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신대의 석가섭과 마하가섭존자 이야기(180518~20)
▣ 일 시 : 2018년 05월 18일 ~ 20일
▣ 코 스 : 밤머리재(宿) - 거림 - 세석(泊) - 촛대봉 - 영신봉 - 영신대 - 창불대 - 음양수샘 - 거림
▣ 인 원 : 4명(솔박사님, 안청식님, 김자준님), 20일(세석산장) : 조중제님, 정삼승님
▣ 날 씨 : 아침 최저 기온 5도, 낮 15도
선인들의 유산록에 나오는 세석평전의 지명을 이해하는 데는, 먼저 1472년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遊頭流綠)에 실려있는 몽산화상이 그린 가섭도에 안평대군이 쓴 贊과, 점필재의 문인인 1487년 秋江 남효온 선생의 지리산일과(智異山日課)와, 1489년 탁영 김일손 선생의 속두류록(續頭流錄)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김종직 선생은 몽산화상이 그린 가섭도에 대해서 유두류록(遊頭流綠)에 간단히 언급한 대신 비해당 贊이 실려있고, 김일손 선생의 속두류록(續頭流錄)에는 가섭도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남효온 선생의 지리산일과(智異山日課)에는 다른 유산기에서 보이지 않는 지명이 많이 등장한다. 빈발봉(빙발봉), 소년대, 계족봉, 빈발암 외에도 여러 지명이 나오는데, 세석평전의 미하가섭존자존자 이야기를 풀어가는 또 하나의 중요한 단서가 된다. 유학자들이 기록한 유산기에는 지명에 대한 언급만 했지, 지명에 대한 유래와 설명은 없으니, 선인들의 유산기를 읽는 독자들이 풀어야할 과제라고 생각한다.
蒙山畫幀迦葉圖贊
匪懈堂 李瑢
頭陁第一。是爲抖擻。: 마하가사파존자께서는 두타 수행인 두수를 바르게 실천하시어
外已遠塵。內已離垢。: 밖으로 이미 번뇌를 떨치시고, 안으로는 마음의 때를 벗으셨네
得道居先。入滅於後。: 앞서 道(아라한과)를 얻으시고 뒤에는 적멸의 경지에 드셨으니
雪衣雞山。千秋不朽。: 눈덮인 계족산에 깃들어 천추에 사라지지 않고 길이 전하리라.
[출처 : 1472년 김종직선생의 유두류록]
* 安平大君 : 1418(태종 18)∼1453(단종 1) 조선 초기의 왕족·서예가. 이름은 용(瑢), 字는 청지(淸之), 號는 비해당(匪懈堂)· 단종 즉위 후 둘째 형인 수양대군과 권력다툼을 벌였으나 계유정난으로 희생(35세)을 당함.
1472년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遊頭流綠)에 나오는 안평대군 비해당(匪懈堂)의 贊은 세석평전의 모든 비밀이 들어있다. 석가모니의 상수제자인 마하가섭존자가 출가해서 두타 수행을 제일 바르게 행하시어, 이구지(離垢地)의 경지에 이르러, 마침내 아라한과(道)를 얻고 빈발라굴에서 대중들에게 설법을 행하시다가, 부처님의 가사를 가지고 적멸의 경지에 들어, 계족산 아래 바위 틈에 깃들어. 미래에 도래할 미륵불에게 전하기 위해 석가섭으로 化하여 선정(禪定)에 들어갔다는 것이 비해당 贊의 줄거리이다. 빈발은 마하가섭존자가 출가하기 전의 이름이고, 가섭은 출가해서의 이름이며, 영신봉은 가섭의 영혼(靈魂)이 깃든 계족산(꿋꿋따빠따기리)의 또 다른 상징으로 마하가섭존자의 적멸 이후, 가섭존자의 숭고한 불성을 뜻하는 고유명사로 지칭되었으리라고 추정된다.
♣ 다시 읽어보는 석가섭의 비밀 : http://blog.daum.net/lyg4533/16487817
♣ 1487년 <남효온>지리산일과의 貧鉢峰과 鷄足峰 : http://blog.daum.net/lyg4533/16487923
금요일 오후 밤머리재 데크에서 1박을 한 후 그동안 유산기를 읽고 답사하고, 답사한 후 다시 읽었던 선인들의 유산기를 생각하며 세석으로 스며듭니다. 점필재길과 감수재길을 함께한 분들이라 마음이 든든합니다. 산행의 멤버들이 泊 산행이라는 같은 취미와 선인들의 유람 길을 답사하는 공통 분모를 함께하기란 그렇게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왜 유람 산행이나 먹방 산행을 하지, 골치 아프고 곰팡스럽게 선인들의 유산기를 云云하느냐?'라고 나무라는 분들도 간혹 있습니다.
안개비가 내리는 거림골로 처음 계획과는 달리 불가피하게 정규등로로 올라섭니다. 우의를 가지고 오지 않았으니 정규등산로는 산죽의 물을 털고 올라가는 일이 없어 한결 수월합니다. 날씨가 화창할 것이라는 일기예보는 빗나갔으나, 능선에 올라서면 하늘이 열리고 멋진 운해를 볼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가질만 한 날씨입니다. 운무는 세석교를 지날 때에도, 세석대피소에 이르렀을 때에도 옅은 안개로 덮여있어 하늘이 열리지 않습니다. 세석교를 지나니 어느덧 안개비는 그치고 연분홍 철쭉의 천상화원이 펼쳐지고, 꽃비가 내린 등로를 조심스레 올라섭니다. 샘터에 배낭을 내려놓고 한 동안 쉬고 있는 사이에 짜잔하고 김자준씨가 숲속에서 잎새주 두 병을 가지고 나옵니다. 아무튼 세석고원에서 철쭉의 만개를 축하라도 하듯, 요즘 말로 개이득이라고 하나요.
자리를 옮겨 세석의 습지 데크에서 등산화를 벗고 자리를 잡고 앉아 하늘이 열리기를 기다립니다. 정면에는 점필재의 유두류기행시에서 전괄(箭筈 : 화살 끝처럼 좁은 산마루)로 표현한 창불대와 가섭도의 비해당 贊에 雪衣雞山(설의계산 : 눈 덮인 계족산)이라고 하였고, 1487년 秋江 남효온 선생은 지리산일과(智異山日課)에서 계족봉이라고 한 영신봉에도 운무가 오락가락합니다. 배낭을 내려놓고 빈 몸으로 촛대봉에 오릅니다. 촛대봉은 1472년 점필재 김종직 선생은 유두류록(遊頭流錄)에서 甑峰(증봉), 1487년 추강 남효온 선생은 賓鉢峰(빈발봉), 1611년 어우당 유몽인 선생은 獅子峯(사자봉)으로, 1851년 하달홍의 두류기(頭流記)에 중봉(中峰), 1879년 송병선 두류산기(頭流山記)에 燭峯(촛대봉)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증봉(甑峰)과 빈발봉(賓鉢峰)과 사자봉(獅子蜂)과 중봉(中峰), 그리고 촉봉(燭峰)은 하나의 봉을 시대에 따라 다르게 부른 것입니다. 촛대봉에 오르니 장관의 운무 쇼가 펼쳐집니다.
♣ 촛대봉 명칭의 변천 과정
순
| 문헌 자료
| 촛대봉
| 비고(영신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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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1472년 김종직의 유두류록(遊頭流錄)
| 증봉(甑峰)
| 雪衣雞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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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1487년 남효온의 지리산일과(智異山日課)
| 빈발봉(賓鉢峰) 또는 빙발봉(氷鉢峰)
| 鷄足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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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1611년 유몽인의 두류산록(頭流山錄)
| 사자봉(獅子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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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1851년 하달홍의 두류기(頭流記)
| 중봉(中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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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1879년 송병선 두류산기(頭流山記)
| 촉봉(燭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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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1년 유몽인의 두류산록(頭流山錄) 사자봉
[1611년 4월 5일] 길가에 지붕처럼 우뚝 솟은 바위가 있는 것을 보고서 일제히 달려 올라갔다 . 이 봉우리가 바로 사자봉(獅子峯 )이다. 전날 아래서 바라볼 때 우뚝 솟아 하늘을 찌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던 그 봉우리가 아닐까?(見路傍有石如屋危. 一踴而登. 卽獅子峯也. 昔日從下望之. 峭峭然揷雲漢者非耶)<1611년 유몽인의 두류산록>
일몰
翌日 일출 시간에 맞춰 배낭을 정리한 후 빈 몸으로 촛대봉에 오릅니다. 촛대봉 일출은 천왕에게 모든 산들이 조회를 하듯 장엄하고 찬란한 일출을 연출합니다. 천왕봉이 법왕으로 석가모니 부처라면 빈발라(가섭)가 출가를 하여 법왕을 우러르듯 빈발라굴(촛대봉)에서 오백의 나한이 운집하여 설법을 하는 형상으로 해석하여 빈발봉이라고 한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작년 9월 구절초가 만개한 초가을 촛대봉 아래 시루봉 직전 바위 群에 있는 아기 부처의 가슴에 암각된 出자를 확인하고, 소설 같은 이야기지만 세석일원에 마하가섭의 전 생애가 담겨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으나 오리무중 傳하는 기록이 없으니 시공을 초월한 상상의 여행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석각의 글자가 出과 生의 複字로 보고, 빈발라(마하가섭)의 출생을 의미한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출생과 출가 그리고 열반(涅槃)에 이르기까지 세석의 전체에 마하가섭의 생애가 담겨있다고 봅니다. 마하가섭존자께서 이곳에서 출생하고 출가하여 빈발봉(촛대봉)에서 수행과 설법을 행하시다가 계족봉 아래 가섭대의 바위에 영혼이 깃들어 미래에 도래할 미륵불에게 부처님의 가사를 전해주기 위해 적멸의 경지에서 선정(禪定)에 들어갔다는 스토리가 연결됩니다. 그래서 靈神은 가섭의 寂滅 이후의 다른 호칭이 아닌가 추정합니다. 靈神의 사전적인 의미는 영험한 신 또는 사람이 바라는 바를 들어주는 신령한 힘이 있는 신이라는 의미로 이해하면 마하가섭존자와 靈神은 자연스럽게 연결이 됩니다.
生의 小篆體
세석의 빈발봉과 계족봉 그리고 좌고대(170903)
이곳은 천상록을 연구하시는 두류산인님(임재욱님)이 한 동안 수행을 했던 기도터라고 합니다. 근처에 바로 물이 있고 앞에는 좌선할 수 있는 바위가 있습니다.
부산 조중제 선생의 생선초밥
부산에서 오늘 새벽에 밤을 새우고 올라오신 조중제님이 준비한 생선 초밥입니다. 참치 부위 중 특수부위는 초밥 하나에 10,000짜리도 있다고 합니다. 지난 번 상류암 터에 이어 두 번째 산행에 합류하였습니다. 유산기를 해석하는 능력이 남 다르고 특히 점필재 김종직의 선열암시에서 '우뚝 솟은 바위에서 톡톡 떨어지는 촉촉수 소리는 맑고도 깨끗하구나,'라는 시구에 佔翁에게 완전히 반했다고 합니다. 아침을 먹고 나니 7시입니다. 여유 있게 출발하려고 하는 이유가 있어 시간을 지체합니다. 일행들은 말이 없어도 서로의 마음을 읽고 있습니다. 남은 밥과 찌개를 배낭에 넣고 영신봉을 향합니다. 영신봉은 비해당 贊에서 설의계산(雪衣雞山)이고, 남효온 선생의 지리산일과(智異山日課)에서 계족봉(鷄足峰)입니다. 계족봉은 범어(산스크리스트어)로 꿋꾸따빠다산(Kukkuṭapāda-giri, 屈屈吒播陀山)으로 한문으로 번역하면 계족산입니다.
♣ 영신대에 숨어있는 석가섭의 비밀 : http://blog.naver.com/lyg4533/221087808825
좌고대를 바라보니 단사천님의 '좌고대에 올라'라는 글이 문득 떠오릅니다. 일행들이 모두 좌고대에 오릅니다. 김자준씨는 추강(秋江)이 올랐던 바위에 올라가고, 멋진 단체 사진 한 컷을 연출한 후 일행들과 영신대로 내려섭니다. 영신대에서 석가섭과 석문, 옛 영신사터, 아리왕탑 터, 빈발암터, 영천과 옥계를 둘러보고 영신대 뒤의 기도터에도 들렀습니다. 여기에서 저는 가섭전과 가섭대 석가섭은 동일어로 해석합니다. 가섭대에 마하가섭존자의 영혼이 영원히 깃들어 있기에 사견이지만 가섭전은 별도의 건물이나 바위가 아니고 그 자체를 가섭전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나머지는 여러 번 언급한 내용이라 생략합니다. '좌고대에 오른다.'의 글을 읽으면 세석의 모든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능선으로 다시 올라와서 비로봉을 향합니다. 내가 자준씨를 돌아보고 曰 '김선생은 조봉근씨처럼 완폭대 석각은 찾지 못하고 어찌 술은 이리도 잘 찾으십니까?'라고 하자 일행들이 破顔大笑(파안대소)합니다. 조망 바위에 올라 비로봉을 가리키며 '비로나자불(비로봉)이 가섭(석가섭)을 내려다보는 형국이다.'라고 설명하니 다들 고개를 끄덕입니다.
♣ 좌고대에 올라 : http://blog.daum.net/lyg4533/16487834
좌고대
영신대
아리왕탑(阿里王塔) 터
[1611년 4월 5일] 비로봉(毘盧峯)은 동쪽에 있고 , 좌고대는 북쪽에 우뚝 솟아있고 , 아리왕탑 (阿里王塔 )은 서쪽에 서 있고 , 가섭대 (迦葉臺 )는 뒤에 있었다.(坐高臺峙其北. 阿里王塔樹其西. 迦葉臺壓其後) <유몽인의 두류산록>
영천(靈泉)
옛 영신암터
영신대와 우측상단 석가섭
石門
玉溪
영신대, 석가섭과 비로봉
영신대 위 기도터
1611년 유몽인의 두류산록에 나오는 비로봉
[1611년 4월 5일] 비로봉(毘盧峯)은 동쪽에 있고 , 좌고대는 북쪽에 우뚝 솟아있고 , 아리왕탑 (阿里王塔 )은 서쪽에 서 있고 , 가섭대 (迦葉臺 )는 뒤에 있었다.(坐高臺峙其北. 阿里王塔樹其西. 迦葉臺壓其後) <유몽인의 두류산록>
창불대로 내려와 조셰프가 즉석에서 초밥을 만들어 요기를 하였습니다. 영신봉 능선을 내려서며 기도터에서 조망을 보고, 옛날 외세석 마을터를 지나 미산 선생님 박터를 둘러보고, 음양수샘으로 내려섭니다. 우천 허만수 선생의 기도터와 움막 터를 지나 첫 계곡을 횡단하는 지점에서 남은 부식으로 점심을 먹고 정규등로로 나와 한 걸음에 거림으로 내려와 의미 있는 산행을 마칩니다.
세석은 1472년 김종직의 유두류록에서 자여원(沮洳原)으로 로 '낮고 습기있는 지대'를 뜻하는데 <詩經 魏風>篇에 '彼汾沮洳 言采其莫' 라는 시구에서 인용하였고, 沮洳原은 '물이 많은 습지 고원'쯤으로 이해하면 된다. 1545(乙巳)년 4월 점필재의 길을 역으로 오르며 천왕봉까지 점필재가 간 곳을 빠짐없이 답사한 黃俊良(1517~1563)이 남긴 錦溪集에도 細石을 저여원(沮洳原)이라고 하였다. 1851년 하달홍의 두류기(頭流記)에는 적석평(積石坪)이라고 하였고 음양수 부근을 외적평(外積坪)라고 하였으며 1871년 裵瓚은 유두류록에서 細磧平田[(세적평전) : 작은 돌이 많은 평전]이라고 하였고, 1879년 송병선의 두류산기에서는 세석평(細石坪)이라고 하였으며, 음양수 부근을 외세석(外細石)이라고 하였다. 1903년 안익제의 두류록에 드디어 오늘의 명칭인 세석평전(細石坪田)이 등장한다.
* 세석평전의 지명에 대한 변천 과정
덕산으로 이동하여 보현갈비에서 하산주를 마신 후, 오늘 새벽 세석으로 초밥을 공수한 조셰프는 차에서 깊은 잠에 빠졌고, 나머지 일행과 작별을 한 후 산천재를 둘러보고 한 동안 천왕봉을 바라봅니다. '아! 덧없는 世上事 가련하구나.! 항아리 속에서 태어났다 죽는 초파리떼 같은 중생들이여! 다 긁어모아도 한 웅큼도 채 되지 않거늘, 저들은 조잘조잘 이기적으로 자기만을 내세우며 옳으니 그르니 기쁘니 슬프니 하며 나대는 꼴이 어찌 크게 웃을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嗚呼. 浮世可憐哉. 醯鷄衆生. 起滅於甕裏. 攬而將之. 曾不盈一掬. 而彼竊竊焉自私焉 是也非也歡也戚也者. 豈不大可噱乎哉.) [유몽인 선생 두류산록1611-04-04]' 어우당 유몽인 선생의 말씀을 되새기며 산행기를 마칩니다. 함께하신 분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잘 보고 잘 배우고갑니다.
영신대와 영천 가 본지 오래되어
이제는 가물가물합니다.
님의 지리사랑이 예까지 전해져옵니다.
대단한 님들...
덕분에 배우고 갑니다.
엄지척~!!
멋진 산행기 감탄 남깁니다.
어, 자준이형을 여기서 보네요.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