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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예레미야서의 말씀 18,1-6>
1 주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내리신 말씀.
2 “일어나 옹기장이 집으로 내려가거라.
거기에서 너에게 내 말을 들려주겠다.”
3 그래서 내가 옹기장이 집으로 내려갔더니, 옹기장이가 물레를 돌리며 일을 하고 있었다.
4 옹기장이는 진흙을 손으로 빚어 옹기그릇을 만드는데, 옹기그릇에 흠집이 생기면 자기 눈에 드는 다른 그릇이 나올 때까지 계속해서 그 일을 되풀이하였다.
5 그때에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6 “이스라엘 집안아,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이 옹기장이처럼 너희에게 할 수 없을 것 같으냐?
이스라엘 집안아, 옹기장이 손에 있는 진흙처럼 너희도 내 손에 있다.”
✠ 복음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13,47-53>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47 “하늘 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
48 그물이 가득 차자 사람들이 그것을 물가로 끌어 올려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
49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50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51 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
제자들이 “예!” 하고 대답하자,
5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53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들을 다 말씀하시고 나서 그곳을 떠나셨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하늘나라의 교육을 받은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 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우리는 마태오복음 13장에 나오는 하늘나라에 대한 비유에서, 마지막 일곱 번째인 '그물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이 비유는 지금까지의 하늘나라에 대한 비유들에 대한 결론에 해당한다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있을 '심판'을 강조하시면서, 하늘나라의 비유를 마무리 지으십니다.
“하늘나라는 바다에 그물을 쳐서 온갖 것을 끌어올리는 것에 비길 수 있다.”
(마태 13,47)
사실 그물 속에는 '온갖 것'이 한데 섞여 있습니다.
마치 밀밭에는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듯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물이 가득 차면, 어부들이 그물을 해변에 끌어올려 좋은 것은 추려 그릇에 담고 나쁜 것은 내 버린다.”
(마태 13,48)
'세상의 끝날'이 오면, 하느님의 천사들이 밀밭에서 가라지를 따로 뽑아 묶어서 불에 태워버리고 밀은 하느님의 곳간에 거두어들이듯이, 하느님의 사명을 받은 어부들이 바다에서 그물을 끌어 올려 쓸모없는 나쁜 고기를 추려내어 해변에 죽게 내버리고, 좋은 고기는 '하늘나라'라는 그릇에 담는다는 말씀입니다.
결국 이 '그물의 비유'는 의인과 악인의 종국적인 결말이 준엄함을 말해줍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바다에 생명의 물을 부으시어 우리를 살게 하시고, 그 물속에서 생명을 모아들이십니다.
곧 우리를 살리려고 당신 생명의 그물에 몰아넣으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이미 당신의 그물 속에 들게 하셨습니다.
이는 욥을 찾아와 충고했던 친구(빌닷)의 말을 떠올려줍니다.
“모르겠는가? 나를 이렇게 억누르는 이가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나를 덮어씌운 것이 그분의 그물이라는 것을!”
(욥 19,6)
시편 작가도 이렇게 노래합니다.
“실족하여 죽을세라 염려하여 주시며 우리의 목숨을 되살려 주셨다.
~ 우리를 그물에 몰아 넣으셨으며 짐을 등에 지우셨다.”
(시 66,10-11)
이처럼 ‘그분의 그물에 든 물고기’인 우리는 동시에 하느님께서 '바다에 처져 있는 그물', 곧 이 세상에 쳐놓은 그물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의 바다에 처져서 온갖 것을 끌어올리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의 비유 일곱 가지를 마치신 다음, 제자들에게 그 사명을 상기시켜주십니다.
“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
하늘나라의 교육을 받은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마태 13,51-52)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의 교육을 받은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러니 '하늘나라'의 의미를 깨닫고, 또한 가르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먼저’ 우리의 곳간에 ‘하늘나라의 복음’이 채워져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하늘나라는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
(마태 13,47)
주님!
하늘나라의 그물에 저를 몰아넣으소서.
당신 말씀의 그물로 덮어씌워 당신 뜻 안에 가두소서.
세상의 바다에 저를 던지시어 당신의 그물이 되게 하소서.
온갖 고기를 모아들일 뿐 제 입맛에 맞게 고르지 않게 하소서.
제가 그물일 뿐 주인이 아니듯, 고기의 주인도 아님을 잊지 않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추수 때가 되면>
저는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냈습니다.
그리고 성모동산이 있는 아름다운 성당을 기억합니다.
지금은 아주 작게 느껴져도 그 멋스러움은 여전합니다.
텃밭에는 콩이 심겨 있었고 들깨도 있었습니다.
밭모퉁이에는 흔하지 않은 가로등이 밤새 켜 있었습니다.
가로등 가까이에 있는 콩과 들깨는 다른 것보다 훨씬 더 키가 크고 잎도 넓었지만, 가을 추수 때에 보면 열매가 없었습니다.
겉은 화려했지만 정작 속은 빈 껍데기였습니다.
낮에는 햇빛을 견디고 밤에는 어둠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탓입니다.
결국 곳간에 채워진 것들은 겉보기에는 초라했던 콩이고 들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마태 16,27)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겉모양으로 갚아주시는 것이 아니라 행한 대로 갚아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인생여정 안에서 겪을 것을 다 겪으면서 견디고 받아들인 삶의 모양을 헤아려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삶 속에 감춰져 있는 악이 나타나지 않고 그 사람이 존경을 받는다 해도, 혹은 외적으로는 아무런 흠이 없고 유능한 사람으로 드러날지라도, 그 사람의 참된 모습은 ‘마지막 날’ 추수 때에 밝히 드러나므로 지금 누리는 것들이 헛된 기쁨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지금 처한 어려움들이 풍성한 열매를 맺는 과정이라고 받아들이기를 희망합니다.
시편 저자는 노래합니다.
“눈물로 씨 뿌리던 사람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사람들, 곡식 단 안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
(시편 126,6)
예수님께서는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을 끌어올려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마태 13,48)고 말씀하셨습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결국 마지막 날에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 행실대로 갚아주실 것입니다”(로마 2,6)
사실 하늘의 그물은 빠져나갈 수가 없는 법입니다.
기회를 주는데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결국에는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심판에 앞서 스스로 자신을 심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삶의 여정이 이미 좋은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는데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과거에 매이지 말고, 지금 이 순간을 주님께 맡기십시오.
이 세상의 삶은 실패도 없고 성공도 없습니다.
실패가 없다는 것은 지금 정신을 차려 알곡의 삶을 살면 된다는 의미요, 성공이 없다는 것은 마지막 순간까지 하느님 마음에 들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우리 마음이 하느님 안에 평안히 쉴 때까지는 그 어디에서도 평안치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나쁜 것을 좋게 만드는 것은 생이 다하는 순간까지 주어진 소명입니다.
우리는 인내와 관용으로 천국을 살아가야 하고 또 보여줘야 합니다.
그러므로 추수라는 심판의 두려움에 주눅 들지 말고, 새 것도 꺼내고 낡은 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이 과거를 발판 삼아 오늘을 새롭게 하고, 그리하여 복된 내일을 희망해야 하겠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가까운 사이라 해도 그 마음을 다 헤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얼굴을 맞대고 서로 이야기 하고 있지만, 마음은 천 개의 산이 있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고 뱃속까지 환희 들여 다 보십니다(예레 17,9).
사람이 하는 일이 제 눈에는 옳게 보일지라도 하느님께서는 그 마음을 헤아리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늘 마음속을 보시는 하느님 앞에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분 마음에 드는 열매를 맺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맺는 모든 열매가 주님 그릇에 담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비유를 이해하면 천국: 비유의 완성은 밥이다>
데일 카네기에게 한 여성이 ‘걱정 극복 사례’로 보내 『자기 관리론』에 나온 내용입니다.
"대공황 대 남편이 버는 돈이라고는 한 주에 평균 18달러 정도였습니다.
남편이 자주 아프다 보니, 그마저도 벌지 못할 때가 많았지요.
가벼운 사고도 잦은 데다 볼거리, 성홍열은 물론 독감도 여러 번 앓았어요.
결국 우리는 직접 지은 집을 잃었습니다.
식료품점에 주어야 할 돈이 50달러나 밀려 있는데, 먹여야 하는 아이는 다섯 명이나 되었습니다.
저는 이웃의 빨래와 다리미질을 해주면서 돈을 벌었고, 구세군에서 산 중고 의류를 수선해서 아이들에게 입혔습니다.
걱정이 많아 병이 날 정도였지요.
하루는 외상값이 밀린 식료품점 주인이 연필을 훔쳤다며 일곱 살 난 제 아들을 야단쳤습니다.
아이는 억울하다고 울었습니다.
정직하고 예민한 아이가 사람들 앞에서 그런 일을 당했으니 얼마나 놀라고 부끄러웠을까요?
저는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습니다.
이제껏 겪어왔던 비참한 일들이 떠올랐습니다.
앞날에 대한 희망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지요.
그래서 잠시 정신이 나갔던 것 같습니다.
저는 세탁기를 끈 다음 다섯 살 난 딸아이를 데리고 침실로 가서는 종이와 헝겊으로 창문과 벽에 난 모든 틈을 꼭꼭 틀어막았습니다.
어린 딸은 “엄마, 뭐해?”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바람이 새어 들어오는 곳을 막았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런 다음 침실의 가스난로를 켰습니다.
불은 붙이지 않았어요.
딸아이와 나란히 침대에 눕자 아이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엄마, 이상해. 우리 좀 전에 일어났잖아!”
저는 “괜찮아. 우리 둘이 낮잠이나 자자꾸나.”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눈을 감고 난로에서 새어 나오는 가스 소리를 듣고 있었습니다.
그때의 가스 냄새는 결코 잊지 못할 거예요.
그런데 갑자기 음악 소리가 들리는 듯했습니다.
깜빡 잊고 부엌에 있는 라디오를 끄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이젠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음악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찬송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죄 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걱정 근심 무거운 짐 우리 주께 맡기세.
주께 고함 없는 고로 복을 얻지 못하네.
사람들이 어찌하여 아뢸 줄을 모를까'
찬송가를 듣다가 제가 얼마나 끔찍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지 깨달았습니다.
혼자서 문제와 싸우고 있었던 거예요.
모든 문제를 기도로 하느님께 맡기지 않았던 것이지요.
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가스난로를 끄고 문과 창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그날은 온종일 울며 기도했습니다.
저를 도와달라는 기도는 아니었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하느님이 제게 주신 복, 곧 건강하고 멋지고 마음씨까지 착한 다섯 아이를 주신 것에 감사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이렇게 배은망덕한 짓은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후로 지금껏 그 약속을 지키고 있습니다.
집을 잃은 뒤 우리는 한 달에 5달러를 내기로 하고 임대한 시골의 작은 학교로 이사했습니다.
저는 그런 집에서라도 머물 수 있도록 해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지붕이 있어서 뽀송뽀송하고 따듯하게 지낼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이보다 더 심한 상황이 닥치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제 기도를 들은 것 같았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상황이 나아지기 시작했거든요.
물론 하룻밤 사이에 좋아진 것은 아닙니다.
경기가 회복되면서 우리는 돈을 조금 더 벌 수 있었습니다.
저는 커다란 골프장의 휴대품 관리소에서 일했고, 부업으로 양말을 팔았습니다.
아들 한 명은 농장에서 일했습니다.
그 아이는 자신의 힘으로 대학을 졸업하기 위해서 밤낮으로 열세 마리나 되는 소의 젖을 짰지요.
어느덧 아이들은 다 자라고 결혼해서 제게 자랑스러운 손주를 세 명이나 안겨주었어요.
가스를 틀고 누웠던 끔찍했던 날들을 돌이켜볼 때마다 저는 늦지 않게 저를 ‘깨워주신’ 하느님께 감사, 또 감사를 드린답니다.
그때 일을 저질렀다면 저는 인생의 수많은 기쁨을 맛보지 못했을 겁니다.
제가 살아온 즐거운 인생을 영원히 잃어버렸겠지요.
이제는 누군가에게 더 이상 살기 싫다는 말을 들으면 이렇게 소리치고 싶어요.
“그러면 안 돼요! 절대로 그러지 말아요!”
우리가 아무리 암울한 날들을 보낸다 해도 그 시간은 한순간에 불과합니다.
그때가 지나면 미래가 펼쳐지기 마련입니다."
내가 선한 물고기인지 악한 물고기인지는 지금 이 순간 내가 죽는다면 나는 무엇을 할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여전히 나에게 의지하면 나는 악인이고 주님께 맡기면 선한 물고기입니다.
세상에 사탄교가 있다는 것 아십니까?
사탄교도 성경처럼 자신들의 사탄경이 있습니다.
사탄경 1장 1절은 이렇습니다.
“네 삶의 주인은 너 자신이다.”
신앙인의 첫째 진리는 이것입니다.
“내 삶의 주인은 하느님이시다.”
죽음 직전에도 내 삶의 주인이 여전히 나라면 나는 사탄교의 단원입니다.
머리카락 하나도 만들 수 없는 인간이면서 어떻게 나의 창조자가 나라고 여길 수 있을까요?
하지만 우리는 그럽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주인으로 살라고 합니다.
“참호 속에는 무신론자가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귀가 찢어질 듯한 포성이 터지고, 팔다리가 잘려 나가 비명을 지르는 전우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참호 안에서 당신을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을까요?
신을 찾고 있지 않겠습니까?
이런 상황에서도 신을 찾지 않는다면 나쁜 물고기가 분명합니다.
나쁜 물고기에서 좋은 물고기가 되는데 단 20분이면 충분합니다.
결단만 내리면 됩니다.
그러면 구원받습니다.
우리는 평생 이 20분의 회개의 시간을 갖지 못해서 영원한 불지옥을 선택합니다.
내가 나의 주인으로 살아서 좋은 건 도대체 무엇입니까?
지금은 돌아가신 임언기 신부가 임종 직전 한 냉담 신자에게 병자성사를 주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간암 말기 환자였는데 본인이 청한 것은 아니고 주위 신자들이 끝까지 성사를 거부하는 것이 안타까워 청했던 것입니다.
배에 이미 복수가 차 있고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었습니다.
그는 오랜 냉담을 하고도 병자성사를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고해할 것이 없느냐고 묻는 신부님의 질문에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말을 못 하나 싶어 십계명을 일일이 읊어주며 해당하는 것이 있다면 고개를 끄덕이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병자는 미동이 없었습니다.
결국 신부님은 고해성사와 병자성사를 거부하는 것에 대해 확신하고 방을 나섰습니다.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뒤에서 환자가 크게 소리쳤습니다.
“나 죄 없어!”
바오로 사도는 “의로운 이가 없다. 하나도 없다.”(로마 3,10)라고 말합니다.
천사도 하느님 앞에서는 부끄러워 얼굴을 가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어떻게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분은 오랜 냉담으로 하느님의 비유를 계속 거부하고 계셨기에 가장 중요한 고해성사와 성체성사의 비유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비유의 완성이 무엇일까요?
예수님 비유의 완성은 이것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요한 6,54)
누군가가 주는 선물은 다 비유입니다.
그 선물 안에 사랑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을 볼 수 있으면 비유를 이해한 것입니다.
제가 어머니의 비유를 다 알아들었을 때 어머니께서 끓여주시는 라면 하나의 가치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비유의 완성은 밥입니다.
그리고 밥을 이해하면 그 밥을 주시는 분께 죽음까지도 맡길 수 있는 존재가 됩니다.
위 이야기에서 다섯 살 된 딸은 엄마가 함께 죽음으로 가자고 할 때 미심쩍은 마음에서도 엄마와 함께 누웠습니다.
어떻게 엄마에게 목숨까지 맡길 수 있었던 것일까요?
바로 엄마가 주는 비유를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비유 중에 ‘밥의 비유’를 이해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비로소 어머니의 자녀가 됩니다.
박철민 배우가 ‘냉장고를 부탁해’에 나와서 어머니가 해 주셨던 조기매운탕을 먹고는 오열하는 장면은 밥의 비유를 이해했음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치매에 걸려서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고 자기 이름도 모르지만, 어머니께 마지막까지 충실할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은 밥의 비유이고, 이 비유를 이해하면 이제 하느님을 떠날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밥의 비유는 마지막입니다.
작은 비유들의 포인트가 쌓이다 보면 결국 이해하게 되는 게 밥입니다.
그 밥에 주시는 분의 살과 피가 들어있음을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체의 비유를 이해하면 좋은 종류의 물고기가 되어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모든 비유는 바로 성체의 비유를 이해하기 위한 밑밥입니다.
우리는 성체의 비유를 이해하고 그 밀떡을 하느님의 살과 피로 주시는 양식으로 볼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합니까?
- 수원교구 영성관장 / 수원가톨릭대 교수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이왕이면 잔챙이가 아니라 깜짝 놀랄 정도로 큰 대어로 성장해야겠습니다>
삼복더위의 뜨거운 공기를 뚫고 이 본당 저 본당 청소년들이 저희 피정 센터를 찾아오고 있습니다.
한 본당 나가자마자 또 다른 본당이 들어오니,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합니다.
화장실 바닥도 청소하고, 쓰레기 분리수거도 하고 있으니, 시설 관리인으로 착각하시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저기요~ 출입문 비번이 어떻게 되나요?”
“저기요~ 욕조 바닥이 막혔는데 빨리 뚫어주세요!”
오르락내리락하며 몰입하다 보면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릅니다.
무더위를 건강하게 잘 극복하는 비결은 더위를 피하기보다 매일 하는 일에 더 열정적으로 몰입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보다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에 깊이 몰입하다 보면 더위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습니다.
어촌에 살다 보니 삶이 참으로 역동적입니다.
낮에는 주어진 소임에 최선을 다합니다.
어둠이 내려앉으면 또 다른 신세계가 펼쳐집니다.
바닷물이 멀리 빠져나간 밤바다로 해루질을 나가고 밤낚시를 나갑니다.
운이 좋은 밤은 한두 시간 만에 어망이 묵직해집니다.
떠나올 때는 잡은 고기들을 다 가져오지 않습니다.
영양가 없는 숭어는 살려줍니다.
기준 치수에 미달되는 녀석들은 도로 방생합니다.
때로 옆에 간절한 눈빛으로 기다리고 있는 야생 고양이들에게 몇 마리 던져주면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덥석 물고는 자기 아지트로 달려갑니다.
이윽고 남은 물고기들, 즉 대상어들만 간추립니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흐뭇해지는 두툼한 우럭이나 놀래미, 감성돔이나 장어들은 이게 웬 떡이냐 하며, 잘 살려 집으로 가져옵니다.
따지고 보니 저희 사는 모습이 오늘 복음 말씀과 똑같습니다.
“그물이 가득 차자 사람들이 그것을 물가로 끌어 올려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
(마태오 복음 13장 48절)
그물을 걷어낸 어부들이 즉시 하는 일은 고기를 선별하는 것입니다.
원하는 대상 어종들, 가져가도 괜찮은 고기들만 선창 아래 있는 수족관으로 모시고, 별 도움 안 되는 잡어나 잔챙이들은 올라오는 즉시 바다로 던져버립니다.
언젠가 어부이신 하느님으로부터 환영받지 못하고 아무렇게나 던져지는 잡어나 잔챙이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분 마음을 흡족하게 해드리는 대어로 성장해나가야겠습니다.
우리 인간이란 존재 어떻게 보면 한없이 나약하고 한심한 존재가 분명합니다.
머리칼보다 많은 죄, 상처와 결핍투성이의 존재가 맞습니다.
그러나 마냥 거기에 머물러 살라는 법은 없습니다.
인간이 대단하고 위대한 이유는 노력에 노력을 거듭하면 엄청난 성장이 가능한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놀랍게도 부단한 성장 끝에 제2의 예수 그리스도가 될 수 있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우리보다 앞서 살아가신 성인(聖人)들께서 그것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삶을 통해 똑똑히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위대한 인간 프란치스코 성인은 제2의 예수 그리스도라고까지 불리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역시 한없이 부족하지만, 각고의 노력 끝에 하느님 마음에 쏙 드는 대어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이왕이면 잔챙이가 아니라 깜짝 놀랄 정도로 큰 대어로 성장해야겠습니다.
그런 희망과 기대를 가슴에 품고 오늘 하루를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그물의 비유>
‘그물’은 ‘교회’를 뜻하고, 그물을 바다에 던지는 것은 선교활동을 뜻합니다.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다는 말은 ‘모든 사람’이 선교의 대상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그물이 가득 차는 때는 ‘최후의 심판 때’입니다.
최후의 심판은 사람들을 ‘의인’과 ‘악인(죄인)’으로 분류해서 의인들은 구원하고 죄인들은 처벌하는 일입니다.
‘울며 이를 갈 것이다.’ 라는 말씀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후회와 절망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자기가 회개하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 모든 것이 끝나버렸다는 절망.
성경에 있는 ‘종말과 심판에 관한 말씀’들은 단순한 예언이나 예고가 아니라,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는 ‘경고’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회개하고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면 구원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따라서 ‘그날’에 자기가 어떻게 될지는 ‘지금’ 각자 스스로 선택하는 것과 같습니다.
구원받기를 원하고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구원받을 것이고, 영혼의 구원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도 없이
지금 마음대로 막 사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가 선택한 일이니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습니다.
‘그물의 비유’는 ‘가라지의 비유를 설명하신 말씀’과 거의 같습니다.
“...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마태 13,40-43)
세례자 요한도 회개를 선포할 때 같은 말을 했습니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
(마태 3,11ㄹ-12)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는 누가 알곡인지, 또 누가 쭉정이인지를 드러내는 일이 될 것입니다.
코로나 때문에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못하는 것과 그것을 핑계로 신앙생활을 중단하는 것은 분명히 다릅니다.
스테파노 순교 후에 큰 박해가 일어났을 때, 박해를 피해서 흩어진 신자들은 우리에게 좋은 모범이 됩니다.
“그날부터 예루살렘 교회는 큰 박해를 받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사도들 말고는 모두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다.
흩어진 사람들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였다.”
(사도 8,1ㄴㄷ.4)
박해를 피해서 예루살렘을 떠난 신자들은 신앙생활을 중단하고 숨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더욱 열성적으로 신앙생활과 선교활동을 했습니다.
(그래서 박해가 오히려 복음이 더 널리 선포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코로나 사태도 일종의 박해입니다.
박해를 받으면 금방 꺾이는 사람도 있고, 오히려 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종말의 심판 때가 아닌데도 알곡과 쭉정이로 분류되는 것입니다.
박해를 비롯해서 여러 가지 시련에 관해서 사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렇게 시험을 통과하면, 그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
(야고 1,12)
“사랑하는 여러분,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에 일어나더라도 무슨 이상한 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니 기뻐하십시오.
그러면 그분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도 여러분은 기뻐하며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1베드 4,12-13)
“여러분이 지금 얼마 동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며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로 단련을 받고도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훨씬 값진 여러분의 믿음의 순수성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밝혀져, 여러분이 찬양과 영광과 영예를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1베드 1,6ㄴ-7)
어려운 일이 없을 때에는, 즉 누구나 쉽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때에는 알곡과 쭉정이가 구분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도 잘 모릅니다.)
그러다가 어떤 어려운 일이 닥치면 그때서야 비로소 알곡은 알곡으로, 쭉정이는 쭉정이로 드러나게 됩니다.
물론 그렇게 드러난다고 해서 그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 자신이 쭉정이처럼 살았다는 것을 깨닫고, 인정하고, 회개하고, 다시 시작하면, 누구나 알곡이 될 수 있습니다.
죽기 전까지는 누구에게나 바로잡을 기회가 있습니다.
만일에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지 않으면, 쭉정이로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52절의 ‘자기 곳간’이라는 말은 ‘자기의 지식’을 뜻합니다.
‘새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뜻하고, ‘옛 것’은 구약성경의 가르침을 뜻합니다.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낸다는 말씀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토대로 구약성경의 가르침을 해석해야 하고,
완성해야 한다는 뜻입니다(마태 5,17).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깨달음의 여정”을 살아가는 하늘 나라의 제자들 - 기도와 회개, 분별과 선택, 협력과 훈련, 종말과 심판>
“내 영혼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내 한평생, 나는 주님을 찬양하리라.
사는 동안, 나의 하느님 찬송하리라.
행복하여라, 하느님을 구원자로 모시고,
주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이!”
(시편 146,1-2,5)
오늘 ‘그물의 비유’를 마지막으로 마태복음 13장 일곱 개의 하늘 나라의 비유들은 끝납니다.
엊그제의 ‘가라지의 비유’와 흡사한 '그물의 비유'로 초점은 종말 심판에 있습니다.
제1독서 예레미야서의 옹기그릇과 옹기장이 비유와 관련되어 “어떻게 살아야 하나?”에 대한 좋은 가르침과 깨우침을 줍니다.
오늘도 여러 단상斷想들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1. 정확히 10년 전 요셉 수도원 25주년을 맞이하여 25년 수도공동체 역사를 묵상하며 내린 결론같은 진리 넷입니다.
우리 삶만이 아니라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의 변화를 보여주는 자연성경책을 통해서도 절절히 깨닫는 진리입니다.
1. 모든 것은 다 때가 있다.
2. 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
3. 모든 것은 다 필요했다.
4. 지금을 살자(carpe diem)
2. 제1독서 예레미야서 옹기장이의 비유를 묵상하던 중 떠오른 성가 49장 옹기장이가 생각났습니다.
역시 우리 삶에 대한 좋은 가르침과 깨우침을 줍니다.
내용이 좋아 2절까지 보기 좋도록 배치하여 인용합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른 우리의 한결같은 협력의 노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옹기장이 손에 든 진흙과 같이
내게 있는 모든 것 주님 손에서
님 뜻따라 나의 삶이 빚어지리니
가르치심 마음 새겨 들으렵니다
옹기장이 손에 든 진흙과 같이
내가 가진 모든 것 주님 안에서
님의 모습 내 얼속에 새겨졌으니
기쁨중에 당신 말씀 행하렵니다.
3. 시편 127장 앞부분 말씀도 생각이 납니다.
이와 더불어 “모사謀事는 재인在人이요 성사成事는 재천在天이다”, “일을 계획하고 꾸미는 것은 사람이 하지만 일을 이루시는 것은 하느님이 하신다.”는 진리도 새삼 깨닫습니다.
“주께서 집을 아니 지어 주시면,
그 짓는 자들 수고가 헛되리로다-
주께서 도성을 아니 지켜 주시면,
그 지키는 자들 파수가 헛되리로다
이른 새벽 일어나 늦게 자리에 드는 것도,
수고의 빵을 먹는 것도 너희에게 헛되리리-
주님은 사랑하시는 자에게
그 잘 때에 은혜를 베푸심이로다.”-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저에게 그 잘 때에 은혜를 베풀어 주셨기에 그 짧은 시간 단잠을 자고 일어나 이른 새벽 날마다 쓰는 강론입니다.
새삼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삶의 자세가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게 됩니다.
4. 오늘 복음의 비유를 대할 때 늘 둘이 생각납니다.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천망회회 소이불루(天網恢恢 疎而不漏)”, 하늘의 그물이 크고 성긴듯해도 결코 빠뜨리는 법이 없다는, 즉 죄를 지으면 반드시 하늘로부터 벌을 받는 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말마디입니다.
그 누구도 하느님의 그물망을 벗어날 수 없으니 결국 죽음을 통해서 그물망에 걸려 들어 올려지면서 종말이요 심판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와 더불어 연상되는 우린 인생 여정에 대한 깊은 성찰을 촉구하는 말마디로 제가 늘 염두에 두고 사는 진리입니다.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로 내 인생여정을, 일년사계一年四季, 일년 사계절로 내 인생여정을 압축했을 때 지금 어느 시점時點, 지점地點에 위치해 있겠느냐에 대한 자각과 확인입니다.
삶의 환상이나 거품은 말끔히 걷히고 남은 선물인생, 본질적 깊이의 투명한 삶을 살 것입니다.
5.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답입니다.
오늘 하루 최선을 다해 살면 내일은 내일대로 잘 될 것입니다.
내일을 하나도 걱정할 바 아닙니다.
어제의 상처를 치유하고 내일을 준비하는 오늘입니다.
오늘이 내일의 미래입니다.
오늘 잘 살면 내일은 내일대로 하느님이 잘 해 주실 것입니다.
휴가로 보내는 날들이 아까워 휴가 안간 지 수십년입니다.
일과 놀이가, 삶과 휴가가 하나된 삶이니 새삼 무슨 휴가겠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세상 떠나 하느님 집에 가면 끝없는 안식의 휴가라는 생각도 떠나지 않습니다.
2012년 이후 10년 동안, 아니 앞으로도 살아 있는 그날까지 제 좌우명 고백기도는 다음 하나일 것입니다.
참 많이도 인용했고 앞으로도 필요하다 싶으면 인용할 것입니다.
삶을 깊이 들여다 보면 하늘 아래 새것은 없고 거룩한 반복, 새로운 반복이기 때문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게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아멘.”
우리 사부 성 베네딕도는 물론 옛 사막의 수도승들의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는 이구동성의 말씀입니다.
죽음 있어 삶은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하루하루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종말론적 파스카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저에게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은 하루의 영적전투를 끝내고 잠자리에 드는 시간이요, 이른 새벽 그날의 강론을 쓰며 하루를 새롭게 여는 시간입니다.
그대로 죽음과 부활의 '파스카의 삶'이 습관화된 듯 합니다.
8년전 산티아고 순례여정도 살아 있는 그날까지 계속되는 느낌입니다.
이때 가장 행복했고 설렜던 시간은 날마다 새벽 배낭을 등에 메고 길을 떠날 때였습니다.
삶은 부단한 '떠남의 여정'이란 진리를 절감했습니다.
단상들이 길었습니다.
이런 단상들을 바탕으로 오늘 말씀을 보면 그 이해도 확연해집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되어 살 수 있는 비결이 다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물의 비유를 통해 늘 종말 심판을 염두에 두고 하루하루의 삶에 최선을 다하자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옹기장이 하느님의 일에, 하느님의 뜻에 최대한 협력을 잘 해드리자는 것입니다.
이래야 하느님 마음에 들고 내 마음에 드는 내 고유의 삶의 옹기그릇도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인위적 외형적 성형수술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깨닫습니다.
참 좋은 내 고유의 삶의 옹기그릇을 하느님과 잘 협력하여 만들어 갈 때 내면의 아름다움은 저절로, 서서히 주님을 닮은 참나의 깊고 신비로운, 아름답고 품위있는 외모外貌의 얼굴로 변모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지혜로운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되어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로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 지혜로운 분별과 선택, 주님뜻에의 협력과 훈련, 종말과 심판을 염두에 두고 치열히 절박한 마음으로 분투의 노력을 다하며 하루하루 진인사대천명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일곱의 하늘 나라 비유를 가르쳐 주신 똑같은 주님께서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당시의 제자들은 물론 우리 모두의 분발을 촉구하시며 우리 모두 지혜로운 하늘 나라의 제자들이 되어 하늘 나라를 살게 하십니다.
새삼 우리의 삶은 ‘늘 옛스러우면서도 늘 새로운(ever old, ever new)’, ‘깨달음의 여정’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
그러므로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이들은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마태 13,51-52)
이런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집주인처럼 날마다의 삶도 강론도 그랬으면 소원所願이겠습니다.
끝으로 캐나다에서 교황님의 제17주일 조부모와 노인의 날 미사시 강론 결론으로 끝맺습니다.
“젊은이들이여 노인들이여, 조부모들과 손주들이여,
모두 함께 합시다.
우리 함께 앞으로 나아갑시다.
그리고 함께 우리 꿈꾸도록 합시다.
(Young and old, grandparents and grandchildren, all together. Let us move forward together, and together; Let us dream)”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신학교 2학년 때입니다.
중세철학사 시험을 보았습니다.
과목의 범위가 많았고, 공부할 내용도 많았습니다.
시험지를 받아들고 종이에 이렇게 글을 적었습니다.
“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시험을 보자, 최선을 다했으면 결과는 하늘에 맡기자는 뜻이었습니다.
교수님은 제가 조금 이상한 행동을 했는지 제 자리에 오셔서 시험지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혹시 제가 부정한 행위를 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제가 쓴 글을 보시고 웃으시며 열심히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 뒤로 잠언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제비는 옷 폭에 던져지지만 결정은 온전히 주님에게서만 온다.”
시편은 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께서 집을 지어 주지 않으시면 그 짓는 이들의 수고가 헛되리라.
주님께서 성읍을 지켜 주지 않으시면 그 지키는 이의 파수가 헛되리라.”
아무리 노력해도 알 수 없었는데 순간 영감이 떠올랐을 때 아르키메데스는 ‘유레카’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다행히 중세철학사 시험은 무사히 통과했습니다.
거절을 잘 못하는 성격인데다가 맡은 일은 잘 하려고 하다 보니 일이 엉키고 복잡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사면초가라는 말처럼 혼자 힘으로는 해결하기 힘든 일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끔씩 주님께서 일을 말끔하게 해결해 주곤 하셨습니다.
팬데믹으로 모든 일정이 취소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코로나가 확진되어서 일정이 연기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려고 하면 못 할 것은 없지만 몸도 마음도 피곤했을 일들도 하느님께서는 제가 할 수 있는 만큼만 기회를 주셨습니다.
지금은 거의 볼 수 없지만 어렸을 때는 소달구지를 종종 보았습니다.
덩치가 큰 소가 주인의 손에 이끌려 얌전히 따르는 것은 ‘코뚜레’가 있기 때문입니다.
소에게는 멍에가 될 수 있지만 주인에게는 소를 다스리는 도구가 됩니다.
소는 주인을 위해서 일을 하지만 주인은 소에게 여물을 주고, 안전한 집을 마련해 줍니다.
코뚜레는 주인과 소를 이어주는 안전핀과 같습니다.
연이 자유롭게 하늘을 날 수 있는 것도 ‘줄’이 있기 때문입니다.
줄이 끊어지면 연은 이내 땅으로 떨어지기 마련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 집안아,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이 옹기장이처럼 너희에게 할 수 없을 것 같으냐?
이스라엘 집안아, 옹기장이 손에 있는 진흙처럼 너희도 내 손에 있다.”
맞습니다.
저는 시간과 공간을 스스로 결정해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예전에 많이 들었던 소위 ‘386’세대로 태어났습니다.
저는 부모를 결정하지 않았고, 저의 성도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한양 조씨 집안에서 태어났고, 남자로 태어났습니다.
고등학교까지는 제가 선택해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소위 ‘뺑뺑이’ 세대였습니다.
마치 옹기장이가 진흙으로 그릇을 만들 듯이 하느님께서는 저를 오늘까지 인도해 주셨습니다.
제가 태어난 시대, 제가 태어난 집안, 제가 남자로 태어난 것을 스스로 결정하지는 않았지만 오늘까지 감사드리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불평과 불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라면 감사드리면서 받아들이는 것도 삶의 지혜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을 좋아합니다.
"주님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도록 용기를 주시고, 할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는 겸손을 주시고,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식별하는 지혜를 주소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이야기하셨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 나라를 어떻게 설명하시겠는지요?
하느님 나라는 내가 원하는 것이 모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나 혼자 영원히 사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늘을 날 수 있고, 물속에서도 숨을 쉴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어느 특정한 공간과 시간으로 가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에서 시작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의가 드러나는 곳입니다.
"세상에는 높고 귀한 사람이 많다.
그러나 하느님은 당신의 오묘함을 겸손한 사람에게만 드러내신다."
(집회 3, 20)
저는 이 말을 이렇게 생각하고 싶습니다.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는 겸손한 이들에게서 드러납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종종 꾸는 꿈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꿈을 꾸고 나면 그렇게 기분이 좋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다시 가고 싶지 않은 군대에 다시 이등병으로 입대하는 꿈이었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제대했는데, 당시 나의 선임들이 꽉 차 있는 내무반에 이등병으로 있는 제 모습을 보게 됩니다.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가니 기뻐할 일인데도, 되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절이라서 그럴까요?
기분이 그리 좋지는 않습니다.
되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절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되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간이 필요 없는 시간은 아니었습니다.
비록 좋아하는 일이 아니어서 되돌아가고 싶지 않은 군대 시절이지만, 제가 성장하는 데 있어서 반드시 해야만 하는 꼭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좋아하는 일만을 쫓으면 해야 하는 일을 놓치고 맙니다.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면서 포기하면 어떨까요?
나의 발전을 가져올 변화의 가능성이 줄어들게 됩니다.
어떤 공부도 공부는 해야 하는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신앙생활이 재미없다고 하시는 분이 많습니다.
재미없어서 포기해야 할까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떠올리면 재미없어도 해야 하는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좋아하는 일만이 우리가 해야 할 진리가 아닙니다.
해야 하는 일에 충실하면서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의 발전과 진정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물의 비유를 말씀해주십니다.
하느님 나라에 비유된 바다에 던져진, 특히 티베리아스 바다에서 쓰던 것은 길이가 4~500미터, 넓이가 2~3미터나 되는 큰 그물입니다.
그러다 보니 온갖 종류의 물고기가 잡힐 것입니다.
그런데 좋은 고기만 잡히는 것이 아니라 나쁜 고기도 잡힙니다.
그물 안에 들어왔지만 나쁜 고기라서 하느님 나라라는 그물 밖으로 던져질 수밖에 없습니다.
좋은 고기는 하느님 나라에 살기에 합당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주님의 뜻에 맞게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자기 좋아하는 것만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을 먼저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좋아하는 일보다 필요한 일을 먼저 찾았습니다.
이 좋은 고기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 욕심과 이기심만을 내세운다면 절대 좋은 고기가 될 수 없습니다.
좋은 고기는 주님의 사랑을 그대로 따르는 사람이었고, 자기 좋아하는 것을 쫓는 이기적인 사람보다 주님 좋아하는 것을 먼저 좇은 이타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고기의 모습으로 하느님 나라라는 그물에 있을 것 같습니까?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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