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삿갓-訓長(훈장)
世上誰云訓長好(세상수운훈장호) 세상에서 누가 훈장이 좋다고 했나?
無烟心火自然生(무연심화자연생) 내(煙氣) 없는 심화(心火)가 저절로 일어나네
曰天曰地靑春去(왈천왈지청춘거) 하늘 천 따지 하다가 청춘이 지나가고
云賦云詩白髮成(운부운시백발성) 시와 문장을 논하다가 백발이 되었네
雖誠難聞稱道賢(수성난문칭도현) 정성껏 가르쳐도 칭찬 듣기 어렵고
暫離易得是非聲(잠리이득시비성) 잠시라도 자리 뜨면 시비 듣기 십상이네
掌中寶玉千金子(장중보옥천금자) 손안의 보배 같은 천금 자식 맡겨 놓고
請囑撻刑是眞情(청촉달형시진정) 매질해서 가르쳐 달라는 게 부모의 진정일세
*위 시는 “현대시의 감각으로 풀이한 김갓갓 시집(金笠詩選集)(정민호 역저)”에 실려 있는 것을 옮겨 본 것입니다. 역저자는 “어느 시대 어느 때나 선생은 고달프다. 선생이 훈장이라면 그때의 훈장은 정말 고달팠다.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심화가 일어나고, 하늘 천 따지 하다 보면 어느덧 청춘이 다 지나갔다. 정성을 다해도 칭찬은커녕 잠시만 자리를 떠도 선생 욕하기 일쑤다. 학부형은 매질하여 가르쳐 달라고 하지만 이것은 부모의 심정이요 사실과는 달랐다. 그래서 훈장하기 어려움을 이 시를 통해 나타내고 있다”라고 감상평을 하였습니다.
*김삿갓[1807 ~ 1863, 본명 김병연(金炳淵),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성심(性深), 호는 난고(蘭皐), 속칭 김삿갓 혹은 김립(金笠)이라고 부름, 아버지는 김안근(金安根)으로 경기도 양주에서 출생]은 조선 후기의 시인으로 1811년(순조 11) 홍경래의 난 때 선천부사(宣川府使)로 있던 조부 김익순(金益淳)이 홍경래에게 항복하였기 때문에 연좌제의 의해 멸족되어 당시 6세였던 그는 하인 김성수(金聖洙)의 구원을 받아 형 병하(炳河)와 함께 황해도 곡산(谷山)으로 도망가서 살다 그 다음에 집안이 멸족에서 폐족으로 사면되면서 강원도 영월로 옮겨와 살게 되었다.
과거에 응시하여 김익순의 행위를 비판하는 내용으로 답을 적어 장원급제하였는데, 김익순이 자신의 조부라는 사실을 알고 난 후 조상에 대한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고 벼슬을 버리고 20세 무렵부터 머나먼 방랑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스스로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 생각하고 항상 큰 삿갓을 쓰고 다녀 김삿갓이라는 별명이 생겼고, 전국을 방랑하면서 각지에 즉흥시를 남겼는데 그 시 중에는 권력자와 부자를 풍자하고 조롱한 것이 많아 민중시인으로도 불린다. 아들 익균(翼均)이 여러 차례 귀가를 권유했으나 계속 방랑하다가 전라도 동복(同福:전남 화순)에서 57세로 객사하였다. 유해는 영월군 태백산 기슭에 있으며, 1978년 그의 후손들이 광주 무등산에 시비를 세우고, 1987년에는 영월에 시비가 세워졌다. 작품으로 “김립시집(金笠詩集)”이 있다.
*정민호(鄭旼浩, 1939~, 본관 迎日, 아호 丁巴,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조부 학강(鶴岡)으로부터 한문 수학, 1966년 ‘思想界’ 신인문학상 당선으로 문단 등단, 현역 문단인(시인)으로 활동, 경북문화상, 한국문학상, 한국pen문학상, 한국예총 예술대상 등, 포상으로는 녹조근정훈장(대통령), 예총경주지부장, 경북문인협회장 등 역임, 현재 경주향교 사회교육원 한문지도 강사, 경주문예대학 원장, 시집으로 “꿈의 耕作” 외 15권, 산문집 “시인과 잃어버린 팬티”등, 국역으로 “論語抄”, “鶴岡詩集”, “五言唐音”, “七言唐音”, “唐詩選集”, “교양 明心寶鑑”, “三國史記”, “三國遺事”, “唐詩의 이해와 감상”, “한국인의 한시(漢詩)” 등 다수.
*無烟心火(무연심화) : 연기나지 않게 탄다는 훈장의 마음
云賦云詩(운부운시) : 부가 어떻고 시가 어떻다 하고 설명함
掌中寶玉(장중보옥) : 이 세상에서 가장 보배로운 것이니 여기서는 자식을 말함
撻刑(달형) : 매를 친다는 뜻
첫댓글 남을 훈육하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듯합니다....
그래서 옛말에 선생 똥은 개도 안 먹는다고 했나 봅니다...ㅎㅎ
ㅎ, 존경받는 스승은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댓글 같은 말 듣지 않는 스승이 많이 생겨나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행복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