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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5월 19일 부활 제6주간 화요일
제1독서 : 사도 16,22-34
복 음 : 요한 16,5-11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5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
그런데도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너희 가운데 아무도 없다.
6 오히려 내가 이 말을 하였기 때문에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 찼다.
7 그러나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8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
9 그들이 죄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고,
10 그들이 의로움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내가 아버지께 가고 너희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며,
11 그들이 심판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저의 형 누나들이 학교에서 받아오는 많은 상장들을 보면서
저 역시 그런 상장을 많이 받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형 누나들처럼 항상 시험 성적도 좋을 것으로 생각했지요.
그래서 하루빨리 학교에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드디어 8살이 되어, 어머니 손을 잡고 왼쪽 가슴에 손수건을 붙이고 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저의 예상과 달리 많은 상장을 받을 수도 없고,
또 좋은 성적 받기도 쉽지 않음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한 반에 70명이 넘는 아이들이 있었는데, 그중에서 저는 너무나도 평범했습니다.
더군다나 한글도 아직 제대로 모르는 저로서는 학교 문의 문턱은 너무나도 높아 보였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자신감은 줄어만 갔고 학교 가기가 싫어졌습니다.
지금은 그때를 떠올리며 “어렸으니까”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성인 역시 마찬가지임을 깨닫습니다.
자신 안에 자신감이 사라질 때, 남들보다 부족하다고 생각하면서
얼마나 많이 좌절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습니까?
포기하면 그것으로 끝이지만, 그래도 다시 시도하면 또 다른 미래를 만들 수가 있는 법입니다.
실제로 어떤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되면 뇌 손상을 가져오게 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부정적인 영향을 가져오는 두려움에 따른 포기, 자신감이 없다고
포기하는 우리의 모습이 낯설지 않게만 느껴집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이런 모습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하느님 나라라는 희망을 간직하면서 지금, 이 순간을 힘차게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제 안 계실 것이라는 사실과
그들을 기다리는 고통스러운 일에 관한 생각으로 마음에 근심이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예수님의 부재를 눈으로 믿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믿는 사람에게는 커다란 축복이 주어질 것입니다. 이 축복이 바로 ‘성령’이었습니다.
성령께서는 세상이 단죄한 구원자의 이름으로 놀라운 일들을 행하심으로써
의로움에 관한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입니다.
즉, 주님을 단죄했던 유다인들의 잘못을 밝히시고,
주님을 따르는 길이야말로 가장 올바른 길임을 드러내신다는 것입니다.
혹시나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불안한 마음을 종식하고,
대신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세상에 주님을 증거 할 힘을 얻을 수 있기에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것은 커다란 축복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여전히 주님의 뜻을 따르는데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 우리입니다.
그렇다고 그 뜻을 실천하는 것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성령께 우리 자신을 맡기며 힘차게 주님의 길을 가야 합니다.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요한 16,5)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앞부분>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승천과 성령의 파견을 예고하시는 장면이고,
<뒷부분>은 세상에 대한 성령의 역할에 대한 말씀입니다.
<뒷부분>은 내일 복음과 함께 보도록 하고, 오늘은 <앞부분>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승천을 암시하십니다.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요한 16,5)
이는 당신이 파견 받아 오셨다는 것과 보내신 분의 사명을 마치실 때가 되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당신이 떠나간다는 말에 제자들의 마음에 근심이 가득 찼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또 다시 ‘보호자’이신 성령의 파견에 대해서 거듭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요한 16,7)
왜 꼭 당신이 가셔야만 그분을 보내시는 것일까?
아니, 성령은 이미 당신과 함께 계시는 분이 아니신가?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는 이 말씀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는 해설하면서,
“그리스도를 육에 따라서만 아는 한 성령을 받을 수 없다는 뜻”이라고 말합니다. 곧
“동정녀의 태에서 잉태된 종의 모습이 우리 육체의 눈앞에서 사라지고 나야,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 자체에 순수한 마음의 눈을 두기 시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를 그레고리우스도
“내가 나의 육체를 너희 눈앞에서 사라지게 하지 않으면,
보호하시는 성령을 통하여 너희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깨달음으로 이끌 수 없다는 뜻”으로 해설합니다.
이는 마치 사도 바오로가
“우리는 이제부터 아무도 육적인 판단으로 알아보지 않으렵니다.”(2코린 5,16)하고
말하는 것과 같다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이렇게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함께 같이 계실 수가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눈이 그분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의 눈이 영적으로 열리게 되면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어제가 가야 오늘이 오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함께 있으면서도,
오늘을 통하여 어제도 내일도 드러나는 것과 마찬가지라 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차원에서, 그것은 마치 아버지께서 만물을 지으시고 구원하실 수 있으시지만
아들을 통하여 그것을 이루시면서 아들을 드러내시듯이,
예수님께서도 모든 일을 이루실 수 있지만
성령의 존귀함을 드러내시기 위하시는 까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사랑이신 하느님의 본성이며, 삼위일체 사랑의 특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사랑은 자신 안에서 자신이 아닌 타자를 드러낸다는 사실입니다.
곧 아버지께서는 아들과 성령을 드러내시고, 아들은 아버지와 성령을 드러내시고,
성령께서는 아버지와 아들을 드러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진정 그분을 사랑한다면,
우리 안에서 우리 자신이 아닌 그분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요한 16,7)
주님!
저를 부수고 당신을 드러내소서!
보는 것, 아는 것에 매여 있는 저를 부수소서.
제 자신에게 매이지 않는 영을 보내소서.
눈을 비추시어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소서. 아멘.
성령 예찬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가 답이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어제 미사 강론 시작하면서 본기도의 아름다움에 대해 나눴던 내용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 파스카 축제를 지내는 저희가,
언제나 그 풍요로운 신비를 체험하며 살게 하소서”
참 간명하면서도 깊고 아름다운 기도문입니다.
바로 진리의 영 보호자 성령이 우리 모두 풍요로운 파스카 신비를 체험하며 살게 하십니다.
삶의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도 진리의 성령뿐입니다.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시고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는 분도 성령이십니다.
부단한 깨달음을 통해 우리 모두 무지의 어둠에서 벗어나
‘진리의 빛’속에 살게 하는 성령의 은혜입니다.
성령이 빠진 자리에 십중팔구 더러운 영, 악령이 자리 잡을 수 있으니
늘 성령충만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여 기도는 필수입니다. 기도할 때 성령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어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성인을 조명하는 집중 기사가 여러 편 나왔습니다.
여기서도 단연 주목되는 성인의 우선적 특징이 기도였습니다.
한 마디로 성인 교황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정말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기도입니다.
우리 수도자는 물론이고 참으로 믿는 이의 정의는 하느님의 사람, 기도의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세 가지 특징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1. 기도의 사람, 2. 참으로 사람들 가까이 있었던 분, 3. 자비로운 정의’의 세 특징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특히 성인의 기도에 측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그 많은 업무에도 불구하고 요한 바오로 2세는 언제나 기도할 시간을 찾아냈다.
그분은 주교의 첫째 번 일이 기도하는 것임을 너무 잘 아셨고 그대로 행하셨다,”
이어 성인 교황이 폴란드의 대주교 시절, 개인 비서로 일했던 스타니스타브 추기경의 증언입니다.
“그분은 언제나 기도하셨습니다.
그분은 기도의 가치를 소년시절부터 배웠고, 이런 측면은 이후로도 계속 깊어졌습니다.
성인은 그가 누구든 가난하든 약하든 병들었던 그 모든 이들을
크나 큰 존경과 친절, 사랑으로 대했던 참으로 비상한 인격을 지니신 분이셨습니다.”
그대로 하느님의 사람, 기도의 사람, 성령의 사람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이었습니다.
저는 여기서 참으로 하느님의 오묘한 섭리를 발견했습니다.
바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에 앞선 교황님이 요한 바오로 1세이시고
그분의 재위 기간이 33일, 교황님들 중 두 번째로 짧았다 합니다.
바로 제263대 교황 바오로 1세가 1978년 9월20일 선종 후
뒤를 이은 제264대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무려 1978년부터 2005년까지
무려 27년간 재위하셨으니 앞서의 교황 몫까지 다하게 하신 하느님의 섭리가 놀랍습니다.
기도와 더불어 성령의 선물이요 성령을 통한 끊임없는 내적 정화와 성화의 변화로
예수님을 닮아가는 우리들임을 깨닫습니다.
오늘도 어제에 이어 주님은 복음에서 파라클레테 진리의 영, 보호자 성령에 대한 말씀을 주십니다.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해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
이미 우리에게 실현된 진리입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 중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 예수님의 참 좋은 선물,
보호자 성령을 받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마음 활짝 열고 끊임없이 기도하면 누구에게나 선사되는 성령의 선물입니다.
무지에 대한 근원적 처방도 성령뿐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을 믿지 않음이 죄임을, 또 스스로 쟁취할 수 있는 의로움이,
의화가 아니라 이 또한 성령의 선물임을 깨닫게 되며
심판 또한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보다는 우리의 무지로 자초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모든 깨달음은 성령의 은혜입니다.
요즘 사도행전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하시는 위업을 보여줍니다.
기도에 따른 성령의 기적임을 다음 장면이 잘 보여줍니다.
오늘 사도행전의 주인공, 바오로와 실라스는 말 그대로 기도의 사람, 성령의 사람입니다.
‘이러한 명령을 받은 간수는 그들을 가장 깊은 감방에 가두고 그들의 발에 차꼬를 채웠다.
자정 무렵에 바오로와 실라스는 하느님께 찬미가를 부르며 기도하고,
다른 수인들은 거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 감옥의 기초가 뒤흔들렸다.
그리고 즉시 문들이 열리고 사슬이 다 풀렸다.’
참 통쾌한, 참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성령의 기적을 상징하는 장면입니다.
기도에 따른 기적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어지는 간수와 두 사도간의 대화와 해피 엔딩으로 끝나는 모습도 참 아름답습니다.
이 모두가 부활하신 주님의 성령의 은혜입니다.
-“두 분 선생님, 제가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온 집안이 구원을 얻을 것이오.”
그 자리에서 그와 온 가족은 세례를 받았고 그들은 하느님을 믿게 된 것을 크게 기뻐하였다 합니다.
새삼 우리의 믿음과 세례를 상기하게 됩니다.
과연 세례 받은 자로서 주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음을
늘 새롭게 체험하면서 기쁘게 살고 있는지 말입니다.
어제도 문득 짧은 고백시가 떠올랐고 행복했습니다. 먼저 번 소개했던 짧은 고백시와 함께 나눕니다.
-“사람은 꽃이다/늘 피는 꽃이다”-
이에 대한 어느 형제의 댓글도 감동이었습니다.
“사람이 꽃이다. 정말 기막힌 표현이십니다. 사랑의 사도다운 말씀이십니다.
감사합니다. 기쁩니다. 이 꽃도 오늘 기쁘게 살아갑니다.”-
-“아침은 늘 새롭다/나도 늘 새롭다”-
여기다 어제 떠오른 '행복'이란 시입니다.
-“당신은/늘 거기 계시고/저는/늘 여기 있나이다/오 주 예수님!”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를 늘 새롭게 창조하시고
성령 충만한 삶을 살게 하시며 영원한 기쁨, 영원한 행복을 미리 맛보게 하십니다.
아름다운 아침 성무일도 본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느님, 저희가 영원한 청춘을 되찾고 즐거워하오니,
지금 영광스러이 당신의 자녀 되었음을 기뻐하는 저희로 하여금,
언제나 확실한 기쁨의 희망을 품고 부활의 삶을 살게 하소서.” 아멘.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요한 16, 7)
한상우 바오로 신부
떠날 수 있기에
하느님께
갈 수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사랑은
떠나심 속에서도
계속 이어집니다.
모든 길의 시작은
떠남에 있습니다.
떠나는 것이
더 깊이
우리에게 오는 것입니다.
떠나간 만큼
더 깊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삶의 이야기는
떠나보내고 만나는
애절한 이야기입니다.
내려놓지 않고서는
진정
떠날 수 없는
우리들 삶입니다.
그래서
성장을 필요로 하는
우리들 여정입니다.
보호자이신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사랑은
서로의 소중함을
지켜주고 보호하여주는
성령을
맞아들이는 것입니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보호하시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새옹지마(塞翁之馬)와 비슷한 의미입니다.
하느님께서 쉼표를 찍은 곳에 마침표를 찍지 말라는 말도 있습니다. 역시 비슷한 의미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이 있는데 ‘걸림돌과 디딤돌’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고통과 역경을 만나면 걸림돌로 여겨서 이웃을 탓하고,
자신을 원망하며 더 깊은 좌절에 빠집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고통과 역경을 만나면 그것을 디딤돌로 삼아서 영적으로 더 성숙해집니다.
코로나19는 인류에게 마침표가 아닙니다. 코로나19는 인류에게 하나의 쉼표입니다.
경제활동이 멈추고, 이동이 멈추니 생태계의 질서가 회복되고 있습니다.
사라졌던 바다거북이 산란을 위해 육지로 올라왔다고 합니다.
대기 오염이 줄어들어서 호흡기 질환의 환자들이 감소했다고 합니다.
성장, 발전, 물질, 자본, 금융, 경제, 디지털, 인공지능의 세상에 살던 우리는
연대, 협력, 생태, 나눔, 기본소득, 가정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치료약을 개발하고, 백신을 개발하면 코로나19는 사라질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 성장, 발전, 물질, 금융, 경제, 디지털, 인공지능의 세상을 향해 나가야할까요?
자연을 파괴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생명을 죽이고, 대기를 오염시키고, 물을 오염시키고,
부익부 빈익빈의 세상을 향해서 달려가야 할까요?
야곱은 야뽁강가에서 하느님의 천사와 씨름을 하였습니다.
축복을 받았지만 정강이뼈를 다쳤습니다.
성공을 위해서 형을 속였던 야곱입니다. 앞만 보고 무한질주를 했던 야곱입니다.
다리를 다친 야곱은 이제 무한질주를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인생을 돌아보았고, 형에게 용서를 청하였습니다.
야곱은 이제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이 다스리신다는 뜻입니다.
코로나19라는 쉼표 다음에 우리는 어떤 삶을 선택해야할까요? 분명 쉽지 않은 길입니다.
그러나 포기할 수 없는 길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삶을 선택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다스리시는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 삶은 공감의 삶, 연대의 삶, 나눔의 삶, 생태보존의 삶,
기본소득을 보장해주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제1독서는 감옥에 갇혔던 바오로와 실라스의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지진이 있었고, 분명 밖으로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와 실라스는 감옥에 있었습니다.
간수는 바오로와 실라스가 도망간 줄 알고 자결하려하였습니다.
바오로와 실라스는 간수에게 도망가지 않았다고 이야기합니다.
간수는 세상의 기준으로는 당연히 도망가야 하는데
하느님의 뜻을 따라 도망가지 않았던 바오로와 실라스에게 감동합니다.
그리고 바오로와 실라스를 집으로 초대하였습니다.
복음을 들었고, 세례를 받아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온 가족이 세례를 받았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간수에게 지진은 전화위복이고, 새옹지마이며, 디딤돌이 되었습니다.
코로나19는 제게도 쉼표였습니다. 매주 토요일 저녁미사도 중단되었습니다.
신문홍보와 강의도 취소되었습니다. 피정도 취소되었습니다.
과테말라에서 있을 교구모임도 취소되었습니다. 멈추니 보이는 것도 많습니다.
멈추니 듣는 것도 많습니다. 수선화, 튤립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름 모를 새들의 노래를 들었습니다. 책도 읽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마리문모 수녀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요한 16, 7)
죽음을 통해 부활을 배우듯이
떠남을 통해 만남을 배웁니다.
삶 안에서 모든 것엔 다 때가있듯이
당신이 이끄시는 그 손길에 모든 것을 의지하게 하소서.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