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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예레미야서의 말씀 15,10.16-21>
10 아, 불행한 이 몸!
어머니, 어쩌자고 날 낳으셨나요?
온 세상을 상대로 시비와 말다툼을 벌이고 있는 이 사람을.
빚을 놓은 적도 없고 빚을 얻은 적도 없는데 모두 나를 저주합니다.
16 당신 말씀을 발견하고 그것을 받아먹었더니 그 말씀이 제게 기쁨이 되고 제 마음에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주 만군의 하느님, 제가 당신의 것이라 불리기 때문입니다.
17 저는 웃고 떠드는 자들과 자리를 같이하거나 즐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를 가득 채운 당신의 분노 때문에 당신 손에 눌려 홀로 앉아 있습니다.
18 어찌하여 제 고통은 끝이 없고 제 상처는 치유를 마다하고 깊어만 갑니까?
당신께서는 저에게 가짜 시냇물처럼, 믿을 수 없는 물처럼 되었습니다.
19 그러자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돌아오려고만 하면 나도 너를 돌아오게 하여 내 앞에 설 수 있게 하리라.
네가 쓸모없는 말을 삼가고 값진 말을 하면 너는 나의 대변인이 되리라.
그들이 너에게 돌아올망정 네가 그들에게 돌아가서는 안 된다.
20 그러므로 이 백성에게 맞서 내가 너를 요새의 청동 벽으로 만들어 주리라.
그들이 너를 대적하여 싸움을 걸겠지만 너를 이겨 내지 못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원하고 건져 낼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21 내가 너를 악한 자들의 손에서 건져 내고 무도한 자들의 손아귀에서 구출해 내리라.”
✠ 복음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13,44-46>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44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45 또 하늘 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
46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자, 가서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샀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13장에 있는 하늘나라에 대한 비유 일곱 개 중에서 오늘 우리가 들은 '보물의 비유'와 '진주 상인의 비유'는 일반 군중에게 하신 앞의 네 개의 비유와는 달리, 제자들에게 하신 비유로 마태오복음에만 전해집니다.
이 비유들은 '대체 하늘나라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를 깨우쳐줍니다.
곧 '하늘나라'는 우리의 ‘일터인 밭’에 묻혀 있고, ‘진주를 찾는 행위’ 안에 깃들어 있음을 깨우쳐줍니다.
그리고 그것은 ‘가진 것을 다 팔아 사들여야 할’ 만큼 가치 있고 중요한 일임을 깨우쳐줍니다.
오늘은 이 두 비유의 서로 다른 특성에 주의를 기울여보고자 합니다.
'보물의 비유'는 품꾼 혹은 소작인이 남의 밭에 나가 일을 하던 중에 묻혀 있는 보물을 우연히 발견하였습니다.
이는 그가 일하다가 갑작스럽게 횡재를 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보물을 파내게 되면 당시의 법에 따라 주인의 것이 되기 때문에, 그 보물을 파내거나 몰래 가지고 돌아가지 않고 다시 묻어두고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삽니다.
곧 법과 도덕을 넘어서는 이 품꾼의 태도는 보물의 가치가 그 어떤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얻을만한 귀중한 가치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 보물을 얻기 위해 그 어떤 희생도 치러라”는 강력한 요청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치 부자 청년에게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라. 그리고 나를 따르라."(마르 10,21)고 강력한 희생을 요청하셨듯이 말입니다.
한편 '진주 상인의 비유'는 우연히 밭을 갈다가 찾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진주를 가진 장사꾼이 마치 진리를 찾아 나선 수도승처럼 더 값진 진주를 찾아 나섰다가 애써 찾아 헤맨 끝에 마침내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했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이 '하나'(ενα)란 ‘여럿 중의 하나’라는 말이 아니라, ‘오직 하나’, 곧 ‘하나뿐인 유일한 것’을 의미합니다.
곧 최상의 것으로서, 그것 ‘하나’면 모든 것을 가진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요, 다른 모든 것을 합해도 그 보다 낳을 수 없는, 도저히 값을 헤아릴 수 없는 ‘최상의 값진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다른 모든 것을 버려두고라도 이 값진 진주 하나를 차지하라”는 간절한 요청입니다.
마치 마르타에게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루가 10,42)인 것을 요청하셨듯이 말입니다.
결국 이 두 비유에서 지칭하는 '밭의 보물'과 '값진 진주 하나'는 '하늘나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꼭 사야 할 뿐만 아니라 그 무엇보다도 앞서 가장 먼저 구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마태 6,33)
우리는 이 '보물', 이 '값진 진주'를 오직 한 분, 우리 주님 예수님에게서 얻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이신 당신이 바로 우리의 '유일한 보물', '하나뿐인 진주'입니다.
그런데 ‘유일한 보물’이신 당신께서는 ‘먼저’ 우리를 소중한 진주로 여기시고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우리가 당신을 사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쳐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하늘나라는 밭에 묻혀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다.”
(마태 13,44)
주님!
밭을 일구는 제 손길이 당신의 나라를 찾아 발견하게 하소서.
발견하고서 가진 것을 다 팔아 사게 하소서.
그 모든 것을 합한 것보다 더 값진,
모든 것을 합해도 그것보다 나을 수 없는,
도저히 값을 헤아릴 수 없는 최상의 것,
그것을 가지면 모든 것을 가진 것이기에,
목숨을 내어주고서라도 얻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보물 중의 보물>
아무리 값진 보물이라고 해도 어떤 사람의 눈에는 보이고 어떤 이에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값진 진주를 찾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찾아다녀야 얻을 수 있습니다.
애쓰지 않는 사람이 보물을 발견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에게 주어진 보물이고 따라서 보물을 얻기 위한 희생과 헌신이 요구됩니다(마태 13,46).
그리고 값진 보물을 발견했으면 그것을 손에 넣기 위하여 그보다 못한 것들을 처분하게 됩니다.
새 옷을 장만하면 전에 입던 옷을 정리하게 됩니다.
더 좋은 것을 얻으면 하나는 자연스럽게 정리됩니다.
하느님을 차지하면 다른 모든 것은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가진 것의 가치를 과대평가하거나 과소평가한다면 결코 더 좋은 것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필리피신자들에게 말합니다.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
(필리 3,7-9)
마태복음 19장 이하의 부자청년 이야기를 보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온 젊은이에게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하셨습니다.
그러나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
그는 주님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는 희망을 지니고 있었지만, 자기의 재산을 포기하지 못하였습니다.
주님 앞에서는 양다리 걸치기나 어중간은 없는 법입니다.
젊은이는 결국 주님을 차지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큰 것을 위해 작은 것을 포기할 줄 아는 용기와 무엇이 참으로 가치가 있는 것인가를 식별할 수 있는 지혜가 요구됩니다.
“하느님을 잃어버리기보다는 차라리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 훨씬 더 낫습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의 말씀을 묵상합니다.
“무엇으로도 마음을 흩으러뜨리지 말며 무엇 때문에도 놀라지 말라!
모든 것은 지나가나 하느님은 변하지 않는다.
하느님을 차지한 자에게는 부족할 것이 없으니 하느님만으로 충분하다.”
결국 하느님을 얻으면 모두를 얻은 것이요, 모든 것을 얻어도 하느님을 차지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느님의 나라를 성인들이나 가는 곳으로 어렵게만 생각한다면 아무 발전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허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마태 6,33)을 구하고 그리하여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심판하러 오지 않으시고 오히려 구원하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상황 안에서도 실망과 좌절보다는 하느님의 자비를 갈망해야 합니다.
성녀 엘리사벳 씨튼은 고백합니다.
“하느님만이 나에게 남은 피난처이십니다.
저는 다른 모든 피난처를 잃어버리고 주님에게만 의존하게 되는 데서 오히려 영적인 기쁨을 느낍니다.”
보물은 사람의 마음이 머무는 곳에 있고 세상의 어떤 것도 다 보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다보지 말고’(루가 9,62) 내 삶의 자리에서 참 보물을 찾아야 합니다.
“주님, 정녕 당신은 저의 등불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저의 어둠을 밝혀 주십니다.”
(2사무 22,29)
이제 당신이 밝혀 주시는 보물을 차지해야 하겠습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어떻게 하면 저도 예수님 음성을 들을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은 하느님 나라의 또 다른 비유입니다.
밭에 묻힌 보물과 귀한 진주의 두 비유가 나옵니다.
핵심은 내가 하느님 나라를 위해 무엇을 희생할 수 있느냐에 따라 그 나라를 얻느냐, 얻지 못하느냐가 정해진다는 것입니다.
영화 ‘탑건-매버릭’에서 톰 크루즈는 탑건 생도들의 교관으로 나옵니다.
어느 나라에서 핵 개발을 하고 있어 그 시설을 파괴하는 임무를 맡은 것입니다.
탑건 팀은 그동안 졸업생도 중 천재라고 자부하는 최고의 조종사 12명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이 중에서 6명을 선별해 작전에 투입합니다.
그런데 12명의 탑건 졸업생들은 자만심이 대단합니다.
자신들은 누구든 이길 수 있고 어떤 작전이든 수행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물론 그만큼 실력이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이 작전은 그 영광만큼이나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우선 톰 크루즈는 그들의 실력을 좀 보자고 합니다.
그들이 편대로 나뉘어서 톰 크루즈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감 있게 지면 팔굽혀펴기 200번을 하자고 제안합니다.
하지만 결과는 12명 모두 톰 크루즈에게 격추됩니다.
그제야 그들의 표정이 바뀝니다.
이 작전에 ‘진심’이게 된 것입니다.
진심이라는 말은 자신들의 노력을 투자할 준비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전에는 그냥 하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그들은 모두 황천길로 가야 했을 것입니다.
톰 크루즈는 그들의 생명을 위해 목숨을 건 훈련을 하도록 그들의 마음가짐을 바로 한 것입니다.
저에게 어떤 분이 “신부님, 저도 신부님처럼 예수님 음성을 듣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하는 이 음성은 25년이 지난 지금도 저의 삶에서 큰 힘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분들에게 진심인지 묻고 싶습니다.
저는 하.사.시. 10권을 다 읽었고 다시 읽고 있었으며, 성체조배를 많이 했고, 단식까지 했으며, 제 책상에는 피 흘리는 예수님의 사진들만 걸려 있었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들어왔을 때는 정말 진심이었습니다.
목숨까지 바치는 게 아깝지 않았습니다.
저는 아직도 그런 진심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목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저는 다시 그런 십자가의 고통으로 가는 것이 두렵습니다.
이것이 진심입니다.
진심이란 내가 얻으려고 하는 것을 위해 내가 얼마나 투자할 수 있는지에 달렸습니다.
사랑하면 모든 것을 바칩니다.
성체가 바로 하느님의 진심입니다.
하느님은 아드님을 죽여서 그 살과 피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이것이 진심입니다.
이 진심에 우리가 얼마나 우리 자신을 포기합니까?
저는 평일 미사도 다만 1,000원이라도 봉헌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진주를 얻기 위해 그만큼도 투자하지 않으면서 성체를 영하면 효과가 있을까요?
없습니다.
은총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은총은 비와 같습니다.
내가 비워지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봉헌이 없는 성체성사는 아무 효과가 없습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박은빈 배우는 5살 때부터 지난 25년간 쉬지 않고 연기 생활을 해 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200억이 넘는 이 대작의 주인공 역을 제안받았습니다.
하지만 박은빈 배우는 몇 번이고 못 하겠다고 고사하였습니다.
장애인에게 자칫 상처를 주는 연기를 할 수도 있어 자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박은빈 배우는 자신이 이 캐릭터를 위해 쏟아야 할 노력이 얼마나 고될지를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제작사도 진심이었습니다.
그녀의 결정을 기다리며 일정을 1년 미룬 것입니다.
오직 박은빈 배우를 위해 일정을 1년을 미룬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커다란 손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역할을 위해 모든 것을 쏟아낼 수 있는 박은빈 배우의 진심에 자신들도 진심으로 응답한 것입니다.
이 때문에 지금 엄청난 흥행을 하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식인 중 하나인 ‘조던 피터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지식인으로서 하느님을 믿느냐는 말에 지식인처럼 대답합니다.
“저는 그런 질문이 싫습니다.
그냥 신이 있는 것처럼 산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나 부활이 있느냐고 물으면…. 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다 몇 년 뒤 자신도 아프고 아내도 아파서 커다란 고통을 겪습니다.
그리고 그 고통 중에 믿음을 갖게 됩니다.
지금은 아주 독실한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말합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히 믿는 것이 두렵습니다.”
이것이 진심입니다.
두려워야 합니다.
예수님도 십자가 앞에서 두려웠습니다.
아버지의 진심에 당신의 진심을 돌려드리는 일은 곧 십자가의 죽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를 위해 우리가 십자가의 죽임을 당할 수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우리는 두렵습니다.
하지만 딱 우리가 바칠 수 있는 양만큼만 하느님 나라의 행복이 허락됩니다.
이 진심 없이 신앙생활을 하면 아무런 효과도 없고 하느님 나라도 차지하지 못합니다.
조금씩이라도 가진 것을 바쳐봅시다.
그분은 진심이셨습니다.
이제 우리의 진심만이 남았습니다.
그분의 성체 앞에서 ‘난 어떻게 보답해 드려야 할 것인가?’를 항상 생각하며 두려워해야 합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 수원가톨릭대 교수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그는 결코 고통에 굴하지 않았으며 당당히 넘어섰습니다>
끝도없이 다가오는 이런 고통 저런 고통, 고통의 바다를 항해하는 오늘 우리들입니다.
때로 참혹한 고통 앞에서는 그 어떤 위로도 소용이 없습니다.
어정쩡한 위로의 말이 오히려 쓰라린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격이 되고 맙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내 이 사무친 고통, 극심한 고통은 누군가의 더 큰 고통을 통해 어느 정도 해소가 되고 완화가 됩니다.
예언자로서의 하루하루 삶 자체가 고통이었던 예레미야 예언자의 탄원을 묵상할 때마다 제겐 은근슬쩍 위로가 되니 참으로 신기한 일입니다.
그는 어느 순간 얼마나 괴로웠던지 이렇게 외쳤습니다.
"아, 불행한 이 몸!
어머니, 어쩌자고 날 낳으셨나요?
온 세상을 상대로 시비와 말다툼을 벌이고 있는 이 사람을."
극심한 고통 하면 둘째가라면 서러워 하실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역사상 그토록 혹독한 고통을 겪으신 분이 또 어디 있을까요?
지상에서의 짧은 생을 사셨던 예수님이셨지만 그분처럼 심연의 극한 고통을 겪으신 분은 인류 역사상 다시 또 없을 것입니다.
고통의 극점에 서 계셨던 분이 바로 수난 예수님이셨습니다.
결국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면서 겪는 고통이 견딜수 없을 정도로 극심할 때 신앙인으로서 가장 좋은 극복의 비결은 고통의 극점에 서계신 수난 예수님의 얼굴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그토록 극심하고 혹독한 고통을 겪은 예레미야 예언자였지만 고통에 결코 굴하지 않았습니다.
고통을 당당히 넘어섰으며 마침내 멋지게 극복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아름다운 고백에 이르렀습니다.
"당신 말씀을 발견하고 그것을 받아먹었더니 그 말씀이 제게 기쁨이 되고 제 마음에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보물의 비유와 진주 상인의 비유>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또 하늘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자, 가서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샀다.”
(마태 13,44-46)
‘보물’은 하느님 나라, 하느님 나라의 복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 등입니다.
복음, 또는 하느님 나라를 ‘보물’이라고 표현하신 것은 그것만이 유일하게 우리가 얻기 위해서 노력할 가치가 있는 것이고, 다른 것들은 모두 쓸모없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숨겨져 있었다는 말은 모르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 라는 보물을 ‘모든 사람’에게 알려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그 보물을 숨기거나 감추지 말고 온 세상에 선포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마태 10,26-27).
발견했다는 말은 모르고 있다가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실제로는 ‘믿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복음을 전해 들었을 때, 그 복음이 유일한 보물이라는 것을 믿는 사람들은 받아들이고, 안 믿는 사람들은 안 받아들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그것이 보물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니까 그것을 얻지 못한 것에 대해서 속상해 하지도 않고, 자기가 손해를 보았다는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속상해 하기는커녕 신앙인들을 비웃습니다.
(물론 나중에 하느님의 심판대에 섰을 때에는 후회하겠지만.)
보물을 발견하고서 다시 숨겨 둔다는 말은 ‘기쁨’을 강조하는 표현일 뿐입니다.
남이 가로채는 것을 막으려고 감춘다는 뜻이 아닙니다.
비유의 표현만 보면, 그 밭은 남의 밭이고, 밭에 보물이 숨어 있다는 것을 밭주인에게 알리지 않고, 그래서 밭주인을 속여서 밭만 사는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는데, 뜻을 생각하면, 밭에 보물이 숨어 있다는 것을 주인에게 알려 주고, 밭만 사는 것이 아니라, ‘보물’도 함께 사는 것으로 표현해도 상관없습니다.
주인의 눈에는 그것이 보물이 아닌 것으로 보이니까, 속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손해를 보았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는 말은 보물을 차지하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는 뜻입니다.
그 밭이 ‘남의 밭’이 아니라 ‘나의 밭’이라고 해도 뜻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나의 밭’이라면,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는 말을 보물만 남겨 두고 다른 것은 모두 버린다는 표현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사도들이 처음에 예수님을 만난 일은 밭에 숨겨진 보물을 발견한 일과 같습니다(요한 1,40-41).
그리고 그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예수님을 따른 일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그 밭을 차지한 일과 같습니다.
“그들은 ......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루카 5,11)
‘모든 것을 버리고’를 ‘모든 것을 다 바쳐서’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부들을 부르신 이야기에 있는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라는 말은(루카 5,5)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그들의 인생을 상징하는 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날마다 하루하루 먹고사는 일만 걱정하는 인생,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공허함만 남는 인생, 그렇게 살다가 그냥 그렇게 허무하게 끝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지배당하는 인생.
아마도 사도들은 자신들의 인생을 완전히 새롭게 변화시켜 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랬다가 예수님의 복음 선포를 듣고, 또는 세례자 요한의 인도를 받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따르게 되었는데, 그것은 자신들의 인생 전부를 바쳐서 보물을 차지한 일입니다.
밭에 숨겨진 보물을 발견하고 크게 기뻐하면서 그것을 차지한 사람의 예로, 사도행전 16장에 나오는 ‘간수’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간수는 ‘필리피’에서 바오로와 실라스가 박해를 받고 감옥에 갇혔을 때, 그 감옥을 지키던 사람이었습니다.
'... 그들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두 분 선생님, 제가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이 대답하였다.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오."
그리고 간수와 그 집의 모든 사람에게 주님의 말씀을 들려주었다.
간수는 그날 밤 그 시간에 그들을 데리고 가서 상처를 씻어 주고, 그 자리에서 그와 온 가족이 세례를 받았다.
이어서 그들을 자기 집안으로 데려다가 음식을 대접하고, 하느님을 믿게 된 것을 온 집안과 더불어 기뻐하였다."'
(사도 16,30-34)
감옥을 지키는 간수가 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에게 ‘구원을 받는 방법’을 묻는 것은 세속의 눈으로 보면 대단히 특이한 일로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눈으로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바오로와 실라스는 영혼의 자유를 누리고 있었고, 그 간수는 영혼의 자유 없이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제가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는 말은 구원을 받는 방법을 묻는 말이지만, 바오로와 실라스처럼 살고 싶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복음이라는 보물을 구경만 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입니다.
그것을 차지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복음을 믿고, 복음대로 사는 것, 그것이 바로 복음이라는 보물을 완전히 차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복음을 믿게 되었다면, 자기가 차지한 그 보물을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야 합니다.
복음이라는 보물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면 알릴수록 더욱 확실하게 ‘나의 것’이 되는, 그런 보물입니다.
반대로 감추고 있으면 점점 더 ‘나에게서’ 멀어져 가고, 결국에는 ‘나의 것이 아닌 것’이 되어버립니다.
신앙인은 이미 보물을 발견해서 그것을 차지한 사람입니다.
혼자서만 기쁨을 누리지 말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려 주어야 하고, 기쁨을 함께 누리자고 초대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 나라’ 라는 보물을, 또 ‘복음’이라는 보물을 ‘모든 사람’이 함께 차지하기를 바라십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살아 계신 ‘참보물’인 주님 - 발견의 기쁨, 발견의 은총, 발견의 행복>
“하느님,
저는 당신의 힘을 노래하오리다.
아침이면 당신 자애에 환호하오리다.”
(시편 59,18ㄱ)
옛 초등학교 시절의 추억이 참 풍요롭습니다.
오십 년대 육십 년대는 모두가 가난했으나 마음은 참 부자였고 행복했습니다.
공해나 오염이 없는 곳곳의 자연터가 다 놀이터였습니다.
무엇보다 지금은 20-30명으로 줄어든 시골의 모교가 당시는 800명 전체 학생 수였고 동네마다 아이들도 참 많았습니다.
아마 초등학교 시절 잊지 못할 추억 둘은 소풍과 가을 운동회일 것입니다.
봄소풍, 가을소풍시 끝날 때쯤 있었던 보물찾기 행사가 생각납니다.
숨겨진 보물쪽지를 찾았을 때의 기쁨, 그리고 찾지 못해 빈손일 때의 허전함은 누구나의 공통적 느낌일 것입니다.
보물 내용이야 별 수 없지만 보물쪽지를 발견했을 때의 기쁨이 정말 큰 것입니다.
바로 발견의 기쁨입니다.
발견의 은총, 발견의 감사, 발견의 행복입니다.
그대로 보물찾기는 인생을 상징한다 싶습니다.
보물찾기 인생이라는 것이지요.
과연 여러분은 보물을, 참보물을 발견했는지요.
여전히 찾고 있는지요.
아니 아예 보물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냥 살고 있지는 않은지요.
보물찾기를 포기하지는 않았는지요.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하늘 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
그는 값지 진주를 하나 발견하자, 가서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샀다.”
여기 보물과 진주는 모두가 참보물을 상징합니다.
보물이라 다 보물이 아닙니다.
보물인 듯 하나 가짜 보물도 무수합니다.
당장은 기뻐하지만 얼마 못가 시들해지는 세상 보물입니다.
세상 모든 것을 상대화 시켜 시시하게 만드는 참보물입니다.
참으로 참보물을 발견했을 때 세상것들에 집착하지 않고 초연한 이탈의 자유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참보물 앞에서 세상것들은 다 빛을 잃기 때문입니다.
오늘 보물의 비유와 진주 상인의 비유, 모두가 하늘 나라의 비유입니다.
하늘 나라를 살 수 있는 비밀을 알려 주는 비유입니다.
참으로 보물을, 진주를 발견했을 때 비로소 하늘 나라의 기쁨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전자는 우연한 보물의 발견이요, 후자는 찾았을 때의 진주의 발견입니다.
새삼 발견의 기쁨이자 발견의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우연한 듯 하지만 우연이 아니라 은총입니다.
평소 찾는 마음으로 살았기에 은총으로 발견한 보물이자 진주입니다.
과연 이런 참보물은 찾았는지요.
참으로 이런 참보물을 발견했을 때 비로소 충만한 기쁨, 충만한 행복을 살 수 있습니다.
더 이상 보물을 찾아 나서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가 참보물밭이자 내마음이 참보물이 숨겨져 있는 보물밭입니다.
다음 행복기도 중 선물은 보물로 바꿔도 그대로 통합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원보물, 참보물은 주님이요 하늘 나라입니다.
참으로 주님이란 영원한 보물, 참보물을 발견했을 때 참기쁨, 참감사, 참행복입니다.
이런 참보물의 발견은 은총입니다.
참으로 간절히 항구히 찾았을 때 선사되는 참보물입니다.
참으로 이런 참보물인 주님을 찾았을 때, 만났을 때 참부자요 참행복이요 참자유인입니다.
이런 참보물을 찾았기에 수도생활을 참으로 기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참 어리석어, 무지에 눈이 멀어 여기 참보물을 놔두고 밖에서 찾는 사람들입니다.
‘수도자의 성소聖召’라는 얼마전의 고백시가 생각납니다.
“참 좋다, 참 사랑스럽고 아름답다
그러나 웬지 답답하다
연인의 모습들, 부부의 모습들
추호도 부러움은 없다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일 거다
결혼은 아무나 하는게 아닌가 보다
이래서 수도성소의 참보물인가 보다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 2022.7.16.
다음 어제 써놓은 ‘배경이 되어’란 고백시도 생각납니다.
참으로 참보물인 주님을 발견했을 때, 늘 참보물인 주님과 함께 살아갈 때 모두를 비운, 겸손하고 초연한 무욕의 배경의 삶이 가능할 것입니다.
침묵은 사랑입니다.
배경은 사랑입니다.
참으로 모두의 깊은 침묵의 배경이 되어 살고 싶은 것이 제 소망所望이기도 합니다.
“불암산 배경의 하늘이 되라고
수도원 배경의 불암산이 되라고
묵묵히 한결같이
수도공동체의 배경이 되라고
하늘과 산의 배경이 되라고
그리고 낮의 배경인 밤이 되라고
온갖 초목들의 배경인 흙이 되라고
침묵의 배경이 되어 살라고 주님은 말씀하시네”
- 2022.7.26.
참보물 찾기는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찾아 발견해야 하는 살아 계신 참보물인 주님이요 이래야 늘 새 하늘 새 땅의 삶입니다.
참으로 이런 참보물인 주님을 날마다 새롭게 찾아 발견할 때 비로소 안주安住가 아닌 정주定住의 삶입니다.
늘 거기 그 자리에서 늘 샘솟는 기쁨의 우물로, 늘 맑게 흐르는 기쁨의 강으로 살 수 있습니다.
바로 이의 모범이 예수님을 비롯한 무수한 성인들이요, 오늘 제1독서의 주인공, 눈물의 예언자 예레미야입니다.
어제에 이어 극도의 불행을 겪고 있는 서두의 묘사부터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내 눈에서 눈물이 흘러, 밤낮으로 그치지 않는다.
아, 불행한 이 몸!
어쩌자고 날 낳으셨나요?
모두 나를 저주합니다.”
그러나 즉시 예레미야는 참보물인 주님을 확인하고 환호합니다.
참으로 치열한 내적 갈등 중에 기도하는 ‘기도의 사람’ 예레미야입니다.
이처럼 현실의 고통이 크다는 것입니다.
말씀의 참보물을 발견한 예레미아의 고백입니다.
“당신 말씀을 발견하고 그것을 받아 먹었더니, 그 말씀이 제게 기쁨이 되고, 제 마음에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주 만군의 하느님, 제가 당신의 것이라 불리기 때문입니다.”
이런 참보물의 발견에 기뻐하던 예레미야는 돌변하여 신세를 한탄합니다.
얼마나 내적 치열한 갈등중인지 마음에 아프게 와닿습니다.
“어찌하여 제 고통은 끝이 없고, 제 상처는 치유를 마다하고 깊어만 갑니까?
당신께서는 저에게 가짜 시냇물처럼, 믿을 수 없는 물처럼 되었습니다.”
이런 겉잡을 수 없는 회의의 늪에, 수렁에 빠져 허우적대는 예레미야를 살려 내시는 살아 계신 참보물 주님이십니다.
“내가 너를 요새의 청동 벽으로 만들어 주리라.
그들이 너를 대적하여 싸움을 걸겠지만. 너를 이겨내지 못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원하고 건져 낼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얼마나 가슴 벅찬 살아 있는 참보물 주님인지요!
날마다 이런 참보물을 발견하는 기쁨으로, 맛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바로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영원히 살아 계신 참보물인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늘 나라의 기쁨과 행복을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
(시편 103,2)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아, 불행한 이 몸!
어머니, 어쩌자고 날 낳으셨나요?
당신 말씀을 발견하고 그것을 받아먹었더니, 그 말씀이 제게 기쁨이 되고, 제 마음에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예레 15,10.16)
"어머니 왜 나를 낳으셨나요?"
우리 삶이 너무 고단하고 힘들면 한번씩 내뱉는 소리이지요.
나만 힘든 것 같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행복해 보이지만, 사실 모든 사람에게 삶이 버거울 때가 있답니다.
예레미아도 하느님의 예언자로 불림받아 살아가는 것이 너무도 힘들었답니다.
'나보다 불행한 사람이 또 어디 있을까?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렇지만 예레미아는 하느님의 말씀에서 위로와 기쁨과 즐거움을 맛봅니다.
그 힘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여러분도 삶이 너무 힘드시나요?
예레미아처럼 한탄이 나오나요?
괜찮습니다.
이 세상에서 잘 살기가 참으로 어렵답니다.
내 맘과 같지 않고 참 어떻게 살아야 할지 난감할 때도 있답니다.
그때 우리의 유일한 위로와 희망은 하느님의 말씀이랍니다.
오늘도 말씀의 힘으로 힘들지만 하루를 또 살아보자구요.
아무리 힘들어도 그분이 나와 함께 있어주신다니 그것 하나만 믿고 그냥 웃어보자구요.
여러분의 얼굴에 작은 기쁨과 즐거움이 살~짝 멤도는 모습을 그려봅니다.
- 작은형제회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작심삼일(作心三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단단히 먹은 마음이 사흘을 가지 못한다는 뜻으로, 결심이 크지 못함을 이르는 말입니다.
사실 늘 3일이 문제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3일만 참으면, 즉 3일 이내에 원하는 성과를 얻게 되면 자기 결심대로 행동할 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열정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오늘부터 기도하겠다고 다짐했지만, 작심삼일로 끝났다는 분이 많습니다.
원하는 성과가 이 안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내 열정을 불러일으킬 무엇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금주, 금연하겠다는 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금주, 금연을 통한 성과보다 막연하게 끊겠다는 다짐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열정이 생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삼 일에 한 번 열정을 불러일으킬 무엇을 만들어야 한다고 합니다.
용기도 북돋아 주고, 동기 부여해 주고, 도와주겠다는 누군가가 있으면 성공적 다짐이 될 수 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작심삼일로 끝나는 분은 혼자 있는 외로운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
아무튼 작심삼일로 끝나는 나의 결심이 아닌, 끝까지 이룰 수 있는 열정을 계속해서 부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군가와 함께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수도 있고, 자기에게 열정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것들을 계속 찾는 것도 지혜로운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그 진가를 안 사람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귀중하다는 것을 보물과 진주의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주십니다.
사람들은 무엇이든 손에 넣으려는 목표물이 있으면 자기 소유의 모든 것을 동원해서 그것을 가지려고 합니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위험해 보이는 과감한 투자까지도 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까?
이처럼 하느님 나라에 대한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보물이나 진주의 가치를 알고 있는 사람처럼,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이용해서 하느님 나라를 얻으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고 하십니다.
물론 인간적으로는 이 비유에서 이상한 점이 발견되지요.
남의 밭에 숨겨진 보물을 발견하면 어떻게 하는 것이 정상일까요?
보물을 신고해야 정직한 사람이 아닐까요?
세속적인 탐욕이 가득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를 얻기 위한 노력은 아무리 해도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 모두 가고 싶어 하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그 노력은 어떻습니까?
작심삼일로 끝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쉽게 포기하고 좌절 속에서 하느님 나라로부터 멀어집니다.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다시금 따져보면서,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들어가려는 의지가 중요합니다.
이 의지를 위해 앞서 말씀드린 열정을 계속해서 만들어주십시오.
그 열정과 함께 할 나의 이웃을 만드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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