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습은 서울에 책을 구하러 갔다가 효령대군(孝寧大君)의 권유로 세조의 불경언해사업(佛經諺解事業)에 참가하여 배불당에서 교정 일을 맡아보기도 하다가 그의 나이 31세가 되던 1465년 봄에 경주로 내려갔다.
조선의 모든 곳을 답사한 김시습이 가장 살만한 곳(卜居)으로 여기고 사랑했던 곳은 아마도 경주의 금오산이었을 것이다. 매월당집 부록 제 2권에 실린 <매월당시사유록후서梅月堂詩四遊錄後序>에 실린 그의 글에 의하면 “금오에 살게 된 이래로 멀리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고, 다만 바닷가에서 한가로이 노닐며 들판과 마을을 말과 행동에 구애받음이 없이 자유로이 다니며 매화를 찾고 대밭을 찾아 언제나 시를 읊고 술에 취함으로써 스스로 즐거워하였다.” 리고 썼는데, 그는 금오산을 ‘흘러다니 다가 멎는 산‘이라는 의미로 고산故山으로 삼고자 했음인지 여러 번 되풀이해서 ’고산’이라고 썼다. 그는 태어나서 자란 서울을 객관客官이라 하였고, 서울에 있으면서 꾸는 꿈을 객몽客夢이라고 하였다. 그런 여러 가지 정황을 보아 김시습이 얼마나 경주의 금오산을 사랑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관서. 관동. 호남은 하나의 도道로 여겨서 하나의 유록으로 만들면서 금오는 하나의 부인데도 하나의 유록으로 만들었다. 그의 호인 매월梅月이라는 당 역시 금오산의 금오매월에서 따왔으며 그가 머물렀던 금오산실은 바로 용장사(茸長寺)이며, 그 집의 당호가 바로 ‘매월당’이다.
이 금오산에서 서른한 살부터 서른일곱 살에 이르는 인생의 황금기를 보내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로 불리는〈금오신화〉를 비롯한 수많은 시편들과〈유금어록(遊金語錄)〉을 남겼다. 집구시(集句詩)인〈산거백영(山居百詠)〉과〈전등신화(剪燈新話)〉를 본떠 지은〈금오신화(金鰲新話)〉도 이때(1468)에 지은 작품이다.
김시습은 금오산에서 지내면서 시를 짓기를, “오막살이 푸른 담요 따뜻하기도 한데, 매화 그림자 창에 가득, 달 밝은 밤에 등잔 돋우고 밤새 향 피우고 앉았으니, 사람이 보지 못한 책 볼까 두렵구나.”하였다.
그는 저술한 <금오신화>를 석실에다 감추고 말하기를 “후세에 반드시 나를 알 사람이 있을 것이다.‘고 하였는데 그의 말이 헛되지 않아 <금오신화>가 사람들에게 발견되어 김시습의 작품 중에 널리 알려진 작품에 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