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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6월 27일 연중 제12주간 화요일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6.12-1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6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12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13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14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
개보다는 낫게 살아야
우리나라는 요즘 애완견의 천국 같습니다. 개 호텔이 있고, 개 미용실이 있고, 개 유치원이 있고, 개 돌보미가 아주 좋은 직장입니다. 방송국 프로그램 중에는 ‘개는 훌륭합니다.’라는 프로그램이 있고, 어떤 유모어에는 국회의원들의 호칭이 ‘개**’라는 호칭도 있습니다. 반면에 유기견들이 너무 많아서 유기견 수용소에는 하루에도 몇 천 마리 이상이 버려지고, 농촌에는 들개가 무서워서 조심하는 곳도 많다고 합니다. 이제 여름철이 되어서 많은 개들이 사육되다가 보신탕집으로 끌려갈 것이고, 충견과 애완견과 잡종견과 대접을 받는 몇 천만 원짜리 개와 강제로 도살되는 개 등 이렇게 이율적인 개 대접에 개들도 많이 섭섭할 것 같습니다. 나는 개를 아주 좋아합니다. 그러나 사람보다 개를 더 위하는 사람들은 사람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이 부모나 자식들에게 그렇게 대하는지 다른 눈으로 바라보기도 합니다. 개한테 너무 돈을 많이 쓰면서 사람들에게 인색한 사람들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개 대접도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불만이 많습니다.
얼마 전에 필리핀의 이름 없는 개 한마리가 전 세계에 짙은 감동을 선사한다고 하였습니다. 주인의 어린 딸을 구하려다 중상을 입은 이 충견이, 장기간의 해외치료를 마치고 귀국했다고 합니다.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킨 주인공은 이름 없는 잡종견 '카방'이라고 하는데 ‘카방’은 2011년 오토바이에 치일 뻔한 주인의 어린 딸을 구하기 위해 뛰어들었다가 턱과 주둥이 부위가 잘려나가는 중상을 입었고 주변 사람들이 모금운동에 나서 수천달러의 치료비를 모았고 미국에서 2만 달러가 모금되어 8개월의 치료를 받고 고향에 돌아왔답니다. 필리핀의 수의사 앤턴 림은 "카방은 조건 없는 사랑의 상징입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면 개들은 보답합니다."라고 얼굴이 완전히 달라진 ‘카방’을 보고 말했다고 합니다.
개는 성경에서 불결, 멸시, 위선, 이방인 등에 비유되지만 충직하고 의리가 있는 동물이기도 합니다. 사람과 친숙한 동물인 개는 속담에도 자주 등장합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욕설에도 많이 등장하고 부정적 의미로도 쓰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는 웬만한 욕설에는 개가 자주 거론되기도 하고 좋지 않은 것은 ‘개’자가 앞에 붙습니다. 개 입장에서 보면 아주 섭섭할 일입니다. 더구나 여름이 되면 항상 된장을 발릴까 불안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며칠 전 잡종 진돗개가 주인 할머니를 물어 죽인 일이 보도 되었을 때 개의 야맹성(野猛性)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모든 가축들 중에서 개에 대해 특별한 혐오감을 갖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개는 더러움과 참담한 가난의 상징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나쁜 습성을 비유해 개를 등장 시키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나타난 개는 한마디로 탐욕의 동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무절제한 욕심을 빗대 "게걸스러운 개들 그들은 만족할 줄 모른다."(이사 56,11) 면서 이스라엘의 부패한 지도자들을 비유하는 데 사용하기도 했으며 사형수들을 사형시킬 때 개에 물어 죽이게도 합니다. 사람들이 남긴 음식이나 분비물을 주워 먹게도 해서 ‘개 눈엔 똥만 보인다.’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입니다. 지금 개를 그렇게 대접했다가는 고발을 당할 것입니다. 개나 늑대 여우는 토했던 것을 다시 먹기도 하고 자식을 먹이기 위해서 토해 내기도 합니다. 성경은 이런 특징을 죄의 반복성에 비유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한번 회개 했으면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야하는데 다시 짓는 것에 비유한 것입니다. 미련한 사람은 개가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행동을 반복한다고 꼬집고 있는 것입니다. (잠언 26, 11).
신약에서 사도 바오로는 "개들을 조심하십시오. 나쁜 일꾼들을 조심하십시오. 거짓된 할례를 주장하는 자들을 조심하십시오."(필리 3,2)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개들은 신앙에 손해를 주는 모든 사람들을 지칭합니다. 이처럼 성경에서 개는 불결이나 멸시, 하찮음, 사탄, 위선, 이방인, 거짓 교사, 구원받지 못한 이의 비유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평화신문, 제881호(2006-07-23), 허영엽 신부 참조]
유다인들은 개와 돼지를 아주 불경한 동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개와 돼지를 동급으로 취급하고 사람을 개와 돼지에 비유하면 엄청난 모욕으로 비유되는 것입니다. 이 불경한 동물로 생각한 돼지를 개와 동급으로 취급했는데, 사람을 개와 돼지에 비유하면 이는 엄청난 모욕인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개를 아무리 좋아하고, 남편보다 개를 위에 놓고 사랑한다고 해도 개와 돼지에 비유하면 고소를 당할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라는 복음말씀이나 진리를 알아듣지 못하고, 하느님의 말씀으로 새겨듣지 못하고 불경스럽게 대하는 유다인들의 어리석고 혐오스러운 행동을 꾸짖고 계십니다.
개만도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개만큼의 사랑도 받지 못하는지도 모릅니다. 개한테 잘해 보십시오. 반드시 보답합니다. 필리핀 수의사의 말대로 개들은 본능적으로 그렇게 보답합니다. 사람은 개보다는 더 나아야 합니다. 적어도 개 보다는 더 나아야 사람입니다.
논어에서도 공자는 올바른 도의 문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자왈 ; 수능출불유호? 하막유사도야?’
‘子曰 ; 誰能出不由戶? 何莫由斯道也?’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누가 문을 통하지 않고 나갈 수 있는가? 어찌하여 올바른 도를 따르지 않는가?”’라고 올바른 도에 따라 살기를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대로 살라고 이르십니다. 거룩한 하느님의 말씀과 보물과 같은 율법과 예언서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어렵고 험난한 삶이지만 올바르게 살라고 강경하게 말씀하십니다. 유다인들처럼 위선적으로 살지 말고 아무리 못해도 그들보다는 낫게 살라고 하십니다. 어찌 좁은 도의 문을 통과하지 않고 하늘나라에 갈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개보다는 낫게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너와 나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한 혈육이 아니냐?>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13,2.5-18
2 아브람은 가축과 은과 금이 많은 큰 부자였다.
5 아브람과 함께 다니는 롯도 양과 소와 천막들을 가지고 있었다.
6 그래서 그 땅은 그들이 함께 살기에는 너무 좁았다. 그들의 재산이 너무 많아 함께 살 수가 없었던 것이다.
7 아브람의 가축을 치는 목자들과 롯의 가축을 치는 목자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때 그 땅에는 가나안족과 프리즈족이 살고 있었다.
8 아브람이 롯에게 말하였다. “우리는 한 혈육이 아니냐? 너와 나 사이에,
그리고 내 목자들과 너의 목자들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9 온 땅이 네 앞에 펼쳐져 있지 않느냐? 내게서 갈라져 나가라. 네가 왼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고,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나는 왼쪽으로 가겠다.”
10 롯이 눈을 들어 요르단의 온 들판을 바라보니, 초아르에 이르기까지 어디나 물이 넉넉하여
마치 주님의 동산과 같고 이집트 땅과 같았다. 그때는 주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시기 전이었다.
11 롯은 요르단의 온 들판을 제 몫으로 선택하고 동쪽으로 옮겨 갔다. 이렇게 두 사람은 서로 갈라지게 되었다.
12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서 살고, 롯은 요르단 들판의 여러 성읍에서 살았다. 롯은 소돔까지 가서 천막을 쳤는데,
13 소돔 사람들은 악인들이었고, 주님께 큰 죄인들이었다.
14 롯이 아브람에게서 갈라져 나간 다음,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눈을 들어 네가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을, 또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아라.
15 네가 보는 땅을 모두 너와 네 후손에게 영원히 주겠다.
16 내가 너의 후손을 땅의 먼지처럼 많게 할 것이니, 땅의 먼지를 셀 수 있는 자라야 네 후손도 셀 수 있을 것이다.
17 자, 일어나서 이 땅을 세로로 질러가 보기도 하고 가로로 질러가 보기도 하여라. 내가 그것을 너에게 주겠다.”
18 아브람은 천막을 거두어,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의 참나무들 곁으로 가서 자리 잡고 살았다.
그는 거기에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았다.
축일6월 27일 성 치릴로 (Cyril)
신분 : 총대주교, 교회학자, 교부
활동 지역 :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활동 연도 :380?-444년
같은 이름 : 시릴, 시릴로, 시릴루스, 치릴루스, 키릴로, 키릴로스, 키릴루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태생인 성 키릴루스(Cyrillus, 또는 치릴로)는 그 도시의 총대주교인 테오필루스(Theophilus)의 조카였다. 어려서부터 성직자가 되기로 한 그는 알렉산드리아에서 고전과 신학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고, 삼촌인 테오필루스에 의해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403년 총대주교인 삼촌을 수행해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로 가서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Johannes Chrisostomus, 9월 13일)를 단죄한 퀘르키아(Quercia) 주교 회의에 참석했으며, 417년까지는 테오필루스의 노선에 따라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를 반대하였다. 412년 10월 15일 테오필루스 총대주교가 사망하자 성 키릴루스는 사흘 후에 삼촌을 계승해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가 되었다. 그는 삼촌보다 더 뛰어난 신학적 역량을 갖춘 인물이었다.
그러나 성 키릴루스의 지지자와 그의 경쟁자였던 티모테우스(Timotheus)의 지지자 사이에 격렬한 싸움이 일어나 그는 큰 상처를 입고 출발하였다. 그런데 성 키릴루스는 자신이 축출하였던 노바티아누스(Novatianus) 이단을 상대로 일련의 공격을 재개했고, 그리스도인들을 공격하던 유다인들을 추방하는 일에 관여했다. 하지만 유다인들의 반란이 계속되자 오레스테스 총독 또한 그의 행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성 키릴루스는 세속 정부의 권위를 인정하며 유다인들 문제에서 손을 뗐다.
성 키릴루스는 신학적으로 주로 알렉산드리아의 성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5월 2일)의 노선을 따르며 아리우스주의에 대항하였다. 정통 가톨릭 신앙을 지키기 위해 애쓰던 그는 430년에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인 네스토리우스(Nestorius)와 분쟁에 휘말렸다. 네스토리우스는 가톨릭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이 동일하다고 가르치는 데 반해, 신성과 인성이 분리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성모님은 하느님의 어머니가 아니라 단순히 인간 예수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마리아에게 주어졌던 ‘하느님의 어머니(천주의 모친)’ 즉 ‘테오토코스’(Theotokos)라는 호칭을 사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이단에 빠지고 많은 성직자와 수도자들도 혼란을 겪게 되었다.
성 키릴루스는 강론과 서한을 통해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을 반박하고 사람들이 이단에 빠지지 않도록 경고했다. 그리고 네스토리우스에게도 직접 편지를 보내 그의 주장을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이단에 빠진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자 그는 교황 성 코일레스티누스 1세(Coelestinus I, 4월 6일)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여, 430년 8월 로마에서 주교 회의를 개최하여 네스토리우스를 단죄하도록 교황을 설득했다. 그리고 그에 맞추어 성 키릴루스도 같은 해 11월에 알렉산드리아에서 주교 회의를 열어 네스토리우스의 가르침을 단죄하고 교회 일치를 도모하고자 했다.
그러자 네스토리우스는 교황이 아닌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에게 성 키릴루스를 이단으로 고소했다. 당시 네스토리우스가 총대주교로 있던 콘스탄티노플은 황제가 거주하던 곳이었다. 황제의 신임을 믿고 고소했지만, 황제는 이 문제를 독단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며 주교 회의를 소집했다. 그래서 이루어진 것이 431년의 에페수스(Ephesus) 공의회이다. 교황 성 코일레스티누스 1세는 성 키릴루스로 하여금 네스토리우스를 축출하도록 지시하였고, 성 키릴루스는 에페수스 공의회에서 교황의 특사 자격으로 의장직을 맡아 회의를 주재하였다. 이때 200명 이상의 주교들이 대거 참여하여 큰 성황을 이루었다.
에페수스 공의회는 네스토리우스가 결백하다고 주장하는 안티오키아(Antiochia)의 총대주교 요한 1세(Joannes I)과 안티오키아 학파의 신학자들이 대거 몰려오기 전에 네스토리우스와 그의 추종 세력을 단죄함으로써 성 키릴루스의 승리로 끝났다. 네스토리우스는 결국 유배되었고, 이런 과정을 겪으며 그리스도론에 대한 교회의 정통 교리가 확고히 정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2년 후인 433년에 성 키릴루스는 안티오키아 학파와 화해를 이루었다. 안티오키아 학파는 에페수스 공의회에서 결의한 대로 마리아께 ‘하느님의 어머니(천주의 모친)’라는 칭호를 부여하는 것을 인정했고, 그리스도가 성부와 동일하며 인간 예수와 동일함을 인정하는,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동일하다는 결론에 합의했다. 성 키릴루스는 이러한 결의와 합의를 끌어내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고, 그래서 ‘성모 마리아의 신학박사’라는 별칭을 얻었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 이단이 사라지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 후로도 성 키릴루스는 모든 생애를 바쳐 이단 척결을 위해 사목적, 학문적으로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성 키릴루스는 삼위일체와 강생에 관한 교의 확립과 신학 논문 저술에 여생을 바쳤고, 그리스도교 사회에 깊이 뿌리박고 있던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와 네스토리우스주의를 배격하는 일을 지속해 교회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그는 알렉산드리아가 낳은 가장 위대한 신학자였다. 그의 저서는 정확한 사고와 명확한 전개 및 그 합당한 근거 제시로 후대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가 남긴 저서 중에는 구약과 신약 성경에 관한 여러 주석서와 많은 교의 신학 논문을 비롯해 배교자 율리아누스(Julianus) 황제에 대한 반박문과 편지 그리고 다양한 강론들이 전해져 온다. 그리스 교부의 한 명인 성 키릴루스는 1882년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교회 학자로 선언되었다. 동방 교회에서는 6월 9일에 그의 축일을 기념하고 있다.
오늘 축일을 맞은 치릴로 (Cyril) 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야고보 아저씨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이배근 가브리엘 형제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