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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6장
14 (주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헤롯왕이 그에 관하여 듣고 말하기를 “침례인 요한이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났으므로, 그의 안에서 능력 있는 일들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하더라.
15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그는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는 선지자이거나 선지자들 가운데 한 사람과 같다.”라고 말하더라.
16 그러나 헤롯이 이 말을 듣고 말하기를 “그는 내가 목을 벤 요한이라. 그가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났느니라.”고 하더라.
마침내 예수의 명성이 헤롯에게까지 이르렀고 헤롯은 주께서 "침례인 요한이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14절)난 분으로 추측했다. 왜 그런것인가? 양심의 가책 때문이다: 헤롯은 요한을 목베어 죽였었다(16절).
셰익스피어는 그의 햄릿이라는 작품에서 이렇게 썼다. "양심은 우리 모두를 겁쟁이로 만든다." 달리 말해서 우리가 올바로 행하지 않는 이유는 때로 양심의 가책을 덮으려 하기 때문인데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의 옷장에서 뼈들을" 발견하는 것을 원치 않는 것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덫에 걸리나"(잠 29:25). 따라서 헤롯왕은 "사람을 두려워"함으로써 양심이 더럽혀진 전형적인 사례라 할 것이고 우리는 본문을 다루면서 그 점에 대해 분석할 것이다.
이제 14-15절 사이에서 여러분은 당시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바라본 세 가지 시각을 볼 수 있다(참고. 8:28). 어떤 이들은 기적을 행하시는 주께서 부활한 침례인 요한이라 여겼고, 다른 이들은 주께서 "주의 크고 무서운 날이 오기 전에"(말 4:5) 등장한 엘리야("Elias"는 엘리야의 헬라어 표현이다)라 생각했다. 또는 주께서 구약의 선지자들 중 한 명이라 여긴 사람들도 있었는데 마 16:14에는 사람들이 주께서 예레미야라 말했음이 나온다. 이 추측 중 어느 하나도 자유주의자들이 그려낸 "예수", 길고 부드러운 옷을 걸치고 꿀 떨어지는 목소리로 "평화를 위해 일하는 자들에게 복이 있으리, 그들은 하나님을 보리니."라고 말하고 다니는 모습과는 맞지 않는다.
그 선지자들은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 중 가장 투박한 인간형들이다. 침례인 요한은 자신이 침례를 주는 것을 보러 나온 바리새인들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너희 풀숲에 있는 뱀 같은 자들아, 하나님께서 너희를 치시고 불태우시기 전에 회개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눅 3:7-9의 "원문"을 보라).
엘리야는 "우리 아버지"와 "아베 마리아"를 되뇌이며 묵주를 돌려대는 그 바알 선지자들을 조롱했다(왕상 18:26-27). 다른 사람의 종교를 조롱하는 설교자를 상상할 수 있는가?! 엘리야는 그렇게 했다.
예레미야는 그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설교했다. "느부캇넷살이 이 성읍으로 들어올 것이며 그가 오면 여자, 아기, 아니면 '연장자 시민들'을 가리지 않고 다 죽일 것이다.' 그는 너희의 아이들을 너희 앞에서 죽일 것이며 죽이지 않은 자들은 사슬에 묶어 바빌론으로 끌고갈 것이다. 그는 이 성읍을 폐허로 남겨둘 것이며 성전도 불태울 것이다." 이것이 "눈물의 선지자"가 한 말이다.
소선지서에 보면 한 제사장이 아모스를 찾아와서 이렇게 말한다. "너는 여기 하나님의 집(벧엘)에서 설교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이는 이곳이 "왕의 예배당"(암 7:13)이기 때문이다. 아모스는 그 사람의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네 아내가 어떻게 될지 알려주겠다. 주께서 그녀를 내보내셔서 '거리의 여인'으로 만드실 것이다. 주께서 앗시리아인을 보내셔서 너의 자녀들을 죽이실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하나님께서는 이 땅 전체를 오염된 쓰레기장처럼 만드실 것인데 너는 거기서 죽으리라"(암 7:17). 아모스는 그런 선지자였다 - "선지자들 가운데 한 사람."
여러분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가 어떤 말씀을 썼는지 아는가? 그는 이렇게 썼다. "보라, 내가 너희의 씨를 썩게 하고 너희 얼굴에는 똥, 곧 너희 엄숙한 명절의 똥(dung)을 바르리니"(말 2:3).여러분은 현대 역본들이 이 똥이라는 단어를 업데이트하는 데 성공했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노라." 하나님께서는 말라키를 통해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 얼굴에 거름을 바를 것이다." 예수님과 비교된 "선지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이런 말을 한 것이다. "온화하고, 상냥하고, 정중한" 예수께서 이런 식으로 말씀하셨다고?
밥 존스 시니어는 이렇게 말했다. "구약 선지자들은 '설탕 막대' 같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짜디짠 사람들이었다." 상처에 소금을 뿌리면 쓰리다. 예수께서 비견되신 구약 선지자들은 소금 같은 사람들이었다. 여러해 전 밥 존스 대학 설립자가 죽고 난 후에 그 학교의 성경 학부 학장이 뭐라고 말했는지 아는가? 스튜어트 커스터는 킹제임스 성경 논쟁의 진실(밥 존스 대학 출판부, 1981, 30페이지)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 중에서 일점의 신랄함이나 불친절함도 찾을 수 없다." 정말 없다고?!
"너희 뱀들아, 독사들의 세대야, 어떻게 너희가 지옥의 저주에서 피할 수 있겠느냐?"(마 23:33).
"내버려 두라. 그들은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들이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고 하시더라"(마 15:14).
"너희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마 23:17, 19).
"너 눈먼 바리새인아"(마 23:26).
"가서, 그 여우에게 말하라"(눅 13:32).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나와서 너희 아비의 정욕을 행하고자 하는도다"(요 8:44).
"경건한 학교"(그것을 무엇이라 부르건)에서 가르치는 그 자는 구원받지 못한 자유주의자처럼 이야기한 것이다. 스튜어트 커스터는 소금 같은 선지자를 조엘 오스틴 같은 "설탕 막대"로 바꿔서 제시하려 한 것이다.
16절은 침례인 요한이 엘리야의 유형과 같은 선지자라는 것을 증거하는 구절 중 하나이다. 엘리야가 재림 전에 나타나서 목베임 당하는 것처럼 침례인 요한도 목베임 당한다(계 11:7 참고. 계 20:4). 헤롯은 침례인 요한이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났다고 생각했는데 재림 전에 그런 일이 엘리야에게 실제로 일어날 것이다(계 11:11). 환란 성도들은 성전 제단에서 살해당한 다음(계 6:9) 그들은 양처럼 제물로 바쳐질 것인데(시 44:22) 레위기에 보면 제물로 드려지는 그 양, 염소, 소들은 목을 자르게 되어 있다(레 1:8, 12). 이 주제에 대해 더 자세히 공부하고자 하면 시 16:4, 사 6:13을 참고할 것을 추천한다.
17 헤롯이 그의 아우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위해 친히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붙잡아 감옥에 가둔 적이 있었으니, 이는 그가 그 여인과 혼인하였음이며
18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기를 “당신이 당신 아우의 아내를 취한 것은 부당하도다.”라고 말하였기 때문이라.
19 그리하여 헤로디아가 요한에게 원한을 품고 죽이려고 하였으나 할 수 없었으니
17-18절은 왜 1:14에서 헤롯이 요한을 "감옥에 가둔" 것인지 이유를 보여준다. 헤롯은 자기 아우 빌립의 아내와 결혼함으로써 모세 율법을 어기고 간음을 저질렀는데(레 18:16, 20:21) 요한이 헤롯의 그 행실을 엄하게 질책했다.
17절과 19절에 등장하는 문제의 인물 "헤로디아"가 침례인 요한을 죽이면서 만찬을 즐기는 것을 보라. 그녀가 "자기 조랑말"을 헤롯의 "마차"에 묶은 것은 헤롯이 헤롯 대왕의 왕업을 물려받을 첫번째 계승자였기 때문이고 어떤 설교자도 그녀의 야망을 좌절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역사의 많은 여인들이 자기 배우자를 드롭킥으로 차서 지옥에 보내거나 그의 인생을 하나님의 뜻에서 탈선시켜 버렸다. 구약 성경의 아합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났다: 이세벨은 자기 남편을 충동질해서 그를 북이스라엘 열지파의 왕들 가운데 가장 사악한 왕으로 만들었다(왕상 21:25). 나는 많은 크리스찬 청소년 캠프에서 그런 일을 보았는데 한 청년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려고 하는 순간에 옆에 있던 그의 여자 친구가 손을 뻗어 그의 무릎에 대고 "그러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달함으로써 저지하는 그런 장면들을 보았다.
많은 남자들이 성경침례교회에 와서 설교들을 듣고, 그들은 참 설교와 성경적 교리가 무엇인지 생애 최초로 알게 된다. 그는 이 교회에서 좀 더 배우고 싶어하지만 그의 아내는 그러한 남성적, "마초적", "광신적 애국주의적" 설교를 수용하지 않는다. 그녀는 분명한 어조로 남편에게 말하기를 그가 그녀와 그 목회자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잘 지내는 나눔의 목회"를 하는 길 저편의 교회로 가서 어떻게 아내로 하여금 원만하게 가정을 운영하게 할 수 있는지 가르치는 "설교자"의 말을 듣는다.
20 이는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며, 그를 주목하였고, 또 그의 말을 듣고서 많은 일을 하였으며 기쁘게 들었기 때문이라.
21 그런데 마침 적절한 날이 왔으니, 헤롯이 그의 생일에 그의 고관들과 군 지휘관들과 갈릴리 유지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더라.
22 그때 앞서 말한 헤로디아의 딸이 나와서 춤을 추어 헤롯과 또 그와 함께 앉아 있는 사람들을 기쁘게 한지라, 왕이 그 소녀에게 말하기를 “무엇이든지 네가 원하는 것을 나에게 구하라. 그러면 내가 너에게 그것을 주리라.”고 하고
23 또 그가 그 소녀에게 맹세하기를 “무엇이든지 네가 나에게 구하는 것을 네게 주리라. 내 왕국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고 하니라.
24 그 소녀가 가서 자기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무엇을 구하리이까?”라고 하니, 그녀가 말하기를 “침례인 요한의 머리라.”고 하더라.
25 그러자 그 소녀가 곧 왕에게 황급히 와서 구하여 말하기를 “왕께서 지금 침례인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서 나에게 주시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하더라.
26 왕은 심히 난처하였으나, 자기가 한 맹세와 또 자기와 함께 앉아 있는 사람들 때문에 그 소녀의 청을 거절하고 싶지 아니한지라.
27 왕이 즉시 사형집행인 한 명을 보내어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고 명령하니 그가 가서 감옥에서 요한을 목베어
28 그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그 소녀에게 주니, 소녀가 그것을 자기 어미에게 주더라.
29 요한의 제자들이 그 소식을 듣고 가서 그의 시체를 가져다가 무덤에 장사하니라.
앞서 말했다시피 헤롯은 양심에 관한 문제를 연구하는 좋은 사례이다. 20절에서 헤롯은 양심이 깨어났는데 그는 침례인 요한의 말을 "기쁘게" 듣고 "많은 일을" 하였다. 그런데 22절에서 헤롯의 양심은 춤으로 인해 화인맞는다. 그리고 결국 빌라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헤롯왕에게 보냈을 때 주께서는 그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으신다(눅 23:8-9). 예수께서는 자기 양심을 죽여 버린 헤롯 같은 사람에게 하실 말씀이 없었던 것이다.
빌라도처럼 헤롯도 도덕적인 비겁자였다: 그는 죄의 자각에 대해 올바로 반응할 용기가 없었다. 세상에는 육체적인 면에서 용기가 충만하지만 도덕적으로는 매우 비겁한 사람들이 많다. 다윗 같은 인물조차 도덕적으로 겁쟁이가 되는 경향을 갖고 있었는데 그는 필리스티아 군주를 두려워하여 그 앞에서 미친 척을 했었다(삼상 21:12-14). 엘리야는 이세벨을 두려워한 나머지 목숨을 건지기 위해 도망쳤다. 엘리야가 450명의 바알 선지자들을 죽였던 사람인데도 그랬다. 요한복음 9장에서 안식일에 예수께 치유받은 소경의 부모는 아들을 위해 변론하기를 겁냈는데 이는 그들이 "회당에서 출회"(요 9:22)당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기로 성경에 "두려워 말라"는 말씀이 그렇게 많이 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람들이 옳은 행동을 하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계 21:8에서 불못에 간 사람들을 언급할 때 "두려워하는 자들"이 동성애자들("가증스런 자들"), 살인자들, 음행하는 자들, 우상숭배자들보다 앞에 언급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만일 어떤 카톨릭교도가 자신이 카톨릭 교회 묘지에 묻히지 못하는 것이 두려워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다면 그는 지옥으로 가는 것이다. 만일 어떤 유대인이 자신의 유산을 잃어버릴까봐 그리스도를 거부한다면 그는 불못으로 가게 될 것이다. 만일 어떤 마호메트교도가 모슬렘 가족과 친구들이 자신에게 행할 일이 두려워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는다면 그는 자기가 따른 "선지자"와 함께 꺼지지 않는 불속에 있게 될 것이다.
헤롯의 문제는 무엇이었는가? 그는 두려움을 품고 있었다. 여러분이 어떤 인물을 판단할 수 있는 두 가지 기준은 이렇다: 그가 사랑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는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머리가 아닌 마음의 문제이다. 지성은 이 사안의 결정 요인이 되지 못한다. 성경은 인간에 대해 이렇게 말씀한다: "이는 그가 마음에 생각하는 대로 그도 그러한즉"(잠 23:7). 이 지상에 살았던 가장 현명한 사람이 이렇게 말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열심을 다하여 네 마음을 지키라. 이는 삶의 문제들이 거기서 나옴이라"(잠 4:23).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는 그 믿음은 마음에서 오는 것이다(롬 10:9-10).
헤롯은 자신의 양심을 두려워했다(14절 주석을 보라). 이런 옛말이 있다: "양심적인 사람은 태풍 속에서도 잠잘 수 있다." 바울은 "선한 양심"(행 23:1; 딤전 1:5, 19), "하나님과 사람 앞에 항상 거리낌이 없는 양심"(행 24:16), 또 "약한 양심"(고전 8:12), "순수한 양심"(딤전 3:9; 딤후 1:3), "화인 맞은" 양심(딤전 4:2), "더럽혀진"양심(딛 1:15), 그리고 "악한 양심"(히 10:22)에 대해 말했다.
여러분이 크리스찬으로서 자신의 양심을 지키고 싶다면 마틴 루터가 말한 대로 자기 양심을 "성경에 묶어 둘" 필요가 있다. 최종 권위가 없는 사람은 어떤 것에도 양심이 매여 있지 않는데 그는 불법자, 무정부주의자이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양심을 다스리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법 밖에 놓이고(불법자) 여러분 자신의 변덕스런 생각 외에는 어떤 삶의 기준도 없게 된다(무정부주의자).
둘째로, "헤롯이 요한을...두려워하며"(20절). 헤롯은 "성경공포증"을 앓고 있었는데 그는 성경과 성경적 진리를 두려워하는 자였다(요 17:17). 그래서 그는 자기 개혁은 했지만 구원을 받지 못했다. 구원 없는 자기 개혁은 저주이다. 헤롯은 요한을 "주목하였"고 그의 말을 "기쁘게 들었"으며 심지어 요한이 그에게 시킨 "많은 일을 하였"으나 그럼에도 그는 고쳐지지 않았다.
헤롯은 자기 아내를 두려워했다. 그가 요한을 체포한 이유가 그것이었다.
어떤 어린 소년이 자기 아버지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아빠는 다이노사우루스를 무서워해요?" "아니" 아빠가 대답했다. "코끼리는 무서워해요?" "아니." "사자는 어떤데요?" "아니란다." "괴물 곰은 어때요?" "물론 아니지." "그럼 아빠" 아이가 말했다. "아빠는 엄마 말고는 무서워하는 게 없어요?"
방금 아내와 대판 싸운 남자가 자기 친구에게 말했다. "결국 그녀가 무릎으로 기어서 나한테 다가왔어요." "그녀가 뭐라던?" 친구가 물었다. "그녀가 말하기를 '침대 밑에서 나와, 이 겁쟁이야.'라고 하더군."
어떤 사람이 자기 친구에게 그가 미모의 아내를 얻었다고 칭찬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네 아내 같은 여자를 아내로 얻었다면 매일 밤 집에 있고 싶었을 걸." "넌 그렇게 해야만 할거야" 그 친구가 말했다. "그러지 않으면 그녀가 너를 일주일 내내 갈굴테니까."
"나는 그 성의 주인이 그 남자인 줄 아는데 이는 그의 아내가 그에게 왕관을 씌워주는 것을 봤거든."
"나는 그가 집에서 바지를 입고 있는 것을 아는데 왜냐하면 그가 두른 앞치마 밑에서 바짓단을 봤거든."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그들의 아내들과 함께 "진주문" 앞에 서 있었다. 성 베드로가 나와서 이렇게 말했다. "좋아요, 집안일들을 자기가 결정하셨던 남성들은 이쪽으로 오시고 그렇지 않았던 분들은 그 자리에 그대로 계세요." 그러자 한 남자가 이쪽으로 옮겨 왔다. 의아해진 성 베드로가 말했다. "당신은 정말 아내에게 가정을 맡기지 않고 혼자 한 건가요?!" "아니오" 그 남자가 말했다. "그게 아니라 내 아내가 나보고 이쪽으로 서지 않으면 혼난다고 해서요."
헤롯은 여론도 두려워했다. 헤롯이 요한을 처음부터 살해하지 않은 이유가 그것이었다. 백성들은 요한이 선지자라 믿었기에 헤롯이 요한을 노골적으로 살해한다면 그는 여론의 지탄을 받을 수 있었다. 제사장들과 장로들도 11:32에서 같은 문제를 갖고 있었다.
여론은 아무것도 아니다. 여론은 변덕스럽고 사람들은 계속해서 생각을 바꾼다. 행 14장에서 바울이 절름발이를 고쳐주었을 때 루스트라인들은 그와 바나바가 신이라고 선언했다(행 14:12). 바울과 바나바가 그들에게 설교하자 같은 군중이 돌변해서 바울을 돌로 치고 죽도록 방치했다(행 14:19). 행 28장에서 바울이 독사에게 물리자 멜리테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오, 저 사람은 진짜 나쁜 사람인가보다, 난파된 배에서 구조되었지만 운명이 그를 심판하는구나"(행 28:5). 그런데 그가 부풀어올라 죽지 않자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는 신인 게 분명하다"(행 28:6).
내가 여러분에게 건전한 충고를 하나 하겠다. 군중 앞에서 연기할 생각하지 말라. 그들에게 그럴 가치가 없다. 사람들이 여러분에 대해 나쁘게 얘기하는 모든 말이나 좋게 얘기하는 모든 말을 믿지 말라.
정치인에게 있어서는 나쁜 소문에 휘말리는 것이 끔찍한 일이다. 그들은 뉴스 미디어가 자신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여론을 형성하기 때문에 신경쓰지 않을 수 없다. 대통령과 상하원 의원들, 연방 대법원 판사들은 헌법에 근거한 결정이나 옳은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 그들의 모든 정치 행위는 다수 국민이 원하는 것과 뉴스 미디어가 다수의 의견으로 말하는 것 사이에서 줄타기 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본문 26절에서 헤롯이 걱정하는 것은 그의 동료들의 공론이 어떤가이다. 헤롯의 생일이 되었고 "고위급 인사들"을 위한 잔치를 열었다. 잔치 중에 그의 의붓딸(요세푸스는 그녀의 이름이 살로메라고 확인해준다)이 들어와 헤롯 앞에서 관능적인 춤을 추면서 그의 정욕에 불을 당긴다. 그로 인해 헤롯은 양심에 화인을 맞고 양심이 죽은 상태가 된다.
그때 그는 자기 일생에서 한 말 중에 가장 어리석은 말을 내뱉게 된다: "무엇이든지 네가 원하는 것을 나에게 구하라. 그러면 내가 너에게 그것을 주리라...내 왕국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22-23절). 그것은 아하수에로가 에스더에게 했던 제안과 유사하지만(에 5:3, 6, 7:2) 아하수에로의 경우는 남편이 사랑하는 아내에게 말한 것이었다. 헤롯은 "추악하게 늙은 남자"로서 자신의 의붓딸을 고급 "창녀"처럼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살로메는 어미에게 가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무엇을 구할까요?"
그러자 어미가 말한다. "그 침례교 설교자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달라고 구하거라."
"하지만 엄마, 그건 역겨워요! 나는 그런 걸 받고 싶지 않아요!"
"너는 나를 위해서 그걸 구하면 된단다, 딸아, 그러면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가 들어주마, 귀여운 것", 헤로디아가 말했다.
그래서 살로메가 헤롯에게 가서 말한다. "왕께서 지금 침례인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서 나에게 주시기를 원하나이다"(25절).
헤롯은 그 일을 하고 싶지 않았지만("왕은 심히 난처하였으나", 26절) 그때 이미 그의 양심은 회복 불가능하게 망가지고 더럽혀지고 화인을 맞은 상태였다. 그가 할 수 있었던 생각은 이것 뿐이었다: "내 친구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그녀의 요구를 무시하면 저 친구들은 내가 일구이언하는 실없는 인간이라고 비웃겠지."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어리석은 자들의 친구는 멸망하리라"(잠 13:20). 또 성경은 "악한 사귐[즉, 여러분이 만나는 친구들]은 좋은 행실[즉, 여러분의 건전한 생활 방식]을 부패시키느니라"(고전 15:33)고 말씀한다.
한 번은 젊은 크리스찬 숙녀가 댄스장에 가고자 했다. 그녀는 그것이 잘못된 행동임을 알았지만 크리스찬 아버지의 충고를 무시하고 댄스장에 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녀가 일어서기 전에 아버지는 그녀가 잊지 못할 실제적인 교훈을 주고 싶었다.
그는 딸에게 벽난로에서 석탄을 집어들어 보라고 말했다. 그녀가 난로를 보니 차갑게 식어 있었고 며칠 동안 불이 지펴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녀는 두려움 없이 차가운 석탄을 집어든 다음 말했다. "보세요, 나는 데이지 않았어요." "그런데 네 손을 한 번 보렴" 아버지가 말했다. 그녀가 자기 손을 보니 검댕으로 더럽혀져 있었다. 아버지가 말했다. "그것 보려무나, 나쁜 친구는 언제든 너를 더럽힌단다."
이것은 오늘날 크리스찬들 사이에 일어나는 많은 문제 가운데 하나다. 교계 지도자들은 잘못된 단체와 연대하고 있다. 이 현상은 현대주의자, 자유주의자만큼이나 근본주의자, 보수주의자에게도 마찬가지로 발생하고 있다. 기독교 대학과 신학교의 교수들은 그들의 동료 학자들로부터 인정받기를 열망한다. 나는 그것을 "학자 연합"이라 부른다. 그들 모두는 신학의 권위가 성경의 권위를 능가한다는 생각에 동의한 자들이다. 따라서 신학 교수나 성경 교사들이 성경(AV 1611)을 비판하지 않으면 그들은 "인정"받지 못한다.
그게 아니라면 교계의 선한 지도자들은 성경의 권위 문제에 부딛칠 때 겁쟁이가 되곤 한다. 리 로버슨, 커티스 허트슨, 그리고 심지어 잭 하일스조차도 한동안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그들이 듣게 될 말보다 "형제들"이 그들에 대해 하는 말들을 더 두려워했다.
이언 페이슬리 같은 선동가조차도 그랬다. 그는 유럽 의회에 가서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 부를 정도로 겁이 없었지만, 밥 존스 주니어에게는 토끼처럼 소심하게 굴었다. 뷰챔 빅의 손자들과 바틀렛 형제들이 한 번은 얼스터를 방문하여 이언 페이슬리를 만났는데 그들이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럭크만 박사의 책들을 읽어보았나요?" "네, 그렇습니다" 페이슬리 형제가 답했다. "그 분의 책들을 읽어봤지요." "그렇다면 당신은 킹제임스 성경에 대한 그의 입장을 어떻게 생각합니까?"라고 바틀렛이 그에게 물었다. "그건 완전히 옳아요"라고 페이슬리가 그의 짙은 스코틀랜드 사투리로 말했다. "하지만 내가 이런 말을 했다고 밥 존스 주니어에게 말하지 마세요."
무엇이 그의 문제였던가? 그는 사람을 두려워했다: 페이슬리는 그의 동료인 밥 존스 주니어를 두려워했다. 페이슬리가 킹제임스 성경에 대해 올바른 말을 하면 밥 존스 주니어가 그를 밥 존스 대학의 강단에 세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페이슬리의 딸이 그 대학에 다니고 있었고 그는 평지풍파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헤롯은 "그의 고관들과 군 지휘관들과 갈릴리 유지들"(21절) 앞에서 자기 위신이 실추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동료들 사이에서 명예를 잃어러나 지역 사회에서 위신과 평한을 잃어버리는 것은 동양 사회에서 최악의 일로 간주된다. 헤롯은 옳은 일을 행하는 것보다 그의 명성을 잃어버리는 것을 더 두려워했다.
한 번은 한 주일학교에서 이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해 주었는데 어떤 어린 소녀가 성경 교사에게 질문했다. "왜 헤롯은 원치도 않으면서 침례인 요한을 죽여야 했나요?" "글쎄" 교사가 말했다. "헤롯이 그 소녀에게 왕국의 절반을 준다고까지 중요한 손님들 앞에서 약속했기에 그 약속을 깨는 게 두려워서 그랬지." "왜 그는 그녀에게 왕국의 절반과 침례인 요한의 목 둘 다 줄 수 없다고 말하지 않았나요?" 어린 소녀가 천진난만하게 물었다.
왜 그럴 수 없었는가? 만일 헤롯이 왕상 2:20-24의 솔로몬처럼 행동했다면 그는 정욕으로 인해 여자에게 발목 잡혀 조종당하는 유악한 겁쟁이가 되는 대신 정당한 방법을 통하여 강력한 지도자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헤롯은 양심적으로 행동할 용기가 없었고 배짱도 없었다.
30 그후 사도들이 예수께로 함께 모여서 그들이 행한 일과 가르친 일을 모두 주께 말씀드리니,
31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따로 외딴 곳으로 나와 잠시 쉬어라.”고 하시더라. 이는 많은 사람이 오가므로 그들이 음식 먹을 시간조차도 없었음이라.
32 그러므로 그들이 배를 타고 따로 외딴 곳으로 가니라.
33 무리가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또 다른 많은 사람들도 주를 알아보고 모든 성읍들에서 그곳으로 달려나와 도보로 앞서 가서 주께로 함께 나오더라.
34 그때 예수께서 나오셔서 많은 무리를 보시고 가엾게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았기 때문이라. 그리하여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치기 시작하시더라.
본문은 5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의 전주곡이다. 여러분은 침례인 요한의 죽음을 다룬 삽입부 이전에 주께서 사도들을 파송하시는 장면(12절)이 있었음을 기억할 것이다. 이제 그들의 순회 설교가 끝났고 그들은 자신들의 성과를 보고하기 위해 예수께 왔다.
문제는 3:20에서와 같은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이는 많은 사람이 오가므로 그들이 음식 먹을 시간조차도 없었음이라"(31절).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이 피곤한 것을 아시고 "너희는 따로...쉬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위대한 실제적 교훈은 목회자가 가끔 쉬면서 여가를 즐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목회가 여가 생활과 동일시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누구든 진짜 "섬김"에 참여한 목회자는 사역이 "일"이라는 것을 안다(엡 4:12). 여러분은 설교와 강해를 위해 공부하고 준비할 자신만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여러분은 병원에 진료받으러 갈 시간도 있어야 한다. 심방할 시간도 따로 있어야 한다. 여러분이 이제 막 사역을 시작했거나 소규모 사역을 하고 있다면 여러분 스스로 교회 건물을 청소하고 잔디를 깎으며 화장실 휴지를 갈아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따금 휴식과 "재충전"할 시간을 가져야 한다.
내가 이제까지 사역을 하는 데 도움이 된 것 한 가지는 매일 낮잠을 잤다는 것이다. 점심 식사 이후에 나는 전화의 수화기를 내려놓고 클래식 음악을 틀어놓은 다음 방바닥에 누워서 한시간 쯤 잠을 청한다. 어떤 목회자들은 휴식을 취하기 위해 골프를 치고 또 다른 이들은 낚시를 한다. 여러분은 도의적이고 온당한 범위 안에서 휴식을 취한 다음 주의 사역에 다시 매진해야 한다.
우리는 "외딴 곳"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1:45 주석에서 다룬 바 있으니 그곳을 참조하라. 그리스도께서 모래 사막에서 설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대해 계속 의문이 든다면 39절을 보라: 31절에서 그 "외딴 곳"에는 "푸른 풀밭"이 있었다. 요한은 그곳에 "풀이 많더라"고 말한다(요 6:10).
이 "외딴 곳"은 갈릴리 바다 북쪽 지역을 가로질러 가는 첩경이었다. 눅 9:10은 그곳 성읍 이름이 벳세다라고 알려주는데 누가복음 주석서에서 우리는 성경에 두 개의 벳세다 성읍이 있다고 언급했었다. 예수와 제자들이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그 무리는 분명히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들은 주님과 제자들을 앞질러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었다(33절).
34절은 예수께서 "무리"를 대하신 전형적인 태도를 보여준다(마 9:36을 보라). 주께서는 그들을 동정하셨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으며 또한 그들을 염려하셨다. 이것이 "가엾게 여기시니"의 의미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동정하신 이유는 그 유대인들에게 인도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았기 때문이라." 문제는 그들의 종교 지도자들, 곧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그리고 서기관들에게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통들로 대체했다(7:7-13).
예레미야가 이렇게 썼다: "내 백성이 잃어버린 양이 되었도다. 그들의 목자들이 그들을 곁길로 가게 하였으며 그들을 산지로 돌이키게 하였으니 그들이 산에서 작은 산으로 가며 그들의 쉬는 곳을 잊었도다"(렘 50:6).
그래서 그들의 목회자인 "목자들"로부터 버려진 백성들(렘 2:8, 10:21, 12:10, 23:1-2)에 대한 그리스도의 연민이 어떤 식으로 먼저 표현되었는지 아는가?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치기 시작하시더라." 주의 가르침에 치유가 동반된 것은 무리에 대한 주의 연민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표였지만(마 14:14) 그럼에도 주께서는 우선적으로 진리를 선포하심으써 자신의 연민을 보여주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에게 "사회 복음"을 전파하라거나 영적인 문제 해결을 도외시한 채 물리적 방법만으로 백성을 고쳐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내가 가난하고 굶주린 아프리카 사람을 도와서 그에게 음식을 주고 옷을 주고 돈을 줄 수 있으며(더 나아가 직업을 알선할 수 있고) 그를 교육시켜줄 수 있지만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지옥을 향해 갈 것이다.
나는 크리스찬들이 빈자, 배고픈 자, 노숙자, 약물중독자, 혹은 문맹자를 무시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물리적 문제들을 해결해주는 것이 죄 문제의 해결과 동일시될 수 없다는 것이다. 복음 전파와 "하나님의 모든 계획"(행 20:27)을 선포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역의 최종 목적이며 다른 부수적인 것들은 이 두 목표를 이루는 데 필요한 도움을 주는 요소들이기에 그것들의 순서와 본말이 바뀌어서는 안 된다. 만일 여러분이 사회 봉사와 관련한 일들과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선포하는 사역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면 성경을 전파하는 일을 선택하는 편이 항상 옳다.
여러분에게 누군가에게 성경을 가르쳐줄 기회가 온다면 그 기회를 놓치지 말고 사용하라. 그러나 상식적으로 행동하라. 불필요하게 남을 기분나쁘게 행동할 필요는 없으며 여러분의 업무 시간에 개인 사역을 하겠다고 여러분의 고용주들의 시간을 훔치지는 말라. 그러나 여러분은 타인에게 말씀을 전할 때 그 사람이 홀로 있을 때, 생각 속에 들었던 말씀을 되새김으로써 성령께서 일하실 수 있게끔 말씀을 전할 필요가 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들에게 정해진 것이고 그 뒤에 심판이 정해진 것같이"(히 9:27)가 그 좋은 예이다.
35 날이 이미 저물었을 때 제자들이 주께 나와 말씀드리기를 “이곳은 외딴 곳이요 이미 때도 저물었으니
36 무리를 보내어 근처 시골과 마을들로 가서 빵을 사먹게 하소서. 그들에게는 먹을 것이 아무것도 없나이다.”라고 하니라.
37 주께서 대답하여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시니, 그들이 주께 말씀드리기를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어치의 빵을 사서 그들에게 먹으라고 주리이까?”라고 하니라.
38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빵이 몇 덩어리나 있는지 가서 알아보라.”고 하시니, 그들이 알아보고 말씀드리기를 “빵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나이다.”라고 하더라.
39 주께서 제자들에게 명하여 사람들을 모두 떼를 지어 푸른 풀밭에 앉게 하시니
40 그들이 백 명씩, 혹은 오십 명씩 떼를 지어 앉더라.
41 주께서 빵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하늘을 바라보시며 축복하신 후,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사람들 앞에 놓게 하시고 물고기 두 마리도 그들 모두에게 나누어 주시니
42 모두가 먹고 배불렀더라.
43 그후에 그 조각들과 물고기들을 거두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더라.
44 빵을 먹은 사람들은 남자가 약 오천 명이더라.
"날이 이미 저물었을 때"(35절). 사실 그 때는 "저녁"(마 14:15)이었다. "때도 저물었으니": 저녁 식사 시간이 이미 넘어버렸다. 따라서 그때는 저녁 7시 정도 되었을 것이다. 그때는 여름철이었던 게 분명하고 그래서 무리가 근처 촌락들로 음식을 구하러 돌아다닐만큼 햇빛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36절).
주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37절). 문제는 제자들이 음식을 줘야 할 사람들의 수였다. 44절은 거기에 "남자가 약 오천 명" 있었다고 말씀하는데 그 숫자는 "여자들과 아이들"(마 14:21)은 제외한 것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제자들은 10,000-15,000명의 사람들 앞에 있었다. 제자들 중 일부가 주께 물었다.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어치의 빵을 사서 그들에게 먹으라고 주리이까?" 한 데나리온은 성경 시대에 하루의 노임에 해당했고(마 20:2) 200 데나리온은 상당히 큰 금액이었다. 그러나 빌립이 계산하기로 그 금액도 무리를 먹이기에는 부족했다(요 6:7).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빵이 몇 덩어리나 있는지 가서 알아보라"(38절). 마가는 제자들이 어떻게 무리가 가진 빵의 숫자를 확인했는지 언급하지 않지만 요한은 그것을 기록했다. 안드레가 "한 소년이 보리빵 다섯 덩어리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는 것(요 6:9)을 발견했다.
자유주의자들은 그 소년이 예수께 자신의 점심 도시락을 기꺼이 바치는 것을 군중들이 보고서 감명받아 그들 각자가 아껴둔 음식들을 꺼내서 나눠 먹은 것으로 이 기적을 설명하려 한다. 그것은 허튼 소리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무엇이 있고 없는지 알고 계셨다. 만일 사람들에게 음식이 있었다면 그들은 허기를 느낄 때 그것들을 꺼내서 먹었을 것이다. 무리에게 음식이 있었다면 애초에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음식이 있었다면 예수께서는 사도들에게 "자, 이제 우리가 기도하고 저들이 각자 가져온 음식을 먹게 하자"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누가 음식을 가졌는지 확인이 이루어졌고 결국 수천 명의 군중 가운데 "한 소년"만이 "보리빵 다섯 덩어리"(가장 값싼 빵)를 가진 것이 드러났다. 그에게는 물고기 두 마리도 있었고 그것들은 "작았다". "이백 데나리온 어치의 빵"도 무리를 먹이기에 부족했다면 어떻게 다섯 덩이의 가장 값싼 빵과 두 마리 "정어리"가 그들에게 충분한 분량의 음식이 되겠는가?
예수께서는 무리에게 음식을 주시기에 앞서 그들이 "떼"를 지어 앉도록 하신다. 그들은 백 명이나 오십 명씩(40절) 떼를 지어 앉았다. 따라서 그곳에는 오십 명이나 백 명 단위의 아주 많은 그룹들이 있었을 것인데 총 인원수는 10,000-15,000명 정도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백 명 단위의 떼를 기준으로 해서 150개까지의 그룹이 있었을 것이고 오십 명을 기준으로 하면 더 많은 그룹이 나뉘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내가 볼때 거기에는 200개 이상의 떼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들 모두를 오직 다섯 개의 빵과 두 마리 생선만으로 먹이셨다.
나는 그 기적을 현장에서 목도한 그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다는 사실이 경악스럽다. 주께서는자신의 초자연적 능력과 신성을 공공연히 보여주셨는데도 말이다. 그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기적은 보지 않고 음식만 쳐다봤다(요 6:26). 그 사건이 있고 다음 날(요 6:22) 예수께서는 자신의 공사역 기간 중 가장 많은 제자들이 주로부터 이탈하는 사건을 겪으신다(요 6:66). 왜 그렇게 되었는가? 그들이 주의 말씀으로 인해 실족했기 때문이다(요 6:60-61).
"사회 복음"이 그토록 위험한 이유가 여기 있다. 여러분의 교회에 오는 사람들이 "빵과 물고기"만을 얻기 위해올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그들에게 말씀을 주기 시작하면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들이 원래 믿었던 정령숭배나 불교, 힌두교나 마호메트교로 돌아가 버린다. 왜 그런가? 이는 그들이 자기들의 배는 채웠지만(혹은 옷이나 집, 자녀 교육 등은 얻었지만) 그들의 마음에 변화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점심을 예수께 양보한 이 소년의 사례는 여러분이 주께 헌신하고자 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모형적으로 보여주는 놀라운 사례이다. 소년은 예수께 자신이 가진 것을 드렸고 주께서는 그에게 더 많은 것을 돌려주셨다(43절). 이것은 추수의 법칙 중 하나인데 여러분은 뿌린 것보다 더 많은 수확을 거두게 된다. 주님께 자신의 것을 기쁨으로 드릴 때 여러분이 받는 약속은 이렇다:
"하나님께서는 너희에게 모든 은혜를 넘치게 하실 수 있나니 모든 것을 언제나 너희가 필요한 대로 가질 수 있게 하심으로 모든 선한 일에 넘치게 하시려는 것이라"(고후 9:8).
그 소년은 자기 점심을 예수 그리스도께 드릴 필요가 없었다. 그는 많은 젊은이들이 자기 생명을 버리는 것처럼 그 음식을 버릴 수도 있었다. 소년은 자기밖에 모르는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자신을 위해서 그 음식을 간직해둘 수도 있었다. 소년은 제자들이 음식이 있는지 물어볼 때 시치미 뗄 수도 있었다. 여러분은 오늘날 미국에서 여자들이 남자인 체 하고 남자들이 여자인 체 가장하는 공격적인 운동을 보고 있다. 성경은 그런 사람들에 대해 위선자라고 부른다. 그들은 거짓말쟁이들이다(계 21:8을 보라).
나는 남부에서 성장한 두 소년을 알고 있다. 그들 둘 다 하나님께 놀라운 재능을 받았지만 그들 각자가 그 재능을 사용한 방식은 완전히 달랐다. 한 소년은 미시시피의 성결교 가정에서 성장했다. 그는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럭비 선수가 되고 싶어 했지만 그는 자신의 멋진 머리칼을 자르고 싶지 않아서 럭비를 포기했다. 어떤 신인 발굴 담당자가 백인이면서 흑인같이 풍부한 음성을 낼 수 있는 재능을 그 소년에게서 발견하고 횡재를 했다. 그 아이는 남은 생애 동안 음악 활동을 하면서 팬들 위에 스타로 군림하고 살았다. 심지어 그는 사람들이 그를 "왕"이라 부르도록 놔두었다. 그는 50세가 되기 전에 죽었다. 그는 다섯 개의 처방받은 약들을 한 번에 세 배 분량까지 복용했다가 약물 과용으로 사망했다. 그에게 약 처방을 해 준 주치의는 그가 "걸어다니는 약국"(마약 중독자를 우회적으로 표현한 말)이었다고 말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엘비스 프레슬리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재능을 자신만을 위해 허비해 버렸다.
또다른 아이가 앨라배마에서 성장했다. 그는 땅콩 농장에서 자랐다. 그의 모친은 침례교인이었고 그의 아버지는 감리교인이었다. 그는 감리교인이 되어야 했지만 침례를 받고 침례교인이 되었다. 그가 열 살이 되었을 때 대단한 생각을 했는데 그것은 자신이 앞으로 영원히 살 것이라면(그는 구원받은 상태였다) 제대로 사는 법을 배워야겠다는 것이었다. 그 심오한 생각은 일생 동안 그에게 동기 부여로 작용했다. 그는 옛날식 감리교 복음설교자가 되었고 일생 동안 족히 50만 명의 혼을 그리스도께 인도했다. 여러분은 그가 설립한 학교를 알고 있는데 밥 존스 대학이다. 밥 존스 시니어는 자신의 "바구니"를 주께 드림으로써 주께서 그것을 쓰시도록 했다. 그리고 당연히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쓰셨다.
이제 크리스찬들이여, 잃어버린 세상 사람들은 여러분이 그들에게 생명의 빵을 줄 것을 고대하며 여러분을 보고 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 그러나 여러분 자신의 능력과 자원으로는 그렇게 할 도리가 없다. 만일 그 소년이 스스로 무리에게 음식을 나눠주고자 했다면 그는 겨우 몇 사람에게, 그것도 조금씩밖에 주지 못했을 것이다. 소년은 자신이 가진 것을 예수께 드려서 주께서 그것을 축복하심으로써 무리가 먹을 수 있도록 했다(41절).
42-43절: "모두가 먹고 배불렀더라. 그후에 그 조각들과 물고기들을 거두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더라." 이 기적은 그리스도의 사역 기간 중 있었던 가장 놀라운 사건 중 하나이다. 이 사건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던지 사복음서 모두에 등장하고 있다: 마 14:13-21; 본문 막 6:32-44; 눅 9:10-17; 요 6:5-13. 게다가 이 일에 이어서 4,000명을 먹이시는 기적도 있었다(마가복음 8:1-9을 보면).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 기적을 여러 번 겹쳐 보여주시는 것은(창 41:32에서 파라오의 겹쳐 꾼 꿈을 보라)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뜻이다.
요 6:30-31에서 기적을 경험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만나로 먹이신 사건을 떠올렸고 예수께서 예언된 메시아가 맞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구약의 만나 사건이 실제적 역사적 사건인 것은 맞지만 주께서는 시 78:2에서 그것을 또한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그 일이 역사적 사실 이상의 교훈을 우리에게 가르치기 위한 목적으로 행하신 사건이었다고 말씀하신다(시 78:24-25을 보라).
이 부분에서 우리가 배우는 가르침은 재림에 관한 예언적 가르침이다. 미카 7장은 대환란에 처한 이스라엘에 대해 다루는 내용이다: 미 7:12에 나온 적그리스도의 침공 장면(참고. 사 10:5)과 미 7:17에 나온 재림 장면(참고. 계 6:15-17)을 보라. 적그리스도가 이스라엘로 올때 마 24:15-16에 나온 그리스도의 "산들로 도망하라"는 말씀을 믿고 청종한 유대인들은 도망치는 데 성공한다. 그 "산들"의 위치는 미 7:14에 나와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곳에서 주의 백성들을 "옛날처럼" 먹이실 것이다. 그 "옛날"은 언제를 말하는 것인가? 미 7:15에서는 "이집트 땅에서 네가 나오던 날들과 같이"라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적그리스도로부터 도망친 그 유대인들에게(계 12:6) 출애굽 당시처럼 만나를 공급하실 것이다(시 105:38-40을 보라).
마귀가 광야에서 그리스도를 시험할 때 돌들로 빵을 만들어 보라고 유혹한 이유가 그것이다. 마귀는 주께서 재림 때 하실 사역을 초림 때 하시도록 만들려고 했다. 마귀는 그렇게 간교하다, 여러분(창 3:1). 마귀가 여러분이 잘못된 행동을 하게 만들지 못한다면, 그는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보다 앞서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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