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더위란 난생처음 당하는 것이었다.”
시인 정지용의 산문 '가장 시원한 이야기'의 첫 문장이다. 정지용은 이 더위를 가리켜 "숨도 막히지만 기가 막혀서"라고 했다. 그러나 정지용은 마음을 지그시 누르며 그날을 기다리기로 한다.
"참고 살기로 했다. 아무리 덥다 해도 제철이 오고 보면 이 나무에 새로운 바람이 깃들 것이겠기에!"
시인의 생전에는 에어컨도 없었으니 무더위에 어지간히 숨도 막혔지만 기도 막혔으리라.
최악의 폭염이라고 여기저기서 비명이 들리고, 염소 뿔도 녹인다는 압력솥 더위였지만 나는 오늘도 반려견 ‘베베’를 앞장세워 산에 올랐다. 올 여름도 이틀인가 빠지고 무슨 약속이나 한 듯 산을 꼬박꼬박 올랐다. ‘지혜를 얻으려면 바다로 가고 너그러운 마음을 구하려면 산으로 가라’했던가. 손바닥만 한 마음 탓도 있지만 딱히 죽칠 일도 없고 축 처져 있기 뭐해서였다. 강총경(강순경)이 회 먹으러 포항 가자는 권유도 베베 때문에 안 된다 했더니 기절초풍 비아냥거렸다.
“쓸만하다했더니 사람 완전히 버렸네….”
뭘 모르는 말쌈이다. 고독한 사람에겐 남모르는 친구가 있는 법.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1Q84'에서 여성 킬러 아오마메는 생사가 걸린 임무 수행을 떠나며 친구에게 집에 둔 고무나무를 돌봐달라고 간곡히 부탁한다. 뤽 베송 감독의 영화 '레옹'에서 실내 식물 아글라오네마는 킬러인 레옹의 분신이나 다름없다. 레옹은 아글라오네마를 화분에 담아 정성껏 가꾸고 거처를 옮길 때마다 갖고 다닌다. 그에게 있어 제일 친한 친구는 아글라오네마다. 레옹은 아글라오네마와 대화도 나누고 마음의 평정을 얻는다. 나 또한 소설가 백영옥처럼 참회록을 쓰긴 싫다.
“나는 이 자리에서 나의 로즈메리에게 깊이 참회한다. 그녀는 내게 물을 청했으나, 나는 비료를 주었고, 그녀는 내게 조금 더 많은 바람과 햇볕을 구했으나, 나는 내 두통을 위해 그녀를 어둑한 내 침대 구석에 몰아넣었다. 오늘 아침, 그녀가 이파리를 늘어뜨린 채 죽어 있었다."
베베의 나이가 사람 연세?로 치면 거의 90에 가깝다. 수의사는 건강검진을 간 베베를 보고 자기 종에서는 기록을 세우겠다면서 운동으로 단련되었으니 운동을 멈추지 말라고 당부했었다.
각설하고, 산조차 제 자리에 녹아내릴 것 같은 무더위였지만 아파트에서 산까지는 숲길이라 걸을 만 했다. 꽃 지고 새잎 나 녹음이 온천지에 깔려 허벅지게 더부룩하던 푸나무들이 처서를 지나서인가, 아님 내 느낌인가, 기운이 좀 죽은 듯 했다. 그런데다 조금 못가서 식물의 피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알고 보니 공공근로자들이 산자락 푸서리에서 널출지게 어수선한 가지나 삭정이, 큰 나무 밑에 있는 애솔나무들을 톱이나 낫으로 쳐내고 있었다. 작업을 한 곳은 훤하고 시원해 보였으나 이렇게 함부로 나무에 손을 대도 괜찮은가 싶다. 이런 마음은 우리 동기 나무박사 춘파(김대수)의 영향을 받아서고,
‘인간은 자연에 초대된 손님입니다. 예의를 지키세요.’
제주 우도에 있는 ‘훈데르트바서 파크’입구에 박혀있던 문장이 떠올라서다.
미국 미시간주립대에서 분자 생물학과 유전학을 전공하는 베론다 L 몽고메리 교수는 그의 책 ‘식물의 방식’에서 ‘식물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행동할 뿐 아니라 주변 식물은 물론 다른 유기체들과 소통하고 협력하면서 환경을 변화시키기도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주변 환경을 감지하고 위험한 상황을 판단할 뿐더러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인지 알고 있다고까지 했다. 자라면 자라는 데로 그냥 둬야하지 않을까. 나무의 우듬지를 잘라내는 인간의 몰지각을 한탄하던 춘파에게 언젠가 물어봐야겠다. 어쩠거나 큰 나무 밑에서는 작은 나무가 자라기 어려운가보다.
모기 입이 비뚤어진다는 처서(處暑)를 지난지도 벌써 나흘째다. 그래선지 숲 속 공기는 달콤하고 햇살은 따가우면서도 투명했다.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은 즉물적으로 곡선이었다. ‘곡선의 미학자’로 불리는 스페인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는 “직선은 인간의 선이고 곡선은 신의 선”이라 했는데 잎새 하나까지도 그 어떤 여름이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 여름이 온 산천에 꽃도 피웠다. 십여 년 전에 산비탈에 배롱나무를 수 백 그루 심더니 산천초목이 모두 녹색인데 보라색에 붉은색, 간혹 흰색도 섞여 올해는 배롱나무 꽃들이 유난히 화사했다. 그 꽃 무덤 속에서 매미가 울고 있었다. 그러나 자지러지던 매미 울음소리가 기운이 없고 처량하게 들린다. 매미는 주광성 곤충이라 밤에는 울지 않아야 정상이건만 요사이에는 가로등 탓인가 밤에도 야근을 해 밤잠을 설치게 한다. 매미는 보통 땅속에서 애벌레로 3~17년의 인고의 세월을 견디다가 세상 밖으로 나온다. 하지만 땅 위로 나온 매미의 삶은 허망할 정도로 매우 짧다. 겨우 2~3주 산 다음 생을 마감해야한다. 땅속에 갇혀 지낸 세월을 보상받으려는 걸까, 한이 맺혀서인가, 여름 한철 죽을힘을 다해 포달을 피우며 울어댄다. 그것도 암컷을 차지하려는 속셈에서 내지르는 수놈들의 타울거리는 울음소리라니 수놈은 종에 구별 없이 어디가나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우리나라에 많은 참매미와 말매미의 울음소리는 70~90데시벨에 달한다나. 이는 진공청소기나 열차 소리와 비슷한 수준이란다. 숲 가까이 사는 나는 여름이면 귀가 솔지만 매미의 6덕을 새기며 참는데 이력이 났다.
나는 퍼르퍼르 포롱거리는 산새들에게 윙크를 보내며 시인 이상화가 그렇게 원했던 살진 젖가슴 같은 부드러운 흙을 발목이 시리도록 걸으니 산내리 바람결이 온몸에 감겼다. 그래도 여름의 뒤끝이라 땀이 베여났다. 그러나 나는 어떤 여름을 탓하지는 않는다. 그 여름이 우리들의 먹거리를 키우고 영글게 하지 않았는가. 설사 어떤 여름으로 인해 이십 여명의 사망자가 나오고 길거리로 나앉은 수재민이 부지기수라 하지만 그 어떤 여름을 탓하랴? 대비 못한 인간의 미욱함을 탓할 일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름은 우리 곁을 떠나고 있다. 녹색물이 뚝뚝 떨어지던 나뭇잎들도 윤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초여름 냉면집 앞 포렴에 명조체로 또박또박 적힌 '냉면 개시'라는 빨간 글자가 어느새 탈색되어 희끄무리하다. 가을이 오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마다 여름과 작별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이제 여름을 떠나보내야 할 시간이다.
무섭게 우쭐거리던 무더위가 한풀 꺾이고 저녁이면 선선한 바람결을 온몸으로 느낀다. 바닷물이 좋아 바닷가에 살적에는 그리 좋아해도 8월 10일이면 바닷물이 차가워 얼씬도 하지 않았는데 지구온난화로 세상은 점점 뜨거워지고 있는 모양이다. 하루 강수량으로는 115년 만에 최고 기록을 세우고 인명 피해까지 낸 올 여름이 그나저나 서서히 가고 있다. 그래도 뭣이 그리 아쉬운지 황망히 산모퉁이를 돌면서도 핼끔핼끔 주춤거린다. 그래선지 습한 공기가 내 주위를 아직도 어슬렁거린다. 그래봐야 작열하던 햇살도 기운을 잃었고 다가오는 가을 앞에서 전들 어쩌리. 뒷물이 앞 물을 밀어내기 마련이다.
길고 질긴 여름이라도 그 끝에는 가을이 있는 것처럼, 더위와 집중호우라는 이중고가 닥쳤던 여름이었지만 계절을 떠나보내는 마음은 언제나 아쉽다. 그 어떤 여름도 사랑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기에 보내는 계절은 모두 아쉽다. 거자필반 떠난 어떤 여름은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다시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겠지….
나는 산을 내려오며 이형기의 시 한 편을 마음속으로 읊조렸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첫댓글 글귀가 살아서 꿈틀 거리며 뇌파를 자극하네.
자네의 뛰어난 기억력, 엮어낸 문장에 정신이 번쩍, 잠이 달아났네.
자연을 사랑하고 산을 좋아하는 사나이 앞날에
건강과 행복이 주렁주렁 열리길 기원하네. 그리고 계속 번성하여라.
조용하던 우리들의 카페에 읽을 거리를 실어 주는 이 있어 살아있음을 고맙게
기쁘게 생각한다
여름 잘 보내고 가을 잘 맞자
우리 곁을 떠나면 여름은 언제나 다시 돌아 왔다 그러나
年年歲歲 花相似 歲歲年年 人否同
물이 뚝뚝 뜯는 여름 속에서 ..내년에도 무사 하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