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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승윤이랑 영화를 보고 밥을 먹고 헤어져 각자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어차피 내일 되면 볼 얼굴, 굳이 뭐 더 있고 싶다거나 아쉽다는 감정은 없었다.
정거장을 지나칠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올랐다 내리고, 그 사이에서 난 괜시리 뻘줌해져
오는 마음에 핸드폰만 만지작거렸다. 승윤이에게 문자나 해볼까하다 할 얘기도 아까 다 끄집어내서
하고 또 하고 계속 수다만 떨어대서 없었다. 그냥 이대로 묻혀가야지.
그리고 난 곧바로 쏟아지는 하품의 연속에 잠시 잠에 들었다.
ㅡ너의 그림자에 묻다,
다시 잠에서 깨었을 때는 내릴 정거장까지 세정거장 정도 남아있는 상태였고,
잠도 깊이 자지 않은 터라 쉽게 깨어날 수 있었다. 멍하니 창 밖 풍경을 바라보며
생각을 비우고 있다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마침 내릴 정거장이었다.
하마터면 몇 정거장을 더 갔을거란 생각에, 만약 그랬다면 집까지 어떻게 걸어가나
상상만해도 다리가 아파옴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나 벨을 눌렀다.
오죽 승윤이랑 수다 떨며 걸어다녔으면 발톱이 아파올까.
할 말, 못할 말 있는데로 다 하고는 왔지만 또 다시 내일이 되면 뭐가 좋다고 수다 폭풍이 이어 질 것이다.
그러다 아까 승윤이랑 했던 말들을 곰곰히 생각하다가 뒷문이 열리자 땅을 내딛었다.
'야, 그냥 너도 잘생긴 사람 만나면 번호 물어봐. 이뻐져서 연락한다고 말이야.'
순간 내 머릿속을 지나가는 말 한마디. 에이 설마. 여자가 물어보면 뭔가 그런단 말야. 그 착한 천사면 또 모를까.
그나저나 이 말 웃기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앞을 보았을 때 나는 이 말이 어쩌면 옳을지도 모를 생각을 했다.
"…, 그래서 말야."
친구와 함께 버스정류장 의자에 앉아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나와 눈이 마주친 그때 그 천사였다.
어쩌면 이렇게 타이밍도 딱 맞아 떨어지는지. 마침 자신의 생각을 했는지를 아는 지 모르는 지
나와 눈이 마주친 상태 그대로 살짝 머리를 숙여보인다.
아, 아, 아는 척 해준거 맞지!
나도 얼떨결에 똑같이 고개를 숙여주고야 느꼈다.
주체할 수 없는 떨림이 온 몸을 흔들고 눈 앞이 아찔해진다.
"마태랑, 듣고있냐?"
"어."
아직까지도 나는 아찔한채로 서있는 상태. 나와 함께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은
이미 각자의 갈 길로 흩어진지 오래였고 나는 홀로 멍하니 천사를 바라보며 서있었다.
그리고 그런 나를 바라보며 살짝 인상을 찌푸린 천사는 입을 움직였다.
'위험해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입모양이 말해주었다.
최승윤! 승윤아, 니 말을 실천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굳은 결심을 한 채 달달 떨리는 손을 마주 잡고 천천히 천사와 그의 친구 쪽으로 향했다.
천사가 가까워져서 내 앞에 위치해있고, 그의 친구 마저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올려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며 의문을 품고 있는 눈을 보자니 더 많이 떨려와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아버렸다.
아, 다시 갈까? 하지만 여기까지 와 놓고?
이대로 가면 다시 볼 수나 있을 것같아? 망설이지마, 신도여루!
할아버지! 도와주세요! 할아버지의 하나뿐인 손녀가 반한 천사란 말이에요.
두 눈을 꼭 감고 두 손을 꼭 쥐고 핸드폰을 내밀었다.
창피함은 잠시이고, 천사와의 헤어짐은 오래다! 조금만 창피해지자, 신도여루!
"번호 좀 주세요!"
주체할 수 없이 떨리는 마음과 그 마음과 똑같이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내밀었건만
어째 돌아오는 말이나 행동이 없다. 불안한 마음이 어떻게 된 건지 힐끗 실눈을 떴다.
"…. 이름이 뭐에요?"
"네?"
"그 쪽. 이름이 뭔데요?"
"아, 아…, 신도여루! 신도여루에요."
"이름이 참…. 이쁘네요."
내 이름에 기다렸다는 듯이 그 날의 기억처럼 다시 한번 살짝 웃어보이더니
손의 핸드폰을 가져가 번호를 눌렀다.
그러니까 지금 이게…, 내가 번호 딴 거 맞지? 그리고 이 사람이 내게 번호를 주고 있는 거 맞지?
이러고 보니까 내 얼굴이 그리 못생긴건 아닌가봐!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에 모락모락 피어나는 설레임이었다.
"제 이름은 아세요?"
"아뇨."
얼핏 들었던 것 같으나, 말 그대로 정말 얼핏이라서 기억이 나지를 않는다.
마…, 마 뭐였던 것 같은데.
"마태랑이에요. 마태랑."
"아, 마태랑…."
입 안을 감도는 그 이름을 다시 한번 읊조리며 핸드폰을 건네받고는
전화번호부에 '마태랑'이라고 저장을 시켰다. 아싸! 승윤아, 어쩌면 나는
잘생긴 사람들에게 먹히는 얼굴인가봐! 그래, 그런 거 같아! 그렇지 않다면
왜 번호를 주겠어. 괜찮게 생겼으니까 주는거겠지? 뭐, 내가 인간답게 생겼기는 하니깐.
"하. 감사해요! 정말 감사합니다!"
기쁜 마음에 꾸벅꾸벅 인사를 하고, 뒤돌아섰다.
희망으로 부푼 가슴에 마치 핸드폰이 내 보물인냥 꼭 안고서 한 발자국씩 천천히 걸었다.
집에 가서 문자해봐야지. 뭐라고 문자해보지?
승윤이가 이 사실을 알면 뭐라할까. 간도 크겠다고 하겠지. 운명이 틀림없어. 그래!
그 때 밤 이후로 또 이렇게 만나고, 번호까지 주는 걸 보면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아니잖아?
"아, 어떻게. 너무 떨린다."
이미 발갛게 변했을 볼을 손등으로 만지며 다시 걸었다.
물론 약간의 창피함도 있었지만 지금 내 기분은 최고조에 머물러 있었기에 그런 창피함 따위는
기분 좋게 넘길 수 있었다. 물론 잠시 후엔 아니였지만 말이다.
그렇게 몇 발자국이나 떼었을까 뒤에서 다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천천히 걸었기 때문에, 그리고 발걸음을 돌린지 몇 걸음도 안됐기에 그들의 대화는 충분히 내 귀에 들릴 수 있었다.
"야, 마태랑. 언제부터 네 취향이 저랬냐?"
마태랑의 옆에 앉아있던 친구의 말이란건 알았겠지만, 그 순간 위로 치솟고 있던 기분이
급격하게 가라앉는 걸 느꼈고, 조용히 있으면 귓가에 꽉 채워졌을만큼 거칠게 뛰고 있던 심장이
아까와는 또 다른 기분으로 뛰고 있음을 느꼈다. 이 말을 듣기 전보다 더 묵직하고 크게.
가슴이 아프다. 그래, 내가 무슨 생각을 한거야. 다 말도 안되는 거였잖아.
결국은 도망치듯 그 자리를 벗어나봐도 내 마음 속에 남은 상처는 어쩔 수가 없었다.
"뭘 기대한거야…. 바보같이."
ㅡ너의 그림자에 묻다,
"야, 신도여루! 자냐?"
"응…, 잠 와…. 왜?"
"아니. 매점가자고. 싫음 말구."
"매점? …그래, 가자."
베고있던 키티 쿠션을 가만히 책상 위로 올려두고는 교복을 단정히 하고는 자리에서 벗어났다.
뭔가 이상한 느낌에 뒤를 돌아보면 유주가 아까 그 자리 그대로에서 가만히 날 지켜보고있었다.
저게 자기가 가자고 해놓고는 뭐하는짓이야. 자는 사람 잠도 다 깨워놓고선.
"뭐해. 안와?"
"아, 가야지. 가. 그나저나 너 요즘 이상하다?"
"뭐가?"
어느새 내 옆으로 와 팔짱을 낀 유주. 이상하다니 뭐가 또 이상하다는 건지.
매점을 가기 위해서 반을 벗어나 위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아파?"
"아니. 안 아픈데?"
"근데 요즘 왜 이렇게 기운이 없어? 무슨일있어?"
"무슨 일은. 그냥 잠와서 그런거야. 아이구. 요즘 왜 이렇게 잠이 오는지."
시도 때도 없이 덤벼드는 졸음에 두 눈을 비비고는 힘을 줘 앞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매점이 보이기 시작한다. 올라올 때만해도 배고프지 않았는데 막상
매점을 보니 왜 이렇게 또 배가 고파오는 건지. 먹고 자고 또 먹고 자고.
이래서 봄은 싫어. 잠이 너무 온단 말야. 먹고싶은 것도 많아지게 되고.
유주가 빵을 사고 봉지를 벗겨내 입에 한 입 물고서는 내게 말을 걸었다.
"넌 안 먹어?"
"응. 돈 없어."
"돈? 그냥 골라. 사줄께."
"진짜?"
"응. 머리 묶으고 온 거 보니까, 또 늦잠자서 머리도 못 감고 나왔네. 아침도 못 먹었지?"
쫌생이 송유주가 뭔 일이나 싶어서 의심쩍게 바라보았지만 그에 유주는
그저 손사레만 치며 고르라고 할 뿐이었다. 나중에 이걸 빌미로 얼마나 뜯길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배가 고픈 건 어쩔 수 없는 현실이기에 유주가 빵을 사주는대로 받고는
매점 앞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요즘 제헌이는 왜 그렇게 바빠?"
"제헌이? 여자친구 생긴 거 같던데?"
아차차. 말 잘못했다. 뒤늦게 깨달은 입방정에 얼른 입을 꼭 닫고 살며시 유주의 눈치를 살폈다.
예상대로 유주는 손으로 입술을 뜯으며 심각한 얼굴이었다.
정말 난 바보인건가. 유주가 제헌이를 좋아하는 거 뻔히 다 아는데 어떻게 이렇게 쉽게 말했는지.
다시한번 유주의 얼굴을 보았으나 방금 전과는 비교도 안되게 울상이었다. 곧 울듯이.
"여자…, 친구?"
"아, 음…."
이걸 어떻게 말하나. 사실 김제헌에게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추측은 추측이 아닌 거의 확정이나
유주에게 말하면 유주는 분명 울텐데. 유주가 제헌이랑 아는 사이도 아니구 내 옆에서 그냥 몇번
본 걸로 좋아하고, 혼자 마음 졸이는 이 아이에게 여자친구가 있다고 말한다면 더 미안해진다.
그래, 그런 것 같다고만 하자. 거의 적은 가능성으로 말하자. 그게 좋겠어.
"유…,"
"여기서 뭐하냐, 신도여루."
'유주야, 그냥 나 혼자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라고 말하려는 순간, 양반도 아닌 김제헌과
이수현이 와서 말을 걸었다. 꼭 하필 이럴때 눈에 띄는 김제헌. 유주가 보고싶다고 할 때나
좀 나타주는 건 바라지도 않고, 그냥 해명이나 하고 나타났으면 말이라도 않지.
나는 분명히 말할 타이밍을 놓친거다.
"보면 몰라? 빵 먹어!"
눈치도 없지. 눈이 있으면 지금 유주가 어떤지 봤을텐데 그냥 지나가주지는.
아무리 모르는 사이라 하더라도 눈에 익혔을만 한데. 역시 너란 놈은 안돼, 김제헌.
그렇지. 너한테는 유주가 아깝지.
심술궂은 마음에 말이 날카롭게 나갔다. 그에 인상을 찌푸리며 내 옆의 의자에 털썩 앉아 말거는 김제헌.
가, 가란말이야. 김제헌! 여기 있지말고 어서 가버려!
"또 왜 그래. 그 날이야?"
이어지는 김제헌의 말에 할 말을 잃고는 입이 턱 벌려졌다.
아무리 어렸을 적 부터 볼 거, 못 볼 거 가리지 않고 자랐다지만 어떻게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해!
"이게 미쳤나! 못할 말이 없어."
손을 들어 김제헌의 등을 한 대 쳤다. 그러자 '아야야.'하며 말도 안되는 엄살을 부리며
이어서 날아오는 나의 다른쪽 팔을 붙잡고는 자기 딴에는 귀여운 웃음을 지어보였다.
"안 놔?"
"그럼 왜 이렇게 까칠하시나."
"뭐가 까칠하다는 거야, 이 바보가."
"아…, 너 박나래 때문에 그러지. 내가 너랑 일, 이년도 아니고 오빠가 여자친구가 생길 수도 있는거지 그런 걸로 삐지냐?"
"……."
눈치랑 뻔뻔한 말솜씨랑 바꿔치기 한 놈이 뭐라는거야! 이따 이 놈들이 조용히 사라지면
유주에게 사실 이러이러하다고 해명하려했건만 단단히 사실확인을 해주는 김제헌 덕분에
내 화는 머리 끝까지 치솟았다.
"오빠가 여자친구가 생겼다해도 질투는 하지마라. 여자가 그럼 추하다."
진짜 바보 아니야. 분위기 파악 하나 못 해? 옆에서 이수현이 김제헌을 툭툭 치며
눈치를 주었는데도 입을 잘만 놀리고 있다.
"이 자식이…!"
"여루야, 나 반에 먼저 가볼게."
"어? 유주야!"
유주가 도망치듯이 반으로 홀랑홀랑 사라지고 나서 남는 건
아직까지도 눈치 못챈 멍청이 김제헌의 독백.
"그러니까 진작 오빠한테 잘하지… 악! 왜 때려!"
더 이상 못 들어줄만큼 착각 속에 허우적대는 김제헌의 정강이를
뻥하니 축구공차듯 차주고는 돌아섰다. 뒤에서 '신도여루! 아 씨, 신도여루!!'
내 이름을 계속 외치는 김제헌을 뒤돌아보지도 않고 매점을 빠져나가려 했다.
"신도여루."
뒤에서 날 잡아채는 손. 정강이 까인 김제헌이 그새 괜찮다는 듯 날 따라올리 만무했고,
그렇다면 이건 이수현이다.
"어. 수현아."
김제헌의 다른 친구들이었으면 마음에 탐탁지 않았을텐데, 이 이수현이란 아이는
내가 이제껏 본 김제헌의 친구들 중에 가장 마음에 들 정도로 괜찮은 애였기에
손이 잡혀도 아무 말 안하고 기다려주었다.
"이번 주말에 말이야. 괜찮아?"
괜찮냐니? 뭐가?
"뭐가 괜찮아?"
"아, 그게…. 그 시간."
한참 망설이다가 말을 꺼내는 이수현.
이 말이 꼭 수줍게 들렸다면 난 미친거겠지.
"시간이야 괜찮은데, 김제헌이…"
"아. 제헌이가 시킨거 아냐. 그냥 영화나 보자고."
"너랑 나만?"
"응. 괜찮아?"
"김제헌만 없다면. 그럼 문자로 약속 잡자."
"알았어."
"아 참참! 그리고 김제헌한테 나 화 났다고 전해줘. 화 풀리기 전까지 말 걸면 죽여버리겠다고!"
"응. 가봐."
웃으며 손 흔들어 주는 수현이에게 나도 똑같이 손을 흔들어 주고는 반으로 내려갔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수현은 애가 참 괜찮단 말야. 김제헌 친구 중에 이수현이 제일 괜찮은 게 아니라
이수현 친구 중에 김제헌이 있다는게 내가 다 부끄러울 정도로 말이야.
그나저나 수현이와는 김제헌과 만날 때 몇 번 보고, 말도 몇 번 해봤지만 둘이 따로 만나는 건
이번이 처음인데…. 왜 만나자고 한거지? 김제헌 때문인가?
더 신경쓰며 생각해 볼 수도 있겠지만, 교실 문에 당도한 내게 더 중요한 일은
유주에게 이 일을 어떻게 할 것이냐 였다.
첫댓글 잙읽었어요ㅇ_ㅇ 아~~ 지금 학교에서 컴퓨터 시간인데 자율이라고 해서 소설 읽는 중이예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