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列國志 제92회
염옹(髯翁)이, 상신(商臣)이 초성왕(楚成王)을 시해한 일을 논하여 말했다.
“성왕은 아우로서 형을 시해했는데, 그 아들 상신은 아들로서 아버지를 시해하였다. 천리(天理)의 응보(應報)는 언제나 이렇게 밝다.”
[제37회에, 초문왕 웅자는 식부인 규씨를 부인으로 삼아 두 아들을 낳았는데, 장자는 웅간, 차자는 웅운이라 하였다. 제38회에, 초문왕이 파(巴)나라와 싸우다가 뺨에 화살을 맞고 그 후유증으로 훙거하고 장자 웅간이 즉위하였다. 제40회에, 웅간이 사냥을 나간 틈에 웅운(성왕)이 웅간을 습격하여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염옹은 또 시를 지어 탄식하였다.
楚君昔日弒熊囏 楚君이 예전에 웅간을 시해하더니
今日商臣報叔冤 오늘 상신이 백부의 원수를 갚았네.
天遣潘崇為逆傅 하늘이 반숭을 보내 역자(逆子)의 스승이 되게 했는데
痴心猶想食熊蹯 어리석은 마음은 그래도 웅장 먹을 생각만 했구나!
상신은 부친을 시해하고 제후들에게는 갑작스런 병으로 훙거했다고 부고(訃告)을 보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그가 초목왕(楚穆王)이다. 목왕은 반숭(潘崇)을 태사(太師)로 임명하여 왕궁의 군사를 거느리게 하고, 자신이 살던 동궁을 하사하였다. 영윤 투반(鬥般) 등은 성왕이 피살되었음을 알았으나, 아무도 감히 말을 하지 못했다.
[제81회에, 영윤이었던 자문(子文; 투곡어도)이 물러나자 초성왕은 위여신을 영윤으로 임명하였고, 위여신이 죽자 자문의 아들 투반을 영윤으로 임명하고, 투월초는 사마에 임명하였다.]
상공(商公) 투의신(鬥宜申)은 성왕이 변사(變死)했다는 말을 듣고, 국상을 조문한다는 핑계로 영도(郢都)로 달려와 목왕을 시해하려고 대부 중귀(仲歸)와 모의하였다. 하지만 일이 사전에 탄로 나, 목왕은 사마 투월초(鬥越椒)로 하여금 투의신과 중귀를 잡아 죽이게 하였다. 지난날 범(范) 땅의 점쟁이 율사(矞似)가, 초성왕·성득신·투의신 세 사람은 제 명에 죽지 못할 것이라 예언한 것이 들어맞은 셈이었다.
[제81회에, 성득신이 연곡성에서 자결한 후 초성왕은 투의신의 벼슬을 낮추어 상읍(商邑)의 수령으로 임명하였고, 투의신은 그때부터 상공(商公)이라 불리게 되었다. 제81회에, 위여신의 아들 위가가 율사의 예언과 초성왕이 성득신과 투의신에게 면사패를 준 일을 얘기하였다.]
투월초는 영윤의 자리를 탐내어, 목왕에게 말했다.
“자양(子揚; 투반)은 늘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부자는 대를 이어 초나라의 정권을 잡아 왔다. 선왕으로부터 막대한 은혜를 입고도 선왕의 뜻을 성취하지 못하고 있으니, 부끄럽기 짝이 없다.’ 자양은 공자 직(職)을 군위에 세우려 하고 있습니다. 자서(子西; 투의신)가 온 것도 실은 자양이 부른 것입니다. 이제 자서가 죽었으니, 자양도 불안하여 다른 음모를 꾸미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목왕은 투반을 의심하게 되었다. 그래서 투반을 불러 공자 직을 죽이라고 명하였다. 투반이 그럴 수 없다고 사양하자, 목왕은 노하여 말했다.
“너는 선왕의 뜻을 이루고자 하느냐?”
목왕은 쇠망치를 들어 투반을 때려죽이고 말았다. 공자 직은 晉나라로 달아났는데, 투월초가 추격하여 교외에서 죽여 버렸다.
[제81회에, 자문은 임종 시에 아들 투반에게 투월초를 경계하라고 일렀다. 투월초는 자문의 사촌동생으로 투반의 당숙이다.]
목왕은 성대심(成大心)을 영윤에 임명하였으나, 그도 얼마 뒤에 죽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투월초가 영윤이 되고, 위가(蒍賈)는 사마가 되었다. 후에 목왕은 자문이 초나라를 크게 다스린 공을 생각하고 투극황(鬥克黃)을 잠윤(箴尹)에 임명하였다. 투극황의 字는 자의(子儀)이며, 투반의 아들이고 자문의 손자였다.
[제77회에, 위가는 13세의 나이에 성득신의 패전을 예언하였고, 제81회에 공정(工正)에 임명되었다. ‘잠윤’은 간관(諫官) 즉 왕에게 간하는 업무를 맡은 직책이다.]
진양공(晉襄公)은 초성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조돈(趙盾)에게 물었다.
[제61회에, 조쇠는 적나라에 있을 때 숙외를 아내로 얻어 아들 조돈을 낳았다. 제73회에, 숙외와 조돈이 晉나라로 왔는데, 조쇠는 조돈을 적자로 삼았다. 그때 조돈의 나이는 17세였는데, 풍채도 좋고 기상이 당당하였으며, 거동에 법도가 있고 시서(詩書)에 통달하였으며, 활쏘기와 말 타기에도 정통하였다. 이제 여기서 조돈이 등장한다.]
“하늘이 마침내 초나라를 저버리는 것이 아니겠소?”
조돈이 대답했다.
“楚君이 비록 횡포하였으나, 예의로써 백성을 교화하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상신은 그 부친을 사랑하지 않았으니, 하물며 다른 사람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신은 장차 제후들에게 그 화가 미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과연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초목왕은 사방으로 군대를 보내 강(江), 육(六), 요(蓼) 세 나라를 차례로 멸망시키고, 陳나라와 정나라를 침범하였다. 그리하여 중원은 또 다시 다사다난(多事多難)해져, 과연 조돈의 말대로 되었는데, 그것은 훗날의 얘기이다.
한편, 주양왕(周襄王) 27년 봄 2월, 秦나라 맹명(孟明)은 진목공(秦穆公)에게 군대를 일으켜 晉을 정벌함으로써 효산(崤山)에서의 패전을 설욕하겠다고 청하였다. 목공은 그 뜻을 장하게 여겨 허락하였다. 맹명은 서걸술(西乞術)·백을(白乙)과 함께 병거 4백승을 거느리고 晉나라를 정벌하러 갔다.
진양공(晉襄公)은 秦나라가 원한을 갚기 위해 출병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매일 사람을 멀리 내보내 정탐하고 있었다. 양공은 소식을 듣고 웃으며 말했다.
“과인의 하사품을 받으려고 秦나라 장수가 오는구나!”
[제90회에, 맹명이 서걸술·백을과 함께 晉나라에서 석방되어 秦나라로 돌아갈 때, 추격해 온양처보가 거짓으로 晉侯가 하사한 말을 받아 가라고 하자, 맹명이 “3년 후에 친히 상국으로 가서 晉君께 인사드리고 받아가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양공은 선차거(先且居)를 대장으로, 조쇠(趙衰)를 부장으로, 호국거(狐鞫居)를 차우로 임명하여, 秦나라 군대를 국경에서 맞이하게 하였다.
[제54회에, 중이(문공)는 호언을 아버지처럼 섬겼고 조쇠를 스승으로 공경하고, 호사고를 형님처럼 따랐다고 하였다. 제87회에, 진문공이 훙거할 때 68세였다. 이때 조쇠는 나이가 몇 살일까? 조쇠가 아니라 조돈인데, 잘못 기록한 것이 아닐까?]
대군이 출발하려 할 때, 낭심(狼曋)이 한 개인 자격으로 사병들을 거느리고 참전하겠다고 자청하였다. 선차거는 허락하였다.
[제90회에, 선진이 적군(翟軍)과 싸우러 갈 때 낭심은 선봉을 자청했다가 쫓겨났기 때문에 직책이 없게 되었다. 부친이 쫓아낸 자를 아들이 받아들였으니, 이미 부친의 잘못을 인정한 것이다. 선차거의 사람됨을 알 수 있다.]
그때 맹명 등은 아직 晉나라 국경을 넘지 않았다. 선차거가 말했다.
“秦軍이 오기를 기다리기보다는 우리가 먼저 秦軍을 공격하는 것이 좋겠다.”
晉軍은 서쪽으로 진군하여 팽아(彭衙)에 당도해 秦軍과 마주쳤다. 양군은 각각 진세를 벌렸다. 낭심이 선차거에게 청했다.
“예전에 선진(先軫) 원수께서 저를 용맹이 없다고 하시면서 파직하고 쫓아내 기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제가 용맹을 시험하고자 자청하는 것은, 감히 작록이나 공을 탐해서가 아니라, 지난날의 치욕을 씻기 위해서일뿐입니다.”
말을 마치자, 낭심은 친구인 선백(鮮伯)과 함께 백여 명의 사병을 거느리고 곧장 秦軍의 진으로 돌격하였다. 낭심의 군대가 이르는 곳마다 秦軍은 바람에 초목이 쓰러지듯 하여 죽거나 부상당한 자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선백은 백을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선차거는 병거에 올라 바라보다가, 秦軍의 진이 어지러워진 것을 보고, 대군을 몰아 공격하였다. 맹명 등은 晉軍을 당해내지 못하고 마침내 대패하여 달아났다. 선차거는 낭심을 구출했지만, 낭심은 온몸에 상처를 입고 피를 한 말 이상 토하더니 그 다음 날 죽었다.
晉軍은 개선가를 부르며 귀국하였다. 선차거가 양공에게 아뢰었다.
“오늘의 승전은 낭심의 공입니다. 신은 아무런 공도 없습니다.”
양공은 상대부의 예로써 낭심을 서쪽 교외에 장례 지내게 하고, 모든 신하들로 하여금 장례 행렬을 전송하게 하였다.
첫댓글 비록 결합은 멀리 있는 사람과 해야 한다.
잡종우생이라고 그래야 인물이 나온다.
조돈도 마찬가지.조쇠가 자기들이 오랑케라고 말하는
적나라 여자 숙외를 아내로 맞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