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은 투쟁의 목표를 수정하라!
정치가들의 논리와 표현은 일상에서의 자아표현과는 사뭇 다르다. 항상 정치적 계산이 앞서 있고 당리당략적이다. 무엇이 다음 선거에 유리할지, 무엇이 다음에 내가 공천받을 때 유리할지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 우리나라는 정치꾼만 존재할 뿐, 정치인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정치꾼은 다음 선거를 생각하지만, 정치인은 더 큰 미래를 생각한다.
어빙 고프먼은 사람과 사람 상호행위를 연기자와 관객의 입장에서 분석해서 유명해진 사회학자다. 훌륭한 연극은 배우와 관객이 하나가 된다. 배우의 행위에 진정성이 보였을 때 비로소 관객은 배우와 함께 호흡한다. 배우와 관객이 따로 노는 연극은 실패한다. 지금 민주당과 촛불을 든 시민 사이에도 그 괴리가 있다.
정치가의 발언이나 행위는 '감정의 상품화'에 지나지 않는다. 정치가 ‘나 홀로 볼링’을 했을 때 유권자인 국민들은 따로 세력을 모으려고 한다. 그게 촛불이다. 민주당의 나약함을 지켜보던 시민들이 우리라도 나서자, 하고 결성된 것이 촛불이다. 여론의 질타가 쏟아지자 민주당이 나중에 촛불에 참여했지만, 아직도 화학적 결합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가 뭘까?
문제는 민주당이 촛불의 목표와 괴리된 목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민주당은 '민주주의 회복과 국정원 개혁'이 투쟁의 목표라고 말했다. 심지어는 시국회의 공동대표도 그 비슷한 말을 해 욕을 바가지로 얻어 먹었다. 이 차이가 민주당과 촛불이 따로 노는 근본적 이유다.
각자 생각이 조금씩 다르겠지만, 촛불을 든 시민들의 마음 속에는 민주주의 회복이니 국정원 개혁이니 하는 추상적인 말보다 우선 '그네가 밉다'. 그게 솔직한 심정이다. 아버지가 쿠데타로 집권하더니 딸마저 부정선거로 집권하는가? 하고 한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청와대의 파수꾼으로 등장한 새누리는 변명하고 왜곡하고 뒤집어 씌우기에 바빴다. 그것도 밉다. 밉다, 얼마나 감정이 집약된 솔직한 표현인가?
지난 제 18대 대통령 선거는 새누리, 국정원, 경찰, 보수 언론이 합작한 총체적 부정 선거다. 그 증거가 속속들이 드러나고 있다. 따라서 촛불의 투쟁은 대선불복이 아니라, 원천무효 투쟁이다. 대선불복이란, 선거가 공정하게 진행됐는데도 상대가 승복을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지난 대선은 누가 봐도 공정하지 못했다. 불과 1% 차이로 당락이 결정되는 박빙 속에서 국정원의 여론 조작과 대화록을 유출하여 선거에 이용한 것은 선거판을 뒤집고도 남을 엄청난 사건이었다. 국가 권력 기관이 개입한 선거는 원천무효가 맞다. 3.15 부정선거가 그랬고, 미국의 워터게이트 사건이 그랬다.
선거판을 뒤집은 경찰의 허위 중간 수사 발표. 그 중심에 김용판과 국정원이 있다.
하지만 민주당은 한가하게 '민주주의 회복과 국정원 개혁'이라는 애매모호한 목표를 설정하고 장외로 나왔다. 하지만 촛불의 목표는 다르다. 민주당 지도부와 촛불 시민 사이에 생긴 이 틈이 불신으로 커갈 때 투쟁은 모래성이 되고 만다. 촛불의 주체는 시민들인데, 민주당이 살짝 촛불에 기대어 있는 형국에선 그 어떤 투쟁의 목표도 달성할 수 없다.
민주당이 정통 지지율을 회복하고 제1야당으로서의 면모를 갖추려면 투쟁의 목표를 분명히 해야 한다. 그저 당원 행사 끝내고 촛불과 잠시 같이 한다고 해서 화학적 결합이 된 게 아니다. 민주당과 촛불이 화학적 결합을 이루려면 공동의 목표가 확실해야 한다. 동상이몽으론 투쟁의 동력이 상실될 수밖에 없고, 전국적인 확산도 될 수 없다. 어깨동무하고 파도가 밀려가듯 하나가 되었을 때, 비로소 투쟁의 동력이 살아난다.
새누리는 민주당과 촛불의 괴리를 간파고 줄기차게 민생이라는 허울좋은 구실로 압력을 가할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할 것은 민주주의가 곧 민생이라는 사실이다. 민주주의가 유린된 상태에서 빵을 조금 더 얻어먹은들 그게 참다운 삶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배부른 돼지가 될 뿐이다. 민주당은 지금이라도 목표를 확실히 정해 촛불과 함께 하라. 그것이 민주주의를 회복하고 동시에 민생을 살리는 길이다.
* 이상 coma=럭키보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