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과 문묘 18현] 정병경.
ㅡ성현의 덕목ㅡ
계절은 질서를 거스르지 않는 본보기인데 근래에 기상 이변이 자주 발생한다. 동짓달 엄동설한은 실종되고 여전히 가을 기운을 느낀다. 일기 덕분에 가벼운 옷차림으로 나서본다.
성균관 입구 왼편에서 질서와 공평을 의미하는 하마비를 만난다. 풍우로 흐릿한 비문에서 세월의 흔적을 엿본다. 성현들 넋이 드나든다는 세 칸의 성균관 신삼문은 닫혀 있다. 대성전(보물 제141호)을 비롯해 명륜당, 비천당과 도서관인 존경각(사적 제143호) 등 20여 채가 들어선 건물은 넓은 면적에 자리했다. 식당과 제기 보관소까지 갖추어져 조선시대 학자들의 활약상을 짐작한다.
조선 개국 후 세워진 건물들은 지금에 이른다. 명륜당의 대들보 아래에서 경서를 읽으며 강학한 학자들의 활약상을 연상해본다. 성균관에 배향된 인물은 충직과 충언의 선비들이다.
대성전엔 공자를 정위正位(중앙)에 모셨다. 안자와 자사자는 동쪽으로, 증자ㆍ맹자 위패를 서쪽에 배위配位했다. 백성이 궁금해하는 질문을 대신해 답을 얻어낸 인물들이다. 공자의 제자 공문孔門 10철哲ㆍ송조宋朝 6현賢 위패가 좌우에 모셔져 있다.
신라 설총과 최치원을 비롯해 고려 충신 정몽주와 안향이 배향되었다. 조선의 명현은 본래 4현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인데 이황이 합류해 5현으로 부른다.
이 후에 아홉 (김인후,성혼,이이,조헌,송시열,송준길,김장생,김집,박세채)분을 양쪽에 배향해 모두 18위다. 중국과 우리나라 성현 112위를 성균관과 동무와 서무에 봉안했다. 일제로부터 해방 후 94현의 위패는 땅에다 묻고 18위만 대성전에 종향從享했다. 현재 동ㆍ서무엔 위패가 없다.
목숨 걸고 직언을 서슴치 않은 신하들이 시대를 거듭하며 무언의 가르침으로 대신한다. 해가 갈수록 위력이 더해지는 충신들은 만세토록 성전을 지킨다. 문묘에 배향된 인물들은 학습學習으로 다져진 성현이다. 1년에 2회 대성전에서 석전釋奠을 지낸다.
칼날의 충언도 서슴치 않는 신하 대부분은 사약(김굉필,조광조,송시열)으로 세상을 떠난다. 조언하다가 귀양과 삭탈관직(정여창,이언적,성혼,조헌,박세채)으로 여생을 보내게 된 선비들도 여렀이다. 불운으로 떠난 선현들은 후대를 이으면서 명성을 휘날린다. 약한것이 강함을 이긴다는 노자의 명언은 후세에 교훈으로 남는다. 죽은 자가 산 자를 능가함을 여실히 보여준다.
ㅡ천년 지킴이ㅡ
수백여 년간 나이테를 그린 느티나무는 성균관의 지킴이다. 이름을 남기고 떠난 학구파들의 신상을 거목은 알고 있다. 학문을 열심히 갈고 닦은 선비를 생각하니 경외심이 생긴다. 낙엽 떨군 선비 나무는 역사를 이어가기 위해 새봄을 기다린다.
372년에 세워진 고구려의 태학이 모체다. 삼국시대를 이어 고려시대(992년)에는 국립대학인 국자감國子監을 설립하였다. 유교 경전을 강론한 기관으로 수많은 인재를 배출해 사회에서 존경의 대상이다.
고려 때까지 개성에 있던 성균관은 조선을 개국(1398)하면서 한양으로 옮겨진다. 일제 시대에 폐지되어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중종 14년(1519) 대사성을 지낸 윤탁이 심은 은행나무 두 구루는 5백여 년의 세월이 무색하다. 중건과 재건으로 지어진 전각들은 후대로 이어지며 가치를 더한다.
삼강오륜의 덕목은 수신제가가 바탕이다. 인의예지는 충ㆍ효의 실천이 있으므로 이루어진다. 청소년기에 인성 교육이 필수다. 애민정신이 있으면 세상은 풍요롭다.
《대성전》 현판은 조선 중기 때 명필 한석봉이 썼다. 명나라 사신 주지번이《명륜당》 현판에 그의 흔적을 남겼다. 명륜당은 유생을 배출하는 과거 시험장으로 쓰인 명당이다.
통치자를 바로 세우려다가 불행하게 살다 떠난 성현들의 명성을 기억한다. 목숨을 잃고도 부관참시의 수모를 겪은 정여창을 새긴다. 정의로움으로 직언을 서슴치 않은 성현들이 성균관 문묘에 배향되어 영원히 살아 있음을 후대에게 보여주고 있다.
2022.12.01.
첫댓글 오늘(2022.12.10. 토) 성균관대 퇴계관 511호에서
화서학 학술대회가 있었는데 우연히 같은 날,
<성균관과 문묘 18현>에 대한 글과 사진을 올려주셨네요.
늘 유익한 내용을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