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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다물역사관(한민족역사탐방) 원문보기 글쓴이: 별미르
0.마고에서 부터 근대까지의 우리의 역사
(마고성 ~ 단군조선)
(마고성 이야기)
우리 역사에도 창세(創世) 이야기가 있음이 신라때 박제상이 지은 부도지(符都誌)가 최근 발간 됨으로서 알려졌다.
지상에서 가장 높은 마고성(麻姑城)의 여신(女神)인 마고에게 두 딸이 있고 이들에게서 황궁, 백소, 청궁, 흑소씨의 남녀 각 1명의, 8명이 태어났고, 이들이 각각 3남 3녀를 낳앗는데, 이것이 인간의 시조이며 몇대를 지나 자손이 3000여명이 되었다고 한다.
성(城)안의 사람들은 품성이 순수하여 능히 조화를 알고 지유(地乳)를 마시므로 혈기가 맑았고 수명은 한없이 길고 누구나 스스로 지키는 자재율로 질서를 이루었다.
어느날 백소씨의 일족인 지소씨가 지유(地乳)대신 포도를 먹고 다른 사람에게도 먹게 함으로써 5미(味)의 맛에 취하고 다른 생명을 취함으로써 천성을 잃게 되고 수명이 줄어들게 되었다. 이들은 성에서 쫒겨나게 되었고 성안에도 지유(地乳)가 끊어져 모든 사람들이 풀과 과일을 먹게 되었다.
이런 사태에 대하여 모든 사람들의 어른인 황궁씨가 책임을 지고 마고 할머니 앞에 복본(復本: 근본으로 돌아감)을 서약하고 모든 사람의 4파로 나누어 성을 떠남에 있어 황궁씨는 일행을 이끌고 북쪽 문으로 나가 동북 아시아 지역의 천산주(天山州)로 갔다.
황궁씨와 그의 자손인 유인씨 그리고 유인씨의 자손인 한인씨가 천년씩 3천년동안 복본을 위해 몸과 마음을 열심히 닦은 결과 기후가 안정되고 사람들의 의식이 상승하여 인성을 회복하게 되었다고 한다.
(환국시대)
한국(桓國)에 관한 기록은 <한단고기(桓檀古記 )> 삼성기(三聖記)에, [우리 한(桓)의 건국은 가장 오랜 옛날에 있었다.... 어느날 동남동녀(童男童女) 800명이 흑수와 백산의 땅에 내려 왔다. ... 이를 한국(桓國)이라 하고 그를 천제한인(天帝桓因)이라 했으며 안파견이라고도 불렀다. 7세를 전하였는데 그 역년은 3,301년이라 한다.]
[그 땅의 넓이는 남북 5만리 동서 2만여리에 이른다. 이를 모두 합하여 한국이라 하며 나누어 말하며 비리국, 양운국, 구막한국, 일군국... 선비이국, 수밀이국으로 보두 12국이다]라고, <한단고기> 태백일사(太白逸史,)에는 [이로부터 한인의 영제 아홉분이 나라를 나누어 다스렸으니 이를 9황(皇), 64(民)이라 한다]고 하였다. 12국중 일부의 이름이 당나라 때 편찬된 <진서(晋書)>에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비리국은 숙신의 서북쪽에 있는데 말을 타고 200일을 가야 한다. 양운국은 비리국에서 말을 타고 또 50일을 가야 한다. 구막한국은 양운국에서 또 100일을 가야 하며 일군국은 구막한국에서 또 150일을 가야 하는데 이를 계산해 보면 숙신에서 5만여리를 가야한다.
이러한 기록을 보면 5만리에 이르는 한국(桓國)은 아시아 거의 전부에 이르는 광대한 범위에 미쳤음을 짐작 할 수 있다
또 12국 중 수밀이국은 메소파타미아 지역의 슈메르(Sumer)로 해석되고 있는데 슈메르는 현재 가장 빠른 문명으로 이해되고 있다. 슈메르인들은 동방의 고원 산악 지대에서 이동해 온 민족으로서 검은 머리를 한 황색인종이며, 이들의 유적지에서는 문자가 새겨진 점토판이 대량 발견되었다.
(신시배달국 시대)
* 국 호 : 배달(혹은 밝달, 박달로서 '밝은 땅'이라는 뜻)
* 성 격 :
* 존속기간 : 서기전 3898 - 서기전 2334(1,565년간)
* 역대한웅 : 시조 한웅(桓雄) 거발한(居發桓) - 18대 한웅 거불단(居弗檀)
* 강 역 :
* 도 읍 지 : 신시(神市)
* 고고학적 시대 : 신석기 시대 후기 - 청동기 시대 초기
<배달국의 건국>
<삼국유사>, <한단고기>, <삼성기>, <태백일사> 등에서는 배달국의 건국에 관하여 한웅께서 지상에 홍익인간하여 광명 세계를 열고자 천부인(天符印) 3개와 무리 3천명을 이끌고 태백산(일반적으로 백두산으로 봄)의 신단수(神檀樹) 밑에 내려와 신시(神市)를 열었다고 한다. 한운은 풍백(風伯), 운사(雲師), 우사(雨師)를 거느리고 곡식, 생명, 질병, 형벌, 선악 등 인간의 360여가지 일을 주관 하였고, 세상에 있으면서 이치대로 교화하고 인간 세상을 크게 도왔으니 사람들이 한웅천왕이라고 불렸다. 중국의 고대 기록인 <산해경(山海經)> <회남자>등을 보면 당시 중국의 동남방에서부터 동북 쪽에는 大人國, 군자국(君子國), 청구국(靑邱國)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각기 다른 나라가 아니라 모두 한웅천왕의 배달국을 가리키는 말이며, 또 후대에는 고조선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치우천황]
치우(蚩尤)천왕은 배달국의 14대 자오지(慈烏支) 한웅을 일컫는 말인데 치우란 우레와 비를 크게 일으켜 산과 강을 바꾼다는 뜻이며, 동양의 군신(君神)으로 추앙받고 있다
<한단고기>-삼성기(三聖記), 규원사화(揆園史話) 등을 보면 치우천왕이 광석을 캐고 철을 주조하여 병기를 만들었으며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 된 이마를 하고(투구와 갑옷을 입은 모양) 중국의 화아제(皇帝 : 중국 역사의 시작인 3황5제중 5제의 첫째를 연전연파하여 청구를 개척하고 땅을 넓혀 중국 땅이 대부분이 우리에게 속했다.
중국의 서량지(徐亮之) 교수는 <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에서 동이족의 중심지가 산동성이라 하였고, 왕동령(王桐齡)의 <중국민족사>에는 [4천년전... 호북성, 호남성, 강서성 등지를 이미 묘족(苗族)이 점령하고 있었으며 중국의 한족(漢族)이 들어오면서 차츰 이들과 접촉하게 되었다. 이 민족의 나라 이름은 구려(九麗)이며 군주는 치우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사마천의 <사기(史記)>에는 '구려(九黎)의 군주는 치우라 했다', '치우는 옛 천자(天子)이다', '치우의 무덤은 동평군 수장현 함향성(산동반도)안에 있다. 그 높이는 7장(丈)으로 백성들이 늘 10월에 제를 올린다' 등으로 적고 있다.
[배달국과 중국의 3황 5제]
한웅천왕이 배달국을 세울 무렵, 중국의 시조라 하는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역사도 시작 되었다.
3황이란 처음 중원의 일부를 차지하고 나라를 세운 세 명의 제왕을, 5제란 그 뒤에 일어난 다섯 명의 제왕을 가리킨다.
3황5제 가운데 대부분이 동이족이며 이 사실은 중국의 일부 학자 들도 인정하고 있다.
현대 중국 사학자들이 공동 편찬한 <고사변(古史辯)>에서는 은(殷)나라 사람이 동이(東夷: 조선족)와 동족이며 그 신화 역시 근원이 같다고 하고, 삼황오제 가운데 태호, 제준, 제곡, 제순, 소호등이 동이족이라는 것은 근래 사람들이 명확히 증명하는 바라고 한다.
우리의 기록인 <한단고기><태백일사(太白逸史)를 보면 3황 중 태호 복희는 배달국의 5대 태우의 한웅의 12아들 중 막내이며 염제 신농은 웅씨(熊氏)에서 갈라져 나간 사람 중 소전(少典)의 아들이라고 한다.
또 5제 중 요.순 시대라 하여 태평 성대의 대표로 꼽는 요임금과 순임금에 관하여 보면 요임금은 배달국의 말기와 단군왕검의 고조선 시대에 걸쳐 있었는데 대홍수를 다스리지 못하고 동이족인 순임금에게 제위를 불려 주었고 순임금은 상국(上國)인 조선에 도움을 요청함에 따라 단군왕검께서는 태자 부루를 보내 오행치수법을 전해 홍수를 다스리게 하였다.
(단군조선시대)
역대단군
단군조선 단군 계표(47대, 재위년수 : 2,096년)
가. 송화강 아사달(하얼빈시대) :
초대 단군왕검~21세 소태(B.C.2333~1286:1048년간)
1대 단군 왕검 (B.C. 2333)
2대 부루 단군 (B.C. 2240. 태자)
3대 가륵 단군 (B.C. 2182. 태자)
4대 오사구 단군 (B.C.2137. 태자)
5대 구을 단군 (B.C. 2099. 양가) 년. 우가)
6대 달문 단군 (B.C. 2083. 우가)
7대 한율 단군 (B.C. 2047. 양가)
8대 우서한 단군 (B.C. 1993. ?)
9대 아술 단군 (B.C. 1985. 태자)
10대 노을 단군 (B.C. 1950. 우가)
11대 도해 단군 (B.C. 1891. 태자)
12대 아한 단군 (B.C. 1834. 우가)
13대 흘달 단군 (B.C. 1782. 우가)
14대 고불 단군 (B.C. 1721. 우가)
15대 대음 단군 (B.C. 1661. ?)
16대 위나 단군 (B.C. 161O
17대 여을 단군 (B.C. 1552. 태자)
18대 동엄 단군 (B.C. 1484. 태자)
19대 구소모 단군 (B.C. 1435. 태자)
20대 고흘단군 (B.C. 1380. 우가)
21대 소태 단군 (B.C. 1337. 태자)
나. 백악산 아사달 시대 :
22세 색불루 ~ 43세 물리(B.C.1285~426 : 860년간)
22대 색불루 단군(B.C. 1285)
23대 아흘 단군 (B.C. 1237. 태자)
24대 연나 단군 (B.C. 1161. 태자)
25대 솔나 단군 (B.C. 1150. 태자)
26대 추로 단군 (B.C. 1062. 태자)
27대 두밀 단군 (B.C. 997. 태자
28대 해모 단군 (B.C.971. ?) )
29대 마휴 단군 (B.C. 943. ?)
30대 내휴 단군 (B.C. 909. 태자)
31대 등올 단군 (B.C. 874. 태자)
32대 추밀 단군 (B.C. 849. 아들)
33대 감물 단군 (B.C. 819. 태자)
34대 오루문 단군 (B.C. 795. 태자)
35대 사벌 단군 (B.C. 772. 태자)
36대 매륵 단군 (B.C. 704. 태자)
37대 마물 단군 (B.C. 646. 태자)
38대 다물 단군 (B.C. 590. 태자)
39대 두흘 단군 (B.C. 545. 태자
40대 달음 단군 (B.C. 509. 태자)
41대 음차 단군 (B.C. 491. 태자)
42대 을우지 단군 (B.C. 471. 태자)
43대 물리 단군 (B.C. 461. 태자)
다. 장당경(開原) 시대 :
44세 구물(丘勿)∼47세 고열가(古列加) (B.C.425∼B.C.238 : 188년간)
44대 구물 단군(丘勿, 20, B.C.425, 욕살)
45대 여루 단군(余婁, 55, B.C.396, 태자)
46대 보을 단군(普乙, 46, B.C.341, 태자)
47대 고열가 단군(高列加, 58, B.C.295, 대장군)
단군고사
* 국호 : 조선(근세 조선과 구별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고조선으로 칭함)
* 성격 : 우리나라 최초의 고대 민족 국가이며 아홉갈래의 한족(桓族 : 조선족) 부족들을 모여 이룬 통일 연맹체 - 거수국(제후국) : 2000년 동안 많은 거수국들이 명멸하였으나 임둔, 현도, 숙신, 청 구, 옥저, 비류, 한(韓)등이 대표적 * 존속기간 : 서기전 2333년 - 서기전 237년 (2,096년간)
* 역대단군 : 시조 단군 왕검 - 47대 단군 고열가
* 강역 : 현재 중국 하북성, 요녕성의 난하 일대로부터 내몽고 자치주 및 그 동쪽의 만주와 연해 주 및 한반도 전역.
* 도읍지 : 아사달이 당초 도읍지였으나 후에 평양성, 백악산, 아사달, 장당경 등으로 옮김. - 첫 도읍지 아사달에 관하여 신채호는 송화강변 완달산 하얼빈이라 하고 윤내현 교수도 조선족의 기원지는 백두산 지역일 가능성을 전제하여 건국 시기의 평양은 심양 근처로 추정.
* 고고학적 시대 : 청동기 시대(고조선 전, 중기) - 철기시대 초기 (서기전 7-8세기 이후, 고조 선 후기) (사진은 참성단)
(삼한관경제)
한국시대 12연방은 신시시대에 9한(桓) 64민(民)이 되었고, 단군조선 시대에 다시 삼한(三韓)으로 나누었는데, 삼한(三韓)은 진한(辰韓), 마한(馬韓), 번한(番韓)을 말하며, 오가(五加) 64족을 모두 포함하였다.
이러한 내용이 <한단고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왕검 역시 하늘에서 내려와서 불함산에 사시니, 나라 안의 모든 사람들이 함께 받들어, 단군으로 모시어 이를 단군왕검이라 한다. 태어나면서부터 지극히 신묘하고 성스러워서 구한(九桓))의 삼한관경(三韓管境)을 모두 통합하였다.」
<한단고기 태백일사 삼신오제본>
「신시개천(神市開天)에서부터 18세를 전하여 1,565년이 흘러서 비로소 단군왕검이 나셨다. 웅씨의 비왕( 王)으로서 마침내 신시에 대신하여 구역(九域)을 통일하고 관경(管景)으로 삼한(三韓)을 나누었으니 이를 단군조선(檀君朝鮮)이라고 한다.」
<한단고기 신시본기>
(열국시대~ 고려시대)
(열국시대)
열국출현의 배경
단군조선은 삼한(三韓)으로 나누어 다스렸는데, 삼한은 진한(辰韓), 마한(馬韓), 번한(番韓)을 말하며 오가(五加) 64족을 모두 포함하였다. 44세 단군 구물(丘勿) 병진원년(B.C. 425)에 삼한을 삼조선(三朝鮮)으로 개정하였다. 진한이 삼조선을 통괄하면서 진조선을 다스렸으며, 마한은 막조선, 번한은 번조선을 다스렸다. 3한의 정치, 경제, 문화적 중심지인 왕검성(王儉城)의 밑에는 제후와 그 일족이 거취하던 제후국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서 국읍(國邑)이 있었으며, 그 외의 일반 부락은 읍 또는 읍락이 있어 이것이 고조선의 기층부락이 되어 읍제국가(邑制國家)적인 사회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제후국들은 진조선, 막조선, 번조선이 각각 망함에 따라 국토가 분열되고 백성은 흩어지게 되었으며, 북방 제후들이 자웅을 다투어 크고 작은 나라가 10여 개국이 세워져 약 2세기간에 걸쳐 열국시대를 이루게 된다.
이들 열국중 종주국 격인 북부여는 진조선이 폐관하기 일년 전인 임술년(B.C. 239)에 종실(宗室) 해모수(解慕漱)가 건국하였다. 을미년(B.C. 86)에는 동부여(가섭원부여)가 분리되고, 동부여에서 남부여가 분리되고, 계해년(B.C. 58)에는 고추모(고주몽)가 졸본(卒本)에 고구려를 세우고, 그 후 비류백제, 온조백제 등이 건국되었다.
서기 1세기에 들어서면서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 사국이 성장·발전하면서 열국이 정비되었고, 서기 3, 4세기에 들어서 고구려 등이 만주와 북중국 일대 고토(故土)를 다시 회복하게 된다.
(사국시대)
- 고구려
고구려의 건국 (사진은 고구려 벽화)
임인년(B.C. 79), 고구려의 시조 고추모(고주몽)는 해모수의 3대 손인 고모 수(高慕漱 : 본명은 불리지(弗離支), 해모수의 둘째아들인 고진(高辰)의 손 자)와 하백녀 유화(宥和) 부인과의 사이에서 동부여(가섭원부여 : 해모수 계)에서 태어났다.
임술년(B.C. 59), 동부여의 사람들이 나라에 이로움이 없는 인물이라 하여 죽이려 하자 졸본부여(卒本夫餘 : 동명계)로 도망 오게 된다.
고무서(高無胥 : 북부여 6세 단군)의 사위(둘째 딸 예씨(禮氏와 결혼)가 되 어 대통을 잇게 되나 하부여인이 그를 죽이려 하므로 다시 동남쪽으로 도 망, 비류수 상류에 이르니 이곳에 있던 소서노(召西奴)가 아버지 연타발(延 陀渤)의 많은 재산을 물려받아서 해부루왕의 서손(庶孫) 우태(優台)의 아 내가 되어 비류(沸流)와 온조(溫祚) 두 아들을 낳은 후 우태가 죽어 과부로 있었는데 고추모(고주몽)와 결혼하였다.
B.C. 58 고추모(고주몽)는 그 재산을 가지고 뛰어난 장수 부분노(扶芬奴) 등을 끌어들이고 민심을 거두어 나라 를 경영하여 고구려를 건국했다.
(대진국시대)
고구려가 망한 것은 A.D. 668년이요, 발해의 건국을 A.D. 699년이라고 볼 때 고구려가 망한 지 불과 31년 사이에 만주에서 고구려족은 사라지고 마치 말갈의 7부족 이 만주 전체를 뒤덮은 것으로 오도(誤導)하고 있고 이들이 발해를 건국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대진국본기>에는 발해(大震國)의 건국은 고구려가 멸망한 A.D. 668년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그 건국자는 고구려의 진국장군(振國將軍)인 대중상(大仲象)으로 기록되어 있다. 대중상(大仲象)은 발해의 1대 세조(世 祖)로 휘(諱)는 중상(仲象) 혹은 걸걸중상(乞乞仲象)이며, 시호(諡號)는 진국열황제로 A.D. 668년 국호를 후고구려, 기원은 중광(重光)으로 하여 나라를 세웠다.
2대 태조(太祖, A.D.699)의 휘(諱)는 조영(祚榮)이며, 시호(諡號)는 성무고황제로 A.D. 699년에 국호를 대진(大震)으로 하였다가 A.D.713년에 국호를 다시 발해(연호는 천통)로 변경한다. 원래 진국(震國)은 단군 조선을 부르던 이름 중 하나였다. 대진의 영토는 5,000리 번성기에는 9,000리에 이르렀으며 역사는 229년간 지속되었다. 지나인들은 대진국이 발해만의 저쪽에 있다하여 발해(渤海)라 불렀다.
2대 성무고황제의 아들인 3대 무황제는 말갈족 중 독립을 끝까지 고집하던 흑수말갈을 대진의 연맹에 복속시켰고 마침내 당나라와 세력균형을 이루어 냈다. 4대 광성문황제 때는 한단시대부터 내려오던 국가교육기관인 태학을 다시 설립하고 한민족의 경전인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가르치며 단기고사를 강의했다. 또한 8세기 후반에 대대적으로 지배체제의 정비에 힘을 기울여, 9세기에 들어 대진국은 크게 융성하였으며 11대 선(宣)황제 때는 해동성국이란 칭호를 듣게된다. 고구려 문화를 기본으로 하고 당의 문화를 받아들여 재구성한 대진국의 문화가 꽃피운 시기이다.
(고려시대)
1.신라말의 정국
신라는 당과 연맹을 맺어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킨 후 1세기 동안은 태평성대로 문화는 크게 발전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귀족들은 개인적으로 사찰을 짓기도 하고 당의 장안을 본떠 풍요와 사치의 극을 달렸다.
그러나 이렇게 경제와 정치를 독점한 중앙귀족은 신라 혜공왕(765- 780)을 기점으로 수많은 반란을 일으켜 권력쟁탈전에 나서게 된다. 반란의 와중에서 150년간 무려 20여명의 임금이 바뀌었고, 즉위한지 1년이 못되어 죽음을 당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한편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는데 큰 힘이 되었던 화랑들도 전쟁이 없는 태평성대가 계속되자 유흥과 향락에 빠져들고, 신라정치의 중심 축었던 골품제는 그 폐쇄성 때문에 6두품 출신 등 지식인계급은 중앙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유리되어 가는 등 신라는 속으로 곪아가고 있었다.
정국의 불안이 계속되면서 중앙의 통제력은 약해지고 지방세력인 호족들이 점차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여 스스로 성주, 혹은 장군이라 칭하면서 사병을 보유하여 그 지방의 행정권과 군사권을 장악하고 실질적인 지배자로 등장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라 52대 효공왕 무렵에는 신라의 세력이 겨우 경주일원만이 명맥을 유지하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이들 지방세력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이가 궁예와 견훤이었다. 이들이 큰 세력을 이루어 각기 나라를 세움으로서 신라, 후백제, 후 고구려(마진, 태봉으로 국호변경)의 후 삼국 체제로 들어간다. 통일이라는 명분을 세워 중원의 패자였던 고구려와 일본건국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백제를 무너뜨린 신라는 소위 통일시대 이후 2세기를 겨우 넘기고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2. 묘청의 난
1) 시대적 배경
고려중기 문종의 전성기 이후 예종은 여진을 정벌하는 등, 치적을 남기기도 하였지만 문치에 더욱 박차를 가하는 시기였고, 현종, 문종으로 이어진 고려 태평시대의 마지막 시대였다. 특히 의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왕실의 권위는 약화되고 현종 이후 왕실과 외척 관계를 이루어온 인주 이씨의 전횡이 두드러져 인종 때의 權臣 이자겸은 왕을 능가하는 권력을 독점하고 있었다.
이때 나라밖에서는 거란의 요를 멸망시킨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가 고려에 대해 형제관계를 요구하더니 드디어는 군신관계까지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권을 잡고있던 이자겸 일파는 자신의 권력을 보존하기 위해 금 나라의 요구를 받아들여 稱臣上表의 굴욕적인 사대를 하였고 안으로는 세력이 더 커지자 스스로 왕이 되려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자겸의 난은 김부식 등에 의해 진압되었으나 정권이 김부식 일파로 넘어간 것에 불과 했으며 이자겸의 난을계기로 하극상의 풍조가 성행하여 왕권에 도전하는 무리들이 내부적 반란을 수없이 일으켰다.
2) 서경 천도 설과 묘청의 난
고려 태조는 불교를 국교로 삼고 유교와 함께 화랑도 정신 또한 중요시했으나, 고려가 점차 기틀을 잡아가면서 불교와 동시에 유학을 크게 장려했다. 광종의 과거제 실시이후 성종 때는 최승로 등의 유학자를 등용하여 재상을 삼아 정치제도의 유교이념을 내세웠다. 이후 유학자는 대개 尊華의 견지에서 사대주의 색채를 짙게 풍겼다. 이에 비해 국풍파(國風波: 郎敎徒와 佛敎徒)는 국체상의 독립과 자주를 부르짖어 정책적으로 압록강 이북의 옛 영토를 회복할 것을 전제로 하고 북진정책을 주장했다.
이들 양자는 조정에서 늘 대립하게 되었다. 인종 때에도 이들의 정치적 대립은 치열했다. 윤관의 아들 윤언이는 북벌, 稱帝를 주장했으나 儒臣의 반대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또한 묘청은 서경 천도와 칭제 그리고 연호를 사용할 것을 주장했다. 더구나 당시의 개경은 이자겸의 난으로 인하여 궁궐이 불타 없어지고 황폐해 졌으며 인심도 매우 흉흉한 상태였다.
묘청은 이를 개경의 지덕이 쇠한 때문이라고 하며 서경으로의 천도를 주장했다. 그러나 개경을 중심으로 한 김부식을 비롯한 문벌 귀족은 이를 즉각 반대하고 현상유지를 고집하였다. 김부식 일파가 내세운 명분은 以小事大는 先王之道이며 칭제건원의 주장은 금 나라를 격노케 하여 국내 안정과 질서를 파괴한다는 것이었다. 묘청은 김부식 일파의 강한 반발로 서경천도 계획이 좌절되자 백수한등과 함께 서경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묘청은 나라를 세워 이름을 大爲, 연호를 天開라 하였으나 군사를 일으킨 이후에도 崔京을 인종에게 보내어 서경천도를 거듭 주장한 것으로 미루어 왕권에 도전한 것은 아니었다. 묘청의 난은 尊華事大에 물든 개경의 기득권 층인 문벌귀족에 의해 자행되는 고려의 중국화에 대한 한민족 자주화 운동이었으며 고려 재 건국 운동이었다. 그러나 묘청의 서경군은 진압군 총 사령관인 김부식이 유도한 내부 분열로 묘청이 살해되었고 군량 부족으로 서경은 함락되고 반란은 진압되었다.
3. 몽고침입
묘청의 서경천도운동 실패이후 권력을 잡은 문벌 귀족이나, 무신을 난을 통해 정권을 잡은 무신들은 모두 개인의 정권 지키기에 경제력과 군사력을 독점하였고 그 결과 왕권과 국가의 힘은 쇠잔해 졌다. 게다가 작은 부족에 불과했던 몽고족이 징기스칸이라는 영웅에 의해 원나라가 세워지고, 중국대륙을 통일하고 여세를 몰아 고려에 침입해 오자(1231년) 고려는 큰 시련을 맞게 된다.
1231년에 시작된 몽고와의 전쟁은 1258년까지 약 30여년간 계속 되었다. 그러나 몽고의 침략이 시작되자 강화도로 도망간 최씨의 고려정부는 싸움은커녕 향락과 사냥에 빠져 있었다. 그 잔인한 몽고군의 손에서 나라를 지탱한 것은 오히려 무시되고 천대받았던 농민군, 천민군 이었다. 그들의 저항이 있었기에 "초토화 작전"으로 유명한 몽고군에 30여년간 항전할 수 있었다. 몽고군과 맞서 30년이나 항전한 것은 세계에서 고려가 유일했다.
한편 이 몽고의 침입 기간 중 부처님의 힘을 빌어 국가를 수호하겠다는 염원은 이제는 전 세계의 문화유산이 된 팔만대장경을 낳았다.
4. 고려멸망
강화도로 피신하며 정권을 유지하는데 급급했던 최씨 정권이 무너지자 고려왕실은 개경으로 환도(1270)하고 이때부터 시작된 원의 지배는 약 100년간 지속되었다. 원의 지배방식은 고려왕실을 통한 간접통치였다. 이후 고려왕의 명칭은 종이나 조가 아닌 왕으로 격하되었으며 차기 임금은 원에서 자라야 했다.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등 고려왕의 시호에 붙은 忠은 바로 元에 충성한다는 뜻이었다. (사진은 천산대렵도)
그러나 강대국 원도 14세기 들어 세력이 급격히 약해지고 주원장이 남경을 손에 넣으며 漢族의 명나라가 건국되었다(1356년) 이틈에 고려의 공민왕은 본격적인 반원 자주화 개혁정치를 펴기도 했으나 개혁의 주역이었던 신돈이 제거되고 노국공주의 사망으로 방황하던 공민왕 또한 환관 최만생에 의해 살해됨으로서 공민왕의 개혁정치는 중단되고 만다.
공민왕의 개혁정치는 실패했지만 그후 신진사대부라는 새로운 세력이 중앙정치 무대에 자리잡게 되고 신흥 무인세력의 대표인물로 등장한 이성계가 그들과 결합하여 위화도회군을 일으킴으로서 고려의470년 사직은 막을 내리게 된다(1392년)
(조선시대)
위화도회군으로 권력을 장악한 이성계는 1392년 고려를 멸망 시고 새 왕조를 열었다. 조선이 개국될 시점은 세계적인 대제국을 건설했던 몽고족의 원나라가 쇠퇴해 가고 漢족의 명나라가 일어나는 전환기였다. 이러한 원과 명의 틈바구니에서 고려말엽은 고구려의 멸망 이래로 잃어버린 땅 동북아시아로 진출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군사적으로도 요충지인 요동벌(만주대륙)을 회복하여 자주적인 주권을 회복할 수 있었던 요동정벌 계획은 권력이라는 개인적인 영화를 추구한 이성계에 의해 무너졌다. 자신의 정치적지지 기반인 신진 사대부와 신흥 무인세력의 정신적 종주국인 면에 대한 사대주의가 국가와 민족의 자주성보다 앞섰다고 볼 수 있다.
명에 대한 사대주의는 국호를 정하는 과정에서도 나타난다. 태조 이성계가 건국한후 국호를 朝鮮과 자신의 고향 이름인 화령 중에 정하려고 하고 명의 황제에게 택일하여 결정해 달라고 사신을 파견했다. 그래서 명의 황제는 조선이라는 이름을 선택해 주었고 그것이 국호가 되었다. 제 나라의 이름조차 남의 손에 의해 결정하는 나라- 이것이 조선왕조의 시작이었다.
조선왕조는 개국과정 에서부터 수많은 인명의 희생 속에서 출말 하였다. 세종대왕 같은 위대한 성군도 있었지만 유교문화가 본격화되면서 반상의 차별이 극심하게 되었고 지배층은 국방은 돌보지 않고 사색당파로 분열되었다. 한편 백제의 멸망 후 새로이 탄생한 일본은 꾸준히 성장한 뒤 약 100년간 치열한 내전을 종식시키고 일본 통일을 완수했다.(1590년) 그리고는 호전적인 무사제후들의 힘을 밖으로 배출시키기 위해 조선침략의 길에 나선다. 반상의 차별과 사색당파, 그리고 관리들의 무능과 부패 속에 임진왜란(1592년), 병자호란(1636)등 큰 전란을 맞아 백성들은 지옥과 같은 참상을 겪었고 전 국토가 피폐해 졌다.
통일신라와 고려왕조가 불교를 국교로 삼으면서 민족전통의 얼인 신선도의 맥은 사라져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선왕조 기간동안 불교는 유교에 의해 천대를 받았다. 500년간 조선사회를 이끌어가던 유교철학이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맞는 리더쉽을 발휘하지 못하고 오히려 장애가 될 때 서구로부터 새로운 외래종교- 기독교가 수입 되었다.
18세기 말엽 본격적으로 전래되기 시작한 천주교와 함께 개신교가 전래되면서 우리 민족정신은 또다시 새로운 부정의 역사를 맞는다. 기독교는 유교의 기본인 제사를 우상숭배로 규정했다. 이전까지는 민족고유의 정신인 신선도, 그리고 원래는 외래종교지만 신선도를 흡수하면서 어느 정도 토착화했던 불교, 유교의 전통은 비과학적이고 미신이며 사탄이라는 이유로 또다시 크게 부정되었다
그렇게 해서 고려시대에 이미 스러져갔던 한민족의 전통과 얼은 기독교가 전래되면서 본격적으로 滅의 단계에 들어섰으며 그 영향을 지금까지 받고 있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물결이 전세계를 휩쓸 때 임진왜란, 병자호란의 고통 속에서도 조선의 지배층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오히려 개혁을 요구하는 동학 농민군을 청, 일의 외세를 끌어들여 철저히 진압했다.
천주교의 전래
우리 나라에 천주교가 처음 알려진 것은 임진왜란(1592년)때였다. 왜장 고니시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 그래서 대부분 신자인 자신의 군사들을 위해 세스페데스라는 종군신부가 우리 나라에 들어왔다.
이때 세스페데스신부는 철저하게 일본 침략자의 편에 서서 조선백성들을 바라보았다고 하는데 이것이 첫 번째 접촉이었다. 그리고 선조 말년에는 북경을 내왕하던 조선의 사절단을 통해 천주교가 전파되기 시작했다. 정묘호란후 인질로 청나라에 끌려갔던 소현세자가 당시 북경에 와있던 신부 아담 샬과 친분을 맺고 그를 통해 천주교와 서양의 과학기술을 배웠다(1645) 그러나 소현세자는 인조임금과 노론 유학자들에게 미움을 샀고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사진은 순교자의 무덤에서 나온 사발)
천주교는 처음 학문의 대상으로 연구되었지만 18세기 후반에는 정권에서 소외된 불우한 남인들과 실리적인 북학파 학자들에 의해 신앙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이벽의 친척이자 친구인 이승훈은 북경으로 들어가는 사신들을 따라가 베드로란 세례명을 받고 돌아왔다. 그가 우리 나라 최초의 천주교 신자이다.(정조7년 단기 4116년, 서기 1783년)
천주교는 이처럼 세계선교사상 유래 없이 자생적으로 시작되었다. 1785년 봄 이승훈, 이벽, 정약용 3형제, 권철신 등은 선교사 없이 김범우라는 사람의 집에 모여 일주일에 한번씩 예배를 드리고 교리강습을 했다. 이벽이 신부소임을 맡아 설교를 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교회다.
중인계급인 김범우는 그후 한국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으며, 그의 집 자리가 바로 지금의 명동성당이다. 조선에 들어온 천주교의 특징은 보통의 경우처럼 선교사들이 들어와 포교를 해서 퍼지기 시작할 것이 아니다. 조선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성직자도 없이 자생적으로 교회가 성장하기 시작한 나라였다.
천주교는 영조때 더욱 많이 보급되어 해서지방, 관서지방에 널리 퍼지게 된다. 천주교의 교세가 계속 확장되면서 제사를 우상숭배라 하여 제사를 없애는 사람도 생겨났다. 조상에 대한 효도를 가장 중시하는 유교국가 조선의 조정에서는 천주교를 "전총문화와 신분질서를 위협하는 사교(邪敎)"로 규정, 천주교를 엄금하는 금압령(정조 9년 단기 4118년, 서기 1785년)을 내렸다. 30년후, 전라도 진산에 살던 윤지충이 모친의 장례식때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도 지내지 않는다는 사실이 조정에 알려졌다. 윤지충은 혹세무민죄로 처형당하였고 홍문관에 소장되었던 서양서적들이 불태워졌다.(신해사옥 1791년)
개신교의 전래
천주교에 대한 탄압은 정조의 사후 순조가 즉위하고 노론 벽파가 집권하면서 본격화 되었다. "천주교를 믿는 사교의 무리"라는 죄목은 정조가 감싸던 남인들을 제거하는데 좋은 구실이 되었다.
1801년 최초의 세례교인인 이승훈, 권철신, 정약종 등과 청나라 신부 주문모 등 300여 명이 처형당했다.(신유사옥) 이때 정약종의 사위이면서 독실한 천주교도인 황시영은 북경의 주교에게 몰래 밀서를 보내다가 도중에 발각되어 처형당하였다.
밀서는 "서양의 천주교 국가들을 움직여 선박 수 백척에 정예병사 5, 6만명 그리고 대포 등을 싣고 와 조선을 쳐서 선교의 승인을 얻게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초기 천주교 신자들이 범한 서양에 대한 무조건적인 동경과 숭배가 이런 무참한 결과를 낳았다. 그들은 서양인들을 "기독교로 무장된 형제들"로 믿었다.
개인신앙의 자유를 위해, 남의 나라에게 자기나라를 공격해달라고 요청한 이 사건 때문에 천주교는 그 후 "대역모반의 매국종교"라는 지탄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실제로 외국인 선교사들과 이부 교인들이 선교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란 명목 하에 외세의 앞잡이 노릇을 한 예가 결코 적지 않다고 한다.
엄격히 폐쇄된 유교국가였던 조선시대에, 외국에서 수입된 종교인 천주교는 그 문화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급속도로 전파되었다. 그것은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거치는 동안에도 변함이 없는 완고한 성리학적 가치관에 백성들이 반감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동안 거듭된 양반관리들의 부패와 세도정치로 사회는 혼란스러웠고, 백성들의 삶은 너무나 어려웠다.
조선시대 기간동안 심하게 탄압을 받아온 불교는 이제 당시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시킬 힘이 없었다. 이러한 정신의 공백기에 서양의 종교인 천주교가 이 땅에 들어온 것이다.
천주교의 "모든 인간은 천주앞에 평등하고, 천주를 통하여 현실의 고통을 벗어나 영생할 수 있다"는 내세적 교리가 고통받던 당시 조선 백성들의 공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여러 차례의 혹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천주교는 조선에서 널리 퍼졌다. 이승훈이 자기 발로 청나라의 성당을 찾아가 세례를 받은지 102년인 1886년, 프랑스와 조선이 조약을 맺은 후 천주교의 포교가 조선 땅에서 공인되었다.
(대한제국시대)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침략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이후 일본은 조선에 대한 침략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 갑신정변과 청일전쟁, 러일전쟁에 승리하며 1905년에는 조선정부를 무력으로 협박하여 을사보호조약을 맺어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를 설치하였으며 헤이그밀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켰다. 1907년에는 정미 7조약을 맺어 조선의 전권을 장악하고 군대를 해산시키고 1910년 한일 합방이 이루어졌다.
식민정책
황민화 정책(1919- 해방까지) 1919년의 3.1운동을 분수령으로 소위 문화정치를 내세워 한반도의 완전한 일본화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헌병통치가 경찰통치로 바뀌었을 뿐 폭압적 지배체제는 오히려 내적으로 심화되었으며 교활한 민족 분열책을 써 일제와 타협하거나 독립운동의 시기상조를 내세우는 민족개량주의자들이 늘어났다. 일본은 많은 저항을 받았지만 이 저항의 과정에서 한국인들은 알게 모르게 차츰 일제에 오염되어갔다. (사진은 강화도조약을 체결했던 강화부의 진무영)
친일과 신친일
무단통치(1910- 1919 3.1만세운동) 일제는 최고 통치기구로서 조선총독부를 설치하고 입법, 사밥, 행정권과 군통수권을 장악하였다. 또 헌병경찰제도로 조선민중의 숨통을 죄었으며 철저히 무단탄압하였다. 일제는 1908년 동양척식회사를 설치하였고 1912년에는 토지조사령, 임야조사령, 삼림령을 공포하여 조선의 토지를 수탈하였다.
그들은 대부분의 농민을 소작농으로 전락시켜 일본경제를 위한 원료 조달 처와 시장으로 삼았다. 또 1912년에 제정된 조선민사령, 조선형사령등은 식민지통치법 이라는 이유로 일본헌법도 적용되지 않으며 조선인의 기본권조차 무시한 악법이었다. 심지어 학교교사까지도 제복, 제모, 일본도를 착용케 하는 헌병경찰에 의한 무단정치와 무력적 탄압은 항일의병에 대한 무자비한 토벌로 이어져 만주, 연해주 등지로 독립투쟁의 무대가 옮겨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