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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하느님,
구원 계획에 따라 세상 모든 일을 섭리하시니
저희에게 해로운 것은 모두 물리치시고
이로운 것은 아낌없이 베풀어 주소서.
제1독서
<저와 이 여자가 자비를 얻어 함께 해로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 토빗기의 말씀입니다.6,10-11; 7,1.9-17; 8,4-9ㄱ
10 토비야가 메디아에 들어서서 이미 엑바타나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11 라파엘이 “토비야 형제!” 하고 청년을 부르자
그가 “왜 그러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라파엘이 말하였다. “우리는 오늘 밤을 라구엘의 집에서 묵어야 하는데,
그 사람은 그대의 친족이오. 그리고 그에게는 사라라는 딸이 있소.”
7,1 엑바타나에 들어서자 토비야가 라파엘에게, “아자르야 형제,
나를 곧장 우리 친족 라구엘에게 데려다 주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래서 그는 토비야를 라구엘의 집으로 데려갔다.
그들은 마당 문 곁에 앉아 있는 라구엘을 보고 먼저 인사하였다.
라구엘은 “형제들, 기쁨이 충만하기를 비오! 건강히들 잘 오셨소.” 하고
답례한 다음, 그들을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9 라구엘은 양 떼 가운데에서 숫양 한 마리를 잡고,
그들을 따뜻이 맞아들였다.
그들이 몸과 손을 씻고 저녁을 먹으러 식탁에 앉았을 때에
토비야가 라파엘에게, “아자르야 형제,
내 친족 누이 사라를 나에게 주라고 라구엘에게 말씀드리시오.” 하고 말하였다.
10 라구엘이 우연히 이 말을 듣고 청년에게 말하였다.
“오늘 밤은 먹고 마시며 즐겁게 지내라.
형제야, 내 딸 사라를 아내로 맞아들일 자격이 있는 사람은 너밖에 없다.
나도 사라를 너 말고 다른 남자에게 줄 권리가 없다.
네가 나에게 가장 가까운 친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얘야, 너에게 사실을 알려 주어야겠다.
11 나는 벌써 사라를 우리 동포 일곱 남자에게 차례로 주었지만,
사라가 있는 방에 들어가는 그 밤으로 다 죽어 버렸다.
그러니 얘야, 지금은 그냥 먹고 마셔라.
주님께서 너희를 돌보아 주실 것이다.”
그러나 토비야는 말하였다.
“제 일을 결정지어 주시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겠습니다.”
그러자 라구엘이 말하였다.
“그렇게 하마. 모세의 책에 있는 규정에 따라 사라는 네 사람이다.
하늘에서도 사라는 네 사람이라고 이미 판결이 내려졌다.
너의 이 친족 누이를 아내로 맞이하여라.
이제부터 너는 사라의 오라비고 사라는 너의 누이다.
오늘부터 사라는 영원히 네 사람이다.
그리고 얘야, 오늘 밤에 하늘의 주님께서 너희를 잘 보살피시고,
너희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풀어 주시기를 빈다.”
12 그러고 나서 라구엘은 자기 딸 사라를 불렀다.
사라가 오자 라구엘은 그 손을 잡고 토비야에게 넘겨주며 말하였다.
“율법에 따라 사라를 아내로 맞이하여라.
모세의 책에 쓰인 규정에 따라 사라는 네 아내다.
그러니 네가 맡아서 네 아버지께 잘 데려가거라.
하늘의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번영과 평화를 베풀어 주시기를 빈다.”
13 라구엘은 다시 사라의 어머니를 불러서 쓸 것을 가져오라고 하였다.
그리고 모세 율법의 규정에 따라
사라를 토비야에게 아내로 준다는 혼인 계약서를 썼다.
14 그러고 나서 그들은 먹고 마시기 시작하였다.
15 라구엘은 자기 아내 아드나를 불러,
“여보, 다른 방을 준비해서 사라를 그리로 데려가시오.” 하고 말하였다.
16 아드나는 가서 라구엘이 말한 대로 그 방에 잠자리를 차려 놓은 다음,
사라를 그리로 데려갔다.
그리고 사라 때문에 울다가 눈물을 닦고 그에게 말하였다.
17 “얘야, 용기를 내어라.
하늘의 주님께서 너의 그 슬픔 대신에 이제는 기쁨을 주실 것이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그러고 나서 아드나는 방을 나갔다.
8,4 부모가 방에서 나가 문을 닫자
토비야는 침상에서 일어나 사라에게 말하였다.
“여보, 일어나구려. 우리 주님께 기도하며
우리에게 자비와 구원을 베풀어 주십사고 간청합시다.”
5 사라가 일어나자 그들은 기도하며
자기들에게 구원이 이루어지기를 간청하였다.
토비야는 이렇게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 찬미받으소서.
당신의 이름은 대대로 영원히 찬미받으소서.
하늘과 당신의 모든 조물이 당신을 영원히 찬미하게 하소서.
6 당신께서는 아담을 만드시고
그의 협력자며 협조자로 아내 하와도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 둘에게서 인류가 나왔습니다.
당신께서는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와 닮은 협력자를 우리가 만들어 주자.’ 하셨습니다.
7 이제 저는 욕정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으로
저의 이 친족 누이를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저와 이 여자가 자비를 얻어 함께 해로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8 그들은 “아멘, 아멘.” 하고 함께 말하였다.
9 그러고 나서 그날 밤 잠을 잤다.
복음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2,28ㄱㄷ-34
그때에 28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 하고 물었다.
29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30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1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32 그러자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34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참사랑의 원리
영원한 것은 무엇이 있을까요? 저는 사랑만이 영원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가장 큰 행복은 무엇일까요? 저는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 대부분은 이 사실을 압니다. 하지만 사랑이 비극으로 끝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고 스스로 사랑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데서 기인합니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마가렛 미첼의 1936년 소설을 바탕으로 한 1939년 미국의 서사적 역사 로맨스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남부의 미인 스칼렛 오하라의 삶과 남북 전쟁 중과 이후의 격동적인 사랑의 삶을 중심으로 합니다. 스칼렛은 아일랜드 이민자 농장 소유주의 딸입니다. 그녀는 강인하고 계산적이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은 가져야만 식성이 풀립니다. 그녀는 고상하고 지적인 이웃 애슐리 윌크스와 사랑에 빠집니다. 그녀는 애슐리에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그는 그녀를 거부하고 그의 사촌 멜라니 해밀턴과 결혼할 계획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사업가 레트 버틀러가 그 대화를 우연히 듣다가 스칼렛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지만, 스칼렛은 레트를 기분 나쁘게 생각합니다. 상심한 스칼렛은 멜라니의 오빠 찰스의 청혼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찰스는 남북 전쟁에 참여해 사망합니다. 스칼렛은 그리 슬프지 않았지만, 슬픈 척을 해야 했습니다. 스칼렛은 끊임없이 멜라니의 남편 애슐리가 전쟁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구애해 봅니다. 그러나 애슐리에겐 멜리나뿐입니다. 멜라니는 사촌 스칼렛의 마음을 알지만, 타고난 침착함으로 스칼렛과 잘 지냅니다.
스칼렛은 이제 망해버린 집안을 다시 살려야 합니다. 그래서 목재상을 하는 부유한 프랭크 케네디와 혼인을 합니다. 이것 역시 사랑이 없는 결혼이었고 남편도 사고로 사망합니다. 이때 스칼렛은 남편의 죽음보다는 애슐리의 부상에 더 마음 아파합니다.
스칼렛의 결단력과 힘을 좋아한 버틀러는 드디어 세 번째 남편이 됩니다. 그리고 버틀러 덕분으로 보니라는 귀여운 딸도 낳습니다. 하지만 스칼렛은 여전히 애슐리에게 관심을 가집니다. 버틀러는 잠자리도 거부하는 스칼렛 대신 딸을 보며 위안으로 삼습니다. 하지만 보니도 말을 타다 목숨을 잃습니다. 그런데 멜라니가 병으로 죽어가자 스칼렛은 멜라니도 자신에게 큰 존재였음을 깨닫습니다. 또 멜라니의 죽음을 슬퍼하며 여전히 자신에게는 관심 없는 애슐리를 봅니다.
그녀는 자신이 결국 애슐리를 차지할 줄 알았지만, 결국 사랑은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그는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해준 사람은 버틀러뿐이었음을 깨닫고 그를 붙들려 하지만, 버틀러는 마지막 희망이었던 보니도 없는 그 집에 살지 않겠다며 스칼렛을 떠납니다. 자신이 사랑했던 모든 사랑이 바람과 함께 사라진 것입니다.
사랑을 자신의 힘만으로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에서 이런 모든 비극이 시작됩니다. 내가 하는 사랑은 소유의 사랑입니다. 사랑은 반드시 삼위일체여야 합니다. 사랑의 행위는 분명 누군가를 기쁘게 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 행위가 나를 기쁘게 하는 행위라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상대를 자기 행복을 위해 이용하는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나의 본성은 뱀이기 때문입니다. 모기는 존재 자체가 본성적으로 사랑을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스칼렛에게 뱀은 애슐리에게 집착하도록 하였습니다. 남는 것은 뱀과 공허뿐입니다.
사랑은 삼위일체여야 합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신 이유는 삼위일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사랑받으셔서 인간을 사랑할 수 있으셨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 자신을 위해 사랑하셔야 했을 텐데 그러면 사랑이 이기주의가 됩니다. 사랑은 삼위일체입니다. 그래야 자아의 본성적인 소유의 사랑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도 누군가를 사랑할 때 나를 사랑해주신 분을 기쁘게 해드린다는 마음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만이 진짜 사랑입니다. 그렇게 해야 나를 기쁘게 하는 이기적인 거짓 사랑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왜 성체를 영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하는지에 대한 이유가 됩니다.
하느님은 당신을 사랑할 수 있도록 우리를 위해 희생하셨습니다. 사랑해야 하는 계명은 어느 종교에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계명과 함께 생명을 주시며 우리를 사랑한 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여 생명이 담긴 양식을 줍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먼저 우리를 사랑해주신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첫째 계명입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그러면 저절로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한 행동을 합니다. 이것이 다른 종교와의 차이입니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나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으신 하느님을 먼저 사랑합시다. 그리고 누군가를 사랑할 때 하느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사랑합시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은 우리를 사랑하신 하느님뿐입니다. 나는 그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기쁘시게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하느님 생명에 참여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사랑의 목적이 저절로 이기적으로 되기 때문에 모기처럼 됩니다. 사랑만이 영원합니다. 내가 그 사랑이 되는 길은 사랑을 사랑하는 길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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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우리 신앙인이 가장 많이 바치는 기도는 ‘주님의 기도’일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복음 전체를 요약한 것이며, 우리가 반드시 바쳐야 할 기도이기에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쳐주셨습니다. 여기서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신 다음에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요한 16,24)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기도의 순서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많은 청을 주님께 올립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순서를 따르고 있습니까? 모든 기도의 우선순위는 주님의 기도 다음 나의 청이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성인은 모든 청원의 시작은 주님의 기도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성 아오스딩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 실린 모든 청원을 살펴보십시오. 나는 여러분이 그 안에서 주님의 기도에 포함되어 있지 않거나 거기서 기인하지 않은 어떤 것을 발견하리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베다 성인도 “우리는 이 기도로 청하고, 바른 삶을 찾고 한결같은 신앙으로 두드려야 합니다.”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 신앙인의 기도는 주님의 기도로 시작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 청원만을 외치는 공허한 기도가 되어서는 단 됩니다. 주님의 기도를 가장 완전한 기도라고 외치셨던 많은 성인·성녀의 말씀을 기억하며, 자기 청원에 앞서 주님의 기도로 하느님 뜻에 일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라고 말합니다. 자기 뜻보다 하느님 뜻이 먼저였습니다. 그런데 하느님 뜻보다 자기 뜻만 이루어지길 계속해서 말합니다. 자기 뜻이 먼저다 보니 하느님 뜻은 아예 보이지 않으면서, 비정상적으로 살게 됩니다. 무엇이 중요한지도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유다인들은 인간 생활을 외부적으로 종교화하여 지켜야 할 계명 248개 조항, 금기의 조항 361개 조항, 모두 합해서 613개 조항으로 세분화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잡다하고 많은 계명을 다 지키는 것도 번거롭거니와 613개 조항의 법규를 지키느라고 쓸데없는 시간만 보내게 됩니다. 그러니 생활하는 데 중요하고 본질적인 계명이 무엇이냐는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종교 생활의 고민을 예수님께 율법 학자 한 사람이 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확실하게 말씀하십니다. 즉,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큰 계명에만 집중하면 되는데, 이는 오히려 뒤로 하고 자질구레한 외부 생활 규율에만 치우치고 있음을 지적하신 것이지요. 가장 중요한 것은 소홀히 하면서, 쓸데없는 것만이 진리인 듯이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인 사랑에 과연 집중하고 있었을까요? 사랑 없는 종교 생활은 하느님을 깨닫지 못하고 또 만나지도 못하게 합니다. 쓸데없는 시간만 보내게 합니다. 따라서 철저히 하느님 뜻에 집중해야 합니다. 내 뜻보다 하느님 뜻이 먼저입니다.
무지한 사람일수록 남을 경멸한다. 지혜가 있는 사람은 포용력이 있는 법이다(필릭스 레크에어).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