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현이 아침에 눈을 떠 커피를 끓일 때쯤이면 지나간 시간이 아련하기만 하다. 한 올 한 올 후각에 적응하는 커피 내음처럼 그와의 시간은 어느덧 그렇게 익숙해져 있었던 셈이다. 그리고 그런 일상이 그녀에게 있어 조금은 신기할 따름이다.
"오늘 아침은 뭘까?"
즐겨보는 신문하나를 손에 쥐고 부스스한 머리를 긁으며 들어서는 그의 모습이 밉지 않다. 푸코의 말을 빌려 힘에 의해 경계된 이성과 비이성의 굴레처럼 극단의 광기 앞에 상처 입은 한 마리의 맹수가 그 자신의 모습이라던 사내의 눈물과 조소가 기억나자, 커피 내음처럼 진한 슬픔이 그녀의 눈에서 묻어 나온다.
"뭘 그렇게 보는거야? 오늘은 온통 이슈가 정치로 몰려있네.... 정말 재미있는 일이지 않아? 바둥바둥 살아가는 세상사의 모습 말이야"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으며, 익숙한 커피 잔을 한 모금 입에 머금은 그의 손이 거칠어 보인다. 살아온 인생처럼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방황하던 그 거침이 고스란히 묻어 나오는 그의 손은 혼돈의 아픔과 슬픔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어제 영화를 봤는데 너무 혼란스러워요"
지현은 커피 한 모금을 마시며 신문을 읽고있는 J.D의 곁에다가 앉았다. 언제나 그렇듯 둘의 대화는 일상으로 시작해서 비 일상으로 끝나간다. 그녀는 그런 대화 양식이 그리 싫지 않다. 그것은 곧 J.D의 삶과도 유사했으니깐
"왜 Twelve monkeys라는 영화 있잖아요 브루스 윌리스와 브레드 피트가 주연한 그 영화를 보고 나서 너무 혼란스러운거 있죠"
신문을 덮으며 J.D는 흥미로운 듯한 표정을 짓는다. 그녀는 항상 그랬다. 밝음 속에 잔존하는 극치의 어둠을 덮어버리려는 듯 생각 없는 모순 속에 진리를 담아내곤 했으니깐
"아저씨, 영화대로라면.... 만약 시간 여행이 가능하다면 한 인간의 인생은 순환의 고리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건가요?"
"응? 무슨 말이야?"
지현은 영화의 주인공이 보여준 삶이 너무 속상한 듯 곧 울먹거릴 자세다.
"그니깐 이런거에요.... 주인공은 미래에서 인류의 종말을 막기 위해 과거로 돌아오죠. 미래의 A라는 지점에선 과거 여행이 가능하고 인류 종말을 야기했던 바이러스 유포를 막기 위해 그를 과거로 보내게 되요. 물론 이런 스토리는 얼마든지 존재하는게 사실이에요 하지만 문제는 주인공이 과거의 B라는 지점에서 인류를 멸망시킬 바이러스 유포를 막지 못하고 살해된다는 점이에요. 공항에서 저지하려는 그가 경찰에게 살해당하죠 그리고 그 B라는 지점에서 어린 자신과 조우하게 되요.... 그럼 그는 다시 인류 멸망을 목격하고 A라는 지점에서 다시금 B라는 지점으로 과거여행을 하고 또 다시 살해되고.... 이상하지 않나요? 결국 정해진 과거와 미래에서 주인공은 수억 번 아니 무한정 B와 A라는 지점의 삶을 반복하게 되는 거잖아요"
지현은 주인공이 겪게될 무수한 삶의 반복과 과거와 미래 그리고 시간여행이 던져주는 그 모순 속에서 정말 머리가 아픈 듯 들었던 커피조차 놓은 채 얘기하고 있었다.
"과연 우리가 지닌 이 얄팍한 지식으로 시간과 미래 그리고 과거를 지배할 수 있을까? 음.... 우리가 절대적이라고 믿고 있는 양자 물리학조차 세상사의 천 분의 일도 설명하지 못하는데 말이야"
J.D는 자신의 말을 유심히 듣고있는 지현의 모습에서 어릴 적 그의 모습을 찾아낸다. 그녀는 무슨 일이 있든, 어떤 문제가 있든 J.D가 정답을 제시해 줄 것이라는 걸 의심하지 않는 모양이다.
"쉽게 설명해보자면 이런 상황을 상상해봐. 상대성 이론에 따라 무의 질량과 무한대의 에너지로 빛 보다 빠른 속도가 가능하다고 했을 때 과거로의 여행은 가능하다고 이론적으로 증명돼 하지만 미래라는 것은 아직 존재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미래로의 여행은 불가능하지 맞지?"
지현은 J.D의 말을 경청하자 다시금 커피 잔을 든 채 음료를 마실 수 있었다. 아마도, 그녀에게 있어서 J.D는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하나의 안식처인 모양이다.
"좋아. 그럼 어떻게 해서 지현이가 과거로의 여행이 가능해졌다고 가정해봐 이론적으로는 증명됐으니깐 말이야... 음.... 한 이틀 전쯤 어때? 지현이가 이틀 전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던 지현이 앞으로 간 걸로"
지현의 얼굴이 화끈거린다. 이틀 전 볼일이 너무 급해 화장실로 뛰어들어갔을 때 감당할 수 없는 소리에 민망해했던 기억이 있었으니까 그 일로 얼마나 놀림을 받았는지
"정말!!!!"
"하하하 알았어 알았다구"
발개진 얼굴로 J.D의 어깨를 감정 어리게 부여잡는 지현을 피하며 그는 넉살 좋은 웃음을 흘린다.
"여하튼.... 지현이 이틀 전 지현의 앞에 나타났을 때 미래의 지현도 과거의 지현도 모두 자신의 모습이야 그렇지?
그녀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J.D의 말이 맞는 것 같다. 그녀는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다면 과거의 지현에게 있어 미래의 지현은 누굴까? 이론적으로 보자면 정해진 미래가 없기 때문에.... 미래의 여행은 가능하지 않다고 그랬어 하지만, 과거의 지현에게 있어 그녀는 미래에서 온 자신 즉 미래가 정해져 있다는 증거가 되 버리는 셈인거야 참 모순적이지 않아?"
"아......"
그녀는 J.D의 말이 자신이 혼란스러워 하던 영화의 내용과 그 맥락을 같이 함을 알 수 있었다. 결국 시간여행은 이론적으로도 모순이라는 얘기가 된다.
"그래 결국.... 단편적인 시간여행의 개념은 사실 가능하지 않은 불가능한 얘기라는 거야 뭐 영화처럼 빛보다 강한 에너지로 과거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 관찰만 가능하고 물리력은 행사하지 못한다던지 혹은 웜 홀 이론처럼 결국 시간여행은 차원여행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어. 아까도 말했잖아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극히 단편적인 일부일 뿐이라고 그게 한계라는 걸 알 수 있다면 지현이가 가지고 있는 혼란스러움이 사라지지 않을까?"
그는 언제나 그렇듯 그녀에게 정답을 선사한다. 그와 그녀가 처음 만났던 날도 그랬고 오늘도 그랬다. 이미 오랜 시간 함께 한 그들이지만 둘은 서로에게서 진실과 해답을 갈구하고 있었던 셈이다.
"음.... 아저씨 그렇다면 미래를 예언한다는 것은 무슨 말이죠? 예언, 점, 미신 이런 것들 말이에요"
J.D는 지현의 호기심 많은 모습에 웃음이 난다. 이미 20대 중반을 넘은 나이임에도 그녀는 처음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 아저씨라는 호칭부터
"일종의 신화적 진리라고 할 수 있어.... 결국 인간은 자신이 믿는 바에 따라 그 진실을 결정하니까"
둘의 얘기는 항상 일상으로 시작해서 비 일상으로 끝나간다. 그리고 J.D는 무엇이 일상이고 무엇이 비 일상인지 굳이 묻거나 따지지 않는다. 결국 그의 말처럼 인간은 자신이 믿는 바에 따라 일상과 비 일상을 구분하기 때문에..... 결국 푸코의 말처럼 진실과 지식은 헤게모니에 의한 광기의 역사일 뿐이었다.
사내는 오늘도 용하다는 점장이를 찾아다닌다. 그의 질문에 답해 줄 수 있는 사람은 과연 없는 것일까? 그는 자신이 하고있는 일의 동기를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학습된 쥐새끼 마냥 조작적으로 강화된 행동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생각하고 생각해도 자신이 하는 일의 원인을 찾을 수가 없다. 아포리즘.... 사내에게 있어 필요한 것은 간결함 속에 묻어있는 하나의 진리였다. 그가 왜 그런 일을 해야만 하는가에 대한 해답
<왜 난 이런 행동을 해야만 하는가?>
그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질문이자 궁금증이다. 이번에 찾아갈 점쟁이는 아마추어 세계에서는 이름 꽤나 있는 여인이었다. 본래는 귀신 형상을 한 목조품을 만들다 신이 내렸다는 그 여인의 점괘는 꽤나 잘 들어맞는다고 정평이 나있었다. 게다가 얼굴도 미인이라는 말에 그냥 지나칠 위인이 아니었다. 그는 그 여인이 운영한다는 목조 공예품 가계를 찾아가는 길이었다. 무언가 해답을 찾을 수 있는 기회, 사내는 그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가 가지고 있는 특별한 무언가처럼 다른 특별함이 곧 사내의 곁으로 다가올 것이라는 확신이 가시지 않는다. 그는 가시지 않는 흥분과 열정에 잠시 정신이 팔려있었던 모양이다. 사람과 살을 맞대는걸 싫어하는 사내였지만 정신이 팔린 모양인지 한 중년 남자와 심하게 부딪힌 것이다. 그는 남자를 돌아보았다. 손에 신문 한 장을 들고 있는 남자의 모습은 초라하기 그지없었지만 예의만큼은 바른 듯 깍듯하게 미안함을 표시한다. 그는 상대편의 사과를 기분 좋은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분명 그와 부딪힐 때 온 감흥은 새로운 만남을 예고하는 기분 좋은 느낌이었기에
"미안합니다."
"괜찮습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요"
정말 인연은 인연이었다. 어디 이런 인연이 또 있을까 생각하는 사내였다. 아마 저 길을 걸어가던 중년의 남자와 자신은 전생에 부부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의 인연이리라... 아직은 저 남자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자신이 아는 척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하늘의 인과율에 따라 저 남자도 곧 자신에 대해 알게 될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는 정중히 사과를 하고 다시 길을 걸어가는 중년의 남자를 얼마동안 바라보았다. 정말 웃기는 일이다. 저 남자와 자신의 운명이 이토록 얽혀 있다니 어떻게 웃기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사내는 오랜만에 느껴보는 이유 있는 즐거움과 함께 목조 공예점으로 들어섰다. 역시 듣던 대로 꽤나 미인인 여인이다.
"어떤 일로 오셨나요? 어떤 걸 구하시는 대요?"
사내는 머뭇머뭇 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아니.. 저.. 그게... 사실... 물건을 사러 온게 아니고요.. 소문을 듣고 왔어요"
여주인이 살짝 미소지어 보인다. 예쁘장한 얼굴에 생기는 보조개가 그녀의 미모를 더 돋보이게 만드는 듯 하다. 사실 그녀는 꽤 유명했기 때문에 이런 일을 한 두 번 겪는 것이 아니었다.
"아... 점을 보러 오셨군요?"
사내는 그제 서야 웃음을 지어 보였다.
"에! 점을 보러 왔어요! 정말 궁금한 게 많거든요"
"그럼 이리로 들어오세요."
사내는 여주인이 안내하는 곳으로 따라 들어갔다. 작은 방에는 조그만 탁자 그리고 점을 볼 때 사용하는 나무 젓가락이 병에 꽂혀 있었다. 여주인이 앉은자리 맞은편에 엉덩이를 붙인 사내는 그제야 마음이 안정되는 것 같았다. 항상 이런 식이다. 알 수 없는 해답에 접근할 때 느끼던 그 안정감 그의 느낌대로라면 아마 그 안정감이 자신의 행동의 원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점을 치는 것만으로도 정말 저에 관한 걸 다 알 수 있나요?"
"물론이에요"
사내는 만족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여인에게 출생 년 월일을 말했다. 사내의 말을 듣고 진지하게 점을 치던 여인은 슬슬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그녀의 말은 사내의 과거사를 속속들이 꼬집어 내고 있었다.
"정말 대단하네요 그럼 제가 이제부터 하려는 일을 왜 하는지 설명해 주실 수 있겠어요?"
사내가 정말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저는 점쟁이이지 심리학자가 아닌 걸요."
"알아요, 하지만... 잘은 모르겠지만 저도 제 미래가 보이는 것 같아요. 그런데 제가 저와는 어울리지 않는 짓을 하더군요. 하고 싶지 않을 뿐 아니라 저로선 엄두도 못 낼 일을요... 그런데 분명히 하고 있거든요 전 정말 제가 왜 그런 일을 하는지 궁금해요!"
사내의 심상치 않은 기운에 여인은 무언가 일이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누.. 누구에요?!"
"알아요... 정말 미안해요. 하지만 아가씨는 점쟁이잖아요"
사내는 여인의 손목을 움켜잡으며 다른 한 손으로 서서히 칼을 뽑아들었다.
"안돼.."
붉은 피가 그녀의 목조 품들을 적셔 가는 모습이 아련하다. 십자가에 못 박히던 예수의 피가 스며드는 것처럼 그렇게 스며들어가는 붉은 피의 모습이 절실해 보인다.
"미안하네요.. 하지만 이 일도 예견했어야죠."
오늘도 회사에서 자신보다 어린 부장에게 민망한 꼴을 당한 고형기는 축 늘어진 어깨를 겨우 추스르며 거리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는 이 의미 없는 삶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지만 달리 뾰족한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죽지 않아 사는 것, 그가 유일하게 살고 있는 이유였다. 그는 동네 포장마차에 들러 소주 한 병을 마신 후 싸늘한 밤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술 기운이 얼근했지만 아직 취한 것은 아닌 듯 싶다.
"소양강 푸른 물에.. 황혼이 지면~"
고형기는 소양강 처녀 한 곡조를 구성지게 부르며 계속해서 거리를 걸어갔다. 거리를 걸어가는 이 행위 하나 조차도 그에겐 의미 없는 일상의 반복이었지만 이 거리에서조차 빠져 나올 수 없는 현실이 마냥 슬플 뿐이다. 수많은 사람들은 느끼지 못할 이 원죄적인 외로움... 그는 오늘도 사무치는 외로움을 안으며 걷고 또 걸어왔던 똑같은 거리를 의미 없이 걸어갔다. 너무 정신을 판 모양인가? 고형기는 앞에서 걸어오던 행인을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어깨를 부딪히고 만다.
"어이쿠!"
그는 비틀거리는 몸을 가다듬으며 사과를 했다. 자신이 훨씬 나이가 많았지만 딴 곳에 정신을 판 것은 분명 그의 실수였기 때문이다.
"미안합니다."
"괜찮습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요"
나이는 젊어 보였지만 행인의 인상은 매우 좋았고 예의도 바른 듯 오히려 자신이 미안하다는 듯한 얼굴로 고형기를 부축했다.
"아 이거 감사하오"
"뭘요!"
그는 요즘 젊은이들이 아직은 올바른 정신이 박혀 있다는 생각에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뒤 돌아섰다. 그의 미소 어린 얼굴에 길바닥에 버려진 조그마한 인형이 들어온다. 평소에 눈썰미 좋기로 유명한 그가 예쁘게 조각된 인형을 놓칠리 만무했다. 방금 부딪힌 예의바른 청년이 떨어트리고 간 모양이다. 그는 인형을 돌려주기 위해 얼른 뒤를 돌아보았지만 예의바른 청년은 어느새 그의 시야에서 사라져있었다. 고형기는 주운 인형을 손으로 만지작만지작 해보았다. 나무로 깎아 만든 동자승 인형으로 손수 만든 듯 독특한 모양이었다. 인형을 조각한 사람의 솜씨를 엿볼 수 있을 정도로 잘 만들어진 인형이었기에 그는 그것을 무심히 버려버릴 수많은 없었다. 주위를 한번 둘러본 고형기는 몇 미터 전방에 있는 목조인형가계를 발견했다.
<음.. 이걸 그냥 저기다 줘버릴까?>
그러나 곧 고개를 젓는 고형기였다. 그가 왜 그 인형을 손수 챙겼는지는 자신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직접 만든 수공예품을 취급하는 전문 매장에서 주운 인형을 가지고 들어갔다가는 욕먹을게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는 다시 뒤를 돌아 소양강 처녀 뒷자락을 구성지게 부르며 가던 길을 계속 걸어갔다.
"미안하네요.. 하지만 이 일도 예견 했어야죠."
그는 부르던 노래를 멈추고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곳에는 아무 생각 없이 걸어다니는 행인들 모습만 눈에 들어 올 뿐이었다.
"음... 이상하네... 누가 분명히 귀에다 대고 말한 것 같았는데.. 헛소리를 들었나?"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다시 길을 걸었다.
"나는야~ 소양강 처녀~"
강형사는 피범벅이 되어 바닥에 뒹구는 내장과 눈알을 바라보았다. 그의 옆에서는 감식반에서 나온 전문가가 다각도로 셔터를 누르며 현장을 보존하고 있다.
"희생자의 눈엔 희생자가 마지막 본 모습이 새겨져 있다는데. 그래서 옛날엔 강간범들이 희생자를 살해하고 눈을 파냈다고 하지 않던가?"
감식반 요원은 사진을 찍으며 중얼중얼 거린다. 강형사가 감식반 요원과 몇 마디 주고받자 곧 현장 보고를 듣고 달려온 박경감이 나타났다.
"선배님 외부지원을 요청했다면서요?"
"이런 엽기적인 살인사건에 대해선 전문가라 하더군..... 아마 정신병자의 소행이 아닐까 해서 말이야 그렇다면 우리만으로 수사하기에는 좀 그렇지 않은가?"
강형사는 나무로 만들어진 귀신의 형상을 바라보았다.
"음... 정신과와 심리학이 전문이라고 들었는데요.. 믿을 수 있을까요?"
"모르겠어... 과장 명령이니 어쩔 수 없지.. 실은 내가 지원 요청한 것도 아니야.. 과장이 막무가내로 붙여주더군"
박경감이 담배를 한 까치 물자 제복을 입은 경찰관이 한 사내를 안내하면서 들어왔다.
"이쪽입니다."
사내의 모습은 정신과 분야의 권위자이며 연쇄살인에 대한 논문을 썼다는 경력에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젊어 보인다. 게다가 보기 드문 미남으로 안경 너머로 보이는 맑은 눈이 인상적이었다.
"오셨습니까? 벌써 도착하다니.... 아무튼 현장이 이 지경입니다."
강형사는 그제 서야 방금 들어온 자가 자문을 주기로 한 박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전 강형사라고 합니다."
"아..네 반갑습니다."
강형사가 먼저 악수를 청하며 통성명을 했다. 그러자 박사는 강형사에게 살짝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의 악수를 받아들였다. 미심쩍은 강형사였지만 도리가 없었다. 과장이 직접 지시한 명령이니 따를 수밖에. 서로 잠시 악수를 나누던 박사는 곧바로 감식용 장갑을 손에 끼며 살인이 벌어진 방 뒤쪽으로 갔다.
"안구를 뽑은 것으로 미루어 악마 숭배에 미친 정신병자나 신체 일부를 모으는 변태 살인마의 짓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만....."
다 핀 담배꽁초를 버린 박경감은 자세히 현장을 관찰하고 있는 박사 곁으로 다가와 말했다.
"옛날 원시 부족은 자신의 적을 죽이고 그 시체를 먹었다고들 하죠.. 적의 힘을 자신이 흡수한다는 부족적인 주술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눈알은 최고의 가치를 가졌다고 할 수 있죠. 상상해 보십시오 자신의 적이었던 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면 그 얼마나 짜릿한 경험이겠습니다. 만약 범인이 그런 주술적인 의도로 살인을 행했다면.... 눈알만 가져가고 시체를 여기다가 버렸겠죠........"
박사는 만면에 웃음을 띄우며 박경감에게 말했다.
"그럼 이유 없이 눈을 후벼팠단 소리입니까?"
강형사는 의문 어린 시선으로 물어보았다.
"아닙니다. 아무 이유 없이 눈을 파낼 필요는 없죠 이건 안드로포맨시라고 하는 의식입니다.. 눈알을 가져가는 주술적인 의미가 아니라 하나의 예언행위라 할 수 있겠죠.. 생체해부로 내장을 관찰, 인간의 미래를 점치려 한 믿음의 결과입니다."
"미래를 보자고 사람 회를 친단 말입니까?"
박경감은 경악스럽다는 표정이었다.
"지금까지 있었던 일련의 연쇄 살인에서 희생자는 모두 점쟁이였습니다. 특히 그런 예지력을 지닌 자들의 생체를 해부한다면 더 큰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이겠죠"
"하지만 이번 희생자는 그냥 목조 공예가였을 뿐입니다."
박사는 탁자 위에 놓여 있던 나무통을 들어보았다.
"동시에 아마추어 예언가였습니다. 나무 막대기로 점을 친 것이죠. 이중 하나를 골라 그 결과로 미래를 예측하는 겁니다."
"그런 걸 믿습니까?"
박경감은 박사의 설명이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울 수 없었다.
"전 별로 신뢰성이 없다고 보지만 희생자는 믿을 수밖에 없었겠군요."
"왜 입니까?"
"이 점을 보니 희생자는 곧 살해될 거라는 결과가 나왔으니까요...."
박사는 조심스럽게 방안을 둘러보았다. 모든 사물의 위치와 배열을 기억하려는 듯, 실험실을 지켜보는 누군가의 모습처럼 그의 눈초리는 맑고도 빈틈이 없어 보였다. 점을 보는데 사용되는 나무통을 유심히 관찰하며, 박사는 자신을 수행한 경찰관을 불렀다.
"저랑 같이 왔던 분을 좀 모시고 오세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내려진 나무통에선 피 묻은 젓가락이 심하게 흔들거린다. 강형사는 요동치는 젓가락의 소리가 묘하게 거슬림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죽음을 문 앞에 둔 누군가가 듣는 저승의 목소리처럼 나무가 부딪히는 소리가 강형사의 귓가를 자극한다.
"누가 또 왔습니까?"
박경감은 묘한 표정의 강형사를 바라보며 다시금 담배를 한 대 물어 피운다. 무언가 일이 풀리지 않을 때 줄담배를 피는 것이 그의 버릇이라면 버릇이었다. 하지만 지금 물어 피우는 담배는 그리 맛이 좋지 않은 듯 절로 인상이 찌푸려진다.
"이런 일에는 같은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이 제격이겠죠"
탁한 담배연기가 자신의 얼굴을 어루만지는 것도 모르는 듯 강형사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이전의 소리를 회상했다. 날카로운 쇠붙이가 긁는 소리도 아닌 것이 꽤나 신경에 거실리는 모양이다.
"무슨 뜻인지.....?"
이해를 못하던 박경감은 경찰관을 따라 걸어 들어오는 사람을 발견하고서야 박사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건 강형사도 마찬가지였다. 제복 경찰관을 따라 들어오는 사내를 발견한 강형사는 묘한 괴리감과 거부감이 더욱 강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괴상망측한 무당 차림을 한 사내의 모습은 누가 보나 점쟁이로 보이는 사람이었다.
"저 사람은 누굽니까?"
박경감은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비벼 끈다. 사건 현장에 무당차림의 사내가 마음대로 들어올 수 있다는 사실조차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지만 과장이 붙여준 전문가라는 남자는 별로 개의치 않는 모양이다.
"네 꽤 유명한 역술가인 김을재씨입니다"
"아니! 박사님... 여긴 살인현장입니다. 이런 곳에 왜 점쟁이를....."
강형사는 계속해서 미심쩍었던 박사에게 다그쳤다. 미심쩍긴 박경감도 마찬가지였다. 공직 생활 25년 동안 살인사건 현장에 점쟁이를 데려온다는 말은 본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박경감 이었다.
"쉿........ 조용... 뭔가가 보입니다."
김을재는 갑자기 눈을 뒤집으며 강형사의 말꼬리를 잘랐다.
"살인자가 보입니다. 그 자는 자신의 인생이 자신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정해진 이치대로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죽이는 겁니다.!"
"정해진 이치대로 살아가는 건 제대로 사는 거 아닌가요?"
박경감은 다시 담배를 한 대 물어 피우며 말했다.
"그렇죠.. 그러나 이자는 그 정해진 이치를 잘 못 이해하고 있어요 자신이 사람을 죽이는 일이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죠.. 자신이 미래에 사람을 죽이는 모습을 보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럼 생김새는 보입니까?"
강형사는 약간 빈정거리는 말투로 물어보았다.
"생김새는... 남잡니다... 그것도 아주 젊은........."
기가 찬 듯한 표정의 박경감과 강형사였다. 그 정도 사실은 누구나 찍을 수 있었다. 이렇게 잔인한 범죄를 저지르고 사람을 해부하려면 근력이 달리는 여자는 무리일 것이다. 남자 그것도 아주 젊은 남자라야 이 정도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는 건 세 살 먹은 어린애라도 예측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김을재는 두 사람의 반응 같은 건 안중에도 없는 듯 싶었다.
"여기입니다! 놈이 여기서 여자한테 덤벼들었어! 하지만 잘 안 됐군... 그래서 화풀이를 한겁니다.."
정신을 집중하던 김을재의 눈이 갑자기 뒤집어지기 시작했다.
"이럴 수가! 사라졌어. 이제 안 보여... 이 살인자... 그냥 착각 속에 빠져 있는 자가 아니야... 이 자도 미래를 보고 있어... 그것도 아주 강력한 힘으로.. 내 힘으로도 이젠 어쩔 수가 없겠군"
박경감과 강형사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할 말을 잃은 채 김을재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김을재가 한 얘기 전부는 그냥 찍어도 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구체적인 것을 물어보면 방금 처럼 대답하면 그만이다. 안 보인다고.........
"지금 장난하는 겁니까? 저 사람 대체 어디서 데리고온 겁니까?"
강형사는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말했다.
"밑져야 본전 아니겠습니까? 조금만 더 들어봅시다. 김을재씨... 힘들더라도 조금만 더 힘을 내 보십시오"
박사는 팔짱을 낀 채로 느긋하게 말했다.
"범인은 아마 십대 후반에서 삼십대 초반의 건장한 남자입니다, 수염을 기르고 있으며 발기부전입니다. 그래서 더욱 성도착이 심합니다. 더 이상은 무리군요.. 그 자의 힘이 너무 강합니다."
"좋습니다. 이렇게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박사는 김을재에게 감사를 표한 뒤 그를 돌려보냈다.
"박사님.... 워낙 단서가 없어서 그러는 것은 이해하지만.. 이제 어떡하실 겁니까?"
"우선은 김을재가 제시한 프로파일을 근거로 검문검색을 강화하도록 하세요....."
"이보십시오.. 박사님.. 지금 저희를 놀리는 겁니까? 사건현장에 점쟁이를 데리고 오지 않나.. 그치가 말한 것을 토대로 범인의 프로파일을 작성하라니........ 이건 누가 봐도 놀림거리 밖에 되지 않습니다."
강형사는 말도 돼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음... 아직... 과장님한테 얘기를 듣지 않았나 보군요.... 이번 사건의 책임자는 접니다. 박경감님과 강형사님은 지시한대로만 움직이면 됩니다. 알겠죠?"
박사는 맑은 눈에 가득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그렇지만... 이건 도대체가 말이......"
"강형사!"
강형사의 말을 끊는 박경감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시한대로 하죠.. 이번 사건의 책임자가 박사님이라면 저흰 지시를 받아야하겠지요"
"후후.. 이해가 빠르십니다. 역시 노련하다고 소문이 난 박경감님 이시군요.. 그럼 각자 일을 보도록 할까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 강형사였지만 명령이라니 어쩔 수가 없었다.
고형기는 오늘도 자신보다 나이 어린 부장에게 면박을 당하고 있었다.
"아니! 고 과장님! 이 회사에서 근무한지 몇 년 째인데 아직 일을 이따위로 처리하고 있습니까?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오면 곤란할 줄 아십시오... 고 과장이 이 회사에 근무한 경력 때문에 이렇게 월급을 주고 있지만 계속 일을 이딴식으로 한다면 어쩔 수 없습니다."
고형기는 머리를 조아리며 '죄송합니다' 라는 말만 연거푸 해댄다. 한 두 번 겪어보는 일은 아니지만 웬지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 과장님이 그러니깐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들한테 무시를 당하는 겁니다. 지금 고 과장 나이가 몇입니까? 나이가 오십이에요 오십.. 그 나이에 아직도 과장이라니.. 부끄럽지도 않으십니까? 저 아니었으면 정리해고 일 순위에 올랐을 겁니다."
다른 때였으면 그냥 참고 넘겼을 부장의 면박이었지만 오늘따라 듣기 거북한 고형기였다.
"그리고 그 목걸이가 그게 뭡니까? 지금 나이가 몇이라고.. 과장이라는 직위가 부끄럽지도 않으십니까? 그런 덜 만들어진 인형을 목에 걸고 다니다니.. 회사를 다닐 맘이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그는 얼마 전에 주웠던 동자승 인형으로 만든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아무튼 이번 기획안이 고 과장 때문에 펑크가 났으니깐.. 시말서 제출하도록 하세요"
부장은 고형기에게 그가 제출한 기획안을 집어던지며 몸을 휙 돌렸다. 그런 그의 모습을 잠자코 바라보던 고형기의 표정이 갑자기 변했다. 그는 실눈을 뜨며 최면이 걸린 듯한 표정으로 부장을 쳐다보았다.
"이봐... 김부장.. 내가 자네에게 자네의 죽음에 대해서 말해줄까? 자넨 내년 5월 9일날 아내와 아들에게 돌아오는 길에 경인 고속도로 88구간 지점에서 음주운전자가 모는 2001년형 EF소나타와 정면 충돌하지... 그리고 앞 유리로 퉁겨져 나가... 처참한 꼴로 10미터 앞 도로에 나뒹굴게 돼..."
고형기의 갑작스런 말에 부장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당신 지금 상관 협박하는 거야? 당장 모가지니깐 빨리 내 앞에서 사라져"
집으로 돌아온 고형기는 한숨을 몰아 쉬었다. 오늘 이 십 년을 넘게 근무했던 회사에서 해고당한 것이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경찰에 끌려가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는 동료들의 말과 함께 그는 짐을 싸서 회사를 나와야만 했다. 매일 같이 때려치우고 싶은 회사였지만 막상 해고당하고 나니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는 이제 무슨 일을 해서 밥을 먹고살아야 하나? 라는 걱정을 하면서 냉장고를 열었다. 저녁식사도 못한 그는 냉장고 안에 있던 배를 하나 꺼내 들었다. 실상 번듯한 자식 하나 없는 그는 의지할 곳이라고는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욱 외로움이 깊어지는 것이리라...... 배 하나를 집어 들은 고형기는 만족한 듯한 웃음을 띄웠다. 이거 하나면 그래도 저녁식사 한끼 정도는 해결될 것이리라... 과도를 집어들고 배를 깎으려던 고형기는 깜짝 놀라며 배를 쓰레기통에 던졌다. 그는 눈을 비비며 다시 한번 쓰레기통에 있는 내용물을 확인해 보았다.
"쳇... 헛것을 봤나? 휴 나도 늙었나보군"
그가 막 깍으려고 집고 있던 배가 갑자기 고형기의 눈에 자신의 머리로 보였던 것이다. 그것도 양쪽 관자놀이가 관통 당해 피를 흘리고 있는 잔인한 모습으로. 그는 냉장고를 뒤지던 것을 포기하고 집에 쌓인 쓰레기를 버리려고 마음먹었다. 집안 구석구석을 청소하고 나온 쓰레기를 봉투에 담아보니 족히 십 리터는 넘는 듯 했다. 쓰레기를 봉투에 꼭 집어넣은 고형기는 아파트 쓰레기 탱크로 향했다. 아파트 쓰레기 창고에 도착한 고형기는 봉투를 쓰레기 탱크에 던져 놓고 돌아섰다. 그러나 곧 그는 쓰레기 탱크 안에서 나는 고약한 냄새에 탱크 안을 들여다보았다.
"음.. 그렇군요.... 그렇다면 두 분도 그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제 의견에 동의하시겠죠?"
박경감과 강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박사가 재대로 된 수사를 하라는 지시를 내렸기 때문이다.
"조서에 따르면 고형기씨는 시체를 발견만 하고 건드리진 않으셨더군요."
박경감은 고형기 맞은편 의자에 앉아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박사는 그런 박경감과 고형기를 주시하며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그걸 왜 만지겠습니까?"
고형기는 지금 생각해도 치가 떨린다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경찰에는 눈이 도려내진 시체가 있다고 신고했습니다. 시체는 엎드려진 상태였는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시체를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눈이 없는걸 어떻게 알았습니까?"
"눈이 없긴 없었죠, 그렇습니까?"
박경감은 고형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뭐가 불만입니까?"
고형기의 말에 질문을 던지던 박경감은 기가 막히다는 표정이었다. 바로 옆에서 심문을 바라보고 있던 강형사도 기가 막히기는 마찬가지였다. 단지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박사만이 조용히 웃고 있을 뿐이었다.
"그럼 눈은 어떻게 뽑혔나요?"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박사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그거야 나무 젓가락으로......"
"시체에서 나무 젓가락 파편이 나오긴 했는데, 어떻게 아시죠?
"그거야... 당연하지 않소, 점쟁이를 죽인다면 점쟁이가 점을 볼 때 쓰던 나무 막대기로 눈을 파겠지.. "
고형기의 대답에 박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그러나 박경감과 강형사의 반응은 달랐다.
"고형기씨 최근 벌어진 일련의 살인 사건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박경감은 박사가 더 이상 질문을 던지지 않자 다시 묻기 시작했다.
"웬 미치광이가 점쟁이들을 죽여 눈알과 내장을 빼놓는다는 정도요."
"내장 얘기는 어떻게 아시죠? 그건 언론에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박경감의 예리한 질문에 고형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난 신문이나 뉴스 따위는 보지 않아요......... 그 딴 것들을 보고 있노라면 왠지 화가 나거든요"
박사는 벌떡 일어서 있는 고형기의 어깨에 손을 얹은 채 말했다.
"죄송하지만 고형기씨, 저희와 좀 같이 가주셔야 겠습니다."
"들어가시죠, 고형기씨."
"지금... 뭐하는 거요?"
"얼마 전 여기서 살인이 벌어졌습니다. 희생자는 목조 공예가로 사람들의 미래를 점쳐주는 점쟁이 일도 겸하고 있었죠. 그리고 고형기씨가 발견한 그 시체의 피해자와 같은 연쇄살인번에 의해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박사는 고형기에게 간단하게 말한 뒤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박경감과 강형사가 고형기를 밀치면서 뒤따라 들어왔다.
"그 점에 관해 뭐 해주실 말씀 없습니까?"
"난 안 그랬소."
고형기의 말에 박사는 자신의 이마를 툭 때렸다.
"하하.. 고형기씨를 의심하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이번 사건에 관해 뭔가를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희는 못 보는 것을요."
고형기는 박사의 말이 무슨 뜻인지 대체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박사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박경감과 강형사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소."
박사는 고형기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실 텐데요."
"대체 왜 이러는 거요? 쓰레기통에 시체를 발견해서 신고했소. 그랬더니 난데없이 뭔가를 본다고 나를 이렇게 괴롭히는 거요? 차라리 나를 범인이라고 하시오."
박사의 말에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을 이어가던 고형기가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곤 바닥에 남겨져 있던 핏자국 쪽으로 다가갔다. 주의 깊게 바닥을 살피던 고형기는 갑자기 화장실로 뛰어들어가 토하기 시작했다.
"범인은... 자신의 운명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얼굴에 땀을 비 오듯 흘리며 역겨운 표정을 지은 고형기는 화장실을 나오자마자 다짜고짜 말했다.
"그 자는 자신이 정해진 미래를 살아가는 하나의 인형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생긴 건요? 생김새도 보입니까?"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박경감과 강형사는 어이없는 듯 했지만 박사는 진지한 어투로 물었다. 박사의 물음에 고형기는 고개를 저었다.
"내면만 보이고 외양은 안 보인다?"
박사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던 고형기는 핏자국이 이어져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뭐가 보입니까?"
"놈이 여자와 하고 있소. 저기서......."
"여자를 겁탈하나요?"
"아니, 아니, 아니오. 오히려 여자가 부추기고 있소."
"그럼 뭐가 문제요?"
박경감은 고형기를 향해 대뜸 물어보았다.
"그냥... 나만 빼고 남들은 다 하고 사는 것 같아서."
고형기를 궁지에 몰아넣으려고 질문을 던졌던 박경감은 한 방 먹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고형기씨, 범인은 왜 이런 식으로 살인을 저지를까요?"
"사람들은 왜 이런 저런 짓을 하고 사오? 나는 왜 회사에서 짤렸습니까? 나도 알고 싶소. 이 여잔 왜 귀신 인형을 만들었겠소?"
"후후........ 어쩌다 그렇게 됐을까요? 인생이라는 것이 다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박사는 타일르 듯 말했다.
"시체는 내일 아침 발견될 거요..... 한강 고수부지에 떠있을거에요.."
고형기는 피곤한 듯 한 표정을 지으며 박사를 바라보았다.
"그럼 난... 이만하면 하루치 죽음은 다 봤소."
스쿠버다이버가 한강에서 시체를 건져 올리자 박사는 미소를 지으며 박경감에게 말했다.
"어디 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군요"
"그건 그가 시체를 버린 장본인이라는 얘기 아니겠습니까?"
박경감은 고형기가 범인이 확실하다는 듯 말했다.
"그는 범인이 아니예요."
"하지만 부검결과 희생자의 사망시간에 고형기씨의 알리바이는 온전치 못합니다."
"알리바이가 온전치 못한 건 그 사람뿐만이 아니에요.. 여기 서있는 저도 그리고 박경감님도 그 시간에 명쾌한 알리바이를 제시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 자는 시체가 어디 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직접 자신이 버리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박경감님... 당신이 만약 범인이라면....... 자신이 죽인 피해자의 시체를 어디에 있다고 신고를 하겠습니까? 게다가 다른 희생자의 시체가 있는 곳까지 예지 하면서 말이죠"
박경감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런 바보 같은 짓을 범인이 할 리는 만무한 일이었다.
"그럼 박사님은 고형기가 진짜로 예언가라 믿고있는 겁니까?"
"박경감님은 시체가 여기서 나올 줄 어떻게 알았다고 생각합니까?"
"운이 좋았나 봅니다."
고형기는 자신의 침대에 누워 머리를 감싸쥐고 있었다.
"똑똑똑!"
노크소리가 들리자 고형기는 침대에서 일어섰다
"들어오슈"
"올 줄 알았소. 왜 왔는지도 알아요. 내가 말해준 곳에서 시체를 찾았기 때문이지. 그래서 내게 예지력이 있다는 걸 확신하고, 형사 둘이 현장을 점검하러간 사이 범인을 잡는데 협조를 구하러 온 거야."
"말씀하신 대롭니다."
문을 열고 들어온 박사는 고형기를 바라보며 말했다.
"난 안 도울 거요. 나가 주시오."
"하지만 능력이 있다는 건 자신도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알고 있소 언제 생겼는지 모르지만 이 저주받을 능력이 나에겐 있소"
"후후.. 정말 부러운 능력입니다."
박사의 말에 고형기는 눈을 부릅떴다.
"당신은 당신이 어떻게 죽을지 알고 싶소? 미래를 알 수 있다는 것이 부러운 능력이라 생각하시오? 이미 정해진 대로 살아간다면 이 세상을 살아갈 이유가 없는 것 아니겠소"
"그럼 나의 죽음을 한 번 봐보시죠?"
박사는 태연하게 고형기의 말을 받아넘겼다. 얼마동안 박사를 노려보던 고형기는 이내 고개를 숙였다.
"당신의 죽음은.......... 보이지 않는군......."
"후후 그렇겠지요 아무튼 고형기씨 범인은 벌써 네 명이나 죽였어요."
"내가 도와줘도 죽일 거요."
"어떻게 장담합니까?"
"이미 정해진 미래가 아니라면 내가 어떻게 보겠소?"
"미래가 정해져 있다면 사람이 노력을 왜 하겠습니까?"
고형기는 허탈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내 말이 그 말 아니겠소? 미래가 정해져 있다면 대체 지구상에 사람들은 왜 살아 있는 거요?."
"당신은 날 도와야만 합니다."
어느새 고형기 맞은 편에 앉은 박사는 그를 바라보았다. 고형기는 박사의 맑은 눈에서 나오는 알 수 없는 힘에 도저히 거부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운명을 막게 될까봐 도울 수가 없는 겁니다. 놈의 다음 희생자는 타임머신발명가의 할머니일지도 모르오. 할머니가 살면 그는 과거로 가 역사를 바꾸겠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지 않고 아님 더 사소하게... 우리 아버지가 어머니를 못 만나 내가 없게 되고... 정해진 미래란 바꿀 수가 없는 법이오.. 만약 내가 당신들을 도운 다면 그것 또한 정해진 미래일 것이오.. 이렇듯 우리가 아무리 용써도 모두 운명의 굴레 안에서 돌고 도는 하나의 인과율일 뿐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날 거부하지 못해요..."
고형기는 박사의 눈을 바라보다 결국엔 고개를 떨궜다.
"좋습니다. 박사가 나에게 거부 할 수 없는 힘을 내 뿜는 것도 하나의 운명이겠지....."
강형사와 박경감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고형기가 예언했던 것이 모두 들어맞고 있는 것이었다. 고형기는 여러 번에 걸친 실험에서 박경감과 강형사가 할 모든 행동을 미리 알아 맞추고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고형기에게 온 우편물을 읽어본 박경감은 인정하기 싫지만 심령술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수신인께. 예의 상 당신이 아는 걸 나도 안다는 걸 알려 드리는 바입니다. 당신과 대면할 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때 당신을 죽이겠지만, 그 전에 몇 가지 대답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우선 내가 이 편지를 왜 보내는가부터... 당신은 내가 보지 못하는 미래도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꼭 나의 부탁을 들어주십시오 마음을 담아. 추신 그 형사 두 분과.... 나머지... 그 분 에게도 인사 부탁드립니다.>
"그 자가 고형기씨가 우리와 같이 있는걸 본 것일까요?"
박경감은 우편물을 책상에 조용히 놓으며 말했다.
"아닐 겁니다...... 놈도 보이는 거겠죠..... 재밌어 지는군요........"
박사는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정말 놀랍군요. 점쟁이한테 많이 가봤지만 선생이 최고예요. 어떻게 저의 마음을 그렇게 속속들이 알고 게십니까?"
사내의 말에 점쟁이는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마지막 한 장남은 카드를 넘기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사내는 점쟁이의 손을 낚아챘다.
"그런데........ 아쉽게도 마지막 카드는 내가 아니라 선생 겁니다."
사내는 음산한 웃음을 지으며 카드를 뒤집었다. DEATH 카드는 죽음의 카드였다.
"박사님 또 살인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박경감은 카드 점을 보는 점쟁이가 살해당한 현장에서 전화를 걸었다.
"그렇군요.."
박사는 전화에 대고 말을 하면서 고형기를 바라보았다.
"지금 곧 가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박사는 고형기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보이셨죠?"
박사의 물음에 고형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왜 말씀을 하지 않았습니까?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요?"
고형기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오.. 내가 보는 미래는 정해져있는 미래 내 입에서 어떤 소리가 나온다 하더라도 현실은 바뀌지 않습니다. 만약 내가 그 사실을 말했다 하더라도 미래는 그 것까지 포함한 채로 이루어 졌을 겁니다....... 내가 말하지 않을 것까지 미리 계산한 지금의 미래와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그렇겠군요.. 하지만 미래가 보이지 않는 사람이라면... 정해져 있지 않겠죠?"
"그렇겠지요.. 미래가 보이지 않는 사람... 당신 같은......."
박사는 웃음을 지었다.
"범인이 당신과 우리가 같이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이상.. 어쩔 수 없이 안전한 곳으로 잠시 가 계셔야겠습니다."
박사는 강형사에게 고형기를 맡긴 후 사건현장으로 떠났다. 떠나는 박사의 눈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어려있었다.
강형사는 박사의 지시에 의해 고형기를 안전한 여관으로 데리고 왔다. 둘이 같은 방에 있는지 두 시간이 지나자 강형사는 슬슬 심심해지기 시작했다.
"참나 원.. 오늘이 딸 아이 생일인대 이러고 있어야 하다니...... 아무튼 고형기씨... 난 형사지만.. 당신이 했던 것들이 이제 서서히 믿기고 있긴 합니다. 그러나 아직은 좀 의심스럽다는 걸 알아두시오"
고형기는 아무생각 없는 표정으로 TV리모콘을 누르다가 강형사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운명을 아시오? 만약 당신은 당신의 미래가 정해져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소? 당신이 나에게 미래에 대한 얘기를 듣는 것까지 모두 정해져 있는 현실이라면..... 우리가 미래에 대한 사실을 보고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는 모든 행동 하나 하나 조차 정해져 있는 현실이라면 대체 당신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물론 그 어떻게 하는 행동조차 모두 정해진 미래일 테지만"
"끔찍한 얘기군요.. 그렇다면 한 가지 질문을 합시다. 대체 난 어떻게 죽게됩니까? 살인사건을 조사하다가 순직하나요? 아님 마누라와 딸자식을 데리고 드라이브 하다가 교통사고로 죽게되나요? 그리고 만약 내가 이 자리에서 당신에게 어떤 예지를 듣는 것조차 모두 정해진 미래인 것입니까?"
고형기는 슬픈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님 몇 십 년 후에 혹 내가 폐암으로 죽는 겁니까? 그리고 당신에게 그 소리를 들은 내가 담배를 끊는 것까지 모두 정해진 미래입니까?"
"아니오..... 당신에게 그런 미래는 없습니다. 단지 내 눈에는 보이는 건 당신과 내가 서로 손을 잡은 채 눈물을 흘리고 있는 모습뿐입니다....."
강형사는 황당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우리 둘이 손잡고 울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만약 당신 말이 맞는다면 지금 이 순간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조차 정해진 미래겠군요"
"그럴지도......"
고형기는 다시 TV리모콘을 만지작거렸다.
"그것 보다... 배고프지 않소?"
고형기가 배를 문지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배가 고프기는 강형사도 마찬가지였다.
"그러고 보니 저녁도 안 먹었군... 그럼 내가 가서 먹을 것 좀 사 올테니 당신은 여기 잠자코 있는게 좋을 거요.. 여관 사방에는 사복 형사들이 감시하고 있으니깐."
"좋을대로.."
강형사가 문을 나서자 고형기는 카운터로 전화를 걸었다.
"여기.. 시원한 맥주 두 병만 올려보내 주시오"
몇 분이 지나자 방문으로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맥주 왔습니다."
고형기는 문을 열고 종업원에게 맥주를 받아들었다.
"고맙소.."
고형기가 맥주를 받아들고 문을 닫으려 하자 종업원이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우리가 이렇게 만나는 것조차 정해진 미래란 말인가?"
고형기는 문 앞에서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종업원을 보며 말했다. 그러자 곧 이어 종업원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마치 희열에 찬웃음을 억지로 참으려는 듯...
"당신을 이리 데려오다니, 하필 내가 일하는 곳으로 말이요..... 정말 운명이란 묘하지 않습니까?!"
종업원이 흥분을 감추며 말을 하자 고형기는 수긍의 미소를 띄웠다.
"그렇군... 운명이란 참 우스운 거야... 내가 미래를 보는 힘까지 그리고 자네가 미래를 보는 힘까지 모두 정해진 미래라는 사실... 참 웃기지 않나?"
"믿기 힘든 일이지만 이렇게 현재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도 불가능한 건 아니었나보군, 이렇게 만난 걸 보니."
"세상 참 우습군요.. 이런 걸보고 운명의 장난이라고 하나보죠? 안 그래요?"
"그런 것 같군."
고형기는 방문을 열며 방안으로 들어가 앉았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있던 종업원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진작부터 당신한테 물어보고 싶은 사실이 있었어요. 내가 한 일과 앞으로 할 일들, 다 보셨죠.?"
고형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끔찍하더군."
"나도 알아요. 하지만 당신이 그 것을 보는 것도 어쩌면 하나의 운명이겠죠.. 그렇지 않나요? 내가 내 미래에 대해보고 순리대로 일을 저지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정해진 미래에 살고 있죠. 그래서 얘긴데 난 참 궁금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내가 정해진 나의 미래에 따라 사는 것은 이해하겠는데. 대체 왜 내가 그 짓을 하죠?"
"자네는 그 사실을 정말 모른단 말인가?"
종업원은 도대체가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들썩거렸다. 그의 태도를 보고 있던 고형기는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네가 살인마라 그런 거야."
종업원은 고형기의 말에 참고있던 웃음을 터트렸다.
"그거... 말 되는군요.. 바로 내가 찾던 정답이었어요."
그는 드디어 정답을 알았다는 기쁜 표정으로 고형기에게 다가와 앉았다.
"이제야 모든 게 설명돼요... 내가 왜 그런 미래를 가지고 살아야만 하는지.. 당신이 그에 대한 정확한 답을 주었어요.."
종업원은 잠시동안 고형기를 바라보다 웃음을 지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 그의 행동에 무관심한 듯 TV리모콘을 만지작거리던 고형기는 차분하게 말했다.
"아냐. 자넨 날 지금 죽이지 않아."
"아니? 왜요?"
종업원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건... 내가 자네에게 죽기 전에 누군가가 먼저 죽게되기 때문이야...."
고형기가 말을 마치자마자 방문을 열며 강형사가 들어왔다.
"누구야?"
강형사는 품에서 권총을 뽑아 들었다. 사내는 전에 김을재가 말한 인상 착의와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분명 수염을 기르고 있었으며 무엇인가 살기 같은 것이 느껴지는 남자였다. 강형사의 본능은 바로 자신 앞에 있는 남자가 위험하다는 경고음을 보내고 있었다.
"타앙!"
총소리가 울려 퍼지자 강형사가 방바닥으로 힘없이 꼬꾸라졌다.
"하하! 당신의 말이 맞네요.. 역시 당신은 제가 찾던 사람이었어요.. 휴우... 미리 권총을 구해놓길 잘했군요... 어렴풋이 내가 권총으로 사람을 죽이는 모습을 보았거든요 자 이젠 당신이 죽을차례 인가요?'
고형기는 종업원이 머리에 권총을 갖다가 대도 무관심한 표정이었다.
"아니..."
"이번엔 또 왜요?"
"그건 말이지.."
고형기의 품에 있던 칼이 종업원의 심장을 정확하게 찔렀다.
"내가 자네를 먼저 죽여.. 그리고 난 뒤......."
심장을 찔린 종업원의 손가락이 까딱거렸다. 권총 방아쇠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있던 종업원의 몸이 경련을 일으키자 겨누고 있던 총에서 총알이 발사됐다. 머리를 관통 당한 고형기는 이제야 모든 업보에서 벗어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이 며칠 전 먹으려던 배에서 보았던 영상과 똑같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난 뒤..... 내가 죽지......"
심장에 칼이 박힌 사내는 눈을 부릅뜨며 자리에 쓰러졌다. 고형기는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종업원의 몸 위로 서서히 쓰러졌다. 그리곤 그의 손이 강형사의 식은 손을 잡았을 때 그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어서오십시오..... 바쁘신 분이신대 저희 병원까지 찾아주셔서 갑사합니다"
L정신과 병원의 원장은 세계적인 석학이 자신의 병원에 자문을 주러 방문한 사실에 큰 자부심을 느꼈다.
"뭘요.. 그것보다 요즘 제가 재미있는 연구를 하느라고 이렇게 좀 늦었습니다만.. 양해해 주십시오"
"물론입니다! 박사님 같으신 분을 매일 병원에 붙잡아 둘 수는 없지요 그냥 시간 나실 때마다 조언을 해주시면 됩니다. 그런데 박사님 목에 걸려 있는 그 목각 인형이 참 인상적이군요"
정신과 병원 원장은 박사의 목에 걸려있는 잘 조각된 동자승 인형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 이거요? 원장님 눈이 참 예리하십니다. 이건 제가 요 며칠 간 연구하던 인간 이상심리에 쓰였던 중요한 도구입니다."
"아.. 그러십니까? 외람 되지만 어떤 연구였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같은 심리학을 연구하는 한 학자로써 박사님의 연구에 대한 대충 얘기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좋습니다. 전 오랜 기간 인간이 지니는 환상에 대해서 연구했습니다. 예를 들자면 자신이 미래를 볼 수 있다는 환상을 지닌 인간에 대한 연구였지요... 물론 그들이 보는 미래라는 것이 실상.. 제가 제시한 인과율에 따른 가장 가능성이 큰 하나의 확률이었습니다만... 물론 그들은 인과율에 따른 가장 큰 확률의 미래가 펼쳐졌을 때 자신이 예지력을 가지고 있다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말이지요... 인간의 심리라는 것이 참 오묘하더군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궁금증은 모든 인간이 태초부터 가지고 있었던 공통된 것이었습니다."
"그렇죠"
"그런데.... 묘한 것은 그 후에 있었습니다. 인간에게 미래를 보여주었을 때의 반응.. 그토록 궁금하게 여기던 미래에 대해 보여줬을 때 그들은 큰 절망에 빠지게 됐습니다. 즉 불확실한 미래에서만 존재했던 희망이 사라진 인간이란 참으로 무기력한 존재였죠"
박사는 원장에게 대충의 설명을 한 후 기도하는 시늉을 했다.
"그렇군요... 믿음과 희망이라는 인간의 심리영역을 연구하는 것도 상당히 가치 있는 일이지요.. 그런데 왜 갑자기 기도를 하시고 그러십니까?"
"아.. 네.. 이건 저의 연구를 위해 희생된 여덟 명의 사람들에게 하는 기도입니다."
"참 고마우신 분들입니다. 의학 발전을 위해 그렇게 협조해 주시다니.."
"참 고마우신 분들이지요"
박사는 정말 고맙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닥터 진 저희 병원에 도대체가 알 수 없는 증상을 지닌 환자가 있는데 그것 때문에 이렇게 자문을 구하기로 한 겁니다. 한 번 봐보시겠습니까?"
첫댓글 1등~~ ㅋ_ㅋ 나에게도 이런일이 .. 으흐흐~ 글 읽고 다시 립흘 달께용 ㅋ
헐.. 그럼 이게 모두; 그 박사가 저지른 일이군요 ㅡㅡ;; 저도 가끔씩 미래..운명에 대해서 생각하곤 하는데... 미래가 정해져 있다면.. 정말 슬플거 같아요 ㅠㅠ 글 너무 잘읽었습니다~ 건필하세요~
혹시 박사=닥터진=제이디 ??
박사=닥터진, 시리즈물이라 사실 모두 연결해서 봐야합니다. J.D는 대립하는 인물? 정도라고 할까요?^^
잘 읽었습니다^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