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내용을 삭제하지 마세요!!
(아래 선 아래에 글을 올리세요!!)
----------------------------------------
마르코스 무가베 등 지구상 악명높은 독재자들의 마누라들은 하나같이 프랑스의 명품들에 매료되어
국고를 자신의 개인금고인양 탕진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60년대 루마니아의 독재자 체아우셰스쿠의 부인 엘레나도 어린 시절 가난으로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
으나 나중에 대통령 부인이 된 후 남편의 지위를 이용해 권력의 정점에 올라 국고로 온갖 사치를 했고
화학박사라는 가짜학위까지 만들어 당당히 '뒷방 대통령'으로 군림했다.
그녀 역시 무속신앙과 점성술에 심취해 국가의 중요한 결정을 무속인의 조언에 따라 결정했는데
1989년 독재와 악정에 시달린 국민들이 들고일어나자 체아우셰스쿠는 국방장관에게 총으로 국민
들을 쏴죽이라 했지만 국방장관은 국민들에게 총을 겨눌수 없다며 대통령말을 무시하고 오히려
국민들에게 대통령을 내어준 후 자신은 총으로 자살하고만다. 대통령부부는 바로 구속되어 몇달 후
공개재판으로 총살당했으니 그로서 24년간의 그 독재는 끝이난다.
명품을 얘기한다면 세계대전의 각국 군복을 빼 놓을 수 없다. 당시 모든 나라의 주목을 받던 군복은
단연 독일이었는데 우리는 영화나 사진에서 전범인 독일군이라면 선입관부터 눈쌀을 찌푸리지만
세계인들은 모든 적국들마저도 독일 군복을 칭송하며 부러워했다고 한다.
당시 독일 국방군 군복과 나치 무장친위대 군복은 히틀러와 괴벨스가 군복을 멋있고 이쁘게 만들어
청년들의 입대를 유도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최대한 이쁘고 멋있게 만들라고 지시가 내려졌는데 내가
오래전에 읽은 책에 의하면 당시 프랑스의 최고 디자이너 샤넬이 특별의뢰로 디자인했다는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그 후에 보면 그 독일 군복은 독일의 한 디자이너가 만든 것으로 돼있는데 샤넬은
프랑스뿐 아니라 영국의 고위층 남자들 그리고 독일남자들과도 염문을 뿌리고 있었고 특히 괴벨스와도
연분이 있었다는 소문이고 보면 군복디자인 의뢰는 자연스러웠을 듯 하다. 그녀는 예술적 재주도 뛰어
났지만 외모도 대단히 뛰어나 각국의 수뇌부 남성들이 끊임없이 들끓었으니 동서 고금 남성이란 동물
은 다 같은 것이라 볼 수 있겠다.
그러나 그 후 샤넬이야기는 왜 쑥 들어갔을까 생각해보니 프랑스는 당시 독일의 적국으로 독일이 군복을
의뢰했다는 건 자존심문제일 것이고 프랑스로서도 샤넬이 적국을 위해 일했다는건 감추고 싶었을 것이다.
우리는 수많은 영화에서 독일병사를 보면 우선 섬찟하여 저항감부터 가는데 그런 선입관을 떠나 객관적
으로 관찰해 보면 실상 디자인은 뛰어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른나라 군복들과는 달리 색갈부터 개성있는
청회색이고 어깨엔 멋진 훈장같은 계급장을 그리고 허리는 가족벨트로 강조하여 멋을 내고 바지는 다시
여유있는 폭이다가 아래는 긴 가죽장화로 조여 완급의 반복으로 독일인들의 예술감각으론 불가능해 보인다.
그래서 아무리 멍청한 남자도 그 군복만 입히면 똑똑하고 멋있어보인다 하였다.
단 실용성이 아니라 디자인과 멋에 초점을 두었기 때문에 방한기능이 굉장히 떨어져서 실전에선 특히
방한기능이 뛰어났던 소련군에 비해 독일인은 추위에 약한 군복으로 더 많이 얼어죽었다한다. 찌는 여름
에는 물도 귀한 전쟁터에서 그놈의 무겁고 긴 가죽부츠란 또 얼마나 비실용적인가.
실용성을 중요시하는 독일인이 디자인했다면 그런 미적감각만을 고집하진 않았을 텐데 역시 프랑스인
다운 예술성이 문제였다. 젊은이들은 그래도 폼이 나는데 5,60대 장교들은 모두 배가 나와 그 군복은
오히려 단점만 부각시키는 역효과로 보였다.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식으로 '파티복은 프랑스 디자이너
에게 전투복은 독일인에게'가 더 맞을 듯 하다.
내가 짐바브웨 소녀에게 학용품들을 보낼 때마다 동네 문방구에 가서 구입했는데 하루는 문방구
주인이 내게 왜 그렇게 많이 사가시냐해서 사정을 얘기했더니 그분은 감동스럽다면서 그 후부터
값을 거의 반값으로 할인해 주었다. 그것은 아마도 자신이 도매로 떼오는 가격인 듯 했다.
안그래도 박스 가득 학용품을 채우려면 값이 만만치 않던 차 나는 고마울 수 밖에 없었다.
하루는 또 자신은 이제 이 문방구점을 접으려하니 물건들을 가져갈 수 있는대로 그냥 가져가라
하였다. 나는 웬 떡인가 싶어 욕심을 내어 몇번을 들락거리며 운반해와서 집에 가득 쌓아두었다.
그래서 그 후 신나게 소포를 보냈는데 짐바브웨에서 이제 약속한 3년이 다 되었으니 그만 보내라
하는 게 아닌가. 아이쿠 이 많은 걸 어떡한담 싶어 생각하다 그 다음부턴 우리나라의 어려운 아이
들에게 나누어주어야겠다싶어 고아원을 돕기로 했다.
그래서 알아보았는데 7,80년대까지 있던 그 많던 고아원이 거의 없어졌다하였다. 수소문하여 겨우
한군데 서울 저동에있는 고아원을 찾아가 보았더니 작은 방에 많은 아이들을 수용하고 있었다.
80년대까지 서울 강남 한복판에 있던 많은 고아원들 그곳은 외국인들이 고아입양을 위해 방문하던
잘나가는 사업체였다. 나의 언니도 와서 5살되는 한 여자아이를 입양해 갔는데 그 값이 8백만원이나
했으니 요금가치로는 8천만원이 넘을 것이라 얼마나 수지맞는 사업이었겠는가. 한국아이들은 모두
특별히 머리가 우수하다고 소문이 나서 서양에선 큰 인기상품이었으므로 값이 올라갈 수 밖에.
그것도 점점 아이를 못키우겠으면 미리 피임이나 중절들을 하여 고아가 사라지고 있었으니 그들은
문을 닫을 수 밖에 없게되어 '꼬꼬무'같은 프로에 보면 고아원에서 고용한 이들과 경찰이 짜고 거리
에서 놀던 아이들을 납치해 고아원에 팔아 미국으로 보냈다는 사연이 심심찮았다.
그 고아원의 슬픈 아이들 얼굴은 내내 잊혀지지않아 갈 때마다 학용품외에 10만원씩을 더 내놓고
왔는데 한번은 늘 가도 없던 그 원장님을 볼 수 있었다. 60쯤 보이는 그녀는 도무지 얼굴에 사랑이나
연민같은 건 보이지않는 살벌한 인상이었는데 첫눈에 보아도 대단한 명품옷을 입고 있었다. 나는 그런
명품옷을 입은 사람을 직접 가까이 보는 게 처음이라 신기하였는데 다음 번에 볼 때도 마찬가지로
대단한 명품고급옷이었다. 나는 값이 저렴한 옷만 사입고 있는데 내가 절약하여 내는 돈을 그녀는
명품으로 치장하고 있구나 싶어 더 이상 그곳에 가고싶지 않았다. 그다음엔 경기도 시골에 있는 한
고아원을 찾아갔고 내가 파주에 살 때 이웃동네에 있는 제법 큰 고아원에 가보아도 공통점은 아이
들의 한결같은 슬픈 눈과 관리측에선 아이들을 방에만 가두어두고 마당이나 집근처 숲에는 절대로
내보내지 않는 다는 것 이었다. 내가 왜 애들을 밖에 뛰어놀게 안하느냐 물으면 다칠가봐.. 하는 이상
한 변명으로 얼버무리는데 그들은 사업수단인 그 아이들이 도망갈가봐 감시하고 있는 듯 했다.
그들은 고아원을 사랑으로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에서 그런 사업의 명목으로 받는 보조금과 또
나같은 이들의 기부금을 노리는 사깃꾼들만 같아 나는 점점 그들을 멀리하게 되었다.
그 서울의 마지막 원장님도 참 어리석다 싶다. 사업 수완을 발휘하려면 일부러라도 다 떨어진 헌
옷을 입는 코스프레를 하고 만면에 친절한 미소를 띄우며 손님을 맞는다면 나같은 사람들은 쉽게
넘어가 사재를 털어서라도 퍼드렸을 텐데.
언젠가 티비에 공장에서 힘든 일을 하면서도 불쌍한 이들을 열심히 돕고 있는 한 젊은 남자의 말이
자신은 고아원 출신으로 그 고통스런 생활을 잊을 수 없어 그런 불쌍한 사람들을 힘껏 돕고싶다고
했다. 자신과 같이 고아원에 살던 사람들은 대부분 지금 교도소에 들어가 앉아있으며 안그런 사람
몇몇도 별 기술이 없어 끼니를 겨우 벌며 힘겹게 살고있다고.. 그건 내가 아버지때문에 교도소를 드나
들며 관찰한 것과 같다. 고아원생활이란 먹을것이 부족해 배가 고팠다는 것 보다는 사랑과 따뜻한
관심의 부족이 절대적 요인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아이들에게 사랑을 베풀지 않고 자신들의 주머니
를 채우기위한 수단으로 삼은 인간들이야말로 나중에 하느님으로부터 가장 혹독한 천벌을 받을
것이다. 그 아이들이 고아원에서 따뜻한 보삺임을 받고 자랐다면 모두 사랑에 넘친 성인으로
자라나 주위에 고통받는 이웃들에게 따뜻한 사랑을 베풀고 있었을 것인데.
첫댓글 가난한 화가의 아내로 살면서 결혼 내내 옷 한 벌 사입은 적이 없었습니다
남편의 그림을 팔아 사는 전업작가로 사는 형편은 지금 까지도 빛없이 살고 있다는 것이
유일한 자부심이었습니다
두아들 대학 보내고 사회에 내보내도 아들들에게는 좋은 것을 입히고 신을 신겼지요
사회생활 하면서 이제는 아들들이 검소하고 내면의 정신 고급이 최고라는 것을스스로
깨달음을 갖고 있어서 참 고맙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월세집 내집 사방을 둘러보면
남편이 남기고 가신 200여점의 그림과 아이들 유아 시집 동화,내 시집들 앨범외 내그림 등등(창작물)
살림은 고급이 없습니다 내옷은 언니 동생들 입던옷 ,재활용에 버려진 옷중에서 꼭 필요한 옷을 가져다
깨끗이 빨아 입고 있어 왔습니다
엇그제 뉴스에서 요즘 엠지세대는 재활용 옷. 가방. 신...등을 사서 입는다니 지구를 살리는
일을 앞장서서 한다니 참 고맙고 앞날에 서광이 비치는 것이 아닌지....
언니는 더불어 불우한 이웃을 돕고 있었다니 저의 본보기 이십니다 존경합니다..ㅎ
설날 축복 받으세요`~
남편의 봉급정도나 되는 명품가방을 사달라는
여자는 남편보고 온갖 도둑질 부정방법을 쓰
라는 건데 밖에서 그런 방법을 쓰는 남자를 내
남편으로 존중할 수 있을까?
여자들만 정신이 바로 박혀도 남자들은 바로
설 수 있으련만.. 온갖 제국주의의 악행을 자
행해온 나라에게 달러를 보태주는 행위라니..
나는 미국언니가 선물로 가져온 샤넬가방을
창피해서 못들고 다니고 국산가방만 들고
다니는데 한번은 그 샤넬가방을 들고 전철을
탔더니 앉아있는 여자들이 수군거리면서 내
가방을 부럽게 쳐다보는 거 보고 참 기가
막히더군..
우봉입니다
반갑고 약간에 오해?있는듯해서 저의 번호 남김니다
010-2174-9384
나주에서 기생하고있습니다^^
소식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