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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 때였다. 당시 아버지는 학원에서 서예를 가르치고 있었는데 학생 중에 꽃꽂이 강사가 한 명 있었다. 너무 예전이라 다른 건 별로 기억 안 나고 아버지께 선물로 드린 분재 몇 개를 보고 감탄했던 것만 기억난다. 자그마한 접시에 심산유곡이 담겨 있는 것 같은 운치있고 멋있는 작품들이었다. 그런데 이 분이 어느날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학원을 그만두는 일이 생겼다. 이분은 당시 가택연금 중이던 김대중씨의 집을 드나들며 꽃꽂이를 가르치고 있었는데, 아이들 등하교길에 미행이 따라붙더란다. 본의 아니게 폐끼치기 싫다며 그만두셨고, 나는 김대중이라는 이름을 처음 듣게 되었다. 김대중이 누구냐고 물어봐도 어른들은 속시원하게 답해주지 않았다. 그저 막연히 박정희 대통령이 싫어하는 사람인 것 같다 정도로 짐작하게 되었다.
당시에 학교 다닌 사람치고 선생들의 박정희 찬가 안 들어본 사람이 없을 거다. 선생들마다 입만 열면 박정희 대통령이 얼마나 이 나라를 발전시켰는지 아냐, 박정희 죽으면 바로 김일성이 쳐들어온다. 방송에서도 국민소득 일만 달러 시대를 위해 박정희 대통령이 노심초사 중이니 조금만 허리띠 졸라매자 이런 선전문구가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나오던 시절이다. (국민소득 일만불이 국민적 염원이었던 시절이지만 박정희는 끝내 이루지 못했다. 나중에 노무현은 약속도 안 한 이만불 시대를 열었음에도 불구하고 욕을 먹었다. 한나라당 씹새들...) 당연히 나는 그런 훌륭한 박정희 대통령이 싫어하고 그런 박정희에게 반대한다는 김대중이라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변명하자면 나는 당시 초딩이었다. 아직도 나의 초딩 때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찌질이들을 보면 화가 난다기 보다는 차라리 측은하다.)
몇 년 지나 어머님이 식당을 개업했는데, 그때 아침마다 오토바이 몰고 와서 개고기 배달해주는 아저씨가 있었다. 그 사람 이름도 김대중이었다. 아버지는 나름 역학에 관심 있어서 공부도 좀 한 경력이 있는 사람인데, 성명학은 일고의 가치가 없는 개소리로 치부했다. 같은 김대중, 한자까지 똑같은데 누구는 대한민국 거물 정치인이고 누구는 개장사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때 나는 김대중이 나쁘지만 뭔가 거물급 인사라는 인상을 받게 되었다.
조금 더 세월이 흘러 87년 대선무렵이었다. 당시 다니던 교회 전도사님은 목포 출신의 열혈청년이었다. 설교 중에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지만 개인적인 자리에서는 군부독재의 부당함에 대해 열변을 토했고, 김대중씨만이 대안이라고 학생들에게 주구장창 길게 이야기를 했다. 당시만해도 김대중에 대한 거부감이 심했기 때문에 나는 나의 거부감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차라리 김영삼이 낫지 않겠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런 이미지야말로 독재정권이 조작한 이미지라고 펄펄 뛰면서 김영삼은 김대중과 동일선상에서 취급할 인물이 못된다고 혹평을 늘어놓았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분 얼굴이 김영삼을 많이 닮았다는 점이었다. 이야기가 거의 끝나갈 즈음에, 그런데 전도사님은 김영삼씨 닮았어요라고 한 마디 했더니만 거의 거품을 무는 지경이 되더라. ^^
대선기간이 되었다. 당시 노태우가 광주 유세하다가 돌세례를 받는 사건이 벌어졌다. 투명 유리에 몸을 숨긴채 겹겹이 쌓인 경호원 틈바구니에서 유세를 시도하는 그의 모습이 안스러워보일 정도였다. 그때만 해도 나는 광주 사람들이 왜 그리 노태우에 대해 증오심을 가졌는지 잘 알지 못했다. 아무튼 며칠 후 이번에는 김대중씨가 경상도 지역에서 유세를 벌일 때였다. 마찬가지로 일부 반대자들이(아마도 알바겠지만) 돌을 던졌고 유세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런데 김대중씨는 두루마기 차림에 경호원 하나도 없이 단상에 홀로 서서 단호하게, '꺼떡하지 마쇼! 거 돌 좀 맞으면 어떻소?'라고 고함을 토하고는 계속해서 유세를 진행하는 것이었다. 순식간에 나는 그의 카리스마에 빠져들었다. 아니, 씨바, 뭐 저리 멋있는 사람이 다 있지? 인간이 이렇게까지 멋있어도 되는 거야? 요새 말로 하자면 그야말로 폭풍간지였다.
얼마 뒤 여의도에서 김대중씨의 유세가 있었고, 나는 그곳에 찾아갔다. 일찍부터 찾아가 앞자리에 앉았지만 너무 일찍 간 탓에 정작 김대중씨가 등장할 무렵에는 소변을 참을 수 없어 유세장 밖의 간이 화장실에 갔고 다녀와보니 도저히 앞자리에 진입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먼 발치에서 그의 연설을 듣고 집에 가는 길이었다. 길거리에 사진책이 한 권 떨어져 있었다. 광주항쟁의 진상을 담은 책이었다. 누군가가 망치로 머리를 내리치는 충격을 받았다. 그제서야 노태우 유세 때 광주 시민들이 돌을 던진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때부터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비로소 나는 국가로부터 거짓된 교육을 세뇌받고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여기까지가 내가 개인적으로 기억하는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추억이다. 이후의 일은 다른 사람들과 특별히 다를 것이 없을 것 같아 생략한다.
김대중을 비난하는 사람들의 메뉴에는 몇 가지 고정된 패턴이 있다. 일단 김대중은 빨갱이다, 라는 점. 이건 뭐 일고의 가치도 없는 이야기이고 김대중이 빨갱이면 나는 레닌이다. --; 김대중 빨갱이론에 대한 근거는, 해방 직후 건준에서 잠깐 활동했던 것, 김정일과 6.15선언한 것 정도 빼놓고는 그럴듯한 근거도 없다. 건준 활동하다가 좌익이 득세한다 싶어서 그만두었다고 본인이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수꼴들은 그를 빨갱이라고 부른다. 이해는 간다. 지들 수준에서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흠집낼 것이 없는 거물이니, 뭐라도 흠잡고 늘어지려는 뼛속 깊이 스민 찌질이 근성. 게다가 6.15 선언은 남북이 공존하는 방식의 통일안에 대해 합의를 한 것이다. 이걸 두고 김정일에게 항복했네 어쨌네 지롤하는 조갑제류의 꼴통을 보면 입 더러워질까봐 언급하고 싶지도 않다. 장담하건데 만약 김정일이 남침하면 제일 먼저 광화문에서 인공기 휘두를 인간은 조갑제다. 조선일보는 장군님의 입성을 환영합니다라는 호외를 뿌릴테고. 원래 짖는 개는 물지 않는 법이라는 고사는 만고의 진리이다. 게다가 저 두 가지가 김대중 빨갱이론을 강화하는 근거라면, 남로당 출신에 7.4 남북 공동성명을 김일성과 합의한 박정희는 뭐라 불러야 할까? 불그스름이?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자줏빛? 인디언 핑크?
김대중이 거짓말쟁이라는 비난도 찌질이들이 애용하는 비난인데, 이것 역시 일단 지르고 보자 식의 묻지마 비난에 불과하다. 옆자리에 부시를 세워놓고 일초만에 들통날 뻥을 친 구라 대마왕 우리 가카, 모든 미디어를 동원해 국민을 세뇌시킨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국군이 진격하고 있습니다라는 방송 내보내면서 정작 본인은 한강다리 끊고 도망친 이승만 등등의 거짓말에 비하면 김대중이 했다는 거짓말은 초라하기까지 하다. 87년 대선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해놓고 출마했다는 것이 그 이유인데, 그것도 앞뒤 맥락 자르고 내지르는 비난에 불과하다. 86년 건대 사태로 이천 명 넘는 운동권 학생들이 구속되는 사상 초유의 대규모 구속사태가 벌어졌다.(한동안 깨지지 않다가 96년 연세대 한총련 사태때 김영삼이 이 기록을 경신했다.) 당시 김대중은 그들을 석방해주면 내가 출마하지 않겠다는 이른 바 불출마 선언을 하게 되는데 전두환은 들어주지 않았다. 그리고 막상 김대중이 87년에 출마하니 보수 언론은 대대적으로 불출마 선언해놓고 왜 나오냐는 식의 비난을 퍼부어댔다. 이걸 거짓말이라고 할 수 있나?
3김 정치라고 싸잡아 부르는 것도 고인에 대한 모욕이다. 박정희와 함께 쿠데타를 도모한 김종필, 3당합당으로 군사정권과 야합한 김영삼과 끝까지 야당으로 남아 투쟁한 김대중을 어떻게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 있겠는가.
지역감정의 원인을 김대중에게 돌리는 개소리에 대해서는 대꾸할 가치도 못 느낀다. 민주당 집권 시절에 대구에 계엄군이 내려가 이백 명 정도 죽이는 사건이 벌어졌다고 해보자. 그래도 대구에서 민주당 찍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미친놈이지 안 찍는 게 미친놈이냐? 다른 지역 사람들은 호남의 몰표에 대해 왈가왈부할 기초적인 자격조차 없다. 광주 시민들이 고립당해 계엄군에 짖밟힐 때 처먹고 씹질이나 하던 것들이 무슨 지역감정이 어쩌고 나발을 불어대나?
국민의 정부가 들어섰을 때 김종필 총리 인준이 한나라당의 반대로 거의 6개월을 끌었다. DJP 연합에 대해서는 나도 썩 좋게 생각은 안 하지만 당시 김대중으로서는 대통령이 되기 위한 거의 유일한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 한나라당에서 총리 인준을 거부한 것은 DJP 연합에 타격을 주기 위한 것이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만한 일이었다. 다른 한나라당 의원들은 원래 그렇다 치더라도 특히 이재오와 김문수의 반대 이유는 가소로왔다. 박정희 정권과 맞서 싸워 민주화 운동을 했던 자신들로서는 그때 총리를 지낸 김종필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벼룩도 낯짝이 있다는데 그게 지금 5공 후예 한나라당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 입에서 나올 말인가? 두 사람 덕에 인간의 역겨움은 어디가 바닥인가 하는 철학적 고민을 많이 하게 되었다.
몇 년 전에 조폭 세계를 다룬 피디수첩인가 뭔가 아무튼 그런 시사고발 프로를 본 적이 있다. 어느 조직 중간 보스급 되는 사람이 새벽에 경쟁 조직의 습격을 받아 죽었는데, 온 몸의 뼈가 성한 곳이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맞아 죽었다. 당시 그 폭력행위에 동참했던 사람 하나를 인터뷰했는데 이 사람 답변이 기가 막혔다. '저희가 더 무서웠어요. 이건 때려도 때려도 계속 일어나잖아요. 나중에는 제발 죽은 척이라도 해라, 이런 심정이었어요. 얼마나 무서웠는지 아세요?' 대강 이런 말을 했다. 죽은 사람도 비슷한 인생을 살아왔을테니 딱히 동정심이 일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가해자의 인터뷰를 보며 적반하장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고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때려도 때려도 일어나는 상대를 본 그의 두려움이 더 컸을까, 아니면 야구방망이와 쇠파이프로 무장한 열댓명에게 구타당하는 죽은 이의 두려움이 더 컸을까. 김대중을 비난하는 사람들에게서 나는 그 뻔뻔스러웠던 말단 조직원의 당당함을 본다. 온갖 매체를 통해 죽는 순간까지 모욕을 주었으면서도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버러지같은 인간들이, 임종이 가까워지자 갑자기 위대한 인물이라고 앞다투어 칭송하는 꼬락서니란. 니들만 몰랐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었어. 세삼스레 친한 척 하지마.
비난이 아닌 비판에 있어서도 억울한 측면들이 많다. 87년 후보 단일화 안 한 것 때문에 일부 운동권에서도 그를 격하게 비판했고 아직도 진중권 같은 사람은 그 부분에 대해서 욕을 한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그런 태도는 세상을 한큐에 바꿀 수 있다는 조급증이 낳은 산물이 아닌지 의심이 된다. 87년 한큐에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있었는데 개인적 욕심으로 그것을 날려보내다니... 뭐 이런 생각이 아닐까?
하지만사람들의 의식은 순간적으로 바뀌는 일이 드물고 그런 사람들이 모인 사회 역시 순간적으로 바꾼다는 건 불가능하다. 프랑스 혁명은 거의 백여 년에 걸친 왕당파와의 투쟁 끝에 겨우 정착되었고, 러시아 혁명은 80여년만에 실패로 돌아갔다. 민주정부 10년을 거치고도 극우파 꼴통들이 설치는 대한민국이 87년 후보 단일화 했으면 뭐 크게 달라졌을까? 나는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비슷한 시기의 필리핀은 우리처럼 중간단계(노태우) 거치지 않고 막바로 정권교체를 이루어냈지만 이후의 국정난맥상과 경제의 어려움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게다가 김대중은 누구보다 김영삼을 잘 아는 사람이다. 당연히 그의 기질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김대중은 민주주의 자체를 중시하는 사람이어서 박정희와 싸웠지만, 김영삼은 스스로가 권력자가 되고 싶었던 사람이었기에 박정희와 싸운 것이라는 추론을 김영삼 정권을 거치면서 내릴 수 있었다.
그의 재임 기간 양극화가 심해졌다는 비판도 일면 타당하지만 당시 현실적 조건들을 무시한 비판이라 할 수 있다. 당시 IMF에서 우리나라에 강요했던 권고안이 신자유주의 정책이라 할 수 있는데, 그 당시 김영삼은 김대중이 반대해서 IMF 자금을 받을 수 없다고 악선전을 하던 상황이었고 이를 이용해 IMF 측에서도 조건을 이행한다는 확답을 하라고 당시 대선후보들에게 요구했다. 그 자리에 진중권이나 박노자를 앉혀놨다고 별다른 뾰족한 수가 있었는지 의문이다. 이건 사실상 한국의 주권을 무시한 IMF를 비난해야 하는 사안인데 진보파들은 그 비난의 화살을 김대중에게 돌렸다.
김대중은 물론 한계가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의 한계는 적어도 다른 정치인들의 한계에 비교한다면 훨씬 높은 지점에 위치한 한계였다. 어찌 되었든 IMF 극복, 남북정상회담 실현, 노벨평화상 수상이라는, 하나만 했어도 길이 칭송받을 업적을 무더기로 토해냈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에 대한 평가가 인색했다.
내 인생에 대단히 일찍부터 다가와 자리잡은 거목이 쓰러졌다. 노무현 대통령의 비극적인 최후를 경험한 탓인지, 그리고 언제 돌아가셔도 딱히 이상할 것 없는 고령이었기 때문인지, 슬프다기보다는 오히려 담담하다. 아마도 슬픔은 천천히, 사소한 기억들에서부터 차근차근 찾아오겠지. 끝내는 다시 만날 수 없는 분을 잃었다는 바다와 같은 슬픔 속에서 허우적대겠지.
불초소생 udis가 그분을 위해 해드릴 일은 서울광장 추모식에 참석해 국화 한 송이 바치고 절 두 번 한 것 외에는 딱히 없을 것 같다. 그저 내 마음 속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도록 늘 추모하고, 그분의 유지를 받들어 담벼락에 욕이라도 지껄이면서 살아가는 것 밖에는...
http://udis.egloos.com/2471193
전 이 글 읽고 정말 감동받았어요.
가려운 데를 제대로 긁어주는 글이라고나 할까?
글 쓴 사람 천재같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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