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잔과 신라는 옛날 (고구려의) 속민이였다. 전부터 조공을 하였으나, 왜가 신묘년(391년)에 왔다. 바다를 건너 백잔을 파하였다. 왜는 신라를 침략하여 신민으로 삼았다. 6년 병신년(396년)에 왕은 몸소 수군을 이끌고, 잔국을 토벌하였다.
百殘·新羅 舊是屬民 여기에서 舊는 앞에 백잔,신라가 주어가 되므로... '부사'로 해석합니다.
舊= 옛날.
是= ~이다. 입니다.
그래서, 해석은 '백잔과 신라는 옛날 (고구려의) 속민이였다.'
由來= [부사] 원래부터. 전부터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전부터 조공을 하였으나, 왜가 신묘년(391년)에 왔다'
2문장을 연결하는 而는 '~하지만, 그러나'의 뜻인 역접으로 봅니다. 예전 상황과 지금 391년의 상황은 다르다는 걸 나타낸다고 봅니다.
391년에 일어난 단독 기사로 봅니다.
대만중앙연구원의 25사 검색 사이트를 통해 검색해 보면, 以來와 같이 글자가 붙어 있는 경우는 해석이 '~이래'가 되지만
以辛卯年來 와 같이 以+ 연도+ 來 같은 용례가 없다고 서영수 교수는 말합니다.
그래서, 그냥 '왜가 신묘년에 왔다' 고 해석하는게 옳다고 봅니다.
결론은 391년에 일어난 단독 기사이다.
渡海 破百殘
'바다를 건너, 백잔을 파하였다'
海 의 삼수변이 세로줄에서 벗어난다는 얘기가 많기에 海는 다른 글자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倭?寇?新?羅
이것은 모모님이 얘기하는 개인적인 판단입니다. 만일 이것이 일리가 있다면.. 뒤의 문장, 以爲臣民 와 연결이 되어..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가 됩니다.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 討伐殘國
6년 병신년(396년) 왕은 몸소 수군을 이끌고, 잔국을 토벌하였다.
396년은 391년과 연대 편차가 5년이 납니다. 게다가, 백제 아신왕때입니다.
무엇때문에 신묘년과 병신년 기사를 연관시키는지 모르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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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락대제기
★六年 丙申 三月 躬率水軍 討帶方及濟 下十餘城 質其弟而歸
6년 병신 (396년) 3월 상은 몸소 수군을 이끌고 대방과 백제를 토벌하였다. 10여성을 함락시키고, 그 동생을 인질로 잡아 돌아왔다.
五月 倭使來獻土物及美女五人 以求仙箓 雲帽生子角彦 (四月 慕垂死 子寶立)
5월 왜가 사신을 보내 토산물과 미녀 5명을 바쳤고 선록을 구하고자 하였다. 운모는 아들 角彦(각언)을 낳았다. (4월 모용수가 죽고, 아들 모용보가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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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린통빙고 仁德朝 (인덕조) 즉위:379년, 己卯(기묘)
○遣葛城襲津彦於新羅(蓋爲四年 壬午歲) 嘖其缺貢 而新羅不順 百濟多詐 襲津彦留不還
<按> 이하 생략
葛城襲津彦(갈성습진언)을 신라로 보냈다.(인덕 즉위 4년 임오년; 382년) 조공을 빼먹으므로 책망하였으나, 신라는 불순하였다. 백제는 속임수가 많았다. 襲津彦(습진언)은 머무르며 돌아오지 않았다.
조서를 내려, 紀角宿禰(기각숙니), 羽田矢田宿禰(우전시전숙니), 石川宿禰(석천숙니),木兎宿禰(목도(토)숙니)를 보내었다. 백제가 동맹을 배신함을 책망하였다. 또한 襲津彦(습진언)을 도와 신라를 벌하였다. 백제는 즉시 辰斯王(진사왕)을 죽여 사죄를 하였다. 신라왕 樓寒(루한) 역시 명령에 복종하였다. 4명의 장군은 곧 군사를 돌렸다. 이 해(진 태원 16년 신묘년; 391년), 고구려왕 安(안)이 죽고, 담덕(영락대왕)이 즉위하였다.
응신천황 3년 (수정기년 392년) 이 해, 백제의 진사왕(辰斯王)이 귀국(貴國)의 천황에게 무례(無禮)하였다. 그래서 기각숙니(紀角宿禰), 우전시대숙니(羽田矢代宿禰), 석천숙니(石川宿禰), 목도숙니(木菟宿禰)를 보내어 그 무례함을 책하였다. 이 때문에 백제국은 진사왕을 죽여 사죄하였다. 기각숙니등은 아화(阿花:아신왕)를 왕으로 세우고 돌아왔다. (일본서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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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군신들은 향배를 정하지 못하였다. 고구려왕 담덕은 병사를 크게 발진시켜, 백제를 압박하였다. 우리 둔병은 백제를 도와 그들을 막았으나, 패배하였다. 담덕은 즉시 收孚(수부)하고 그 땅을 취하고 돌아갔다. 이에 습진언등은 침미, 다례 및 현남지를 나누고, 谷那(곡나) 여러 성을 침략하여 戍(수)를 설치하였다.(통설의 해석: 이에 습진언등은 침미, 다례, 현남,지침,곡나 여러 城(성)을 나누고 戍(수)를 설치하였다) 왕자 直支(직지)를 인질로 삼아, 선대의 우호를 닦았다.
그런데요, "백잔과 신라는 옛날 (고구려의) 속민이였다. 전부터 조공을 하였으나, 왜가 신묘년(391년)에 왔다. 바다를 건너 백잔을 파하였다. 왜는 신라를 침략하여 신민으로 삼았다. 6년 병신년(396년) 왕은 몸소 수군을 이끌고, 잔국을 토벌하였다."<- 이 번역을 그대로 수용하면 5년의 차이가 있지만, 문장 흐름상 백제랑 신라는 왜한테 일방적으로 침략당한 건데 왜 고구려는 엉뚱하게 백제를 친거죠? 이게 잘 이해가 안 가요;;;
신라의 내물왕은 고구려랑 아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영락대제기를 보시죠. 두 딸을 고구려에 보내고, 조카 寶金(보금)을 인질로서 고구려에 보냈습니다. 신라 자력의 힘으로 왜를 막아 내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한 나라가 역부족일 때 이웃나라와 동맹을 맺어 힘을 빌리는게 당연한 이치이지요.
라디오님의 의견은 잘 들었습니다. 하지만 제 질문하고 약간 핀트가 어긋났기에 재차 질문을 자세히 드립니다. 일단 저는 순수하게 비문의 문맥상 흐름에 의문을 제기한 것을 먼저 밝힙니다. 제가 지적한 신묘년 기사에서 첫번째 의문은 "왜가 신묘년에 왔다." 이 다음에 바로 나오는 "바다를 건너 백제를 파하였다."에서 백제를 파한 주체가 고구려인지 왜인지에 대한 의문이고, 두번째는 만약 백제를 파한 주체가 왜라면 뒤에 신라를 속민으로 삼은 것과 함께 백제와 신라는 왜에게 일방적으로 당한 피해자인데 뒤에 바로 왜 고구려가 피해자인 백제를 쳤느냐 하는게 제 의문이었습니다. 다시 살펴주시길.
391년과 396년은 약간 생각을 달리 해서 봐야 합니다. 396년은 이미 백제왕이 바뀌어져 있고.. 백제왕의 대외정책의 변화가 감지됩니다. 백제본기에 의하면 392년 11월, 진사왕 8년에 진사왕이 죽고 아신왕이 등극합니다. 아신왕은 왜와 우호를 맺고, 친왜적인 정책을 펴니.. 광개토왕이 가만히 있을리 없죠. 그래서, 백제를 파했다고 생각합니다.
첫댓글 첫번째 문장에서 屬民 vs 臣民 관계를 보시죠. 속민이였다가... 신민으로 신분이 바뀐 걸 설명해 주는 문장입니다. 주어인 百殘·新羅 의 그 때의 상황에 대해 풀이를 해 놓은 문장인 걸 눈치챌 수 있죠.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 而倭以辛卯年來 渡海 破百殘 / 倭?寇?新?羅 以爲臣民 //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 討伐殘國
百殘·新羅 이 주어이므로, 뒤의 문장에 百殘 과 新?羅 가 나오게끔 구조가 되어 있습니다. 백잔과 신라의 상황을 설명해 줘야 하니까요.
그런데요, "백잔과 신라는 옛날 (고구려의) 속민이였다. 전부터 조공을 하였으나, 왜가 신묘년(391년)에 왔다. 바다를 건너 백잔을 파하였다. 왜는 신라를 침략하여 신민으로 삼았다. 6년 병신년(396년) 왕은 몸소 수군을 이끌고, 잔국을 토벌하였다."<- 이 번역을 그대로 수용하면 5년의 차이가 있지만, 문장 흐름상 백제랑 신라는 왜한테 일방적으로 침략당한 건데 왜 고구려는 엉뚱하게 백제를 친거죠? 이게 잘 이해가 안 가요;;;
이해 안 될게 뭐 있나요? 진사왕때도 고구려랑 줄기차게 싸워 왔고..백제는 고구려와는 적대관계에 있었습니다. 뒤를 이은 아신왕때도 서로 싸웟죠..
396년에만 싸운게 아니에요.. 주기적으로 고구려와 백제가 계속해서 싸워 왔습니다. 391년에 일어난 사건을 기록했고, 396년에 일어난 사건을 기록했죠.
광개토비문은 고구려의 史家가 비문의 글을 작성했잖습니까? 이에 대해 이견은 없으시죠? 사학자가 이렇게 고구려의 역사를 비문에다 쓸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비문은 사서랑 서로 연결이 됩니다.
신라의 내물왕은 고구려랑 아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영락대제기를 보시죠. 두 딸을 고구려에 보내고, 조카 寶金(보금)을 인질로서 고구려에 보냈습니다. 신라 자력의 힘으로 왜를 막아 내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한 나라가 역부족일 때 이웃나라와 동맹을 맺어 힘을 빌리는게 당연한 이치이지요.
백제는 왜와 결탁하여... 고구려와 대항했어요. '전지의 처, 八須(팔수)는 인덕(천황)의 딸이였다' 이런 대목도 나옵니다. 백제와 왜는 혈연관계에요.
장인 어른(내물왕)이 도와 달라는데, 사위(광개토왕)가 도와 주죠. 당연히...
진짜 연대를 보니 내물왕 즉위 356년 광개토대왕 391년..광개토대왕이 374년생이니 아버지뻘도 넘겠네요..근데 굽신굽신했으니..ㅋ
팔린통빙고 역시 국립도서관 소장본으로 일본에서 1931년에 발간된 사서입니다. 저자는 일본인 '권등성경'입니다. 국가전자도서관에서 누구나 볼수 있는 오픈된 사서입니다.
라디오님의 의견은 잘 들었습니다. 하지만 제 질문하고 약간 핀트가 어긋났기에 재차 질문을 자세히 드립니다. 일단 저는 순수하게 비문의 문맥상 흐름에 의문을 제기한 것을 먼저 밝힙니다. 제가 지적한 신묘년 기사에서 첫번째 의문은 "왜가 신묘년에 왔다." 이 다음에 바로 나오는 "바다를 건너 백제를 파하였다."에서 백제를 파한 주체가 고구려인지 왜인지에 대한 의문이고, 두번째는 만약 백제를 파한 주체가 왜라면 뒤에 신라를 속민으로 삼은 것과 함께 백제와 신라는 왜에게 일방적으로 당한 피해자인데 뒤에 바로 왜 고구려가 피해자인 백제를 쳤느냐 하는게 제 의문이었습니다. 다시 살펴주시길.
다시 읽어 봤습니다. 성급한 판단으로 미처 헤아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391년에 백제를 파한 주체는 '왜'입니다. 진사왕이 왜의 지시를 잘 따르지 않으니까요.
391년과 396년은 약간 생각을 달리 해서 봐야 합니다. 396년은 이미 백제왕이 바뀌어져 있고.. 백제왕의 대외정책의 변화가 감지됩니다. 백제본기에 의하면 392년 11월, 진사왕 8년에 진사왕이 죽고 아신왕이 등극합니다. 아신왕은 왜와 우호를 맺고, 친왜적인 정책을 펴니.. 광개토왕이 가만히 있을리 없죠. 그래서, 백제를 파했다고 생각합니다.
백제가 왜와 우호를 맺었다는 것은 왜의 군사적 지원을 받았다는겁니다. 이때의 전쟁은 백제 단독 군대가 아니라...백제와 왜의 연합군대로 봅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라디오님이 말하신 왜는 일본 열도을 말하는것처럼 느껴지는군요..그 당시 일본열도에서 신라와 백잔을 파 할때의 군사의 수와 군사를 보낼 해양선박기술이 있었는지 ...한번쯤은 짚고 넘어가야 할것 같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