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임진왜란 당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총기를 보유한 국가 중 하나였지만, 도쿠가와 막부가 수립된 뒤에는 200년 넘게 총기의 발전이 미미했다. 전쟁이 없고 쇄국 정책으로 외부와의 접촉도 크게 위축되면서 해외의 총기 발전이 영향을 끼칠 여지가 적었던 것이다. 물론 일본도 외부의 총기 발전을 모르던 것은 아니고, 실제로 18~19세기 사이에 수석식(부싯돌식) 총기의 생산도 검토는 했으나 급한 필요성이 없는데 더해 명중률이 낮은 점 등의 단점이 지적되면서 결국 양산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일본이 개화기에 들어서면서 상황은 급변한다. 이 시기, 즉 1840~1870년대 사이는 유럽 열강들의 총기 상황도 하루가 다르게 변하던 시기다. 전통적인 수석식 활강 머스켓은 뇌관식 강선총(라이플 머스켓)으로, 다시 후장식 강선총으로 급변했다. 일본도 외부의 위협에 더해 메이지유신을 거치면서 촉발된 내전들로 인해 더 이상 화승총에 안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달았고, 이 과정에서 엄청난 양의 외국제 소총들이 수입되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혼란을 거친 끝에 1870년대 초~중반 사이에 어느 정도 소총의 표준화를 이루게 된다. 스나이더-엔필드가 일종의 주력 소총이 되고 드라이제 소총이 2선급 소총이 되는데 더해 기병용으로는 스펜서 연발총으로 쓰이는 식의 나름 교통 정리가 이뤄졌다. 여기에 더해 당시 일본은 처음에 프랑스(나중에 프로이센)식 교범을 도입하면서 프랑스군의 장비를 접했고, 그 결과 샤스포 소총도 일부 도입되어 사용되기도 했다.
당시 일본에서 총기 개발과 운용에 가장 높은 경험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진 전문가 중 한 사람이 무라타 쓰네요시(村田経芳:1838~1921)였다. 그는 프랑스에 파견될 정도로 소화기 부문에 높은 평가를 받은 인물로, 이때의 경험에서 그는 프랑스가 원래 종이 탄피를 사용하던 샤스포 소총을 금속 탄피를 사용하는 그라(Gras, 프랑스어로 마지막 단어는 묵음, '그라스'라는 국내식 표기는 잘못되었으며 영어권에서도 '그라'로 부름) 소총으로 개조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일본에서도 비슷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려 했다. 이미 들어온 샤스포 소총을 그라와 유사한 금속 탄피식으로 만드는 ‘일본판 그라’ 개조 작업을 진행하는 한편으로 아예 독일 업체와 손잡고 개조 뿐 아니라 신규 생산까지 진행하려는 것이었다.
비록 1877년에 벌어진 세이난 전쟁(西南戰爭)으로 인해 재정이 악화된 일본 정부가 무라타의 ‘일본판 그라’ 계획보다는 스나이더-엔필드 개조(당시 일본이 보유하고 있던 대량의 구식 엔필드 머스켓을 스나이더-엔필드로 개조하는 것)을 우선시해 무라타의 계획은 다소 정체됐지만, 그는 이때 생긴 여유를 토대로 원래 설계를 일부 단순화하는 등 변화를 주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완성된 일본 최초의 국산 소총이 바로 13년식 소총, 일명 ‘무라타 총’이다.
특징
13년식은 메이지(明治) 13년, 즉 1880년에 완성된 총이다. 11mm 구경의 금속 탄피식 탄약(11x60mm R)을 사용하는 이 총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 프랑스의 그라 소총과 유사한 면이 많지만 일본의 특성에 맞춰 조금 더 단순화한 물건이다. 당시의 유럽에서 점차 보급이 진행되던 단발 볼트액션 구조로, 장전손잡이가 장착된 하나의 폐쇄 돌기로 노리쇠 폐쇄가 진행되는 전형적인 당시 방식의 볼트액션이기도 하다. 탄약은 사실상 프랑스의 11mm 그라 탄약과 같은 치수로, 호환성이 있으며 이는 이 총이 처음부터 그라 소총의 일본화라는 목표로 제작되었음을 잘 말해준다. 심지어 초기의 무라타 소총은 적지 않은 숫자가 아예 샤스포 소총을 개조한, 말 그대로의 ‘일본판 그라’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3년식(좌)과 18년식(우)의 비교 <출처: Public Domain>
물론 일본의 상황으로 인한 설계 변경은 위에서 언급한 대로 몇 가지가 있었다. 사실 모든 부품은 일본제지만 가장 중요한 총열은 벨기에에서 수입해야 했다. 또 공이 스프링도 원래 그라나 샤스포는 코일 스프링을 사용하지만 일본에서는 이런 스프링을 만드는데 필요한 고급강을 계속 수입에 의존한다는 사실이 문제로 지적됐다. 다량의 고급강을 수입하는데 드는 비용도 문제이고, 또 유사시 수입이 안정적으로 가능하겠냐는 지적도 있어서인데, 그 때문에 스프링은 일본에서도 나름 화승총 시대부터 경험을 쌓아온 판 스프링으로 이를 대체했다. 스프링은 장전손잡이 밑단 안쪽에 들어가는 설계이며, 이 때문에 장전손잡이가 나름 독특한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다.
약실 위 후방에는 작은 구멍이 둘 뚫려있다. 이는 당시의 다른 나라 소총들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특징은 아닌데, 이 구멍들은 약실 압력이 원래 규격보다 심하게 강할 때 탄피를 찢고 외부로 배출되라고 만든 일종의 안전장치다. 물론 이런 종류의 사고가 흔한 것은 아니지만 당시의 탄약 품질관리 수준을 생각하면 규격 이상으로 다량의 추진장약이 들어간 경우는 충분히 생각할 수 있기에 나름 합리적인 판단이었는데, 실은 이 특징은 나중에 38식 소총 등의 다른 일본 소총들에도 전해졌고, 그것이 나중에 레밍턴 M700 등 다른 해외의 볼트액션식 소총에도 전해졌다.
30년식 소총(좌)과 무라타 소총(우)의 비교 <출처: Public Domain>
특이한 점은 안전장치가 없었다. 기병총 버전을 제외하면 13년식과 뒤에 서술할 18년식 모두 안전장치가 따로 없었는데, 이는 공이가 후퇴해 코킹된 상태임을 알기 쉽고 어차피 약실에 한 발만 들어가는 단발식이라 노리쇠를 후퇴시켜 약실을 비운 다음 방아쇠를 계속 당긴 상태로 노리쇠를 천천히 앞으로 되밀어주면 공이가 전진한 상태로 안전하게 되돌아간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1885년, 즉 메이지 18년에는 일부 개량을 한 신형인 무라타 18년식이 채택되었는데, 이 총은 노리쇠 등의 디자인을 일부 개량하는 등 미국 윈체스터사의 협력을 얻어 13년식에서 문제시 되던 부분들을 개선했으며 이 과정에서 생산용 설비도 미국제가 도입되었다. 13년식은 약 8만 정, 18년식은 약 9만 정이 제조되었고 총열 길이를 짧게 한 기병용의 18년식 기병총도 제작되었다(약 1만 정).
무라타 소총은 일본 최초의 자국산 제식 소총으로서 청일전쟁 당시에 일본군의 주력 소총이었다. 사실 당시 청군 역시 서방제 단발 후장식 소총들을 사용했기 때문에 딱히 보병화력면에서 일본군이 청군에게 기술적 우위를 가졌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사기나 훈련, 작전 운용 등의 면에서 일본군은 청군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또 자국산 소총을 대량으로 조달해 전투를 치를 수 있다는 자신감 자체가 일본이 불과 수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할 청나라 정도의 국가에 대한 도발을 가능하게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다만 그 운용 기간은 이 시대의 총들 대부분이 그렇듯 상당히 짧았다. 13년식이 1880년, 18년식이 1885년이라는 시기는 사실 몇 년만 더 기다리면 유럽 국가들에서 기존의 흑색화약식 소총들이 졸지에 구식화될 시기였다. 몇 차례나 언급하지만 1886년에 프랑스가 르벨 소총으로 일으킨 ‘무연화약 혁명’이 일본이라고 피해갈 턱이 없었던 것이다. 그로 인해 뒤에 서술할 22년식 소총과 그 뒤를 오래지 않아 이을 30년식 소총이 등장하게 되고, 13년식과 18년식은 개발된 지 10여 년 만에 구식의 범주에 들어가는 2선급 총기로 전락한다.
이처럼 짧은 기간에 구식화가 진행되면서 상당수의 13년식과 18년식은 해외로 넘겨진다. 청일전쟁 이후 청나라에도 일부 공여되었고, 필리핀에도 스페인 및 미국에 대항하던 당시의 혁명정부에게 제공되었다가 총을 실은 배가 상하이에서 침몰되는 등의 사건으로 이 사실이 발각되면서 미국과의 외교 분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무라타 소총이 공여된 또 다른 나라가 우리나라다. 구한말 당시 별기군 창설 시점에도 200정이 제공되는 등 이런저런 경로로 적잖은 숫자의 무라타 소총들이 공여된 것으로 알려졌다. 아닌 게 아니라 일본으로서는 우리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무기 제공을 활용하지 않을 턱이 없었다.
13년식과 18년식은 상당수가 일본 내에서도 군 방출 물자로 풀려 민간용 엽총으로 개조되기도 했다. 단순한 단발총인데다 구경이 큰(11mm) 구형 소총인 만큼 산탄총으로의 개조가 용이했고, 산탄총으로 개조되지 않은 상태로도 비교적 저렴한 라이플로서 맹수 사냥용으로 꽤 요긴하게 쓰였다. 특히 여전히 곰이나 멧돼지 등의 피해가 크던 홋카이도 등의 지역에서는 이 총을 가진 농민이나 수렵인이 상당수 존재했다.
이미 러일전쟁 시점에서도 구식화되어 실전에는 투입되지 않은 무라타 소총이지만, 하마터면 이 총들이 다시 실전에 투입될 뻔한 일도 있었다. 1945년의 패전 직전 시점에서 본토결전을 준비해 신규 소집된 사단들 중에는 창고 구석에 있던 무라타 총들이 지급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정도만 해도 양반인 것이, 화승총을 사용하거나 아예 죽창을 들고 돌격해야 할 병력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다행히도 이 총들은 쓸 일이 없게 되었다.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 군대에도 2선급 부대용으로 지급되었다.
파생형
18년식 기병총
18년식 무라타 소총의 길이를 10cm 정도 줄이고 총열도 10cm 줄인 기병대용 총기. 안전장치가 추가되었다. 착검 장치도 존재하지 않는데, 당시의 기병은 근접전투용으로 검이나 창을 쓰는 게 기본이라 착검이 필요하지 않다고 여겨진 것이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16년식 기병총
13년식 소총을 줄여서 만든 기병총. 다만 이 총이 실제 존재하는 총인지는 자료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일본에서는 이것이 일본어 각인 등에 익숙지 않은 미국 쪽 연구자들이 18년식 기병총을 잘못 표기한 것으로 생각할 경우도 있다.
22년식 소총(무라타 연발총)
1886년 프랑스에서 르벨 소총이 나오면서 일본 역시 기존의 무라타 단발총들이 순식간에 구식화되는 것을 절감했고, 무라타 쓰네요시도 이런 추세를 파악하기 위해 1889년에 유럽으로 다시 건너갔다. 그 경험을 토대로 귀국한 무라타는 새로운 무연화약 탄약을 사용하는 소총을 설계했으니, 이것이 바로 22년식 소총이다.
1889년에 설계되어 22년식이라고 하지만 당시의 일본으로서는 꽤 복잡한 이 총을 양산하는 데 시간이 걸렸고, 그 때문에 1894년에 벌어진 청일전쟁 시점에서야 간신히 2개 사단에게 지급은 되었으나 이 사단들 모두 동원이 늦어 실전에서는 사용되지 못했다. 그 뒤 대만에서의 무력 봉기 진압 등 소규모 실전에 투입되어 사용되었고, 중국에서도 의화단의 난을 진압하느라 출동한 일본군에게 사용되었다.
22년식 소총은 8연발 탄창을 갖추고 8mm 구경의 무연화약 탄약을 사용하는 등 나름 일본의 차세대 화기로서의 면모를 갖춘 것처럼 보였으나 실제로는 문제가 있었다. 어떻게 보면 8mm 구경의 채택이나 총열 아래에 튜브형 탄창을 사용하는 점 등은 이 총을 실질적인 ‘일본판 르벨’처럼 만들었는데(다만 외관이나 구조의 면에서는 마우저 M71/84에 더 가까운 느낌), 문제는 튜브형 탄창이 르벨 소총에서도 단점으로 지목되는 만큼 22년식 역시 일선 부대들에서 적잖은 불평을 들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이미 1890년대면 마우저나 만리허 등 클립 장전식 소총이 보편화되는 시점이라 장탄수가 많아도 정작 그 숫자를 탄창에 넣는 데 시간이 걸리는 튜브형 탄창은 불평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22년식 리뷰 <출처: 유튜브>
또 탄약도 문제였다. 무연화약의 사용으로 탄속이 빨라진 것은 좋았지만 약실 압력도 급격히 높아졌고, 그로 인해 8mm라는 소구경화에도 불구하고 체구가 작은 일본인 사수가 느끼는 반동은 의외로 만만찮았다. 여기에 튜브형 탄창을 사용한 탓에 탄두 끝이 평평하게 되어(앞에 있는 탄의 뇌관을 찌르지 않기 위해) 있는 탄두 디자인은 탄도학적으로도 그다지 유리하지 못했다.
여기에 총 자체의 내구성이나 신뢰성 등도 문제가 되었고, 결국 일본군은 1898년에 30년식 소총을 채택함으로써 무라타 총의 시대를 마무리했다. 22년식은 러일전쟁 중에는 2선급 부대에서 주로 사용했지만, 이 총들도 비교적 빨리 30년식이나 38년식으로 대체되었다.
22년식 기병총
18년식 기병총과 마찬가지로 22년식 연발총의 길이를 줄인 총. 탄창 용량은 5발로 감소.
제원
18년식
길이 : 1.278m 무게 : 4.01kg 총열 길이 : 84cm 사용탄 : 11mm 무라타 (11x60mm R)
22년식
길이 : 1.21m 무게 : 4kg 총열 길이 : 75cm 사용탄 : 8mm 무라타(8x53mm R) 탄창 용량 : 8발
저자 소개
홍희범 | 군사전문지 편집장
1995년 월간 플래툰의 창간 멤버로 2000년부터 편집장으로 출간을 책임지고 있다. 2008년부터 국군방송 및 국방일보 정기 출연 및 기고를 하고 있으며, <세계의 총기백과>, <밀리터리 실패열전> 등을 저작하고 <2차세계대전사>, <컴뱃 핸드건>, <전투외상 응급처치> 등을 번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