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봉화산 둘러보기
▲ 봉화산 산길 (묵동다목적체육관 옆) |
숙선옹주묘역에서 숙선옹주로를 따라 신내동(新內洞) 방면으로 조금 가면 묵동다목적 체육관
이 나온다. 체육관 동쪽에는 봉화산의 품으로 인도하는 푸른 산길이 나있는데, 산 전체가 근
린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어 산길이 잘 정비되어 있다. 게다가 산 허리에 요즘 유행하는 둘레길
까지
걸쳐놓아 봉화산 나들이의 재미를 더해준다.
봉화산(烽火山)은 중랑구 북부 한복판에 홀로 솟은 야트막한 뫼로 키는 160,1m이다. 묵동(墨
洞)과
중화동(中花洞), 상봉동(上鳳洞), 신내동에 넓게 걸쳐있으며, 동남쪽의
망우리고개와
아차산(峨嵯山) 산줄기가 있는 것을 제외하면 주변에 마땅한 언덕이 없어 시야가
확 트여 있
다. 하여 낮은 높이에 비해 조망이 꽤 일품이며, 북쪽으로 수락산(水落山)과 도봉산(道峯山),
서쪽은 북한산(삼각산)과 서울 도심, 남쪽은 광진구와 강남 지역, 동쪽은
아차산 산줄기와 중
랑구 일대가 훤히 바라보인다.
그러다보니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시되어 고구려(高句麗)는
정상 남쪽에 보루(堡壘)를 설치하여 주변을 살폈다.
이 보루는 고구려가 사패산에서 수락산을
거쳐 아차산 남쪽까지 보루를 줄줄이 달아놓은 보루 라인의 중간 경유지로
도봉산과 아차산을
이어주는 역할을 했으며, 이들 보루(약 20여 개가 발견됨)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다고 전한다.
(보루 둘레 약 268m, 내부 둘레 약 4,190㎡, 정상 남쪽에 일부 남아있으나 확인하기 어려움)
조선 때는 봉화산 정상에 봉수대를 설치했는데, 함경도(咸鏡道)에서 오는 봉화(烽火)를 한이
산(汗伊山, 남양주시 진접읍)에서 받아 남산(南山)으로 넘겼다. 산의 이름인 봉화도 바로 이
봉화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별칭으로 봉우재라 불리기도 했다. (봉수대 이름은 아차산봉수대)
봉화산 정상에는 봉수대와 도당(都堂)이 있으며, 매년 음력 삼짓날에 도당제를 지낸다. 정상
남쪽에는 천하를 굽어보는 조망대가 설치되어 있고, 묵동과 중화동, 상봉동, 신내동에서 정상
으로 이어지는 산길이 거미줄처럼 이어져 있다. 어디서 출발하던 정상까지는 길어봐야 20~30
분
정도면 닿으며, 정상을 찍고 다른 쪽으로 내려가도 길게 잡아봐야 1시간
이내이다. 게다가
경사도 거의 느긋하여 산의 품이 꽤 포근하다.
산은 작지만 봉화산이 내린 약수터가 즐비해 도처에서 물을 뿜어내고 있고, 소나무가 많아 솔
내음이
그윽하다. 게다가 중랑구의 오랜 특산물인 먹골배가 노릇노릇 익어가는 배나무 농장들
이 북쪽 산자락에
펼쳐져 있다.
중랑구청 뒷쪽에는 '봉화산 신내근린공원'이 넓게 닦여져 있으며, 산 북동쪽에는 근래 옹기테
마공원이 닦여져 신선한 볼거리를 선사한다. |
▲ 저 산길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정상으로 인도하는 산길
▲ 묵동 봉화산 성황당(城隍堂) |
산길을 10여 분 정도 오르면 '묵동 봉화산 성황당'이라 불리는 돌탑과 제단이 나온다. 이곳은
묵동 주민들이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고자 성황제(城隍祭)를 올리는 곳으로
거의 동그랗게 석
단(石壇)을 쌓고 서쪽에 제물을 올리는 상석(床石)을 두었으며, 석단 중앙에는 성황당의 역할
을 하는 돌탑이 두툼한 모습으로 자리해 있다. 그리고 돌탑 남쪽에는 2005년에 세운 검은 피
부의 '묵동 봉화산 성황당' 비석이 있어 이곳의 정체를 알려준다.
동네 사람들의 손길과 정성이 여전한지 성황당 주변은 정비가 잘되어 있으며, 지금도 성황제
를
지내 마을의 옛 전통을 지키고 있다.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에 아직까지
동제(洞祭)와 성황제를 지내는 곳이 있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인데, (성황제나 산신제 등 마을
제사를 지내는 곳이 아직까지 많이 남아있음) 서울이 20세기부터 사람이 산 것도 아니고 구석
기시대(舊石器時代)부터 살던 터전이라 그런 민간신앙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봉화산 주변도 원래 농사를 짓거나 먹골배를 재배하던 시골로 그들 모두 동제를 지내는 공간
을 갖추고 있었으나 개발의 칼질이 요란하게 거쳐가면서 시골 마을은 모두 사라지고 전통 풍
습도 사라지거나 토박이 주민들만 조용히
지내는 정도로 크게 축소되었다. 그래도 이렇게 남
아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
▲ 울창한 숲을 가르며 정상까지 이어진 산길
▲ 중간에서 만난 숲속 쉼터 (비봉각 직전)
▲ 비봉각(飛鳳閣) - 봉화산도당굿 보존위원회 |
느긋하게 펼쳐진 산길을 계속 오르면 정상 북쪽에 경쾌한 처마선을 드러낸 3칸짜리 기와집이
마중을 한다. 이 기와집은 '비봉각'이란 현판을 달고 있는데, 겉으로 보면 1층처럼 보이지만
경사를 이용한 2층 건물이다.
그는
2009년 2월에 지어진 아주 따끈따끈한 한옥으로 '봉화산 도당굿 보존위원회'에서 관리하
고 있으며,
2층은 도당굿 보존위원회 사무실과 도당굿을 준비하거나 가르치는 방, 그리고 마
루가 있다. 1층에는 창고와 식당이 있으며, 파전과 동동주, 라면, 간식류를 팔고 있다. |
|
|
▲ 옆에서 바라본 비봉각 |
▲ 봉화산 도당(都堂)과 대문 |
비봉각 옆에는 봉화산 도당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다. 도당으로 가는 유일한 길로 아차산봉수
대
곁에 도당이 자리해 있지만 도당 주변을 누런색 담장으로 꽁꽁 두르면서 봉수대에서는 뻔
히 바라보임에도 접근할 수가 없다. 봉수대와 도당 서로를 완전 차단한 것이다. (도당이 봉수
대터
일부를 차지하고 있음)
봉화산 도당은 봉화산 정상에 자리해 있는데, 봉화산 산신할머니를 봉안하고 있다. 산신할머
니
외에도 산할머니, 불사할머니, 미륵할머니로도 불리며 보통은 산신으로 통한다. 이렇게 산
신을
봉안하고 있다면 그냥 속편하게 산신각(山神閣)을 칭하면 되겠지만 특이하게도 조선시대
조정의 최고 기관인 의정부(議政府)의 다른 명칭, 도당(都堂)을 칭하고 있다. (한자도 같음)
도당은 부군당(府君堂)과 더불어 서울 지역의 오래된 당집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는데,
도당에
서 지내는 제사를 도당제(都堂祭), '도당굿'이라 부르며, 이곳 도당에서 지내는 제사를 봉화
산 도당굿이라 부른다. 산신을 봉안한 공간이다보니 도당굿 외에도 산신제도 같이 지낸다.
봉화산 도당은 언제 지어졌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세종실록 29년(1446년) 3월 4일 부분에 '봉
수대 상단에 가옥을 만들고 병기(兵器)와 아침 저녁으로 공급되는 물과 불을 담는데 필요한
기물을 보관했다'는 기록이 있어 그 건물이 도당으로 전환되었다는 설이 있다.
도당은 그 시대에 맞는 건물 스타일로 여러 차례 보수를 거치면서 원형을 많이 잃었는데, 구
한말 이후로 아차산봉수대가 은근슬쩍 사라지면서 봉수대의 빈터까지 적지 않게 차지하고 있
다. 그러다가 1992년 여름, 화재로 소실된 것을 붉은 벽돌과 시멘트로 새로 지었다.
이 도당은 400~500년 동안 봉화산 주변 주민들(묵동, 상봉동, 중화동, 신내동)이 마을의 안녕
과
풍년을 기원하던 오랜 성지로 이곳을 통해 서로의 결속과 대동의식을 고취시켰다. 즉 주변
마을
사람들은 봉화산을 구심점으로 뭉쳤던 것이다.
도당굿은 매년 음력 3월 3일(삼짓날)에 지내고 있는데, 처음에는 이들 동네에서 번갈아 지냈
다. 그러다가 1960년대에 묵동이 손을 때자, 나머지 신내동, 상봉동, 중화동에서 30여 년 간
번갈아 가면서 제를 지냈다. 허나 시간이 지나고 봉화산 주변에 개발의 칼질이 그어지면서 토
박이들은 줄어들고 그로 인해 도당굿이 나날이 퇴색해가자 2000년부터 중랑문화원에서 '봉화
산 도당제 보존위원회'를 결성하여 직접 도당굿을 챙기고 있다. 그러다가 2005년 1월 '봉화산
도당굿'이란 이름으로 서울 지방무형문화재 34호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
▲ 봉수대에서 바라본 봉화산 도당 |
도당굿은 비록 때가 맞지 않아 구경하진 못했지만 오랜 내력에 걸맞게 평소에도 도당을 찾아
치성을 올리는 아낙네들이 어느 정도 있는 모양이다. 마침 대문이 열려있어서 도당까지 접근
할 수가 있었는데, 도당에는 아줌마 신도 2명이 있었다. 그중 1명은 기도를 하고 있었고, 다
른 1명은 청소를 하고 있었다.
살짝 살펴본
도당 중앙에는 조그만 산신할매상이 빨간 방석에 앉아있었다. 옷은 순 하얀색의
장삼으로 머리에 고깔을 쓰고 있어 마치 승무(僧舞)를 벌이는 승려 같다. 그의 얼굴은 뽀송뽀
송한
하얀 피부로 산신에 걸맞지 않게 귀여움이 적지 않게 묻어나 있고, 그 옆에는 산신의 비
서격인 작은 동자상이 있다. 뒷쪽에는 산신과 관련된 산과 소나무가 그려진 그림이 걸려있는
데, 그림 아래쪽은 산신상과 방석에 가려져 있으나 아마도 산신과 동자가 그려져 있지 않을까
싶다. 그들이
있어야 비로소 산신도를 이루기 때문이다.
산신상이 앳된 것을 보면 근래에 다시 만든 듯 싶다. 초창기 산신상이 지금까지 남아있었다면
이건 정말 국가 민속문화재로 삼아도 전혀 손색이 없는데, 그렇지 않은 것을 보면 옛것은 진
작에 사라진 모양이다.
산신상을 막 사진에 담으려고 하니 청소하던 아줌마가 이제 문을 닫을 것이니 나가라고 그런
다.
그래서 군소리 내지 않고 대문을 나가니 바로 대문을 굳게 봉해버렸다. |
▲ 봉화산 도당의 주인장, 산신할머니상 |
봉화산 도당굿은 굿 하루 전날에 당주가 찾아와 직접 도당굿에 필요한 제물을 점검하며,
바로
다음날(삼짓날) 도당과 아래 공터에 마련된 제단에 제물이 차려진다.
굿
진행 순서는 '거리부정'을 시작으로 주당물림, 앉은 부정, 불사할머니거리, 가망청배, 진
적, 본향, 상산, 별상, 신장, 대감, 산제석, 창부, 군웅, 용신, 대잡이 등이며, 2005년 도당
굿에서는 진적에 앞서 유교식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무녀(巫女)는 도당 안에 들어가 앉아 부
정을 친 후, 봉화산 할머니를 모시는 불사굿을 한다. 당 안에서 청배한 후, 마당에 놓인 물동
이를 타고 공수를 주며, 불사굿이
끝나면 나머지 굿은 도당 밑 비봉각 앞에 차려진 가설 굿청
에서 한다.
군웅굿에서는 소머리 사실을 세우고 그것이 쓰러지는 방향을 주시하는데, 특정 마을 방향으로
쓰러지면 그해 좋지 않다고 믿었다. 대는 참나무를 사용하여 굿청을 1바퀴 돌고 서낭당에 놓
는다.
온갖 잡귀를 풀어 먹이는 뒷전을 끝으로 도당굿을 마무리하며, 보통 아침부터 초저녁까지 하
루 종일 펼쳐진다. 또한 예전에는 음력 6월 초하룻날도 소를 잡아서 치성을 올렸으나 이제는
도당굿만 지낸다.
도당굿 지정 무당은 신위행(1939년생 여자), 지정 악사는 김광수(1945년생 남자)로 이들은 봉
화산 도당굿 기능보유자이며, 굿은 신들린 무당을 불러서 하고 악사(樂士)는 피리, 대금, 해
금을
담당한다.
|
▲ 아차산 봉수대터 -
서울 지방기념물 15호 |
도당 바로 옆에는 복원된 아차산봉수대가 자리해 있다. 도당과 더불어 봉화산의 정상을 누리
고 있는데, 이상한 것은 봉수대 이름이 봉화산도 아니고 '아차산봉수대'를 칭하고 있다는 것
이다.
이 봉수대는 두만강(豆滿江)에 있는 함경도 경흥(慶興)에서 시작하여 서울 남산까지 이어지는
조선 봉수로의 1번 노선으로 그 노선의 끝이 바로 이곳이다. 바로 직전 남양주 한이산(汗伊山
)에서 봉수를 받아 조선 봉수대의 중심인 남산 봉수대로 넘겼으며, 아차산봉수대로
인하여 이
산은
봉화산 또는 봉우재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활발하게 봉화를 피우던 이곳은 갑오개혁(甲午改革, 1894년)으로 봉수제도가 폐지되자 철저하
게 버려졌다. 이후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자연과 사람들의 괴롭힘으로 봉수대는 어느 세
월이 잡아갔는지 사라졌고, 봉화산 도당이 그의 빈 자리를 둥지로 삼았다.
아차산 봉수대가 얼마나 완벽하게 잊혀졌던지 그 위치마저 잃어버렸다. 해방 이후 아차산 봉
수대 자리를 그 이름에 따라 광장동 아차산 능선에 있는 것으로 여겼으나 정작 아차산에서는
봉수대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게다가 조선 후기에 제작된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등의
지도에 봉화산을 아차산으로 표기하고 있어서 비로소 아차산 봉수대의 위치를 파악하게 되었
고
그로 인해 아차산의 영역이 봉화산까지 이르렀음을 깨닫게 되었다.
1994년 11월 서울 정도(定都) 600주년을 기념하고자 완전히 쓰러진 아차산 봉수대를 그럴싸하
게 복원했는데 애초 5개의 봉수가 있었으나 1개만 재현했다. 그러다보니 고색의 티는
아예 여
물지도
않았고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로 피부가 너무 반질반질하다. 그래서 문화재청 지정명칭
도 아차산봉수대가
아닌 '아차산봉수대터'이다. 끝에 '터'를 붙여 '터'임을 강조한 것이다.
아차산봉수대가 있는 봉화산은 동남쪽 아차산 산줄기를 제외하면 주변이 죄다 평지라 봉수대
위치로는 아주 좋다. 여기서 봉수를 피면 약 10km 떨어진 남산 봉수대에서 쉽게 확인이 가능
했으며, 눈이나 비가 내리는 경우에는 봉수지기가 직접 남산으로 달려가 상황을 알렸다.
|
|
|
▲ 북쪽 밑에서 바라본 아차산봉수대 |
▲ 봉수대의 뒷통수 |
▲ 봉화를 피우던 봉수대
이제는 봉화를 피울 일이 없으니 그야말로 껍데기만 남은 은퇴자 신세이다.
허나 그의 쓸쓸한 체면도
살려줄 겸, 봉화 체험을 벌여보는 것은 어떨까?
어차피 1994년에
복원된 봉수대이니 그리 손해는 없을 것이다.
▲ 봉수대 창
동쪽으로 난 창을 통해 봉화를 피웠다. 봉화 연기는 봉수 꼭대기로 모락모락
피어올라 하늘을 긴장시키고 남산 봉수대를 바쁘게 만든다. 특히 두만강
너머 애들이 난을 일으키면 더욱 그렇다.
▲ 아차산봉수대에서 바라본 정상 남쪽 |
봉수대 남쪽에는 쉼터와 조망대가 있다. 남쪽을 바라보고 선 조망대에 올라서면 가까이는 망
우동과 상봉동, 면목동 지역을 비롯해 아차산 산줄기, 동대문구 동부, 광진구, 성동구, 멀리
강남을 품은 대모산(大母山)과 구룡산(九龍山),
우면산(牛眠山) 산줄기까지 훤히 시야에 비친
다. |
▲ 속세를 향해 고개를 내민 봉화산 정상 조망대
▲ 정상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중랑구와
광진구, 성동구 지역)
멀리 대모산, 구룡산, 우면산 산줄기까지 흔쾌히 시야에 들어온다.
▲ 봉화산 정상에서 상봉동으로
내려가는 소나무 산길 |
정상이란 자리는 꿀이긴
해도 한편으로는 독성도 적지 않아 오래 머물면 반드시 탈이 나는 법
이다. 하여 적당히 있다가 내려오는 것이 여러모로 좋다.
그렇게
정상에서의 볼일을 마치고 상봉동 보현정사 방향으로 내려갔다. 이 길은 소나무가 무
성하여 그들이 베푼 솔내음에 속세에서 오염된 후각이 말끔히 정화되는 기분이며, 산길 주변
에는 조그만 바위들이 진을 치고 있어, 오로지 흙길로 이루어진 묵동다목적체육관 기점 산길
보다 덜 차분한
모습이다. |
▲ 내려가면서 바라본 중랑구 지역
아파트로 거의 도배가 된 신내동(신내택지지구), 그 너머로 망우동과
면목동,
아차산 산줄기가 바라보인다.
▲ 상봉동 보현정사 입구 |
정상에서 15분 정도 내려가니 보현정사(普賢精舍)란 조그만 절이 나온다. 이 절은 20세기 중
반 이후에 지어진 현대 사찰로 역사가 매우 짧고 소장 문화유산이 없는 절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서 항아리 겉돌 듯 짧막하게 둘러보고 나왔다.
여기서 2~3분 정도 내려가면 중랑구청 서
쪽에 자리한 신내12단지이다.
* 봉화산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랑구 묵동, 신내동, 상봉동, 중화동
* 아차산봉수대터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랑구 묵동 산46-19 |
첫댓글 잘 봤습니다.
이렇게 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 동네인데...매일 둘레길 돌고 있는데....이 묘가 있는 걸 오늘에서야 알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