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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이초 앞에 끝없이 도열한 근조화한…상복 입은 동료교사들과 시민들 발걸음 이어져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 전국교사모임 집회에 4천여 명 이상 운집
"교사에게 권위가 아닌 존중을, 권력이 아닌 인권을 보장해 달라"
22일 오후, 극단적 선택을 한 2년차 담임교사 A씨를 추모하는 근조화환과 꽃다발이 빼곡하게 놓인 서울 서초구 서이초등학교 교문 앞.
주말인 22일, 늦은 오후부터 비가 예보된 서울의 정오는 맑고 쨍했다. 가만히 서있어도 땀이 뻘뻘 나는 날씨였지만, 서초구 서이초등학교 앞에는 지난 18일 교실 안에서 극단적 선택을 한 2년차 교사 A(24)씨를 추모하기 위한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기자가 타고 있던 간선버스에서도 검은 원피스 차림에 흰 꽃다발을 수북이 안은 젊은 여성이 차가 멈춰서자마자 황급히 내렸다. 학교로 향하는 담 앞에는 각지에서 보내온 근조화환 1500여 개가 발 디딜 틈 없이 도열해 있었다.
학교 정문 앞에서는 전국초등교사노조가 방문객들의 헌화를 위해 준비해둔 꽃들을 한 송이씩 나눠줬다. 문 앞에서부터 눈물을 훔치거나 깊은 한숨을 내쉬는 시민들도 있었다. "선생님, 저도 첫 발령에 1학년 맡아서 참 힘들었는데 그 어려움을 같이 나눌 사람이 없었다는 게 너무 마음이 아파요", "같은 저경력 교사로서, 선배교사로서 지켜주지 못해 너무나 애통하고 미안하다" 등 선후배 교사들이 남긴 메시지들이 눈에 띄었다.
토요일인 22일에도 서이초등학교에는 고인이 된 교사 A씨를 추모하기 위한 발걸음이 이어졌다. 학교 벽에 가득 붙은 추모 메시지들을 바라보고 있는 시민들.
슬픔과 분노는 교육계에만 머물지 않았다. A씨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청년들 외 어린이집에 다니는 자녀의 손을 붙잡고 온 부부부터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에 이르기까지 연령대도 다양했다. 학교 안에 임시로 마련된 추모공간에는 점심시간도 잊은 듯 검은색 옷차림의 시민 수십 명이 늘어서서 헌화 차례를 묵묵히 기다렸다.
자신을 서이초등학교 동문으로 소개한 한 20대 여성은 "뉴스를 보면서도 믿기지가 않아 졸업한 후 처음으로 학교에 와봤다"며 "돌아가신 선생님께 부끄럽고 죄송하다"고 울먹였다. 그러면서 "이제 와 그분을 살릴 수는 없겠지만, 저희가 꼭 기억하겠다"고 말했다.
근처 초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 중인 30대 B씨는 "주변에서도 이런 경험을 들을 때가 종종 있다"며 "지도가 폭력이 되고, 훈육이 학대가 되는 상황에서 점점 교실은 붕괴되는 것 같아 착잡하다"고 토로했다.
이어 "제일 화나는 것은 그 책임이 다 교사의 개인사와 자질 문제로 전가된단 것"이라며 "그나마도 얼마 지나지 않아 정쟁 수단으로 전락해 버리지 않나"라고 말했다. 그는 "교사가 마음놓고 교육을 할 수 없다면 교육과정을 수없이 개정한들 소용이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22일 사망교사 A씨를 추모하기 위해 서울 서이초등학교를 찾은 시민들.
국민의힘 박대출 정책위의장도 이날 오후 고인의 분향소가 마련된 강남서초교육지원청을 찾아 조문했다. 박 의장은 페이스북을 통해 "일부 학부모의 악성 민원, 갑질은 폭력"이라며 "고인의 안타까운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선생님들이 가르칠 자유를 회복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학부모 갑질 의혹 등 A씨의 극단적 선택 이면을 둘러싼 여러 의혹 등은 아직 명확하게 드러난 것이 없다. 다만, 과도한 학부모 민원과 학폭 문제 등 일선 교사들이 날마다 겪는 고충과 애로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경찰도 서이초 교장과 교감을 포함한 학교 관계자 수십 명을 참고인 신분으로 불러 정확한 진상 규명에 수사력을 집중하고 있다.
이날 오후 2시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 일대에서 전국교사모임이 개최한 '추모식 및 교사 생존권을 위한 집회'에서도 이같은 문제의식이 집중적으로 공유됐다.
22일 오후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열린 서이초 교사 추모식 및 교사 생존권 촉구를 위한 집회. 전국 각지에서 모인 교사와 시민 4천여 명 이상이 운집했다.
보신각 앞 인도와 차도에는 주최 측 추산으로 4천여 명 이상의 참가자가 집결했다. 검은색 상·하의에 검은 마스크를 쓴 교사 등은 △(서이초 교사 사망 관련) 진상규명 촉구한다 △교사의 생존권을 보장하라 △교사의 교육권을 보장하라 △교사의 인권을 보장하라 △교권 수호 이뤄내자 등의 구호를 연호하며 교육당국의 대책 마련 등을 촉구했다.
경기도의 한 초등학교에서 일하고 있는 2년차 교사 C씨는 "연달아 쏟아져 나오는 기사에 머릿속이 멍해졌다. 누군가에겐 그저 한 사람의 죽음일 수도 있겠으나, 저와 교직에 있는 모두는 알고 있다"며 "그 죽음이 나를 향하게 될 수도 있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아이들을 가르치고 학교에 있으면서 교사로서의 존중은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려워졌다. 안하무인의 태도를 보이는 그들에게 제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이미 정해져 있고, 그들은 그걸 너무 잘 알고 나를 상처 내는 칼로 사용하기도 한다"고 부연했다.
그는 "아이들과 뛰어놀고 재미있는 농담을 하며 색다른 수업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지도서와 인터넷을 뒤적이던 저의 신규시절은 어디론가 가버리고, 이젠 무사히 하루를 지낼 방법을 궁리한다"고 밝혔다.
22일 집회에 참석한 교사들은 정상적인 교육지도가 이뤄질 수 있도록 교사의 인권을 제도적으로 보장해 달라고 촉구했다.
9년차 남성 교사 D씨도 "그동안 혼자 버텨내며 '담임이 잘못하지 않으면 괜찮은 게 아닐까' 생각했다. 지금 보면 너무 어리석고 오만한 생각"이라며 "저는 잘한 게 아니라,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언급했다. 또한 "우리가 원하는 것은 옛날의 (시대착오적) '교권'이 아니라 인권과 생존권"이라며 "교사에게 권위가 아닌 존중을, 권력이 아닌 인권을 보장해 달라"고 호소했다.
또 다른 교사도 현장발언을 통해 "체벌(권)을 살려달라는 게 아니다. 어떤 이유로도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기 때문"이라며 "아이와 학부모의 인권이 소중한 만큼 교사들의 인권도 그러하다는 거다. 교권을 제도적으로 보호받지 못해 교권 침해 보험상품을 가입해야 한다는 현실은 정상적이지 않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우리의 병원 진료기록, 정신과 치료기록, 통화 기록 등 교권 침해 증거들을 다 보여드려야만 보호해 주시겠나"라며 실질적으로 교사들이 생명과 건강을 지키면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정부가 나서 달라고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