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목(許穆)-愼酬酌自警(신수작자경)(인간관계를 신중히 하자고 스스로 다짐하다(쉽지 않은 세상살이)
人情有萬變(인정유만변) 인정은 시도 때도 없이 변하고
世故日多端(세고일다단) 세상일은 하루하루 복잡해지네
交契亦胡越(교계역호월) 친한 사이였다가도 아주 멀어지곤 하니
難爲一樣看(난위일양간) 한결같이 보기가 영 쉽지 않네
*위 시는 “한시 감상 情정, 사람을 노래하다(한국고전번역원 엮음)”(기언記言)에 실려 있는 것을 옮겨 본 것입니다.
*하승현님은 “미수(眉叟) 허목은 시골에 은거하며 독서하고 도를 논하는 산림으로 지냈다. 그러다 명망이 높은 인사를 국왕이 직접 초빙하는 제도가 마련됨에 따라 56세 되던 해에 능참봉에 제수되었고, 81세가 되던 해에는 이조 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제수되었다. 그 사이 남인이었던 미수는 당쟁 속에서 여러 차례 정치적 기복을 겪는다.
계속 은거하며 지냈다면 번민할 일도 적었을 텐데 번잡한 세상살이는 그의 마음에 많은 갈등을 일으켰다. 시시때때로 끓었다 식었다 하는 세태 속에서 늘 변함없는 것을 찾는다는 것은 애초 지나친 욕심이었을지도 모른다.
복잡한 세상을 살아가며 번민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피하기 어려운 일이다. 내 마음을 나도 잘 모르겠으니, 남들이 내 마음 같지 않다고 한탄하는 것은 아직 내 소관이 아닌 것 같고, 일하느라 정신없이 바쁘다고 하지만 매 순간 집중했는가를 생각하면 할 말이 없다. 이런가 하면 저렇고, 저런가 하면 이런 일상 속에서 어리숙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고 번민하느라 일을 또 보탠다.
조선 성종 때 불우헌不憂軒 정극인丁克仁은 상춘곡賞春曲을 지어 속세를 떠나 자연에 묻혀 안빈낙도하는 생활을 노래하였다. 이 고고 첫머리에 ‘홍진紅塵에 묻힌 분네 이내 생애 어떠한고? 옛사람 풍류를 미칠까 못 미칠까?’라고 한 내용이 있다. 봄날의 흥취에 젖어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하는 모습은 보는 사람의 정신까지 개운하게 한다. 그렇긴 하지만 속세에 묻혀 살면서도 이치에 따라 경우에 맞게 산다면 지극한 즐거움을 누리는 것을 넘어 지극한 도리를 행하는 것이 될 터이니, 더없이 훌륭한 삶이라 할 것이다. 그 정도 되니 ‘속세 떠나 사는 분네 이내 생애 어떠한고? 옛사람 도리에 미칠까 못 미칠까?’라고 당당하게 노래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속세를 떠나 지극한 즐거움을 누리기도 쉽지 않은 마당에 흙먼지 가득한 속세에서 제대로 된 도리를 행하며 살기란 어렵고 또 어려운 일이다”라고 감상평을 하셨습니다.
*허목[許穆, 1595년(선조 28)~1682년(숙종 8),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문보(文甫) · 화보(和甫), 호는 미수(眉叟)]-조선후기 성균관제조, 이조판서, 우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1595년(선조 28)에 태어나 1682년(숙종 8)에 사망했다. 과거를 보지 않고 학문과 글씨에 전념해 독특한 전서를 완성했다. 예론에 뛰어나 두 차례 예송 논쟁에서 서인의 영수 송시열을 대상으로 남인의 주장을 대변했다. 현종 대에는 서인의 주장이 관철되면서 좌천되었으나 숙종 대에 남인의 주장이 채택되어 대사헌을 거쳐 우의정에 올랐다. 경신대출척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파직되어 저술과 후진양성에 전념했다. 학문적으로는 주자학 일존주의에서 벗어나 원시유학을 중시했다. 찬성 허자(許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별제 허강(許橿)이고, 아버지는 현감 허교(許喬)이며, 어머니는 정랑 임제(林悌)의 딸이다. 부인은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의 손녀이다. 1615년(광해군 7) 정언눌(鄭彦訥)에게 글을 배우고, 1617년 거창현감으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가서 문위(文緯)를 사사하였다. 또한 그의 소개로 정구(鄭逑)를 찾아가 스승으로 섬겼다. 1624년(인조 2) 광주(廣州)의 우천(牛川)에 살면서 자봉산(紫峯山)에 들어가 독서와 글씨에 전념해 그의 독특한 전서(篆書)를 완성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을 당해 영동(嶺東)으로 피난했다가 이듬해 강릉 · 원주를 거쳐 상주에 이르렀다. 1638년 의령의 모의촌(慕義村)에서 살다가 1641년 다시 사천으로 옮겼다. 그 뒤 창원 · 칠원(漆原) 등지로 전전하다가 1646년 마침내 경기도 연천의 고향으로 돌아왔다. 다음 해 어머니의 상을 당하자 상중에 『경례유찬(經禮類纂)』을 편찬하기 시작해 3년 뒤에는 상례편(喪禮篇)을 완성하였다. 1650년(효종 1) 정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1개월 만에 사임하였다. 이듬해 내시교관이 된 뒤 조지서별좌(造紙署別坐) · 공조좌랑 등을 거쳐 용궁현감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659년 장령이 되어 군덕을 논하는 소를 올렸으며, 또한 당시 송시열(宋時烈) · 송준길(宋浚吉) 등이 주도하는 북벌정책에 신중할 것을 효종에게 간하는 옥궤명(玉几銘)을 지어 바쳤다. 이어 둔전의 폐단을 논하였다. 그 해 효종이 죽자 소를 올려 상례를 논했고, 장악원정(掌樂院正)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60년(현종 1) 경연(經筵)에 출입했고, 다시 장령이 되었다. 그 때 효종에 대한 조대비(趙大妃: 인조의 繼妃)의 복상기간이 잘못되었으므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상소해 정계에 큰 파문을 던졌다. 이를 기해복제라 한다. 이러한 복제논쟁의 시비로 정계가 소란해지자 왕은 그를 삼척부사로 임명하였다. 여기서 그는 향약을 만들어 교화에 힘썼으며, 『척주지(陟州誌)』를 편찬하는 한편, 『정체전중설(正體傳重說)』을 지어 삼년설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였다. 1675년(숙종 1) 이조참판 · 비국당상(備局堂上) · 귀후서제조(歸厚署提調) 등을 거쳐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승진하고, 의정부우참찬 겸 성균관제조로 특진하였다. 이어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승진되어 과거를 보지 않고도 유일(遺逸)로서 삼공(三公)에 올랐다. 그 해 덕원(德源)에 유배중이던 송시열에 대한 처벌문제를 놓고 영의정 허적(許積)의 의견에 맞서 가혹하게 처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로 인해 남인은 송시열의 처벌에 온건론을 주장하던 탁남(濁南)과 청남(淸南)으로 갈라졌고, 그는 청남의 영수가 되었다. 그 뒤 지덕사(至德祠)의 창건을 건의하고, 체부(體府) ·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 · 지패법(紙牌法) · 축성(築城) 등을 반대했으며, 그 해 왕으로부터 궤장(几杖)이 하사되었다. 이듬해 차자(箚子)를 올려 치병사(治兵事) · 조병거(造兵車) 등 시폐(時弊)를 논하였다. 그러나 사임을 아무리 청해도 허락하지 않아 성묘를 핑계로 고향에 돌아왔으나 대비의 병환소식을 듣고 다시 예궐하였다. 특명으로 기로소당상(耆老所堂上)이 되었는데 음사(蔭仕)로서 기로소에 든 것은 특례였다. 1677년 비변사를 폐지하고 북벌준비를 위해 체부를 설치할 것과 재정보전책으로 호포법(戶布法) 실시를 주장하는 윤휴(尹鑴)에 맞서 그 폐(弊)를 논하고 반대하였다. 이듬해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낙향해, 나라에서 집을 지어주자 은거당(恩居堂)이라 명명하였다. 1679년 강화도에서 투서(投書)의 역변(逆變)이 일어나자 상경해 영의정 허적의 전횡을 맹렬히 비난하는 소를 올렸다. 이듬해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집권하자 관작을 삭탈당하고 고향에서 저술과 후진양성에 전심하였다. 그는 이기론(理氣論)에 있어서 기(氣)는 이(理)에서 나오고 이는 기에서 행하므로, 이기를 분리시킬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독특한 도해법(圖解法)으로 해설한 『심학도(心學圖)』와 『요순우전수심법도(堯舜禹傳授心法圖)』를 지어 후학들을 교육하였다. 사후 1688년 관작이 회복되고, 숙종은 예장(禮葬)의 명령을 내려 승지를 보내어 치제(致祭)했으며, 자손을 등용하도록 하고 문집을 간행하게 하였다. 그림 · 글씨 · 문장에 모두 능했으며, 글씨는 특히 전서에 뛰어나 동방 제1인자라는 찬사를 받았다. 작품으로 삼척의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 시흥의 영상이원익비(領相李元翼碑), 파주의 이성중표문(李誠中表文)이 있고, 그림으로 묵죽도(墨竹圖)가 전한다. 저서로는 『동사(東事)』 · 『방국왕조례(邦國王朝禮)』 · 『경설(經說)』 · 『경례유찬(經禮類纂)』 · 『미수기언(眉叟記言)』이 있다. 1691년 그의 신위(神位)를 봉안하는 사액서원으로 미강서원(嵋江書院)이 마전군(麻田郡)에 세워졌고, 나주의 미천서원(眉川書院), 창원의 회원서원(檜原書院)에도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胡越(호월) : 중국(中國) 북쪽의 호(胡)와 남쪽의 월(越)이라는 뜻으로, 서로 관계(關係)가 소원(疏遠)하거나 멀리 떨어져 있음을 이르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