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 러시아 아무르주 주도(州都)인 블라가베셴스크 일대의 중국인 학살 사건
아무르주 주도(州都)인 블라가베셴스크와 스바보드니 지역의 잦은 지역 분쟁
1900년대 초 제야강 운행 여객선
1900년대 초반 중국인
1900년대 초반 제야강
아무르강 일대 국경선
구한말 만주족이 지배하던 청나라에서,
1899년 무렵부터
외세 침입에 반발하는 의화단 봉기가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러시아, 영국, 프랑스, 미국, 일본,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독일 등은 의화단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를 침략하였다.
1900년 6월경 청나라와 차르 러시아간의 관계가 악화되자,
러시아령 아무르주에 거주하고 있던 청국(淸國)인들의 대표자가 러시아 아무르지역 총독인 그리프스코무(К. Н. Грибскому)에게 청국(淸國)인들이 ‘러시아령에 머물러도 되는지 혹은 잠시 러시아 영토를 떠나는 것이 더 나은지’ 물었고,
아무르 총독은 청국(淸國)인들의 거주를 허락하였다.
총독은 중국인들을 모욕하지 말라는 포고령을 내렸고, 많은 중국인들은 안심하고 계속 블라가베셴스크에 거주하였다.
1900년 6월경(11일경, 혹은 23일에서 24일 사이, 날짜는 불분명) 중국 수도 북경 등에서 외국인들에 대한 의화단과 중국인들의 공격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중국에 거주중이던 러시아 정교회측 인물들도 사망하였다.
청나라 내부에서는 외국계 기독교인들에 대한 공격이 있었지만, 애혼조약(일명 : 아이훈 조약, 1858년) 등에 따라 러시아 땅이 된 아무르주 일대에 살게 된 중국인들은 비교적 평화롭게 거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러시아에서는 1900년 6월부터 ~ 7월 1일 사이 아무르강 중류 블라가베셴스크 일대에서도 청나라와 차르 러시아간의 분쟁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고 주장한다.
러시아측에서 주장하기로는 7월 2일 쯤에 청나라 의화단이 아무르강 건너편의 러시아령인 블라가베셴스크를 공격해 러시아 민간인들을 살해하였다고 한다.
러시아측에서 주장하기를 5명의 민간인이 사망하고 10명 이상이 부상을 당했다고 한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러시아측의 주장일 뿐이다.)
도시는 공포에 질렸다.
아무르 총독 그리프스코무(К. Н. Грибскому)는 보복을 명령했고, 7월초부터 블라가베셴스크 일대에 거주하던 중국인들에 대한 체포와 학살이 시작되었다.
아무르 총독 그리프스코무(К. Н. Грибскому)는 중국인에 대한 단호한 조치 명령을 내린 전쟁 장관 쿠라파트킨(А. Н. Куропаткин)의 지시를 이행하면서,
카자키들에게 도시에서 중국인들을 축출하도록 명령했다.
경찰과 의용대원들이 중국인에 대한 급습을 기획했고, 중국인 수천여명이 체포되었다.
급습에는 약탈, 구타 및 살인이 수반되었다.
7월 4일경(※정확한 날짜는 아니다. 당시에 러시아권에서는 율리우스력 등의 달력을 사용하였다.) 생포된 최대 3천5백에서 4천여명의 정도의 첫번째 중국인들이 베르흐네-블라가베셴스키(Верхне-Благовещенский) 마을로 보내졌다고 한다.
더위 때문에 일부 중국인들은 뒤쳐지기 시작했고 집행관은 "모든 낙오자들을 도끼로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결과적으로 수십여명이 사망했다.
마을 인근 강을 헤엄쳐 건너기 위한 장소가 선택되었고 (강폭은 약 200m, 깊이는 최대 4m 정도) 중국인들은 수영을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대부분의 경우 중국인은 수영하는 법을 몰랐기 때문에 물에 들어간 첫번째 사람들이 익사한 후,
나머지 사람들은 물에 들어 가기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총격이 있었고, 채찍 및 날카로운 무기를 사용하여 물속으로 몰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수천여명 중 백여명 정도만이 아무르 강 건너편으로 건너갔다.
그 뒤를 이은 사람들도 비슷한 운명을 맞이했다.
몇몇 러시아 역사가들은 블라가베셴스크 학살 기간 동안 3,000에서 ~ 7,000여명의 중국인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한다.
국경을 이루는 아무르강 일대의 다른 지역에서도
블라가베셴스크 지역보다는 작지만 중국인들에 대한 학살이 발생했다.
나중에 장군이 되는 알렉산드르 바실리예비치 베리시아긴(Александр Васильевич Верещагин) 중장은 회고록에서 며칠 후 아무르강에서 시체를 발견한 이야기를 썼다.
"지금, 아무르 강 전체에서 익사자는 우리를 쫓는 것처럼 떠내려 왔습니다. 승객들은 모두 객실에서 나와 전례 없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내 기억에서 죽을 때까지 지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블라가베셴스크에서 일정 시간 동안 강 바닥에 누워 있었다가 부풀어 오르고 이제 강표면에 나타납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전의 제정 러시아 사회에서는
‘1900년 중국 북경에서의 러시아 정교회 신부 및 신자 살해 사건 등에 대한 보복’ 등에서 비롯된 중국인 학살사건은 "치명적인 위협 상황에서 필요한 자기 방어 조치를 넘어선 비극적 결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당시 중국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르강 일대의 국경분쟁 역사는 상당히 오래되었다.
러시아령 거주 중국인들에 대한 조직적인 학살
러시아령 거주 중국계의 근거 없는 강제 추방과 조직적인 학살은 명백한 범죄로
앞으로도 계속될 약소 민족에 대한 1921년 아무르 스바보드니 사건과 1937년 강제 이주와 같은 잔학행동을 예고한 것으로 보여질 수 있다.
1900년 아무르주 블라가베셴스크 중국인 학살 사건 무렵
러시아군은 일시적으로 아무르강을 건너 애혼(오늘날의 중화인민공화국 흑룡강성 흑하시, 혹은 아이훈)까지 점령하였다.
(※ 아이훈(애혼)은 중국 러시아간의 국경 분쟁사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도시이며, 러시아 아무르주의 주도인 블라가베셴스크와 아무르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북만주의 도시이다. 1921년 6월 28일 자유시 참변 당시, 사할린부대장 박윤천(박일리야) 등이 자유시에서 탈출하여 애혼으로 대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에도 조선인들이 애혼 지역에 다수 거주하였다고 한다.
일제의 1919년경 자유시 민간인 학살은 한국 역사에 등장하는 1921년 자유시 참변과도 연관될 수 있기 때문에 그냥 넘어갈 수는 없고 대략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에도
러시아측 일부 역사가들은 1900년 블라가베셴스크 근처에서 중국인 3,000여명에서 ~ 7,000여명 정도 살해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중국의 역사가들은 이보다 훨씬 더 많은 중국인들이 학살당했다고 주장한다.
만주 마적 홍호자(혹은 홍후즈)의 기원
오늘날
구한말 한국인들의 간도 연해주 지방 이주, 독립운동, 1920년 2월의 니항사건, 봉오동전투, 청산리전투, 1920년 10월의 간도 훈춘사건, 1921년 자유시 참변을 다루는 역사책들에서
중국과 러시아 국경지역, 아무르강 일대, 만주 일대에서 살인, 약탈, 강간을 일삼던 홍호자(紅鬍子, 紅胡子, 홍후즈) 즉 마적들을 ‘악마’로만 묘사하지만,
그들중 일부는
한 때 청나라, 몽골, 혹은 만주 친일 군벌, 러시아에 협조하였던 과거가 있었다.
태평천국난(1850~1864) 등으로 중국 내륙이 혼란에 빠지고,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하고, 외세가 중국의 이권을 강탈하자 중국의 국경 지방 경비가 더욱 어려워졌으며,
만주•몽골•러시아•조선 국경지방에서도 온갖 종류의 마적, 비적 등이 활개를 치기 시작하였다.
중국 마적으로 불려지는 홍호자(紅鬍子, 紅胡子, 홍후즈)는
의화단 사건 무렵 차르 러시아가 중국령 만주를 침공하자 이에 대한 저항도 하였다.
만주에는 다양한 종류의 비적(匪賊)과 반일 세력이 존재하였으며,
대체로 중국 마적(홍호자)들은 소련군과 1945년 8월 일제 패망후 중화인민공화국 등의 공격을 받고 소련•중국 국경지방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만주 마적 장강호(長江好)와 친일 마적 출신 장작림은 한국 역사에도 중요하게 등장
만주지방의 마적 장강호(長江好)는 과거 대륙침략을 노리던 일본인들에게 협조해 일본인들과 친일 마적단을 조직하여 만주•간도 일대에서 한국계 독립군을 토벌하고,
한국계•중국계를 약탈•강간•살해하던 악명 높은 친일 마적이었다.
(박은식 등은 친일마적 '장강호'가 1920년 10월의 훈춘사건을 일으켰다고 주장하였으나, 러시아측에서는 조선인이 가담하였다고 주장하는 자료가 있다. 장강호의 훈춘사건 관여 여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의견이 있다.)
1920년 10월 2일경 간도 훈춘 사건 발생
그런데, 마적 혹은 반일세력중 일부가
일제의 사주를 받았는지, 아니면 만주와 시베리아를 침략한 일제 및 친일파와 불화가 생겼는지,
1920년 10월 2일 (혹은 10월 3일경이라는 소리도 있다) 두만강 건너편 간도 훈춘현의 훈춘현성과 훈춘현성 안에 있던 일본영사분관을 공격하였다.
이 과정에서 몇명의 일본인이 사망한 것은 사실이다.
일제는 대대적으로 ‘제2의 니항사건’ 운운하며 조선인 학살의 근거로 삼았다. (간도토벌, 간도참변 혹은 경신참변)
마적 장강호, 장작림 등은 1920년 10월 훈춘사건(琿春事件)이후에도 일제에 협조한 것으로 나오는 기록들도 있다.
일제가 회유한 친일 마적단의 경우 만주에 진출한 일본인 낭인(혹은 ‘사무라이’라고도 한다.)들의 지도를 받거나 대부분 인간 말종들로 구성된 경우가 많아,
돈과 이권에 따라 한국계•러시아계•중국계•유럽계•일본계를 가리지 않고 공격하기도 하였다.
아무르강을 경계로 중국과 제정러시아가 국경을 이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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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르강(흑룡강)
아무르강 일대의 중국인 학살
중국인 학살 사건
출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情報 第649號(通化保衛團長 趙佐鄕에 관한 건)], [長江好部隊 日人馬賊 引渡問題], [長江好馬賊團의 長白縣 襲擊], [長江好와의 關係에 관한 건], 동아일보 1921년 보도내용 등등
https://ru.wikipedia.org/wiki/%D0%9A%D0%B8%D1%82%D0%B0%D0%B9%D1%81%D0%BA%D0%B8%D0%B9_%D0%BF%D0%BE%D0%B3%D1%80%D0%BE%D0%BC_%D0%B2_%D0%91%D0%BB%D0%B0%D0%B3%D0%BE%D0%B2%D0%B5%D1%89%D0%B5%D0%BD%D1%81%D0%BA%D0%B5
첫댓글 이런 역사가 있었군요 러시아령 거주 중국인들에 대한 조직적인 학살이 있었고 마적이 일본인들에게 협조해 한국계 독립군을 토벌하고 약탈, 강간, 살해 했군요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청일전쟁~일제시대까지 만주는 마적, 비적, 선비(조선비적, 독립군), 공비(공산비적, 공산당계 동북항일군), 토비... 등등이 우글거리는 곳이었지요.
러시아, 중국, 한국의 보는 관점이 다른 지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