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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산돌3909 원문보기 글쓴이: 산돌 이
이성봉목사의 신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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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 15 | 추천 | 0 | 비추천 | 0 | 2018-04-26 19:59 | 작성자 : 장목사 |
이성봉 목사의 삶과 신앙에 대한 신학적 조명
그러나 사도 바울처럼 주님을 위하여 다른 사역자들보다 더 많이 수고한 값진 삶을 산 것이었다. 금년은 하나님께서 이성봉 목사를 이땅에 보내신 지 100주년이 되는 해다. 하나님은 한 세기에 십여 명씩 당신이 크게 쓰시는 마음에 합한 종들을 이 땅에 보내시곤 한다. 하나님께서 황폐해진 이 땅을 긍휼히 여기사 길선주, 김익두, 이성봉, 주기철, 손양원, 박윤선, 한경직목사들과 같은 충성된 종들을 다시 보내 주시기를 기원한다. 나는 중학생 시절인 1951년부터 1953년까지 대구에서 피난 생활을 하던 때 이성봉 목사님이 인도하시는 부흥회에 자주 참석하며 은혜를 받곤 했다. 사실 나는 그때 이성봉 목사님이 부흥회를 인도하신다고 하면 어느 곳이나 찾아가서 부흥회에 참석하곤 했다. 그분의 설교는 중학생인 나에게 너무 재미있었고 감동적이었고 은혜로웠다. 나는 부흥회 도중 이성봉 목사님이 찾아서 읽으라는 성경 구절을 미리 암송했다가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성경을 찾지 않고 즉시 암송하므로 이 목사님의 칭찬을 받곤 했다. 그때 이 목사님이 자주 찾아 읽으라고 하시던 말씀 중에는 시50:15과 시37:4-6과 시81:10, 렘33:3 등이 있었다. 금요일 밤에는 철야기도를 하고 토요일 새벽에는 이 목사님의 안수기도를 받으며 목사가 될 것을 굳게 다짐하곤 했다. "나도 이성봉 목사님 같은 부흥사가 될 수는 없을까?" 이와 같은 생각과 소원을 품기도 했다. 나는 고등학생 시절 서울로 돌아와서 공부할 때 종로 거리 악기 점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를 들으면서 "저 스피커에서 유행가 대신 이성봉 목사님의 재미있고 은혜로운 「천로역정」강화가 흘러 나오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을 하면서 지나가곤 했다. 그만큼 나는 이성봉 목사님을 좋아하고 존경하는 이 목사님의 팬이었다. 나는 여기서 이성봉 목사 탄생 100주년에 즈음하여 "이성봉 목사의 삶과 신앙에 대한 신학적 조명"을 시도해 보려고 한다.
이성봉 목사의 삶은 신앙적 감화와 은혜 체험에 의해서 형성되고 완성된 삶이었다. 소년 시절 이성봉은 어머니로부터 신앙의 훈련과 감화를 받았다. 1900년 7월 4일 평남 강동군 간리에서 이인실씨와 김진실씨의 장남으로 태어난 이성봉은 복음이 간리에 전해진 해인 1905년(6살때)부터 어머니의 철저한 신앙의 훈련과 감화를 받으며 자랐다. 평양 근교 중화읍으로 이사한 후 온 가족은 평양 선교리 감리교회에 다니며 신앙생활을 기쁘게 했고 어머니는 아들 성봉에게 기도를 가르치고 성경을 읽게 했다. 성봉은 6살 때 이미 신약을 일독했고 예배당에서 "누구든지 성신이 인도하시는 대로 기도하시오" 하면 즉시 기도를 해서 칭찬을 받기도 했다. 소년 이성봉은 어머니를 따라서 김익두 목사가 운영하던 황해도 신천의 경신소학교에 들어갔는데 그곳에서 김익두 목사의 신앙적 감화를 받으며 김익두 목사를 존경하게 되었다. 청년 시절 이성봉은 질병과 죽음의 고통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치유의 손길을 체험했다. 청년 이성봉은 17세 경부터 한 동안 반항과 타락의 생활을 했다. 결혼 생활도 행복하지 못했다. 1920년 6월 24일 주일 교회에 가서 예배 드리는 대신 과수원에서 과일을 싣고 평양에 가서 팔아 가지고 그날 밤 술집에서 진탕 술을 마시고 밤 늦게 "노자 노자"를 부르며 돌아 오던 중 기자묘 앞길에서 오른쪽 넓적다리에 통증을 느끼고 쓰러졌다. 골막염으로 다리를 절단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고 철저히 회개하며 하나님께 매달렸다. 그로부터 그의 삶은 변하기 시작했다. 3년 동안의 투병생활은 청년 이성봉으로 하여금 기도와 말씀에 사로 잡히게 했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손길에 붙잡히게 만들었다. 그 후 이성봉은 1925년 동양선교회 성서신학원(현 서울신학대학)에 입학하여 3년 동안 신앙 훈련을 받았는데 그곳에서 깊은 회개와 은혜를 체험했다. 14살 때 기차를 타면서 12살이라고 속인 죄까지 회개했다. 당시의 성서신학원이 회개를 철두철미하게 강조했기 때문이었다. 신학교 시절에 가진 은혜의 체험은 한 평생 이어진다. 성서신학원을 졸업하자 이성봉 전도사는 목회와 부흥 사역에 투신했다. 1928년부터 3년 동안 계속한 수원에서의 목회사역과 부흥사역에 회개의 역사와 함께 기사와 이적이 많이 나타났고 이성봉 전도사 자신은 신비한 영적 체험을 했다. 수원 목회 기간 중 주일 예배를 마친 후 과로로 쓰러져 있는 가운데 다음과 같은 영적 체험을 했다. "그 때 하늘로부터 참 십자가가 나타났다. 나는 분명히 주님이 달리신 그 십자가를 보았다. 감격하여 붙들고 애통하며 나의 모든 죄를 자복하였다. 그는 나를 어루만져 주시며 천국으로 가자고 올라가시는 것이었다. 어디로 한없이 한없이 갔다. 한참 가다 보니 수정 같이 맑은 요단 강물이 흐르고 저편에서 화려하고 찬란한 천성이 보였다. 그런데 어디서 찬송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정신이 회복되며 온 몸에서 식은 땀이 쭉 쏟아졌다. 아프던 내 몸이 거짓말같이 완전히 나았다. 바울 사도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라고 한 것 같이 그 후로 항상 그 환상이 나의 신앙생활을 격려하여 주고 소망 중에 살게 하고, 현실보다 영원한 내세를 더욱 그리워하게 했다." 1931년부터 6년 동안 계속한 목포에서의 목회사역과 부흥사역에도 회개의 역사와 함께 기사와 이적이 많이 나타났다. 그렇다고 이성봉 목사가(1932년에 목사 안수) 신비주의를 주창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목포교회에서 목회할 때 신비주의로 나가는 여신도를 책벌한 일이 있는데 앙심을 품은 그 여신도의 아들에게 폭행과 모욕을 당하기도 했다. 이성봉 목사는1936년 신의주 동부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면서부터 본격적인 부흥사로 활동하게 되는 데, 1937년 서울에서 모인 성결교 총회 기간 동안 이성봉 목사는 성령의 뜨거운 불세례를 체험했다. 총회 기간 동안 피곤한 몸을 잠깐 쉬고 있는데 당시 유명한 부흥 목사인 김익두 목사가 다가와 그의 오른쪽 옆구리에 손을 얹고 기도를 했는데 그의 손이 닿자마자 너무나 뜨거워 깜짝 놀라 침대에서 뛰어 올랐다가 떨어지니 꿈이었다. 전신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으나 심령은 매우 상쾌했다. 그런데 그날 밤 총회 회의에서 그는 전국 부흥사로 임명되었다. 이성봉 목사는 "때때로 그 때의 체험을 생각하여 새 힘을 얻곤 했다"고 기술했다. 1937년부터 이성봉 목사는 능력의 사자로 가는 곳마다 강한 성령의 역사를 일으켰다. 1937년 용정에서 부흥회를 인도할 때는 2,000여명이 회개하여 자복하는 운동이 일어났고 1938년에는 한 해 동안에 50여회 이상 부흥회를 인도하며 회개 운동을 일으켰다. 이성봉 목사는 1928년 수원에서 목회와 부흥사역을 시작한 후 1965년 7월 23일 성결교 합동총회에서 "주를 사랑하자"라는 제목으로 마지막 설교를 하고 8월 2일 주님 품으로 돌아가기 까지 37년 동안 한국과 만주와 일본과 미국 등지에서 수 많은 부흥회를 인도하는 동안 자기 스스로 수 많은 영적 체험을 계속하며 기사와 이적을 동반하는 회개와 부흥의 역사를 많이 일으켰다. 그러나 신비주의는 항상 경계했다. 가슴은 뜨거워야 하지만 머리까지 뜨거워지면 않된다고 항상 경고했다. 지식과 기술과 경영 및 정보 습득에 치중하고 있는 현대 목회 사역자들의 삶의 동향에 비추어 볼 때 은혜 체험과 성령의 역사에 붙잡혀서 한 평생을 살며 사역한 이성봉 목사의 삶은 우리들에게 뜨거운 도전을 주고 있다.
이성봉 목사는 복음전파와 교회부흥이외에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의 눈 앞에는 세상의 부귀영화는 아랑곳 없었고 명예 지위도 거들떠 볼 새도 없이 다만 한 영혼에게라도 더 많이 전도 구령하겠다는 일념에 붙잡힌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지방회나 총회를 무시하지 않았지만 전도하는 것이 자신의 유일한 사명으로 알고 평생 감찰장 하나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사명 완수를 위해서 그의 온 정력 그의 모든 시간과 물질과 심지어 가족까지 다 희생의 제물로 주님께 바쳤다. 순회 집회하는 부흥 목사로 불가피하게 가족을 위해서 작은 집 한 채를 준비했던 일이 있는데 얼마 안가서 어떤 교회 건축에 딱한 사정을 듣고 근근히 작만한 그 집을 선듯 팔아 전도사의 손에 들려주고 가족은 셋방으로 옮아 간 일도 있었다고 한다. 만주에서 집회를 인도하던 중 어머니 병환이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이 목사는 고민하며 기도하다가 결국 어머니를 주님께 맡기고 집회를 계속했다. "생전의 어머니를 뵈오려 가자니 불일듯 일어나는 집회를 내버리고, 굶주리고 목말라 허덕이는 양떼를 버리고 갈 수도 없고 어니 가자니 불효 막심하고 어떻게 할까? 그러나 전쟁에 나간 사람이 부모 병들었다고 돌아갈 수 있느냐? 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저 어머니를 주님께 맡기고 기도하며 집회를 계속했다" 이성봉 목사는 한 영혼이라도 더 구하고 한 교회라도 더 부흥시키기 위해서 그의 한 평생을 모두 불 사르고 말았다. 이성봉 목사는 6.25 동란 이후에는 무너진 성결교회 제단 하나하나를 다시 세우는 교회 재건 운동을 일으켰고 1961년부터 1년 5개월간 "1일 1교" 운동에 나서서500 여 교회를 순회하며 교회 재건과 교단 합동에 전념했다. 마지막에는 일체의 큰 집회나 외부 집회를 단절하고 매일 수 십리씩 걸어 다니며 농어촌 교회들을 돌아보았다. "어떤 곳에서는 소 구루마로 덜커덩 덜커덩 돌아다니기도 하고 어떤 곳에서는 리어카를 가지고 와서 타기도 하고 어떤 곳에서는 자전거를 타라고 하여 자전거 꽁무니에 타고 가다가 험한 길에 넘어져서 한참동안 버드럭 거리기도 하고 어떤 데서는 잘 곳이 없어서 소 외양간에서 한 밤을 지내기도 했다." 이성봉 목사는 이렇게 회고했다. "때로는 트럭 신세도 졌습니다. 장마통에 지게로 전도 기구를 짊어지고 걷기도 했습니다. 고장 난 차를 떠밀고 대관령에서 비를 흠뻑 맞아가며 넘기도 했습니다. 새벽차를 타고 종일 차 속에서 시달려 정신을 못 차리고 허덕일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밤낮 침식을 잊고 하루에 천여리를 차 속에서 산 때로 드문드문 있는 일이었습니다." 이성봉 목사는 때로는 1년에 82곳의 집회를 인도했고 때로는 하루에 5, 6회의 집회를 인도하다가 과로로 쓰러지기도 했다. 1959년 12월 8개월 간의 미국 순회전도집회를 마치고 귀국하고 나서 이성봉 목사는 이렇게 그의 심정을 술회했다. "기회를 민첩하게 사용하여 영혼 구원하는 일밖에는 나에게는 아무 취미가 없었다." 영혼 사랑과 교회 사랑의 복음적 열정이 그의 전 생애를 불 태운 것이었다. 복음 전파보다는 "사업"확장에, 희생보다는 대우 받음에 치중하고 있는 현대 목회 사역자들의 삶의 동향에 비추어 볼 때 영혼 사랑과 교회 사랑에 사로잡혀 복음 전파에 한 평생을 헌신하여 다 바친 이성봉 목사의 삶은 우리들에게 강력한 도전을 주고 있다.
따라서 그에게는 일종의 염세주의 또는 허무주의적 정서가 나타나 있었다. 이성봉 목사는 부흥회 때마다 "허사가"를 즐겨 부르곤 했다. "꿈결같은 이 세상에 산다면 늘 살까 일생의 향락 좋대도 바람을 잡누나 험한 세월 고난 풍파 일장 춘몽이 아닌가 슬프도다 인생들아 어디로 달려 가느냐" "세상만사 살피니 참 헛되구나 부귀영화 장수는 무엇하리요 고대광실 높은 집 문전 옥답도 우리 한번 죽으면 일장의 춘몽" 그래서 정성구 교수는 이성봉 목사의 설교에 허무주의와 냉소주의적인 요소가 보인다고 평가하며 "성경으로 시작해서 허무주의로 마감하는 느낌이다"라고 혹평했다. "복음으로 시작해서 율법으로 끝맺음 하는 느낌이다. 성경으로 시작해서 허무주의로 마감하는 느낌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성봉 목사의 "허무주의적 정서"를 비판적으로만 보지 않고 긍정적으로 보고 싶다. 우선 기독교 신앙은 현세 부정을 통한 현세 긍정적 신앙이지만 궁극적으로는 현세 부정을 통한 내세 긍정적 신앙이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분명히 현세 부정적 요소가 나타나 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1:2).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빌4:7-8).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요일2:15-16).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타지리라]"(벧후3:10). 이성봉 목사의 신앙과 설교에 일종의 염세주의 또는 허무주의적 정서가 나타나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현실 교회와 사회에 대해 아주 무관심하고 무책임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교회개혁을 외쳤으며 일제의 만용과 무지를 공격하면서 일제의 멸망을 외치다가 체포되고 구속되기도 했다. 이성봉 목사는 또한 염세주의나 허무주의를 비판하기도 했다. "영안이 밝은 사람은 인생의 존귀를 발견하는 한편에 또한 세상이 헛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다고 세상을 비관하는 염세주의도 아니요, 세상을 무시하는 허무주의도 아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땅에 있으면서 외국인이요, 나그네라고 한 것은 더욱 아름다운 본향을 사모함이니 이 말은 천국에 목적을 두고 세상에 목적을 두지 않는 건전한 인생관을 말한다." 그는 세상에 대한 애착을 부정한 것이지 세상 안에서의 믿음의 삶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필자는 물론 어거스틴과 칼빈의 문화변혁주의적 입장을 견지하며 정치 사회 문화 참여적 삶을 제창한다. 그러나 현대 교회는, 과거의 교회도 마찬가지였지만, 말로는 문화변혁주의적 개혁주의 신학이나 순교적 신앙을 주창하면서도 실제로는 세상과 돈을 너무 좋아하는 세속주의에 깊이 빠져 있다고 생각한다. 1970년대 이후 한국 교회는 더욱 더 그렇다. 필자는 중세의 금욕주의의 잘못도 잘 알고 요한 번연의 현세 부정주의의 잘못도 잘 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차라리 그들로부터 어떻게 세상에 대해서 죽고 자신을 비우는 청빈과 순결의 삶을 살 수 있는지를 겸허하게 배워야 할 것이다. 세상과 돈과 명예를 좋아하는 세속주의에 깊이 빠져 들어가고 있는 현대 목회 사역자들의 삶의 동향에 비추어 볼 때 이성봉 목사의 "허무주의적 정서"가 깃들어 있는 현세 초월적 청빈의 삶은 우리들에게 심각한 도전을 주고 있다.
이성봉 목사의 신앙은 하나님 제일주의 신앙이었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적인 동기에 따라서 행동하지 않았고, 또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끌어 가려고 하지도 않았다. 오직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순종하는 마음으로 기다릴 뿐이었다." 수원교회를 사임하고 목포로 내려가라는 교단의 지시를 받았을 때 이성봉 전도사는 "정신이 아뜩함을"느끼며 "안 가려고 많이 발버둥을 쳤"으나 결국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하고 곧 순종하는 마음으로 정든 교회를 떠났다." 신의주교회가 1,000여명의 신자를 가진 대교회로 부흥하던 때 갑자기 총회로부터 전국 부흥사로 임명 받았다. 신의주 목회는 이 목사에게 있어서 "제일 부흥되고 제일 재미있게 일한" 목회였다. "정으로 생각하면 차마 떠나기 힘든 곳"이었다. 헌당식을 한지 사흘 만에 떠나려고 하니 발 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성봉 목사는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드리고 사랑하는 목양지를 떠나 우리 밖의 양들을 찾아 험하고 먼 길을 떠났다. 전국 부흥사로 임명을 받고 이성봉 목사는 그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하나님의 주권에 전적으로 순복하는 헌신의 글이었다. "일을 일으키시는 이도 여호와요 일을 그대로 이루게 하시는 이도 여호와시니라. 창세 전에 나를 아시고 모태로부터 나를 택하시고 출생 후 지금까지 거룩하신 품 안에 영육을 보존하시고 전지전능의 손에 붙잡으사 작은 일에서 큰 일에 이르기까지 만사 합동하여 거룩한 뜻이 우리어지게 하심을 감사할 뿐이로소이다. 금번에 귀중한 사명은 벌써 만세 전에 예정하신 주님의 계획이요, 4년 전에 보여 주신 이상의 감동이 오늘에 성취될 때 일희일비의 정을 금할 길 어렵도다. 주님의 거룩한 뜻은 언제든지 이루어지는 것을 생각할 때 한번 더 기뻐하고 감사하며, 중대한 책임을 생각할 때 황송하고 떨리지 않을 수 없노라.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며 티끌 같은 미말의 자신을 돌아볼 때 이 사명의 말씀이 참으로 어려워 미디안 광야의 모세가 내게 거울이 되도다. 오, 주의 권능으로 없던 내가 이 시대에 생겨나서 주의 영광 다 뵈옵고, 필요한 일을 알리어 주시는 그 사랑의 품에 있는 것은 웬일인가. 물질이나 정신이나 영이나 육이나 우리 전부가 주께로 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가는 도상에 순간순간 최후 숨결까지 그 안에서 사라짐을 나타내겠노라.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는 불타는 주님의 사랑, 그의 가슴을 내가 알고 나를 불러 세우신 그 뜻을 알려 주시는 힘, 임하는 말씀, 인도하시는 성령에 끌리어 순종하고 복종하리니 그 잎 길에 장애와 사탄의 오묘도 무수할 터이나 그 염려와 불신앙의 죄악을 다 태워버리고 힘써 매진하겠노라. 각처에 한 핏줄 한 몸으로 지음 받은 형제 자매여, 한 순간이라도 이 그림자, 이 질그릇을 기억하시사 합심 동정의 기도를 드려 주소서. 주여 나의 믿음의 부족함을 도우소서." 우리는 이 글에서 이성봉 목사의 하나님 제일주의 신앙을 분명하게 접한다. 하나님의 예정과 주권에 전적으로 순복하는 칼빈주의적 신앙과 그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과 품을 친밀하게 체험하고 의지하며 그 사랑의 품에 안기면서 고난의 길을 흔쾌히 그리고 겸허하게 걸어 가는 복음주의적 신앙을 생생하게 접한다. 이성봉 목사의 하나님 제일주의 신앙의 특징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절대 순종과 함께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의 손길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었다. 이성봉 목사가 행한 수많은 설교 특히 미국 순회전도 집회 때 행한 수 많은 설교의 주제가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이성봉 목사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무엇보다 사랑의 하나님이었다. 정인교 교수는 이성봉 목사의 하나님 제일주의 신앙을 높이 평가하며 이렇게 기술했다. "여기서 우리는 철저히 사업의 논리와 사업가의 계산으로 오염된 현대 교회와 목회자들을 향한 진정한 광야의 소리를 듣게 된다."
이성봉 목사는 대부분의 설교에서 설교의 목표를 패역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무조건적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역설적 사랑에 두고 있다. 이성봉 목사가 자주 사용하던 예화 중의 하나는 "어떤 술주정뱅이가 만취하여 기차 레일을 베고 잠을 자고 있었다"는 예화였다. 필자가 중학생 때 여러 번 들은 예화이다. 급행열차가 고동을 틀면서 달려 왔을 때 한 자비로운 사람이 고함을 치면서 일어나라고 외쳤지만 그 술주정뱅이는 들은 척도 않했다. 결국 그 자비로운 사람이 달려가서 그 술주정뱅이의 다리를 끌어 철둑 아래로 내동댕이쳤고 그대신 그는 목이 잘리고 다리가 끊어지고 팔이 잘리고 창자가 나와서 즉사했다는 것이다. 기차가 정거를 한 후 술주정뱅이는 그제서야 비틀거리며 일어나서 즉사한 사람이 조심하지 않다가 변을 당했다고 중얼거리다가 따귀를 맞았다는 것이다. "이 자식아! 이 사람은 너 때문에 이렇게 되었어" 이 이야기는 패역한 죄인대신 비참하게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이성봉 목사는 역설했다. "기차 레일을 베고 잠자는 사람은 누구이겠는가? 이 설교를 하는 사람부터 온 세상 사람들인 것이다. 이 이야기는 멸망의 기적은 고동을 틀면서 오는데 죄악의 술을 마시고 취생몽사로 허영의 꿈만 꾸는 것을 살리기 위하여 하나님의 성자가 33년간 외치시다 못하여 우리가 죽을 대신, 멸망 받을 대신에 죽으신 십자가의 대속을 말하는 것이다. 성자 예수 그 머리에 가시관 쓰고 십자가에 못박혀서 돌아가셨네 이와 같이 넓고 크신 사랑에 아직 감복 않는 자야 사람이랄까." 이성봉 목사는 또 다시 아기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한 어머니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모스크바에 흉년이 들어 어떤 아기 어머니가 며칠을 굶고 풀 뿌리라도 캐어 먹으려고 들에 나왔는데 등에 업힌 어린 애기가 젖을 먹겠다고 졸랐다. 그러나 삼 일간을 굶은 어머니 가슴에서 젖이 나올 리가 없었다. 그만 그 어머니는 주머니에서 장도를 꺼내어 젖꼭지를 찢어 피를 내어 어린 아이에게 물리니 어린 것은 피를 빨고 있고 어머니는 기절을 하였다는 이야기였다. 이 이야기는 비참한 죄인을 살리시기 위해 대신 희생의 피를 흘리며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이성봉 목사는 지적했다. "우리 주님은 목마르고 굶주린 우리들을 위해 희생의 피를 흘려 주셨으니 우리도 그 십자가를 지는 것은 주님을 위하여, 남을 위하여 희생의 생활을 하는 것이다." 이성봉 목사는 패역하여 비참하게 된 죄인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은 아무 것도 없다고 거듭해서 강조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고 바라고 좇는 데서만 가능하다. "참 신앙은 예수를 통하여 신구약의 3만여 가지의 약속을 그 피로 인쳐 우리에게 주시고 성신으로 알게 하시는 지각으로 이 말씀 전부를 다 나위하여 주신 줄 그대로 받고 그대로 의지하며 그대로 바라고 그대로 좇고 그대로 증거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이다. 예수란 뜻이 구원이란 뜻이다. 사람에게 제일 급선무는 구원이다. 예수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환난에서 구원하시고 사망에서 구원하신다. 주 예수를 믿으라 너와 네 집이 구원 받으리라 한 것은 예수는 생명의 근원이요, 생명의 본체요, 생명의 자본주가 되시기 때문이다. 그 생명을 받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고 영생을 얻는 것이다." 그리고 십자가를 자랑하고 사랑하자고 호소했다. "대속의 십자가의 참된 사랑에 녹아져서 항상 감사 찬송으로 십자가를 자랑하고,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말마다 그가 가신 자취를 따라 승리의 개선가를 부를 때까지 십자가를 사랑할 것이다." 예수 사랑에 녹아진 가슴, 그리고 그 예수 사랑만을 전하는 입술과 몸을 가졌던 이성봉 목사의 신앙은 갖가지 불순한 것으로 오염되고 변질된 신앙을 붙잡고 있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참신한 도전을 주고 있다.
자신의 삶이 철저한 회개에 기초한 삶이었기 때문에 이성봉 목사는 항상 죄를 무섭게 지적하며 회개할 것을 강하게 촉구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의 메시지와 사역의 기초와 출발점이었다. 예수님의 첫 메시지는 "회개하라"는 것이었고 "거듭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성봉 목사에게는 대중들을 아부하는 설교는 있을 수 없었다. 철저한 회개를 강조했다. 이성봉 목사 자신이 오직 하나님 앞에서 성결하게 살려는 뜨거운 소원을 가지고 평생토록 스스로 크고 작은 일들을 회개하면서 살았기 때문이었다. 신의주에서 목회할 때 12월 마지막 토요일 임신한 사모님이 목사님더러 닭을 좀 잡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이 목사는 거절했다. 때 마침 집에 찾아 온 박동형 군에게 닭을 좀 잡아 달라고 말했다. 그도 싫다고 하다가 할 수 없이 닭을 잡아 주었다. 이 목사는 닭은 잡지 않았지만 닭고기 국은 잘 먹었다. 그 이튿날 주일 아침 이 목사가 설교 준비를 하고 있는데 사모님이 "저 수탉을 좀 잡아매 주세요"라고 부탁했다. 이 목사는 마지 못해 나가서 수탉을 잡다가 그만 엄지 손가락이 찢어져서 피가 흘러내렸다. 눈물이 왈칵 쏟아지면서 사모님을 실컷 원망했다. 손 가락도 아프고 머리까지 아팠다. "주일 날 아침 이거 무슨 일입니까?"라고 기도하던 중 마23장이 번개 같이 떠 올랐다. "화 있을진저 바리새인과 서기관 같은 자여. 무거운 짐은 남에게 지우고 자기는 손 가락 하나 움직이기 싫어하는 자여. 어제 일을 생각해 보라. 닭 죽이기 싫다고 아내에게 미루고 박군에게 미루고 그러면서도 닭국은 잘 먹었지. 바리새인 손 가락 같은 것 찍어 버려 마땅하겠지만 그만큼 둔 것도 감사해라. 너 그런 심보 가지고 강단에서 무슨 설교를 할 작정이냐? 바로 너를 잘 알아 회개하고 설교하라." 이성봉 목사는 그날 아침 하나님과 온 교우들 앞에서 자기의 잘못을 회개하며 설교했다. "주여 감사합니다. 만 번 죽어 마땅한 자식 이 만큼 징계하여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다시는 나 하기 싫은 일 남에게 마루지 않겠습니다. 사랑의 채찍 감사합니다." 이 목사의 회개의 간증에 온 교우들이 큰 은혜를 받았다. 이성봉 목사는 설교 때마다 회개를 강조했다. 회개를 통해서만 죄인이 중생하고 구원 얻어 천국 간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성경에 나타난 인물들과 실제로 만난 수 많은 사람들이 회개한 이야기들을 항상 소개했다. "주여 보시옵소서. 주님 보시는 앞에서 삭개오는 철저한 회개를 했다. 회개는 천국 가는 길이요 제이의 무죄라고 하였다. 죄 지은 사람이 지옥 가는 것이 아니요, 회개하지 못한 사람이 지옥에 간다. 개인이나 국가나 사회가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나님께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 기뻐하신다. 회개는 방향 전환이다. 회개는 또한 숨은 부끄러움 곧 속에 있는 더러운 것을 다 들추어내는 것이니 법률상으로 지은 죄, 도덕상으로 지은 죄를 다 하나님 앞에 고백하며 사람과 관련된 것은 또한 사람과 해결 지어야 한다." 이성봉 목사는 "회개하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회개는 주님의 명령이요 소원이며 회개란 지.정.의.행의 전폭적인 변화라고 폭 넓게 설명했다. "회개는 주님의 지상 명령이요 주의 소원이며 뜻이다. 회개는 구원의 입문이요 기초이니, 복음의 대지가 회개요, 저주와 멸망을 막는 요새가 되는 것이다. 어떤 성도는 말하기를 회개는 제이의 무죄요 향상의 별명이라 하였다. 죄 지은 사람이 지옥 가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는 사람이 지옥에 간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회개할 것인가? 그것은 지. 정. 의. 행으로 나타낼 수 있다. 1) 회개는 지적으로 죄를 깨닫는 것이다. 2) 회개는 정적으로 슬퍼하는 것이다. 3) 회개는 의지적으로 죄를 고백하는 것이다. 4) 회개는 행위적으로 열매를 맺어야 할 것이다. 그런고로 철두철미하게 회개하라." 이성봉 목사는 회개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중생이 구원의 첫 단계요 현재적 단계라고 설명하며 중생이 기독교의 기초임을 강조한다. 중생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구주로 믿어 새롭게 태어 나는 것이다. 이성봉 목사는 구원이란 말을 중생이란 말과 같은 뜻으로 사용하곤 했다.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이다. 사람에게 제일 급선무는 구원이다. 정치가도 먼저 구원을 받아야 하고, 과학자도, 철학가도, 예술가도 먼저 구원을 받아야 한다. 모든 인물들의 급선무가 구원을 받는 것이다. 오늘날 이 세계, 이 사회는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이 지배하여 멸망의 구덩이로 몰아가는 것이다." 이성봉 목사는 "사람이 거듭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는 말씀과 다음 말씀들에 근거하여 중생을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사람이 거듭나서 중생하여야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요1:12), 천국을 보고(요3:3),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 못하고(요일5:18), 의를 행하고(요일2:29, 죄를 범치 않고(요일3:9), 서로 사랑하고(요일4:7), 세상을 이기고(요일5:4), 산 소망을 가지고(벧전1:3), 하나님을 알고(요일4:7), 천국에 들어가서 후사가 된다(요3:5). 그리고 물과 성령으로 중생한 성도는 흑암에서 나아와 광명으로(요일2:8), 죽음에서 나아와 생명으로(요일5:24), 슬픔에서 나아와 기쁨으로(롬14:17), 자기 중심에서 떠나 하나님 중심으로 산다고 했다. 회개와 중생의 메시지가 점점 사라져 가는 오늘에 비추어 볼 때 회개와 중생의 복음을 강조한 이성봉 목사의 신앙과 메시지는 우리들에게 심각한 경종이 되고 있다.
"성결은 성결교회의 전매 특허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이 복음을 그대로 받아 체득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것 없으면 주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히12:14). 성결은 하나님의 지상 명령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벧전1:15). 이 하나님의 말씀은 결정적이다. 이 말씀 들어야 살고 듣지 않으면 죽는다. 이 말씀 들어야 복 받고 듣지 않으면 화 받는다. 이 말씀은 시금석이다. 성결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다. 거룩하여 음란을 버리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라. 성결은 천국민의 자격이다. 성결은 그리스도 신부의 단장이다. 성결한 사람은 하나님이 귀히 쓰는 그릇이 된다. 이 중대하고 귀한 성결은 무엇으로 되는가? 말씀과 성신과 그리스도의 피와 징계의 채찍으로 된다. 하나님은 이 강산을 다 불태우고 이 강산을 온통 피바다로 만들고라도 당신의 택한 민족, 택한 종들, 택한 신도들 한 사람이라도 깨달아 성결해지면 그것으로 위로를 받으신다. 왜 그런가? 한 사람의 영혼이 온 천하보다 귀한 까닭이다." 이성봉 목사는 "거룩하고 깨끗하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성도들이 성결해야 하는 이유는 성부 하나님이 거룩하시고 성자 예수님이 거룩하시고 성신이 거룩하시고 천국이 거룩한 곳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고, 손과 마음과 사상과 입술과 눈동자와 감정과 몸과 영과 혼이 정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즉 성결은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모든 삶의 영역에서 순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결의 필요"라는 설교에서는 성결할 때 하나님을 보게 되고, 재림 주를 보게 되고, 귀히 쓰는 그릇이 되고, 그리스도와 혼연 일체가 되고, 사랑의 사람이 되고, 순종하는 능력을 얻고 환난 고통에서 승리한다고 지적했다. 정성구 교수는 이성봉 목사가 전한 성결의 복음을 오직 은혜와 오직 신앙의 복음을 전하지 못한 율법주의적인 복음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성결에다 그의 메시지를 매달아 놓고 있다.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총의 복음 즉 오직 은혜만(sola gratia)의 복음보다는 하나님 앞에 깨끗하고 순결해 은혜와 구원과 축복을 받은 것이라고 했다. 그는 여기서 오직 믿음으로(sola fidei)의 진리를 말하지 못하고 율법주의적인 것으로 결론짓고 있다. 성결하지 않으면 징계를 면할 길이 없으니 알아서 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 정성구 교수의 비판은 정당하지 못하다. 이성봉 목사가 중생한 신자와 사역자의 현재적 삶에서 성결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지 삶이 깨끗하고 순결해야 은혜와 구원을 받게 된다고 말하지는 않았고, 이성봉 목사가 오직 믿음의 진리를 말하지 않은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신자와 복음 사역자가 성결을 상실할 때 하나님의 축복의 손이 떠나게 되고 하나님의 징계의 채찍이 임한다고 말하는 것이 결코 율법주의라고 말할 수도 없다. 하나님은 성결을 상실한 다윗을 징계하여 회복하셨다. 성결이 천국시민의 자격이 된다는 말도 오직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진리와 결코 상치되지 않는다. 요한 웨슬레 뿐 아니라 요한 칼빈도 경건과 성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평생 칼빈만을 신봉해 오는 한철하 박사가 최근 수년 동안 경건보다는 성결이란 단어를 선호하고 있으며 칼빈과 아울러 웨슬레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오직 믿음만"을 강조한 나머지 인간적 책임을 간과하다가 이중적이고 모순된 신자의 허상을 드러내 보이게 된 한국교회에 대한 자성의 결과로 나타난 소리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그렇다. 한국교회는 성결을 상실하고 있다. "오직 믿음"은 있는지 모르겠지만 분명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모든 삶의 영역에서 순결을 유지하고 나타내는 삶은 사라지고 있다. 평생 성결을 추구하고 실천하면서 성결의 메시지를 전한 이성봉 목사의 삶과 신앙은 우리들에게 커다란 도전이 되고 있다.
이성봉 목사는 그의 자서전에서 신유의 체험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성결교회 4중 복음을 그대로 받고, 그대로 의지하고, 그대로 체험하고, 그대로 전함을 나의 사명으로 알았다. 그래서 신유의 체험을 많이 하였다. 본시 나 자신이 폐디스토마로 오래 고생하여 어릴 때 별명이 깔다귀였다. 신학공부할 때에도 심히 쇠약하고 수원서 교역할 때에도 쇠약하여 몇 달 휴양하는 중 주야에 기도로 나음을 얻고 복막염에서도 나음을 얻었는데 나의 몸은 22관까지 나가는 뚱뚱보가 되었다. 특별히 황해도 송화읍 무초교회 부흥회를 인도하다가 화단이 일어나 머리부터 전신이 붓고 열이 과하여 집회를 중지하게 되었으나.... 참고 기도할 때에 신기한 이적이 나타나 그 밤으로 거짓말 같이 나아서 그 집회를 승리로 마쳤다... 나는 또 맹장염에서 구원 받았다. 해남에서 부흥회 하다가 맹장염으로 아프기 시작했다. 그러나 고통 중에도 집회를 결사적으로 하였다. 너무나 고통을 당하니 송의사가 와 보고는 급성 맹장염인데 24시간 안에 수술을 해야 되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결사적으로 기도만 했는데 그날 밤 너무도 고통스러워 죽는 줄 알았다. 그러나 아침에 이상하게 씻은 듯 나음을 주시었다." 이성봉 목사는 그의 신유에 대한 소신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치 않기 때문에 오늘도 그 권능, 그 사랑으로 치료하시는 여호와시니라. 그래서 나는 신유의 신앙으로 30년간 의약을 의지하지 않고 그의 손에 치료를 받아 오늘까지 나왔다. 물론 의약을 쓰는 것이 죄가 되거나 구원 문제는 아니다. 의약으로 치료하는 것은 자연의 요법이요 신유로 구원 받는 것은 초자연의 요법이다." 그렇다고 이성봉 목사가 무분별하게 기사와 이적을 예찬한 것은 아니다. 그는 항상 신비주의를 경계하며 말씀에 기초한 신앙을 유지할 것을 강조했다. "성경은 천국을 바라보는 망원경이요, 나의 진상을 살피는 거울이다. 이 말씀은 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요 꿀보다 더 달고 꿀 송이보다 더욱 달게 여겨야겠는데, 많은 신자들이 이 말씀을 등한히 하여 은혜를 저버린다. 성신 충만은 말씀 충만이다. 우리의 신앙이 감정과 기분으로 좌우되지 말고 이 말씀에 건전히 굳게 서야 될 것이요, 기사와 이적에 관심을 두지 말고 말씀의 지식으로 이단과 사설을 퇴치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성봉 목사가 한 평생 의약을 쓰지 않고 신유의 은사만 의지한 것은 독특한 입장이지만 그것은 그분 개인의 신앙적 소신에 속한 것이므로 우리는 그분의 신앙을 다만 존중할 뿐이다. 이 목사는 신유의 복음을 믿는 자는 행복하다고 말하며 신유의 은혜를 받기 위해 기도하라고 권면했다. "나는 너를 치료하는 여호와란 말씀(출15:26)을 보시라. 질병으로 신음하는 교우들이여, 죄를 고하고 병 낫기를 위하여 기도하사이다. 환난 날에 나를 불러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50:15). 신유의 복음을 믿는 자는 참으로 행복하도다." 이성봉 목사뿐 아니라 한국교회는 그 초창기부터 회개와 기도 그리고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는 치유의 은사를 인정하며 신유의 은사를 통해 많은 전도와 부흥의 역사를 이루었다. 그러면서도 신유와 이적 중심으로 나가는 신비주의와 이단을 경계했다. 오늘날 한 편에서는 성령의 현재적 은사들을 모조리 부인하고 다른 한 편에서는 신유와 이적의 은사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양극화된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이성봉 목사의 균형잡힌 신유 복음 신앙은 우리들에게 신중한 자기 성찰을 하게 만든다.
이성봉 목사에게 있어서 재림은 구원의 셋째 단계 즉 미래적 단계이다. 재림은 기독교 신앙의 목적이다. "예수의 재림은 하나님의 최대 계획이요, 성도의 최대 소망이다. 만물이 고대하는 소망이요 마귀를 진멸하고 세상을 심판하고 성도의 눈물을 씻어 주시고 당신의 신부들을 영접하시는 주의 날이다." 그리고 재림의 날이 임박했음을 지적했다. "오리라, 도적같이 오리라는 약속을 굳게 잡고 요제인가 고제인가 눈물로 기다리는 주의 재림, 천지는 변하여도 그 약속은 변치 않으시리라. 아무리 보아도 시대는 점점 절박하여 간다. 자연의 징조를 보든지, 국제 사회의 징조를 보든지, 교회와 인심의 징조를 보든지, 유대나라 독립하는 무화과 잎이 나는 것을 보면 재림의 복음을 믿는 자들의 가슴은 뛰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깨어서 재림을 준비하여야 한다. "깨어라.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 밝게 켜 들고 거룩함과 인애로 신혼신을 단장하고 공중 혼연을 고대하는 신부들은 복이 있으리라." "사랑하는 나의 주님 언제나 오시렵니까? 택한 신부 맞으시려 언제나 오시렵니까? 일구 월심 오래도록 주님 생각 간절합니다 사모하는 나의 주님 속속히 오시옵소서." 얼마 전에 김삼환 목사가 오늘날 한국교회의 문제점은 종말신앙을 상실한 것이라고 지적한 일이 있다. 목회자의 설교에서나 삶에서 종말 신앙이 사라져 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에게서 종말 신앙과 재림 신앙이 사라져 가기 시작했다. 현세가 전부인 것처럼 살고 있다. 몰트만이 지적한 대로 미래에 대한 분명한 종말 신앙은 적극적이고 책임 있는 현재적 삶을 살게 만든다. 이런 맥락에서 이성봉 목사의 재림 신앙은 현재와 미래에 대해 둔탁해진 우리들의 신앙을 일깨우는 청량제가 된다.
우리는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보여 주고 물려준 성결한 삶과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신앙의 유산을 고이 간직하고 배우고 개발하여 새 시대에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맡겨 주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복음 사명과 하나님 나라 확장의 선교 사명을 성실하게 수행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회개와 부흥과 성결과 사랑의 영을 부어 주시옵소서! 먼저 주의 나라와 주의 의를 구하게 하시고,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라고 하늘을 바라보며 부르짖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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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
강단에 서셔서 일장춘몽가를 부르시면 천사같이 보였는데.....
한국의 성자라는 말씀들은 적이 있어 궁금했는데 잘 정리해 주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