은둔의 시절에 만난 모비딕(백경),
글은 쓰여 지지 않고, 이도 저도 안 되어 은둔자의 삶을 살던 시절, 허먼 멜빌의 <모비딕>을 읽고서 배를 타고 싶었다. <모비딕>에서 에이해브 선장처럼 흰 향유고래를 찾아서가 아니고 오직 푸른 파도에 온몸을 내 맡기고 큰 바다를 떠돌다 보면 내가 그리는 이상향이 보이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 백경을 찾아 헤매는 에이허브 선장이 “이것은 잡을 수 없는 삶의 망상이다.” 라고 말했던 것처럼 그 당시 나의 꿈들은 잡을 수 없는 신기루였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내 의지와 달리 이렇게 저렇게 흘러 내 본래의 꿈을 허우적대며 따라가는 상황으로 전개되어 바다에서 고기를 잡는 어부의 꿈은 내세에나 가능할까?
“내 이름은 이슈메일이다...내 입가에 우울한 빛이 떠돌 때, 관을 쌓아두는 창고 앞에서 저절로 발길이 멈춰설 때 내 영혼은 가랑비 오는 11월이면 나는 빨리 바다로 가야 한다는 것을 안다.”
<모비딕, 백경白鯨>의 첫머리에 나오는 글이다.
고래잡이 어선인 포경선 피쿼드호의 선장인 에이해브는 흰고래 모비딕에게 다리 하나를 잃었다. 주위 사람들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 고래를 찾기 위해 오대양을 누비고, 흰고래 모비딕을 포획하기 위해 일생일대를 건 싸움을 한다.
결국 망망한 바다에서 모비딕을 발견한 에이허브 선장은 사흘간의 사투 끝에 백경의 등에 고래작살을 꽂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헴프 줄에 엉켜서 헤어나지 못한 채 죽고, 피퀴드 호는 난바다의 소용돌이 속에 물에 잠기고 만다. 그 바다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한 사람의 승무원이 이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소설 <모비딕>이다.
망망한 푸른 바다에서 길 나날 포경선을 타면서 겪었던 모든 경험과 고래와 포경에 대한 박물학적, 그리고 철학적 사유와 종교적 상징들이 한데 어우러진 책이 <모비딕>이다.
“이 세상에 보이는 모든 사물들은 마분지 가면일 뿐이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 속에는 알 수 없는, 그렇지만 분명히 계획적인 어떤 힘이 그 무심한 가면 뒤에서 은밀히 움직인다. 죄수가 벽을 쳐부수지 않고 어떻게 자유스러워질 수 있는가. 흰고래는 나를 향해 밀어닥치는 바로 그 벽이다. 나는 그 고래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거대한 힘을 본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증오하는 것이다. 내게 신성 모독이라고, 얘기하지 말라. 날 모욕한다면 태양이라도 쳐부수겠다! 진리에는 한계가 없다.“
이렇게 말하는 선장 에이허브 선장을 두고 이슈메일은 ”신을 인정하지 않는 신 같은 사람“이라고 말하는데, <이방인>의 작가이자 부조리의 철학자인 알베르 카뮈는 항상 멜빌을 그의 예술적 스승이라고 강조했다. 그가 멜빌에 관하여 쓴 비평이 남아 있다.
“사실 심연은 그것 나름의 고통스러운 덕목을 지니고 있다. 멜빌이 묻혀 살다가 죽었던 침묵과 그가 간단없이 갈고 다녔던 늙은 대양大洋이 그러했듯이 끝없는 암흑으로부터 그는 작품들을 빛 속으로 끌어냈다. 물속에 새겨진 거품과 밤의 얼굴인 그 작품들의 신비스럽고 당당한 모습이 나타나기가 무섭게 그것은 벌써 우리들로 하여금 어둠의 대륙으로부터 빠져 나와 마침내 바다와 빛과 그 비밀을 향하여 나아가도록 도와준다.” <전집 1>
허먼 멜빌이 큰 바다에서 5년여에 걸쳐 포경선을 타고서 외롭고 긴 시간을 보내지 않았더라면 세계문학사에 길이 남을 <모비딕>은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되풀이된 경험을 통해 느낀 바 있다. 인간이란 어떤 경우에서건 자기가 얻을 수 있는 행복에 대한 기대치를 결국에는 낮추거나, 적어도 전환 시켜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행복은 결코 지성이나 상상 속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의 심장, 침대, 식탁, 안장 난롯가, 그리고 전원 등에 있는 것이다.“
“자, 자네의 산 다리를 여기, 내 다리가 있던 곳에 두어보게. 그러면 눈에는 다리가 하나처럼 보이지만, 영혼에는 두 개인 것이지. 그대가 스멀스멀한 삶을 느끼는 그곳, 거기, 바로 거기, 정확히 거기에서 나도 느끼는 걸세, 수수께끼가 아닌가?”
<모비딕>에서 에이허브선장의 말이다.
”그 독수리가 영원히 깊은 골짜기 안에서만 날아다니더라도, 그 골짜기는 산속에 있다. 그래서 독수리가 아무리 낮게 급강하해도, 산속의 독수리는 평야에 사는 다른 새들이 높이 솟아오를 때보다 더 높은 곳에 있다.“ 이 말은 <모비딕>에서 이슈메일의 말이다.
”베짜는 신이 베를 짠다. 베 짜는 소리 때문에 그는 귀머거리가 되어 인간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 베틀을 바라보는 우리도 역시 윙윙거리는 소리 때문에 귀머거리가 된다. 그곳을 빠져나와야만 비로소 그곳에 울려 퍼지는 수천 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인가, 그 무슨 알지 못할 힘이 내게 명령하고 있다. 인간은 그 누구건 간에 운명이라는 지렛대에 의해 돌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말한 에이허브 선장은 자신이 던진 작살 줄에 목이 졸려서 마지막으로 돌아보며 고함을 지른다.
“ 배는? 위대한 신이여, 배는 어디 있습니까?”
“길쭉한 선체와 모든 선원들과 물에 제각각 떠 더니던 노와 모든 작살대, 생물과 무생물이 모두 빙글빙글 하나의 소용돌이 속에 돌고 돌더니 피쿼드 호의 아주 작은 부분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렇게 막을 내리는 것이 <모비딕>이다.
푸코는 <모비딕>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외부의 선과의 대결은 이러한 것입니다. 정열적인 인간은 마치 에이허브 선장(백경의 주인공)처럼 모비딕을 쫓다가 죽는 것과 같습니다. 그는 선을 넘어갑니다.”
선을 넘지 않고 평안하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 선을 넘어서 불행하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
알 수 없다. 살아도 살아도 알 수 없는 삶이지만 멜빌의 말에 해답이 있다.
”만일 내가 죽고 유언집행자들, 혹은 더 정확하게 말해서 채권자들이 내 책상에서 원고를 발견한다면, 나는 모든 명예와 영광을 고래잡이에 돌릴 가능성이 있다. 포경선이 내게는 하버드 대학이자 예일대학교였기 때문이다.“
아직도 <모비딕>을 읽지 않은 사람은 행운이다. 왜냐, <모비딕>을 한장 한 장 읽으면서 태평양보다 푸른 창공보다 드넓은 푸른 바다를 늠름하게 헤엄쳐 갈 것이니까?
2023년 12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