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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너는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될 것이다.>
▥ 사무엘기 하권의 말씀입니다.5,1-7.10
그 무렵 1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헤브론에 있는 다윗에게 몰려가서 말하였다.
“우리는 임금님의 골육입니다.
2 전에 사울이 우리의 임금이었을 때에도,
이스라엘을 거느리고 출전하신 이는 임금님이셨습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너는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고
이스라엘의 영도자가 될 것이다.’ 하고 임금님께 말씀하셨습니다.”
3 그리하여 이스라엘의 원로들이 모두 헤브론으로 임금을 찾아가자,
다윗 임금은 헤브론에서 주님 앞으로 나아가 그들과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웠다.
4 다윗은 서른 살에 임금이 되어 마흔 해 동안 다스렸다.
5 그는 헤브론에서 일곱 해 여섯 달 동안 유다를 다스린 다음,
예루살렘에서 서른세 해 동안 온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렸다.
6 다윗 임금이 부하들을 거느리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 땅에 사는 여부스족을 치려 하자,
여부스 주민들이 다윗에게 말하였다.
“너는 이곳에 들어올 수 없다.
눈먼 이들과 다리저는 이들도 너쯤은 물리칠 수 있다.”
그들은 다윗이 거기에 들어올 수 없으리라고 여겼던 것이다.
7 그러나 다윗은 시온산성을 점령하였다.
그곳이 바로 다윗 성이다.
10 다윗은 세력이 점점 커졌다.
주 만군의 하느님께서 그와 함께 계셨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사탄은 끝장이 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22-30
그때에 22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들이,
“예수는 베엘제불이 들렸다.”고도 하고,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도 하였다.
23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부르셔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24 한 나라가 갈라서면 그 나라는 버티어 내지 못한다.
25 한 집안이 갈라서면 그 집안은 버티어 내지 못할 것이다.
26 사탄도 자신을 거슬러 일어나 갈라서면 버티어 내지 못하고 끝장이 난다.
27 먼저 힘센 자를 묶어 놓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힘센 자의 집에 들어가 재물을 털 수 없다.
묶어 놓은 뒤에야 그 집을 털 수 있다.
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29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30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사람들이
“예수는 더러운 영이 들렸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에페 3,8-12)와 복음(요한 15,9-17)을 봉독할 수 있다.>
The cure of a demoniac in the Synagogue by James Tissot
말씀의 초대
사울이 죽자 원로들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다고 경고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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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은 서른 살에 임금이 되어 마흔 해 동안 다스렸는데, 하느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어 세력이 점점 커졌다(제1독서).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하자 예수님께서는, 한 나라가 갈라서면 그 나라는 버티어 내지 못한다고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마귀들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마르 1,24) 또는 “하느님의 아드님”(마르 3,11)이라는 예수님의 신원을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하느님을 따른다는 율법 학자들은 이 사실을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았나 봅니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서 베엘제불에 사로잡히시고, 마귀 우두머리의 힘으로 마귀들을 쫓아내신다고 모함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나라나 한 집안이 갈라서면 유지될 수 없듯이, 사탄도 서로 갈라서면 버텨 내지 못한다고 하시며 그들의 모순을 폭로하십니다. 마귀를 쫓아내시는 예수님의 능력은 마귀가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또 다른 비유를 드십니다. “먼저 힘센 자를 묶어 놓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힘센 자의 집에 들어가 재물을 털 수 없다.”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마귀 들린 이들을 고치신 기적들은 ‘힘센 자’인 마귀를 ‘더 힘세신’ 당신께서 묶어 놓으셨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힘은 사탄이 결코 맞설 수 없는 힘, 바로 하느님께서 지니신 구원의 힘입니다. 마귀 들린 사람을 고치시는 예수님의 행위는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강한 의지이며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께서 내려오시고 그분을 광야로 인도하신 것처럼,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행적 안에서 활동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율법 학자들처럼 예수님의 활동을 모함하는 것은 성령을 모독하는 행위로 영원히 용서받지 못하는 죄입니다. “내가 하느님의 영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마태 12,28).(한국천주교주교회의 홍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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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하나만 기억합시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은 좋은 것입니다(창세 1장 참조).
좋은 것이 나쁜 것으로 변하는 것은, 실제로 좋은 것이 나쁜 것으로 변질되는 것이 아니라 좋지 않다고 규정하고 판단하는 우리 인식의 편향성이 그것을 나쁜 것이라 매도하기 때문입니다.사람들은 좋은 사람, 나쁜 사람으로 완전히 구분되지 않습니다. 누구 눈에는 좋고 또 누구 눈에는 나쁜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사람은 사람입니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는 우리 시선의 왜곡이 참으로 나쁜 것입니다.제 눈에 낯설고 불편하면 악마로 규정하는 일이 우리 신앙 공동체 안에서 자주 발견됩니다. 신심 활동을 하는 신자들 사이에 편 가름의 잘못이 자주 목격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아무리 나쁘더라도 그를 형제애로 보듬어 줄 수 있는 근력을 키워야 합니다.
교정 사목을 하면서 사형수를 찾아가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은 왜일까요? 회개하고 뉘우치고 그래서 하느님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인간다움에 대한 열정 때문이 아닐까요? 비록 누군가가 아무리 나쁘더라도 늘 좋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기도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신약 성경에 나타나시는 성령께서는 화합과 용서의 힘을 간직하도록 신앙인을 도우십니다.
서로 달라도 하나의 신앙을 지켜 나가도록 우리에게 용기를 주십니다. 서로가 다른 것이 당연하듯, 서로가 하나로 일치하는 것이 성령의 세상에서는 당연합니다. 다름을 틀림으로 생각하는 것이 진정한 악마입니다. 악마가 발붙이지 못하도록 서로를 품어 주어야겠습니다. 다름에 대한 적응, 이것이 참 좋은 세상을 향한 우리의 첫걸음입니다.(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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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 사회의 지도층으로 군림하던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마귀들을 쫓아내고 병자를 치유하시는 기적을 곱게 볼 수 없었습니다. 자신들을 업신여기고, 군중 앞에서 공공연하게 비판하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능력을 지닌 사람으로 인정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했고, 마귀의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거짓 예언자로 예수님을 몰아세우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율법 학자들의 논리는 스스로 모순임을 예수님께서 밝혀내십니다. 예수님의 기적 행위에는 악이 아닌 선이, 죽음이 아닌 생명이 자리 잡고 있기에,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 보아야 남는 것은 사탄의 악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지은 모든 죄는 용서받지만,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고 선언하십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죄란 하느님의 영의 자유와 해방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는 죄, 곧 하느님을 인간의 잣대로 함부로 재거나, 스스로 하느님의 자리에서 사람들을 판단하고 죄짓게 하는 어리석음을 뜻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세례성사를 통하여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았고, 성령 안에 머무는 사람은 무엇이 하느님의 진리에 속하고, 무엇이 사탄의 거짓인지를 식별해 내는 본능을 얻습니다. 우리가 ‘신앙 감각’이라고 부르는 이 영적 식별 능력은 교회 안팎에서 일고 있는 거짓 영을 식별하고, 내 안에서 사탄의 유혹을 끊어 내는 믿음의 덕을 쌓게 해 줍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명성과 치적을 쌓을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께 충실하며 옳고 그른 것을 잘 식별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다윗과 함께 머무신 하느님께서 오늘날 우리 가운데에서도 머무르시도록 끊임없이 청하면 좋겠습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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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의 이야기는 전쟁터에서 그가 비참하게 죽는 것으로 끝나고 이제 다윗 임금의 치세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사울이 기름부음을 받아 임금이 된 순간부터 전사할 때까지 어떻게 스스로 자신의 삶을 망쳐 가는지를 사무엘기 상권은 냉엄하게 전해 주었습니다. 특히 사울은 자신의 잘못을 여러 차례 깨닫고서도 다윗을 시기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끝내 버리지 못한 채 다윗을 죽이려고 시도합니다. 이 모습은 너무나 비극적이어서 성경을 읽는 이의 마음을 안타까움과 답답함으로 무겁게 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사울의 몰락을 여과 없이 보여 주면서 우리가 우리 마음의 어두운 구석을 외면하지 않고 마주 대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 어둠의 구석에 구원의 빛이 비치도록 간절히 기도하게 이끕니다.
사울의 삶을 지배한 병적인 시기와 미움이 어디에서 온 것일지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주님의 영 대신에 악한 영이 지배했다고 성경이 표현하는 사울의 마음의 병은 다름 아니라 의심하고 신뢰하지 못하는 불안한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자비와 약속을 믿지 못할 때, 사람들의 선의를 받아들이지 못할 때 사울과 같은 마음의 병을 앓게 된다는 사실을, 사울의 이야기는 강렬하게 보여 줍니다.
이제 시작되는 다윗 임금의 이야기 역시 죄와 비참함이 가득하지만 결국 축복의 이야기로 남았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그 차이가 왔는지를 곰곰이 헤아려 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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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에서 율법 학자들이 내려왔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그곳으로 몰려갑니다. 사람들의 궁금증은 도대체 예수님이란 분이 어떤 분이신지 율법 학자들에게서 듣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이루신 엄청난 기적들과 그분의 가르침에 대하여 율법 학자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고”(마태 9,33),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요한 7,46).
당시 정통성과 권위를 가졌다고 자부하는 예루살렘 출신 율법 학자들에게는 이 말이 수치스럽고 분노가 치밀어 오르게 다가옵니다. 예수님 자체가 가난한 나자렛 출신인 데다가, 그의 제자들도 고기나 잡아 연명하던 무식한 어부들이요, 세리들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갈릴래아란, 예로부터 ‘이방인들의 지역’이요, 변방의 ‘멸시받던 곳’이었습니다. 그들의 생각에 따르면,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게 된 곳’(요한 7,52 참조)입니다. 있어서도, 있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분의 말씀은 권위가 있고, 그분의 기적은 예사롭지 않습니다.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의 능력이 하늘에서 왔다고 할 수도 없고, 그분의 신분이 예언자라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체면과 권위가 손상되지 않으려면 사람들에게 뭔가 답을 주어야 했습니다. 그들이 찾아낸 답이, 예수님은 ‘베엘제불이라는 마귀에 들린 사람’이고, 이 ‘마귀 두목의 힘’으로 기적을 행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신분이 주는 기득권을 지키려고 얼마나 무서운 말을 하는지요? 우리도 체면과 위신 때문에 이런 거짓 증언을 한 적은 없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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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마귀의 힘을 빌린 것이라고 합니다. 억장이 무너질 일입니다. 엄청난 수모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들어 차근차근 설명하십니다. ‘어떤 집안이라도 갈라져 싸우면 버티어 내지 못하는 법이다. 사탄의 세력이라고 해서 그런 식으로 갈라져 싸우겠느냐?’ 그러니 마귀의 힘으로 마귀를 쫓아낸다는 것은 억지 논리일 수밖에 없습니다.
율사들은 눈뜬장님이나 다름없습니다. 어찌 그렇게 말할 수 있을는지요? 가난한 이들에게 용기와 힘을 주셨던 예수님이십니다. 돈을 받으시거나 그 어떤 보수를 받으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사랑으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사탄의 힘을 빌렸다고 모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대접을 받으셨거늘 영적인 사람이 수모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더구나 같은 신앙인에게 오해를 받는 것은 언제든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영적 생활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한다.” 회개와 뉘우침은 성령께서 베푸시는 영적 은총이거늘 그것을 거부하고 부정하면 어떻게 죄를 용서받을 수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따듯한 것은 성령께서 그 안에 머무르시기 때문입니다. 차갑고 비판적인 곳에서 어떻게 성령의 온기를 느낄 수 있겠습니까? 어느 누구에게도 함부로 ‘악령이 들었다거나 나쁜 영에 사로잡혔다.’고 말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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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의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악령들을 쫓아내시는 것을 보면서 감사하기는 커녕 마귀의 우두머리 베엘제불이라고 혐의를 씌웁니다. 우리도 좋은 일을 하고도 고맙다는 인사보다는 오히려 욕을 먹는 경우가 있습니다. 좋은 사람은 좋은 것만을 보지만, 나쁜 사람은 아무리 좋은 것도 나쁘게만 보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좋은 것만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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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능력과 진리를 대하면서 우리가 먼저 지녀야 할 태도는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겸허한 마음으로 참회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을 때에는 용서를 청할 수도 없고, 따라서 영원히 용서받지 못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겸손하게 자신의 죄를 인정하며 당신께 돌아오는 사람을 언제나 기다리고 계시며 받아 주십니다.
다시 태어나도 현재의 배우자와 결혼하겠느냐는 질문에 몇 %나 긍정적인 대답을 할까요? 2014년에 있었던 조사 결과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남자는 42.6%, 여자는 22%만이 지금의 배우자와 결혼하겠다고 응답한 것입니다. 자신이 선택한 결혼인데도 이렇게 후회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즉, 부부로 살아가는 만족도가 높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를 ‘비교’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친구 남편은 돈을 잘 버는데, 우리 남편은 쥐꼬리만 한 월급만 가져다줘서 불만이다.”
“친구 아내는 남편이 오면 반갑게 맞이한다는데, 내 아내는 집에 들어가도 눈길도 주지 않고 텔레비전만 보고 있어 불만이다.”
비교를 통해 이런 식의 불만 사항이 계속 보이는데 어떻게 다시 결혼할 마음을 가질 수가 있겠습니까?
남과 비교한다는 것은 그만큼 타인의 평가나 생각에 영향을 받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자기 인생의 주인공은 ‘나’인데도, 그 주인공을 ‘남’에게 넘기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타인을 무시하며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타인으로 인해 자신이 부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면 스스로를 되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도 비교를 끊임없이 하고 있었습니다. 즉, 예수님과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 말하는 잘못된 메시아 표상을 비교하면서 잘못된 길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그는 베엘제불이 들렸다.”고도 하고, “그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라고 말합니다.
베엘제불은 유다인들이 이교도들의 신을 경멸하여 부르던 명칭이었습니다. 즉, 이교도들에게 성행하던 구마에서 부르던 신의 이름입니다. 이 주장은 다윗의 아들, 메시아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사람들에게 혼돈을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탄을 쫓아냈다면 그것은 사탄의 힘이 아니고 하느님의 영이 해낸 일입니다. 그러나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죄인들과 어울리는 모습에서 메시아일 리 없다고 말하는 종교 지도자의 말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너무나 많았습니다.
주님은 비교할 수 없는 분입니다. 유일하시고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사탄과 예수님 사이에서 바른 선택이 필요합니다. 이 선택은 단순히 “저는 예수님을 선택합니다.”라는 말로 되지 않습니다. 그보다 주님께서 가장 강조하신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선택이 결정됩니다.
여러분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생각하는 법을 가르쳐야지, 생각한 것을 가르쳐서는 안 된다(코르넬리우스 구를리트).
마음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매일 만 보 이상을 걷습니다. 그래서 하루에 보통 걷는 거리가 10km가 넘습니다. 걷는 것 자체가 이제 습관이 되었는지, 10km 이내의 거리면 그리 멀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까운 거리’라고 생각하며 걷게 됩니다.
아는 친구가 술 한 잔 마시자며 연락했습니다. 걸어가면 분명히 10km 이내이고, 차를 타면 10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입니다. 그런데 그 술자리에 가기가 싫었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인해, 평소에는 가깝다고 생각하는 거리가 너무나도 멀게만 느껴집니다.
마음의 문제입니다. 어렵고 힘들다는 기준 역시 마음이 세우는 것은 아닐까요? 그런데 우리는 어렵고 힘들다는 사실을 보편화 시켜서 누가 생각해도 자신이 최악의 상태라는 것을 강조하려고만 합니다. 자기 마음의 문제로, 이 마음은 자신만이 통제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상황도 긍정적인 마음으로 새로운 변화로 이끌 수 있습니다.
한 말의 식초보다는 꿀 한 방울로 더 많은 파리를 잡을 수 있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저희 수도회 창립자 돈보스코가 각별히 존경하고 흠모했던 선배 성인(聖人)이 있었으니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1567~1622)였습니다. 얼마나 그를 마음에 두고 있었으며, 본받고 싶었던지, 돈보스코가 수도회를 창립할 때 수도회 이름조차 살레시오회로 정할 정도였습니다. 올해 저희 살레시오 가족들은 그의 서거 400주년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1593년 갓 서품된 순간부터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성소 여정은 범상치 않았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그는 서품과 동시에 제네바 교구 참사위원회 의장으로 임명되었는데, 이는 서열상 교구장 다음가는 위치였습니다.
1594년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샤블레라는 험한 산간 지방에 칼뱅 사상을 추종하는 사람들을 가톨릭으로 되돌아오게 하기 위한 목숨 건 선교를 자청했습니다. 그가 샤블레에 최초로 도착했을 때 그곳 사람들의 냉대와 박해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불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회심자들의 수는 극히 미미했습니다. 칼뱅파 신자들의 집회가 끝난 예배당에서 홀로 쓸쓸히 미사를 봉헌해야만 했습니다. 도우미로 따라왔던 사촌은 2년 만에 두손 두발 다 들고 돌아갔습니다.
혹독한 시절이었지만 그는 절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외쳐도 소용이 없자, 칼뱅파로 넘어간 신자들을 위해 팔이 아프도록 눈물의 편지를 썼습니다. 복사기도 없던 시절이라, 같은 내용을 쓰고 또 썼습니다. 그리고 집집마다 다니면서 대문 밑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그는 이른바 ‘미디어 선교’를 일찌감치 시작한 것입니다.
이런 그의 부단한 노력에 더해 1598년 프랑스와 사보이아 간에 이루어진 평화 협정에 힘입어 샤블레 지역의 칼뱅파들이 서서히 가톨릭으로 돌아오기 시작했고, 마침내 4만여 명에 달하는 양들이 다시금 아버지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런 노력에 대한 보상이 그에게 주어지는데, 1602년 35세의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제네바 교구장에 착좌하게 됩니다. 알프스산맥과 안시 호수가 멋지게 어우러진 안시에 거처를 정한 그는 600여 개의 본당을 두루 다니며 사목활동에 전념했습니다.
그가 각별히 존경했던 두 성인이 있었는데, 가롤로 보로메오와 필립보 네리였습니다. 그는 그들의 빛나는 덕행을 온몸에 둘렀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모든 것이 되었으며, 따뜻함과 온유함이 넘치는 착한 목자로 거듭났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 부드럽고 달콤한 품성의 소유자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님을 각별히 사랑했습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큰 환영과 존경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더 나아가 그의 모습과 삶에 홀딱 반하고 매료되었습니다.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런 말까지 나 돌 정도였습니다.
“제네바의 주교님이 저렇게 선(善)하다면 하느님은 얼마나 더 선하실까?”
틈만 나면 분노하고, 여차하면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을 향해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님은 부드럽고 자상한 어투로 이렇게 권고했습니다.
“한 말의 식초보다는 꿀 한 방울로 더 많은 파리를 잡을 수 있습니다.”
기도에 대한 그의 생각은 참으로 설득력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에 대해 생각하고, 하느님을 그리워하고, 하느님을 갈망하며, 하느님에 대해 말하기를 결코 멈출 수 없습니다.”
그가 남긴 불멸의 명저 신심 생활 입문을 통해 영성 생활에 대한 그의 선구자적 시각을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창조하실 때, 초목들은 종류에 따라 각기 자기 열매를 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당신 교회의 살아있는 초목인 그리스도인이 각자 자신의 품위와 신분, 성소에 따라 신심의 열매를 맺기를 원하십니다.”
자기 본분을 망각한 오늘 우리를 향해 그가 남긴 권고는 참으로 뼈 때리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교가 시토회 수도자처럼 봉쇄구역에 머물러 있으면 되겠습니까? 결혼한 사람이 카푸친 프란치스코 수도자처럼 재물을 포기해서야 되겠습니까? 노동자가 주어진 일은 하지 않고 성당 안에만 줄창 앉아있으면 되겠습니까? 수도자가 공동체에 머물러 있지 않고, 주교처럼 여기저기 사목 방문만 다니면 되겠습니까? 그런 모습은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것이며, 질서를 무너뜨리는 견딜 수 없는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신심은 귀족, 노동자, 왕족과 노예, 과부와 미혼녀, 기혼녀 등에 따라 각각 다른 방법으로 실천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실천은 각자의 능력과 일, 직무에 알맞아야 합니다. 신심 생활은 군인들의 막사, 수공업자들의 점포, 왕족들의 궁정, 부부들의 가정에서도 활짝 꽃 피어나야 마땅합니다.”
자아를 죽여야 함을 아는 사람은 성령을 모독할 수 없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시는데, 그 힘이 바로 악령의 우두머리에게서 나온다고 그분의 적대자들이 말했기 때문입니다.
성령과 악령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성령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왜 성령을 원하지 않을까요? 성령께서 하시는 일을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서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일까요? 바로 우리 자신을 죽이는 일입니다.
솔로몬의 성전에서 제물을 바칠 때 하늘에서 불이 떨어졌는데 그 불이 성령의 상징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죽이러 오십니다. 그러나 죽기 싫은 사람은 그 합리화를 성령이 나쁜 영이라고 말해버리는 것입니다.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2021)에서는 이전에 스파이더맨이 싸워야 했던 많은 악당이 등장합니다. 그 이유는 다원 우주라는 개념에서 오는데, 다른 차원의 우주에서 존재하던 같은 악당들이 지구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스파이더맨은 자신의 신상이 공개된 이후로 자신의 지인들에게까지 어려움이 닥치는 것을 보고는 닥터 스트레인지라는 마법사를 찾아가 자신을 아는 사람들의 기억을 다 지워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러나 이 마법이 잘못되어 다른 차원의 지구에 존재하던 악당들이 지구로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지구로 들어온 다른 우주의 악당들은 지구에서 얻는 엄청난 힘에 만족해하며 다시 자신의 지구로 돌아가려 하지 않습니다. 그곳에서 스파이더맨과 싸우다가 죽을 운명임을 알았고, 여기 지구에서 함께 힘을 합치면 지금의 스파이더맨을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 자신들의 지구로 돌아가면 그들이 다 죽는다는 것을 아는 스파이더맨은 그들이 비록 악당이지만 돌려보낼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슈트를 만들었던 기계를 통해 그들을 치료할 수 있는 치료제들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파이더맨은 그들의 운명을 바꿔보려 그들을 집으로 데려와 치료제를 만듭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힘을 잃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스파이더맨의 큰어머니가 사망합니다. 도와주려고 했는데 자신을 가장 사랑해주는 분을 잃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큰어머니의 죽음을 무의미하게 하지 않는 방법은 보복하는 것보다는 그들을 치료해주는 것이라 믿고 결국은 그들 모두를 치료하는 데 성공합니다.
악당들이 거부했던 것은 치료제입니다. 자신들이 갖게 된 힘을 잃어가면서까지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니 힘을 지니고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 스파이더맨은 웃기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대부분의 영화에는 다 이 그리스도 십자가 희생의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사랑의 힘을 믿는 것입니다.
큰어머니의 죽음을 통해 그 악당들을 죽여버려도 시원치 않지만 그는 그 죽음을 통해 치료제를 완성합니다. 스파이더맨이 그리스도라면 그 치료제는 십자가에서 흘리는 그리스도의 피, 곧 성령입니다. 성령을 거부함은 자신의 힘을 잃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힘을 버리지 않으면 결국 죽게 됩니다. 닥터 스트레인지가 그들을 본래의 세상으로 보내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2002년 4월 29일, 독일에서 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의 총기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에르푸르트라는 도시의 구텐베르크 김나지움(10~19세 학생들이 다니는 인문계 학교)에서 퇴학을 당해 앙심을 품은 한 학생이 교사 열두 명과 여학생 두 명 등 총으로 열여섯 명을 죽인 사건입니다.
대학입학 자격시험에 떨어진 로베르트(19세)는 기말시험을 치르지 않기 위해 가짜 진단서를 만들어 제출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발각되어 퇴학 처리되었고, 그는 이 모든 것이 교사들 때문이라 여겨 복수심에 이런 끔찍한 범행을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그가 교사들에게 총을 쏘는 동안 누구도 그를 저지할 수 없었습니다. 이때 한 교사가 나섰습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총을 난사하는 그 앞에 60세의 라이너 하이제 교사는 복면을 쓴 그 앞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차분히 복면을 벗겼습니다. 그리고 그가 자신이 가르친 학생 로베르트라는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로베르트, 이게 무슨 짓이냐! 너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냐?”
그리고 하이제 교사는 자신의 가슴을 내보이며 말했습니다.
“총을 쏘고 싶으면 쏴라. 내 눈을 보고 방아쇠를 당겨보란 말이다.”
로베르트는 힘이 빠진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선생님. 오늘은 실컷 쐈습니다. 이제 재미가 없네요.”
로베르트는 순순히 총을 내려놓았고 라이너 교사는 그를 빈 교실에 밀어 넣고 문을 잠갔습니다. 잠시 후 로베르트는 교실 안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출처: 『어떻게 살 것인가』, 이충호, 하늘아래]
하이제 교사의 가슴에서 나오는 것이 성령입니다. 성령은 그 사람의 죽음과 함께 피와 섞여 나옵니다. 악마가 아니라면 그 성령은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고 자신의 잘못을 보게 만듭니다. 그래서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하고 그렇게 우리 자신을 죽입니다. 이 성령의 힘에 저항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악마가 된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로베르트도 그 성령의 힘에 압도당하여 더는 방아쇠를 당길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 치료제가 바로 그리스도의 옆구리로부터 나오는 피와 물입니다.
이제 우리는 성령을 모독하는 이는 이미 사탄이 된 존재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가리옷 유다가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나오는 성령의 자비를 거부하며 스스로 더 먼 곳으로 도망을 쳤습니다. 그곳이 지옥입니다. 지옥이 없다고 말하는 자도 성령을 모독하는 자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곳으로부터 빼내 오기 위해 흘린 하느님의 피가 성령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을 지옥으로 이끄는 것이 우리 자신임을 믿읍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죽지 않으면 그분께 순종할 수 없고 치료될 수 없음을 믿읍시다. 그러면 적어도 성령은 모독하지 않습니다. 지옥이 있음을 믿어야 하고 그 지옥으로 내려보내는 것이 다름 아닌 성령께서 죽이러 오시는 나 자신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성령을 모독하는 자가 됩니다. 그 끝은 끔찍할 수밖에 없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한국은 곧 대통령 선거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후보의 정책과 능력을 보고 판단 할 것입니다. ‘경제, 부동산, 국방, 복지, 노동, 과학, 외교’ 등과 같은 분야의 정책과 능력을 검증하기 위해서 후보들의 정책을 들어보기도 합니다. 가장 합리적인 것은 후보 간의 ‘토론’입니다. 정해진 주제에 대해서 후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후보들의 능력을 검증하게 됩니다. 향후 5년간 대한민국의 국정을 책임질 대통령을 뽑는 선거이기에 신중한 판단과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합니다. 저는 87년 대통령 선거 때부터 선거에 참여하였습니다. 제가 선택했던 후보가 대통령이 된 적도 있었고, 제가 선택했던 후보가 아쉽게도 낙선한 적도 있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의 선택이기에 당선된 후보에게는 축하의 박수를 보냈고, 낙선된 후보에게는 위로의 마음을 보냈습니다. 공정한 절차에 의한 합리적인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입니다.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예전에는 축제가 되어야 할 선거가 진흙탕이 된 적도 있었습니다. 금품선거가 있었고, 흑색선전이 있었고, 관권선거가 있었고, 지역감정을 유발하는 선거가 있었습니다. 권력을 잡고 싶은 욕망과 욕심 때문에 선거가 난장판이 되었고, 국민들의 눈과 귀를 어둡게 하였습니다. 부정한 방법으로 잡은 권력은 더 큰 부정과 부패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러기에 선거에 있어서 성숙한 시민의식과 언론의 공정한 보도가 필요합니다. 선진국들의 선거는 대부분 한바탕 축제가 됩니다. 선출된 공직자들은 모두가 섬기는 마음으로 일을 합니다. 그러나 후진국들의 선거는 대부분 난장판이 되고 맙니다. 선출된 공직자들은 대부분 권력을 사유화 하려고 합니다. 권력을 잡으면 언론에 재갈을 물리려고 합니다. 법을 공정하게 집행하기 보다는 무죄한 사람을 탄압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려고 합니다.
1592년은 임진왜란이 있었던 해입니다.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일본의 힘이 강해지는 것을 우려하였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여수의 오동도에서 군사훈련을 하였다고 합니다. 율곡 이이께서는 우리도 10만의 군사를 양성해야 한다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치를 하는 사람들은 의견이 두 가지로 갈렸다고 합니다. 지금 같은 태평성대에 군사를 양성하고, 위기감을 조성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유비무환이니 군사를 양성하고, 무기를 정비하고, 성을 튼튼히 쌓아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조선은 일본으로 사람을 보내어 일본이 어떤 상황인지, 일본의 지도자는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같은 상황을 보면서도 의견이 달랐다고 합니다. 한쪽은 일본이 더 강해질 것이고, 조선을 침략할 것 같다는 의견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일본은 오랜 내전으로 힘이 빠졌고, 일본의 지도자는 전쟁을 일으킬 위인이 못 된다는 의견이었습니다. 현실과 사실을 보지 못하고, 나와 다른 쪽에 있는 사람의 주장을 배격하려 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습니다. 결국 조선은 일본의 침략을 받았고, 많은 백성이 죽었습니다. 조선의 정부가 정세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인디언들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할아버지가 어린 손녀에게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두 마리의 늑대가 있단다. 검은 늑대는 불평과 원망을 하고, 걱정과 근심 속에서 사는 늑대란다. 세상을 흘러가는 대로 살려고 하고, 시기와 질투로 시간을 허비한단다. 하얀 늑대는 감사와 희생을 하고, 주어진 일에 만족하고 성실하게 시간을 보낸단다. 가진 것을 나누고, 이웃의 아픔을 위로한단다. 손녀가 할아버지에게 질문을 합니다. 두 마리의 늑대가 싸우면 어떤 늑대가 이길까요? 할아버지가 대답합니다. 네가 먹이를 주는 늑대가 이긴단다.” 우리가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보내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가진 것을 이웃들과 나눈다면 원망과 불평의 마음은 사라질 것입니다. 신앙 안에서 우리는 그것을 식별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한 이들의 친구가 되어주고, 병든 이들을 치유해주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지만 사람들은 이 또한 ‘사탄’의 힘을 빌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비난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을 함께 묵상하면서 새로운 한 주간을 지냈으면 합니다. “아무도 다른 이에게 악을 악으로 갚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오히려 언제나 상호간에 또 모든 이에게 선을 행하려고 애쓰십시오. 항상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테살로니카 전서 5장 15-18)”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을 베엘제불이 들렸다고 하고, 또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도 하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부르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사실 사탄, 마귀는 어떻게 해서든지 하느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자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탄의 공격이 시작되면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점점 사라지면서 우선적으로 하느님과의 관계 자체가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또한 하느님의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인간적인 지식을 추구하게 되고, 자신의 모든 죄에 대해서 합리화를 시키고. 더 이상 죄에 대해서 무감하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또한 하느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뜻을 따르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모든 것에 대해서 감사하지 않고 의심하게 되며, 심지어는 하느님을 떠날 위험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는 그러한 사탄의 공격에 더 이상 괴롭힘을 당하지 않고 다시 하느님께로 나아갈 수 있을까? 그의 해답은 기도, 말씀, 성사, 공동체 여러 가지일 수 있지만 가장 우선적으로 성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성사는 곧 주님께서 현존하시며 직접 이루어 가시는 거룩한 은총의 현장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성체를 모시면서 그분과의 연합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하느님의 공동체 안에서 기도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주님과의 거룩한 만남을 이루어갈 때 사탄은 우리를 이길 수 없습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동네 한 바퀴(2)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주일 오후 도심 속 동네 한 바퀴 하기로 하고 길을 나섰다. 도심 광장은 텅 비어 있고 오가는 사람도 없었다. 한 상가 주인이 말했다. "오후 5시 문열고 오후 9시에 문을 닫습니다. 이는 영업이 아니지요." 이 집은 저녁 5시부터 아침 5시까지 성업 중인 야식집이다. 코로나 오미크론 여파가 심각하다.
지나다 아파트 사이로 잔디 공원이 조성되고 파크골프장이 있는데 조금은 활기가 있다. 벤치에 앉아 그들을 바라다 본다. 옆 체육시설, 농구, 배구, 배트민턴, 테니스장이 졸고있다. 축구장은 그래도 젊음이 있다. 페러글라이딩이 하늘을 날다 안착을 하고 산행과 산책 나간 사람들이 도심 속으로 들어오고 있는 한적한 저녁이다.
코로나 오미크론 확산세로 동네 한 바퀴, 내 발걸음도 축 처진 실망감이 크게 느껴진다. 모두가 정상을 되찾았으면 하고 기도가 절로 나왔다.
도심 속 겨울을 꿋꿋히 지켜내는 나무들이 고맙다. 그래도 도심이 삭막하지 않은 것은 생명나무들이 삭막한 도심을 감싸주기 때문이다. 콘크리트 조형물이 그래도 나무 덕분에 아름답다. 이 어려운 시기에 도심을 품어가는 풍요의 나무들처럼 사람과 사람이 아름다운 숲을 이루고 텅 빈 마음을 풍요로 채워갔으면 하는 마음이다.
서로 갈라져 싸운다. 혀 밑에서 음모를 뿜어내고 빈정대고, 욕하고, 헐뜯고,....거짓 언어가 아닌 진실을 말하면 좋겠다. 하느님 마음되어 성령께서 이끄심대로 축복의 장을 열어 갔으면 좋겠다. 오늘 복음(마르3,22-30)에서 예루살렘에서 온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모함하고, 거친 숨소리내며 거품을 물었다. 그들은 성령을 모독해 모든이의 구원을 가로 막았다.
사정이 어렵지만 모두 함께 하느님 바라보며 하느님 마음이 되어 진실을 이야기 하며 훈훈했으면 좋겠다. 마음만은 서로에게 여유와 풍요를 낳아주는 하루, 한 주간이 되었으면 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마르3,28-29)
성령을 거슬려 지은 죄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들은 예수께서 베푸시는 기적을 하느님의 은혜로 인정하기보다는 마귀의 짓이라고 헐뜯었다. 주님께서는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23절) 하신다. “한 집안이 갈라서면 그 집안은 버티어 내지 못할 것이다.”(25절) 이 말씀은 성령 때문에 하신 말씀이다. 성령께서는 당신 자신을 거슬러 갈라서지도 않으실 뿐 아니라, 모아들이신 사람들이 갈라지지 않게 하신다. 성령께서는 서로 맞서 갈라진 죄를 용서하시고, 깨끗해진 사람들 안에 사신다.
“먼저 힘센 자를 묶어 놓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힘센 자의 집에 들어가 재물을 털 수 없다.”(27절) 여기서 ‘힘센 자’는 악마로 그에게서 털 세간이라는 것은 갖가지 죄와 불경으로 그자가 차지하고 있었던 사람들이며, 장차 그리스도 신자가 될 사람들을 가리키고자 한 것이다. 악마가 인간을 포박했던 것과 똑같은 사슬로 악마를 묶어야 했다. 인간은 이렇게 자신을 옭아매었던 죄의 사슬을 악마에게 남겨 둔 채, 주님께 돌아갈 수 있게 된다.(로마 5,18 참조) 악마는 단단히 묶였고 그의 재물인, 악마가 자기의 목적을 위해 불의하게 이용해 온 묶였던 인류가 하느님의 자비로 자신을 속박했던 악마의 권력에서 해방되었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28-29절) 성령께서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안에 머무르신다. 성령에 참여하기에 합당하다고 여겨지던 사람이 은총에서 등을 돌릴 때,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다.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신앙인의 믿음과 삶의 토대를 거부하는 것이다.
우리도 오랫동안 암흑 속에서 지내면 눈은 보지 못하게 된다. 오랫동안 누워있는 사람은 걸을 수 없게 된다. 이렇듯 하느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기를 너무나 오래 거절한다면 하느님의 진리를 보게 되더라도 그 진리를 인정할 수 없다. 그것이 곧 자기 자신이 사랑이시며 진리이신 하느님을 거부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그것이 성령을 모독하는 죄가 되고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인간 편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믿지 않고 하느님 앞에 나아오지 못하기 때문에 용서를 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령을 거스르는 죄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지 못하고 악의 상태에 남아있는 것을 말한다.
우리 인간은 언제나 잘못할 수 있고 죄를 지을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가 생각하는 죄보다도 더 크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의 사랑을 믿고 앞으로만 나아갈 수 있다면 우리는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으면서 그분 앞에 나 자신이 부족하고 나약함을 솔직히 인정하면서 용서를 청하는 것이다. 언제나 주님께로 돌아가려는 마음과 용서를 청하는 마음으로 그분 앞에 나아갈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하다.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복음의 내용은 예수님 그리고 율법학자들 사이의 논쟁입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에 항상 따라다니면서 꼬투리를 잡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도저히 꼬투리를 잡을 수 없으니 마귀의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쫒아낸다고 억지를 부리고 있습니다. 궁지에 몰린 그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우두머리는 누구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사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마귀들의 우두머리는 사탄이라는 것이죠. 그러면 사탄은 원래 처음부터 그자체로 존재하였을까요. 한번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사탄은 유혹자, 혹은 하느님에게 대적하는 자 라고 불리고 있는데, 사탄을 간단히 말하면 타락천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14장 12-14절 “어찌하다 하늘에서 떨어졌느냐? 빛나는 별, 여명의 아들인 네가! 민족들을 쳐부수던 네가 땅으로 내동댕이쳐지다니. 너는 네 마음속으로 생각했었지. ‘나는 하늘로 오르리라. 하느님의 별들 위로 나의 왕좌를 세우고 북녘 끝 신들의 모임이 있는 산 위에 좌정하리라. 나는 구름 꼭대기로 올라가서 지극히 높으신 분과 같아져야지.” 또는 에제키엘 28장 “사람의 아들아, 티로 임금을 두고 애가를 불러라. 그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너는 완전함의 본보기로서 지혜와 더없는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하느님의 동산 에덴에서 살았다. 너의 그 큰 장사 때문에 너는 폭행을 일삼으며 죄를 지었다. 그래서 나는 너를 더럽게 여겨 하느님의 산에서 쫓아냈다. 보호자 커룹이 너를 불타는 돌들 사이에서 사라지게 하였다. 너의 아름다움으로 네 마음이 교만해지고 너의 영화 때문에 너는 네 지혜를 타락시키고 말았다.”
이 성서의 구절은 사탄의 기원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사탄은 하느님의 피조물로써 교만해졌기에 그리고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마음이 있었기에 타락했으며 하늘로부터 추방 된 것입니다. 위 내용을 보고 또 아담을 유혹했던 것을 볼 때 아담 이전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지요. 이렇게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된 피조물에 불과 한 사탄의 힘을 빌려 성자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마귀들을 쫒아낸다고 하니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한 나라가 갈라서면 그 나라는 버티어 내지 못한다. 한 집안이 갈라서면 그 집안은 버티어 내지 못할 것이다. 사탄도 자신을 거슬러 일어나 갈라서면 버티어 내지 못하고 끝장이 난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오늘 자신이 행한 모든 것들이 마귀(더러운 영)들의 우두머리의 힘을 빌린 것이라는 말에 반박을 하십니다. 즉 사탄의 힘을 빌린 것이 아닌 성령의 힘에 의해서 한 것임을 말이지요. 그러면서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이 것을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메시아로써 하신 모든 가르침과 모든 기적과 치유 등을 믿지 않고 비방을 한다면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을 통한 하느님의 구원사업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을 볼 때 성령 강림을 통해서 시작된 교회를 비방하거나 하는 모든 것들도 성령을 모독하는 것으로 불 수 있지 않을까요. 또한 성령을 통한 구원사업을 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것도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성령의 구원역사는 예수님의 승천으로 끝이 난 것이 아니라 우리들에게 오셔서 지금까지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이 자신들에게 오신 성령의 가르침과 인도하심을 통해 받아들임과 희생하고 용서하는 신앙인이 되지 않는다면 용서받지 못할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교만해지지 않도록 우리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 하느님께 두 손 모아 기도하신 시간을 가져봅시다. 아멘!
최광희 마태오 신부님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을 보고자
예루살렘에서부터 120여 km의 거리를 내려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기적, 구마를 보고 싶은 것이었겠지요.
복음 선포의 현장을 본 그들의 반응은 매우 달랐습니다.
베엘제블이 들렸다.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느님을 따르고자 하고 ,
하느님의 법을 공부하고 연구 한 이들이었지만,
말씀이신 하느님의 행적과 선포는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신자들과 신자들 사이의 갈등, 가족 구성원들과의 갈등
사람과 사람과의 갈등 역시 비슷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나의 삶의 경험과 권위와 체면이 나를 채워 버리면
율법 학자들과 같은 우를 범하고 말겠지요.
다시금 겸손한 마음을 청합니다.
한 집안이 갈라서면 그 집안은 버티어 내지 못할 것이다.
If a house is divided against itself, that house will not be able to stand.
이근상 시몬 신부님
그때에 예수님께서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시어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마르코 16,15-18)
이 대목을 너무 빨리 읽으면 마치 믿는 이들은 여기 열거된 기적을 해야만하고, 이런 기적을 일으키지 못하면 믿는 이가 아닌 것 같은..., 적어도 뭔가 문제가 있는 존재로 느끼며 자괴감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이 대목은 과장없이 있었던 일을 기술한 담담한 증언이다. 먼저 이는 열한 제자에게 하신 말씀이었다.
그리고 이 기적들은 열한 제자가 실제로 행한 이들이다. '마귀들을 쫓아내고(필리보, 사도행전 8,7; 바오로 사도행전 16,18)',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성령강림 때, 그리고 사도행전 19,6)', '뱀을 집어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사도행전 28,4-5),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사도행전 3,7;28,8)'.
이건 열한 사도의 경우였다. 우리에게도 우리가 믿음을 증거할 때 우리를 통해서 전달될 수 있는 표징이 있다. 그건 강력하지만 고유하다. 그 때는 그게 필요했겠지만 내가 만일 이 천년 전 사도들의 표징을 가진다면 ... 글쎄 그게 필요하거나 합당하거나 좋은 건 아닌 모양이다. 내게는 나의 표징이 있다. 그것으로 주님을 증언하기에 족한. 아니 차고 넘치며 가장 필요한 그 표징.
오늘밤 물음이다.
<선과 악>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선은 선이고
악은 악이다
선이며 악은 없고
악이며 선은 없다
선은 오직 선을 낳고
악은 오직 악을 낳는다
선과 통하는 것은 선이요
악과 통하는 것은 악이다
악과 악은 악이기에 서로 다투고
선과 선은 선이기에 다투지 않는다
악은 악이기에 선에 맞서고
선은 선이기에 악에 맞선다
악이 악으로서 선을 모함해도
선은 선으로서 악을 이긴다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마르 3, 22-30(연중 3주 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용서받지 못하는 죄’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당신께서 성령의 힘으로 마귀 쫓아내는 일을 하신다는 것을 밝히십니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마르 3,29)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 죄”가 있다니 말입니다. 당신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속죄양이 되셨는데, 어찌 용서받지 못하는 죄가 있을 수가 있을까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원에 한계가 있다는 말일까요? 혹 하느님의 자비에 한계가 있다는 말일까요? 왜 용서받지 못한 죄가 있을 수가 있을까요?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제대로 알아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용서받지 못한 죄”로 “성령을 모독하는 죄”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용서하지 않는 죄”가 아니라 “용서받지 못하는 죄”라는 점입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용서하시지 않으신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께서는 ‘용서하셔도 그가 용서를 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곧 용서받지 못함은 용서하시는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는 인간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에서도 악마에 대해서 말할 때, 그들의 죄가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은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의 결함이 아니라, 그들의 선택이 지닌 돌이킬 수 없는 특성 때문”(393항)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이는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용서하지 않으시는 게 아니라 용서하시지만, 인간이 그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아서 “용서받지 못한 죄”라는 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모독하는 죄”란 도대체 어떤 죄를 말할까?
그것은 용서하시는 성령의 활동을 의지적으로 배척하고 비난하거나, 혹은 사탄의 일로 단죄하거나 방해하거나 핍박하는 죄를 말한다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용서를 하시는 성령의 활동을 고의적으로 방해하여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는 바람에 새 생명으로 태어지 못한 경우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빛을 주시고 성화시키시는 성령의 활동을 스스로 제외시킴으로써 결국 구원의 가능성이 상실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곧 자신의 완고함과 고집으로 성령의 활동을 거부한 바람에 용서가 차단되어 버린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한다면, 주님이 아닌 피조물, 곧 ‘자기 자신과 자신의 생각’이라는 우상을 섬기고 따르는 우상숭배에 빠진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가기 자신을 앞세우다 자칫 용서하시는 성령의 활동을 거스르는 일이 없어야 할 일입니다. 혹 아직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면, 지금 당장, 용서하시는 성령을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저희가 용서하시고자 하시는 성령의 숨결을 거부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용서하시는 당신의 자비와 사랑, 당신의 은총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마르 3,29)
주님!
용서하시는 성령의 숨결을 거부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제 생각과 제 자신이라는 우상에 빠져
구원의 빛을 스스로 차단하지 않게 하소서.
이제는 제 완고함을 꺾으소서. 당신의 사랑을 거부하지 않게 하소서
끊임없이 베풀어지는 당신의 용서를 받아들이게 하소서. 하여, 받은 그 용서로 용서하게 하소서. 아멘.
의혹을 따라 사는 사람은 진실을 잃은다.<마르코 3/22-30> 1월 24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사람은 겉모양으로 판단할 수 없고 진실을 알려면 더 깊은 사실 판단이 필요합니다. 어떤 것은 의혹을 만드는 사람에 의해 전해지지만 지식의 부족 이간의 많은 약점이 만들어 냅니다.
주님의 능력을 인정하기 싫은 율법 학지들은 주님의 행적을 “ 예수는 마귀의 우두머리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 하시어 설명하였지만 그들은 자기에게 도움이 되지 않아서 끝내 주님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자다. 라고 하며 십자가형에 처하고 갖은 고통을 다 가해죽게 하였습니다.
함께 사는 사람들 사이에는 의혹을 가질 만한 사정이 많이 발생합니다. 나라도 가정도 어떤 공동체도 의혹이생기면 서로 믿지못하고 불신의 세상이 됩니다. 불신은 더 많은 분열을 만들어 내어 공동체를 파괴 하고 많은 죽음까지 일어나게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의혹이 생길 때 어떻게 처신하여야 합니까?
첫째 서들어 판단하지 말고 사실에 입각하어 진실과 사람을 가지고 대하여야 합니다. 급하게 자기 이익을 탐하거나 거짓 소문에 속거나 아니면 속이려는 사람은 의혹을 부불어 진실 인양 만들어 냅니다.
둘째 모든 것을 긍정 적 차원에서 자비심과 사랑을 가지고 보아야 합니다. 사랑이 없는 판단은 언제나 비정하고 내정하어 인간미는 없고 판단의 규정이 궐력이나 재력이나 명예에 의존해서 판다을 내립니다.
셋째는 기도와 깊은 명상입니다. 마음의 소링애 귀를 기우리고 진리의 근원이신 주님의 말씀을 듣고 답하는 대회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기도 없이 시작한일은 인간적이며 하느님의 뜻과는 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성령의 소리에 귀를 기우려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교적 삶의 기본은 피정의 필요성입니다. 내가 지금 바로 살며 바른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는 지 알아보는 길은 피정의 방법입니다.
성아냐시오도 군인으로 전쟁터에서 부상 받고 분도 수도원에서 경연하는 병웜ㄴ에서 치료를 받다가 기도와 묵상을 하면서 자신을 돌아보고 하느님의 참 모습을 찾아 만나서 그 당시 교회를 큰 위험에서 구하였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 “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인다.” 성령을 통하여 알려진 주님을 주님으로 알지못하고 더러운 영이라 하는 사람을 놓고 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서로 악의 유혹으로 의혹을 가지고 서로 사랑하지 않고 올바로 인정하지 않고 의혹 속에 산다면 그것은 하느님 나라에 살지 못합니다. 나의 존재의 참 의미는 하느님을 참 아버지로 믿고 부르는 사람에게 내존재 가치가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거나 부정하거나 그 뜻을 따르지 않으면 존재의 의미가 없습니다.
성령이 각자에게 임하시어 오신 주님은 참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참 하느님이심을 믿고 따르며 이르신 말씀을 굳게 믿고 바라고 사랑하도록 기도합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은 1567년 이탈리아의 사보이아 지역에서 한 귀족 가문의 맏이로 태어나셨습니다. 1593년 사제가 되어 선교사로 활동한 그는 특히 칼뱅파의 많은 개신교 신자를 가톨릭으로 회두시키셨습니다. 1599년 제네바의 부교구장 주교로 임명되어 1602년 교구장이 된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는 많은 저서를 남기고 1622년에 선종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들이, “예수는 베엘제불이 들렸다.”고도 하고,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마르 3,22)고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한 나라가 갈라서면 그 나라는 버티어 내지 못한다. 한 집안이 갈라서면 그 집안은 버티어 내지 못할 것이다. 사탄도 자신을 거슬러 일어나 갈라서면 버티어 내지 못하고 끝장이 난다. 먼저 힘센 자를 묶어 놓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힘센 자의 집에 들어가 재물을 털 수 없다. 묶어 놓은 뒤에야 그 집을 털 수 있다.”(23-27절)
그러시고는 “예수는 더러운 영이 들렸다.”(30절)고 말하는 이들에게 엄하게 이르십니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28-29절)
예수님의 오늘 말씀은 우리가 살다가 짓게 되는 갖가지 죄악들은 용서받을 것이라고 하시면서 우리에게 커다란 위로를 주십니다. 그러시면서도 성령을 모독하는 이는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사는데 바쁘고 세상 물결에 휩싸여 예수님의 말씀을 온전히 다 지키지는 못하더라도,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과 정신과 태도만은 제대로 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로 모시고자 하는 마음,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총에 대해 감사드리는 마음, 주 예수님의 희생적인 사랑과 구원에 대해 감사드리고 따르고자 하는 마음 등이 우리가 자녀로서 그리고 주 예수님을 믿는 제자요 사도로서 지녀야 할 마음으로 보입니다. 성령께서 불충하기 그지없는 우리를 주님께로 인도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 -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의 삶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제 어느 착한 자매님이 투명한 비닐 봉지에 담긴 예쁜 귤을 책상에 놓으면서 한 말이 강론 쓰는 새벽 지금 새삼스런 깨달음처럼 마음에 와닿습니다.
“꽃을 보듯이 열매를 보면서 하나씩 잡수세요!”
꽃꽂이를 대체한 주황색 고운 귤 열매들이 흡사 꽃처럼 생각되었습니다. 꽃보다 아름다운 열매입니다. 봄의 꽃들도 아름답고 향기롭지만 가을 열매들은 봄꽃 이상으로 아름답고 향기롭습니다. 가을 열매 잘 익어 은은한 향기를 뿜어내는 배밭의 가을 배열매들을 보면 실감합니다.
꽃같은 젊음보다 열매처럼 잘 익어가는 노년의 아름다움과 향기는 더 깊고 편안하고 넉넉하고 그윽합니다. 바로 하느님 중심의 삶에 항구하며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그러합니다. 바로 평범한 일상에서 한결같이 이렇게 사는 이들이 성인입니다. 오늘 강론 제목입니다. 어제 끝기도때 찬미가 두 절이 새삼 아름답다 생각되었습니다.
“우리는 잠을 자도 주님과 함께/꿈에도 당신만을 뵙게 하소서
언제나 한결같이 당신영광을/새는날/밝아올제 찬미하리다”
“몸과맘 튼튼하게 생명주시고/우리의 몹쓸열기 식혀주소서
밤깊어 무섭도록 캄캄한속을/눈부신 당신 빛이 비춰주소서”
바로 하느님 중심의 삶에 항구한 이들에게 주시는 은총입니다. 마음을 다해 바치는 이런 기도가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게 합니다.
오늘은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학자 기념일입니다. 17세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가장 큰 영향을 준 영성대가입니다. 그는 종교개혁자에 대항하는 지도자들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사람이 되었으며, 그의 지혜와 지식을 따를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는 미망인이었던 성녀 요안나 프란치스카 드 샹탈을 만나 그녀의 영적 지도자가 되었고, 이후 두분은 교회 역사상 가장 유명한 영적 우정의 도반으로 인정됩니다. 성 프란치스코 드 살은 성녀 요안나 프란치스카 드 샹탈과 함께 기존 수도회의 육체적 엄격함을 견디기 어려운 젊은 여성들이나 미망인들을 위한 ‘성 마리아 방문 수도회’를 설립합니다.
성인은 프랑스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리옹에 있는 성 마리아 방문 수도원의 작은 방에 머무르던중 뇌일혈로 병자성사와 고해성사후 1622년 12월28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예수, 내 하느님 나의 전부여!” 임종 기도후 만55세로 선종합니다. 성인의 무수한 저술중에도 특히 ‘신심생활입문’과 ‘신애론’이 유명합니다.
성인은 그레고리오 교황에 의해 1662년 1월8일 시복된후 1665년 11월19일 시성되었고, 1877년 11월16일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교회학자로 선포되었으며, 1923년에는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작가와 언론인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됩니다. 사후 세월이 흐를수록 빛나는 영원히 살아 있는 듯한 대 영성가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성인입니다.
성인은 독창적 방식으로 교회의 정통적 영성을 가르치고 생활하며 방향을 제시하였는데 그는 무엇보다도 성성聖性에서 보편적 성소의 선각자였습니다. ‘성인으로 불린 이는 일부 소수의 특전 받은 사람이 아니고 각 생활 상태에서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이라는 중요한 교의는 약 400년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확정된 진리가 됩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나 깨어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한결같이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사는 자가 성인입니다. 눈만 열리면 곳곳에서 발견되는 이런 성인들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의 문제점이 환히 드러납니다. 복음의 상황이나 오늘의 현실이나 흡사합니다. 하느님 중심을 잃었을 때 참으로 혼란하고 혼돈스런 세상이 됩니다. 하느님 중심의 제자리에 온갖 우상이나 더러운 영들이 자리잡고 있을 때 마귀들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율법학자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예수는 베엘제불이 들렸다”고도 하고,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왜곡합니다. 예수님은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없음을, 즉 영악한 사탄이 분열을 자초하는 일이 없음을 예로 들면서 사탄을 제압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은 당신이심을 밝힙니다. 하느님의 힘을 지닌 예수님만이 사탄을 제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힘센 자를 묶어 놓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힘센 자의 집에 들어가 재물을 털 수 없다. 묶어 놓은 뒤에야 그 집을 털 수 있다.”
힘센 자가 자리한 중심 자리에 그 보다 힘센 분이신 주님을 모실 때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 마음의 중심 자리에 주님을 모시고 내부를 깨끗이 정리하고 살 때 비로소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하느님의 영에 의한 활동을 더러운 영이 들렸다 곡해한 이들을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바로 이런 자들이 성령을 모독하는 악마같은 자들입니다. 생각없이, 영혼없이, 하느님 중심없이 살다 보면 누구나 더러운 영이 들릴 가능성이 농후한 참 위태한 사람들입니다. 바로 오늘날의 혼란상이 이를 입증합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들이 득실득실한 세상같습니다. 얼마전 수도형제와 주고 받은 대화입니다.
“머리는 좋은데 마음 나쁘게 쓰는 이들을 보면 참 난감합니다.”
“머리는 좋은데 마음은 나쁘게 쓰는 이들, 그대로 악마들이네요!”
그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사는 진실하고 정직한 이들이 참으로 그립고, 고맙고, 소중한 시대입니다. 바로 이런 삶의 모범이 산전수전 역경을 거치면서 믿음으로 승리의 삶을 살아 온 제1독서 사무엘 하권의 주인공 다윗입니다. 다음 묘사가 다윗의 성공과 그 비결을 알려줍니다.
“다윗은 서른 살에 임금이 되어 마흔 해 동안 다스렸다. 그는 헤브론에서 일곱해 여섯달 동안 유다를 다스린 다음, 예루살렘에서 서른세 행 동안 온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다윗은 세력이 점점 커졌다. 주 만군의 하느님께서 그와 함께 계셨기 때문이다.”
다윗 성공의 비결은 바로 주 만군의 하느님께서 그와 함께 계셨기 때문임을 봅니다. 이렇게 하느님과 함께 사는 자를 누가 대적할 수 있을런지요. 새삼 깨어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성인답게 사는 하느님 중심의 삶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참으로 주님은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시며 시편 화답송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내 진실 내 자애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시편89,25ㄱ). 아멘.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이기우 신부님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을 하루 앞둔 오늘은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기념일입니다. 그는 루터나 칼빈, 쯔빙글리 등이 들어 올린 이른바 종교개혁의 깃발 때문에 가톨릭 교회에 짙은 어둠이 드리우던 시대에 태어나 성장하였습니다. 그리고 반종교개혁을 기치로 가톨릭 교회의 쇄신을 부르짖던 예수회 대학에서 공부하였습니다. 그는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가톨릭 교회로부터 떨어져 나간 신자들을 다시 돌아오게 하는 데 혼신의 힘을 다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리기 3백 년 전에 보편적 거룩함의 성소, 즉 모든 이가 자신의 직업과 신분에 따라 신심을 달리 간직해야 하며 이를 통해 거룩하신 하느님께로 나아갈 수 있다는 평신도 사도직 영성을 부르짖은 교회학자가 되었습니다.
1619년에 출판된 그의 저서 <신심생활 입문>은 그가 수많은 신자들의 영성 상담을 하며 심금을 울리는 지성적인 강론으로 무려 5만 명의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을 가톨릭으로 재개종을 시킨 체험에서 쓰여진 기념비적인 저작입니다. 이 책에서 그는 이렇게 갈파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실 때 그 종류를 따라 열매를 맺을 것을 초목에게 명령하셨다. 이와 같이 하느님은 또한 교회의 살아있는 초목인 신자들에게 그 처지와 각자 맡은 직분에 따라 각각 다른 신심의 열매를 맺기를 명하신다. 평신도와 성직자의 신심이 같을 수 없고, 기혼자와 수도자의 신심이 같을 수 없다. 개인들의 능력과 직업과 직무에 맞추어 신심이 각기 다르게 열매를 맺어야 한다. … 진정한 신심은 그 어느 것도 손상시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만사를 완성시킨다. 꿀벌은 꿀을 마실 때 꽃을 조금도 상하지 않게 하며, 보석을 꿀에 담그면 그 광채가 더욱 빛나는 법이다. 이와 같이 각자의 직분과 직업과 처지에 따라 하느님께로 향하면 가정의 평화는 커지고, 부부간의 애정은 깊어지며, 사회에서 각자가 맡은 직무는 유쾌하고 즐거워진다. 평신도들과 기혼자들에게는 성직자나 수도자들과는 다른 신심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 환경에서든지 완덕의 생활을 구할 수 있고 이를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처럼 교회의 대다수 구성원인 평신도의 각성과 신심을 촉구한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같은 취지로 소설 ‘돈키호테’를 쓴 스페인의 미겔 데 세르반테스, 수학과 철학의 방법론적 원리를 세운 프랑스의 르네 데카르트, 열역학 법칙을 발견하여 물리학의 기초를 세운 영국의 아이작 뉴톤 등과 함께 17세기에 근세 유럽의 여명을 밝힌 선각자였습니다.
공교롭게도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을 하루 앞둔 오늘,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삶을 기억함은 개신교 신자들이 가톨릭으로 회심하기를 바라서가 아니요, 오히려 가톨릭 평신도들이 개신교 신자들이 말씀에 대해 지닌 열정과 지식을 본받기를 바라서이며, 그래서 결국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가기 위하여 자신의 처지와 직분과 직업에 충실함으로써 완덕의 길로 나아가기를 바라서입니다. 이것이 프란치스코 살레시오가 정작 지향하던 보편적 성성(聖性)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부들은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선구적 실천을 본받아 평신도들도 거룩함에의 부르심을 받고 있음을 확인한 바 있으며, 교회 일치에 관한 기본 노선으로 다음과 같이 천명하였습니다.
“복음의 메시지로 전 세계를 비추고 온갖 민족과 인종과 문화의 모든 사람을 한 분이신 성령 안으로 모아들여야 할 자기 사명의 힘으로, 교회는 성실한 대화를 가능하게 하고 촉진하는 저 형제애의 상징이 된다. 그것은 먼저 바로 교회 안에서 사목자들이든 그 밖의 그리스도인들이든 하나인 하느님 백성을 이루고 있는 모든 사람 사이에서 언제나 더 많은 열매를 맺는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정당한 모든 다양성을 인정하고 상호 존중과 존경과 화합을 증진하도록 요구한다. 신자들을 갈라놓는 것보다 일치시키는 것들이 훨씬 더 강하기 때문이다. 필요한 일에는 일치가, 불확실한 일에는 자유가, 모든 일에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사목헌장, 92항).
어둠으로 어둠을 이길 수 없다.
한재호 루카 신부님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서 병자를 고치시고 마귀를 쫓아내시며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게 되자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에 대해 모함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베엘제불이 들렸다.” “그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언뜻 보면 잘 이해되지 않는 것 같지만, 우리의 일상을 가만히 관찰하면 매우 명쾌한 말씀입니다. 어두운 방에서 어둠을 지우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빛입니다. 어둠을 어둠으로 지울 수는 없습니다. 옷에 얼룩이 지면 무엇으로 얼룩을 없앨 수 있을까요? 맑은 물입니다. 얼룩으로 얼룩을 씻어낼 수는 없습니다. 사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탄을 사탄으로 쫓아낼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살다 보면 나쁜 습관이나 뿌리 깊은 상처 등 우리 안에 담긴 어둠을 없애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어둠을 없애기 위해서는 오직 한 가지만이 필요합니다. 바로 빛입니다. 나쁜 습관을 없애는 지름길은 좋은 습관을 키우는 것입니다. 뿌리 깊은 상처를 지우기 위해서는 좋은 추억을 쌓는 것이 필요합니다. 살다 보면 어둠에서 헤어나오지 못해 괴로워할 때가 있는데, 사실 그럴수록 더 깊은 어둠으로 빠지게 됩니다. 어둠 속에 있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빛입니다. 빛이신 주님께 매달릴 때 어둠이 사라질 것입니다.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마르 3, 23)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새날이
밝았다.
하느님 사랑은
불빛보다 더 밝은
진실한
사랑으로
시작된다.
꺼지지 않는
사랑이다.
모순의 껍질을
벗듯 새날을
만나는
은총의 기쁜
새날이다.
아픈 이들에게
치유와 해방을
선사하시는
주님이시다.
주님께서는
빼앗고 가두는
그런 분이
결코 아니시다.
생명을 모독하는
악령이 아닌
생명의
원천이신
성령께로
우리를
데려다 놓으신다.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우리의 생명과
우리의 내면까지
모두
모독하는 것이다.
살아있는
인격의 시간이
바로 살아계신
성령의 힘이시다.
하느님의 전능은
성령의 활동으로
전개된다.
성령께서는
일치를
체험하게 하신다.
좌우로 갈라지는
분열이 아닌
사랑과 용서라는
일치의 체험이다.
성령께서는
우리 삶의
아픔과 억압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신다.
갈라진
거기에서
성령의 힘을
만나게된다.
새로워지는
새로운 삶으로
초대하시는
성령의 힘을
진실로 믿는다.
어떤 날이
아니라
성령의 새날
새하루이다.
새생명
새마음의
빛나는
시작이다.
나우루 공화국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울릉도의 1/3 정도의 크기밖에 되지 않는 아주 자그마한 나라입니다. 이 나라는 1980년대에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달러를 넘는 부국이었습니다. 당시 미국이나 일본의 1인당 국민소득이 1만 달러 정도였으니 얼마나 부유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부자 나라가 된 것은 그 나라에 있는 동물의 배설물(구아노) 때문이었습니다. 이 배설물이 인광석이라는 자원으로 변해서 엄청난 부자나라가 된 것입니다.
전 국민이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피지나 하와이, 싱가포르로 매일 쇼핑하러 다녔고, 거리에는 람보르기니, 포르쉐 같은 고가의 자동차만 볼 수 있었습니다. 돈이 많으니 일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심지어 모든 노동력을 외국인 노동자로 때우고, 심지어 공무원까지 외국인을 채용했습니다.
이 상태로 30년이 지나자 일이라는 개념 자체는 실종했고, 여기에 인광석이 고갈되면서 1인당 국민소득이 2,500불에 불과한 가장 가난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인광석이 커다란 축복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인광석이 가져다주는 부로 인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게 했고 이렇게 나라 전체가 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탄의 유혹은 무엇일까요? 바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사탄의 가장 큰 유혹이었습니다. 직접적으로 인간의 육체적 감각을 괴롭히고 고문하거나 그들의 육신을 때리지 않습니다. 그들의 의지, 더 정확히 말하면 탐욕을 다스리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사탄의 특기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들이 “예수는 베엘제불이 들렸다.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라고 말합니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왔다는 것은 그만큼 권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의 말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력을 끼친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예수님에 대한 부정적인 말이 사람들을 예수님 곁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주님을 적극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옆에 두고도 아무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유혹하는 사탄의 활동이 활발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어떤 유혹에 굴하지 않고 끊임없이 주님의 뜻을 따르며 사는 길밖에 없습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는 공을 무서워서 도망간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도망가기 때문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다(윌리엄 제임스).
동질감
‘나는 참 별난 사람이다’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이 별난 모습은 특별히 문구류를 너무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책과 함께할 수 있는 문구류에 과소비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쟁여 놓기도 많이 해서 서랍 안에는 사용하지 않은 문구류가 많고, 구매할 때도 마음에 드는 것이라면 한두 개가 아니라 5개 이상을 묶음으로 구매합니다.
지금 쓰고 있는 만년필도 6개입니다. 만년필은 매일 사용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잉크가 굳거나 터져서 나중에 쓰는 데 불편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또 노트에 물이라도 흘리게 되면 무슨 글씨를 쓴 것인지 도저히 알아볼 수 없습니다. 그래도 만년필이 너무 좋아서 여러 개의 만년필을 돌아가며 쓰고 있습니다.
이렇게 아날로그식 감성을 가지고 문구류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우연히 문구류에 대한 예찬을 늘어놓은 에세이를 보게 되었습니다. ‘나와 같은 사람이 있다니….’라는 생각으로 너무 반가웠고, 그래서 너무 즐겁게 책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다 읽고 나서 솔직히 남는 것은 별로 없는 책이었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재미있게 그리고 신나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동질감 때문입니다.
주님을 좋아하려면 동질감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동질감을 느끼게 될 때, 더 사랑하게 되고 그 안에서 큰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과 어떤 마음으로 함께 하십니까?
선한 영과 악령을 구분하고자 노력하는 식별력이 더욱 요구되는 시대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유대인들의 사상 안에 베엘제불(Beelzebul)은 ‘악령들의 두목’을 의미합니다. 히브리어로는 복합명사 바알제불(Ba'al Zebul)인데, 이는 집주인(lord of the dewlling)이라는 뜻입니다. 악의 원천이 되는 존재로 악의 중심, 악령들의 대부 역할을 하는 ‘대마귀’(大魔鬼)라고 보시면 맞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루살렘에서 파견되어온 율법학자들이 참으로 해서는 안될 말을 예수님을 향해 던지고 있습니다.
“예수는 베엘제불이 들렸다.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쫒아낸다.”(마르코 복음 3장 22절)
해도해도 너무한 말, 어처구니없고 얼토당토 안한 말 앞에 예수님께서는 정말이지 억장이 무너졌습니다. 자신들을 베엘제불로부터 구원해주기 위해 이 땅에 내려오신 당신을 향해, 쌍수를 들어 환영하고 백번 천번 감사해야 마땅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신을 향해 베엘제불이 들렸고, 마귀 우두머리와 협력하여 마귀들을 쫒아낸다는 루머를 퍼뜨리니, 뭐라 할말을 잃고 마셨습니다.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이 퍼트린 악의에 찬 가짜 뉴스가 얼마나 큰 잘못인지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이 땅에 내려오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향해 마귀의 두목이라고 하니, 이보다 더 큰 신성모독이 어디 있겠습니까? 성령의 인도로 이 땅에 오셨고, 성령으로 충만하시며, 성령의 힘으로 악령을 쫓아내고 계신 예수님께 사탄의 하수인이라고 하니, 이보다 더 큰 성령 모독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율법학자들이 유포하고 있는 가짜 뉴스의 심각성과 폐해를 잘 알고 계셨던 예수님께서는 아주 강한 어조로 조기 진화에 나서십니다. 그들이 계속 엉뚱한 말을 계속할 때, 당신의 어린 양떼들이 받게 될 악영향이 심각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마르코 복음 3장 29절)
사실 예수님 가르침들 가운데 중요한 주제가 죄의 용서였습니다. 악의 길에서 돌아서서 아버지께로 돌아서기만 하면, 겸손하게 용서를 청하며 새 삶을 다짐하면, 그 어떤 무거운 죄라 할지라도 용서해 주신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유독 성령 모독죄에 대해서는 아주 강경한 태도를 취하고 계십니다. 바리사이들이 오늘 저지른 죄가 성령 모독죄의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그들는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끝끝내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분에게 베엘제불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씌웠습니다.
대놓고 하느님을 모욕하는 사람들, 끝끝내 하느님께로 돌아서기를 거부하는 사람들, 하느님을 정면으로 저주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도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을 구원에서 배제시키니,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없는지 잘 살펴봐야겠습니다. 그런 분들 리스트를 한번 작성해봐야겠습니다.
끝까지 예수님을 거부하는 사람들, 틈만 나면 하느님을 조롱하고 욕되게 하는 사람들, 하느님을 시험하고 욕되게 하는 사람들, 그들은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그들의 회개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또 구체적인 노력을 계속해야겠습니다.
요즘 주변을 살펴보니 여기저기 베엘제불들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이 시대 또 다른 대마귀들이요 악령들입니다. 그들은 교묘하게 위장하고 등장해 어린 양떼를 현혹시킵니다.
그들에게 있어 양떼는 섬김의 대상이나 사목의 대상이 절대 아닙니다. 먹잇감이요 욕구충족의 대상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분위기는 비슷합니다. 거짓 목자들은 가짜 뉴스를 진짜인양 목숨걸고 퍼뜨리고 있습니다.
목자로서의 가장 기본인 인성이나 품위, 겸손의 덕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천박한 언행과 기이한 억지논리로 양떼를 악의 구렁텅이로 몰고 가고 있습니다. 전형적인 베엘제불입니다.
선한 영과 악령을 구분하고자 노력하는 식별력이 더욱 요구되는 시대입니다. 더 눈을 크게 떠야겠습니다. 거짓 목자에게 현혹되지 않도록 유의해야겠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있습니다. 나름 열심한 가톨릭 신자들이 가짜 뉴스에 현혹되어 불행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거짓 매국 언론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심을 늦추지 않아야겠습니다. 홀로 식별이 어려울 때는, 엉뚱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 가톨릭 교회 목자들의 조언에 귀를 기울여야겠습니다.
사랑을 하려고 해야 사랑할 줄 아는 사람들을 만난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라이언 화이트는 혈우병을 앓아서 수술을 받았는데 그만 에이즈 보균자의 피를 받게 되어 13살의 나이에 에이즈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어른들의 부주위로 죽음을 기다려야 했던 라이언은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너무나 밝게 학교생활을 하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아주 친절하게 대하고 부모님을 공경하였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매스컴을 통해 전 미국으로 알려지게 되자 당시 레이건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 마이클 잭슨 등의 유명인사들의 위로와 선물도 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죽음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라이언은 5년간의 투병 끝에 18세에 죽습니다. 소년이 죽기 전에 아버지와 나눈 대화내용이 크리스천잡지에 실렸습니다.
“아들아, 미안하다. 이제는 네게 아무것도 해 줄 것이 없구나. 이 아빠가 더 이상 어떤 선물도 줄 수 없음을 용서해 다오.”
그러자 아이는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빠, 전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에게 선물을 받았어요. 그런데 아빠 같은 선물을 준 사람은 없어요. 아빠는 저에게 천국에 가는 티켓을 주었어요.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셨잖아요. 이보다 더 위대한 선물은 없어요.”
어떤 아이들은 성당가라고 하면 성당 가서 뭐 하느냐고 말합니다. 그런데 어른들의 부주위로 암이 걸려 죽어가면서도 라이언은 큰 선물을 받았다고 감사해합니다. 왜 그럴까요? 아는 것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있어야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당에 나와 보라고 하면 “종교집단은 다 돈 뜯어먹으려고 저러는 거야!”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그런 사람이니까 다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자신 안에 사랑을 간직하지 못한 사람은 예수님께서 살과 피를 내어주어도 그 안에서 사랑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살과 피로 이웃을 위해 무조건적으로 무언가를 내어준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야 성체성혈에서 하느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본인이 항상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모든 사람과 심지어 하느님도 이기적으로 바라봅니다. 그러나 성체성혈보다 큰 사랑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안에서도 사랑을 발견해내지 못하면 그런 상태로는 구원의 희망이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분명 성령의 힘으로 마귀를 쫓아내셨습니다. 그러나 율법학자들은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사람들을 미혹시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모독하는 것은 참을 수 있어도 성령님을 모독하는 것은 참을 수 없으시다는 듯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이 얼마나 무서운 말입니까?
우리는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이 절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령은 사랑입니다. 내가 먼저 좋은 것을 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성령이 보입니다. 좋은 영은 좋은 영을 알아보고 나쁜 영은 나쁜 영을 알아봅니다.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의 영을 보고도 “예수는 더러운 영이 들렸다.”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 안에 좋은 영이 계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힘으로 조금이라도 사랑의 선물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그래야 하느님도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분으로 보입니다.
‘예쁘게 말을 하니 좋은 사람들이 왔다.’의 저자 심희정씨는 ‘독설 마녀’라고 불릴 정도로 옳고 그름이 명확했고 해야 하는 말은 꼭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게 옳다고 믿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남은 것은 외로움뿐이었습니다. 주위에 사람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녀가 20년째 기자로 일하면서 수많은 성공한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말을 예쁘게 하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녀도 말을 예쁘게 하려고 시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주위에 좋은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만나도 알아보지 못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처럼 되려고 시도하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성령을 받아도 알아보지 못하는 이유는 이웃에게 내 살과 피를 내어주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려고 하는 사람만이 사랑을 할 수 있고 사랑을 해 보아야만 하느님의 사랑이 보입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은 사랑하려는 마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보스턴엘 다녀왔습니다. 신학교, 내셔널 슈라인, 성 요셉 트라피스트 수도원을 방문했습니다. 신학교의 성당, 식당, 도서관을 보았습니다. 머물고 싶었고, 기도하고 싶었고, 공부하고 싶은 신학교였습니다. 내셔널 슈라인은 성당이 아름다웠고, 십자가의 길이 잘 조성되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미사를 함께하였습니다. 트라피스트 수도원은 수사님들이 직접 건축하였다고 합니다. 오랜 시간 기도하셨던 수사님들의 영적인 힘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넓은 땅과 아름다운 성전이 있었지만, 기도하고 복음을 전할 젊은이가 부족해 보였습니다. 신학생이 줄어서 3개였던 신학교가 한 곳만 남았다고 합니다. 내셔널 슈라인에서 미사 주례를 하시던 신부님은 80은 훌쩍 넘어 보였습니다. 180명의 수사님이 있었던 수도원은 50여 명의 수사님이 있다고 합니다. 한국의 신학교, 성지, 수도원을 생각합니다. 아직은 젊은이가 많지만,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젊은이는 줄고 있습니다. 원인을 알면 치료하는 방법을 찾을 수 있습니다. 나름대로 원인을 생각해 봅니다. 여러분은 어떤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음식이 맛있으면 사람들은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교회가 잃어버린 맛은 무엇일까요?
첫째는 ‘말씀’입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실천하지 못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중풍 병자, 소경, 나병 환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치유되었습니다. 다락방에 숨어서 떨고 있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거리로 나왔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삶의 중심에 있어야 합니다.
둘째는 ‘기도’입니다. 풍요와 발전을 위해서 마르타의 삶에 충실했지만, 하느님의 뜻을 찾기 위한 마리아의 기도가 부족했습니다. 가족이 모여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마련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분주한 중에도 늘 기도하셨습니다. 구하면 주시고, 찾으면 얻고, 두드리면 열린다고 하셨습니다. 몸을 위한 여행과 휴가도 좋지만, 영혼을 위한 피정이 필요합니다.
셋째는 ‘교회의 가르침’입니다. 교부들의 가르침을 전하지 못했습니다. 영적인 서적을 가까이하지 못했습니다. 우리 영혼의 빈 창고에 세상의 것들이 들어왔습니다. 우리의 판단과 행동의 기준에 세상의 가치와 세상의 욕망이 함께 했습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교회의 서적과 신문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넷째는 ‘미사’입니다. 주일미사 참례 자가 줄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만찬을 하시기 전에 먼저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빵을 떼어 나눠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이것을 받아먹으십시오. 이는 여러분을 위해 내어 줄 내 몸입니다.” 미사는 예수님의 희생과 나눔의 재현입니다. 미사를 통해서 주어지는 은총을 받아야 합니다.
다섯째는 ‘나눔과 친교’입니다. 나눔과 친교가 적어지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가진 걸 기꺼이 나누었습니다. 가난한 이, 과부, 고아, 병든 이, 노예, 이방인도 친교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초대 교회 신자들은 이 세상에서 이미 천국을 체험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을 함께 묵상하면서 새로운 한 주간을 지냈으면 합니다. “아무도 다른 이에게 악을 악으로 갚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오히려 언제나 상호 간에 또 모든 이에게 선을 행하려고 애쓰십시오. 항상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5장 15-18)”
<성령과 악령>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거룩하신 성령
더러운 악령
선을 행하시는 성령
악을 부추기는 악령
살리시는 성령
죽이는 악령
공감하시는 성령
무관심한 악령
격려하시는 성령
깎아내리는 악령
함께 기뻐하시는 성령
시샘하는 악령
자유롭게 하시는 성령
조종하려는 악령
설득하시는 성령
강제하는 악령
품으시는 성령
밀치는 악령
일으키시는 성령
짓누르는 악령
모으시는 성령
가르는 악령
나날이 푸릇하신 성령
마침내 사그라지는 악령
<마귀>
송영진 모세 신부님
“한편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들이, ‘그는 베엘제불이 들렸다.’ 고도 하고, ‘그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고도 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부르셔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한 나라가 갈라서면 그 나라는 버티어 내지 못한다. 한 집안이 갈라서면 그 집안은 버티어 내지 못할 것이다. 사탄도 자신을 거슬러 일어나 갈라서면 버티어 내지 못하고 끝장이 난다.
먼저 힘센 자를 묶어 놓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힘센 자의 집에 들어가 재물을 털 수 없다. 묶어 놓은 뒤에야 그 집을 털 수 있다.’(마르 3,22-27)”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권능과 권한’으로 마귀들을 쫓아내신다는 것을 인정하기가 싫어서 “그는 베엘제불이 들렸다.”, 또 “그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라고 말했습니다.
마귀들은 사람의 힘으로는 쫓아낼 수 없는 강한 존재들이어서 하느님의 힘으로만 쫓아낼 수 있는데, 율법학자들은 예수님 께서 ‘하느님의 힘’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하느님의 힘’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면, ‘마귀 우두머리의 힘’으로 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 나름대로 논리적 으로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의 억지 논리’를 ‘당신의 합리적인 논리’로 반박하십니다.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는 것은 ‘자멸 행위’입니다. 그래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논리입니다.(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혹시 마귀들이 진짜로 쫓겨난 것이 아니라, ‘쫓겨나는 척’만 한 것은 아닐까?” 라고 의심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사실, 안 믿기로 작정한 사람을 믿게 만드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확실한 증거를 제시해도 그 증거 자체를 부정합니다. 예수님께서 마귀들을 쫓아내실 때, 마귀들은 쫓겨나는 척을 한 것이 아니라, 진짜로 쫓겨났고, 예수님께 굴복했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사도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낼 때에도 그랬고,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낼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해서 생각하면, 사탄이 마귀들을 쫓아내라고 자신의 힘을 남에게 빌려 주는 일은 결코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마귀들은 서로 싸우는 척도 안 하는, 즉 자기들끼리 다투거나 싸우는 일은 전혀 없는, 굉장히 잘 뭉쳐 있는 존재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귀들의 단결력은 인간들의 단결력보다 훨씬 더 강력합니다.
따라서 그런 마귀들에 맞서 싸우려면 우리는 그것들보다 더 강하게 단합을 해야 합니다. 만일에 인간들이 단합하지 않고 서로 분열되고 흩어지면, 그것은 마귀들의 공격에 무방비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마귀들을 쫓아내시는 예수님을 모함하는 것도 사실은 마귀의 술책에 놀아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를 가리켜서 온갖 비방과 모함을 하는 자들도 마귀가 바라는 대로 일하는, 사실상 마귀의 하수인으로서 일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힘센 자’는 마귀들을 가리키고, 그 힘센 자를 묶어 놓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마귀들을 완전히 제압해서 굴복시키시는 분입니다.
그런 분이기 때문에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릴 이유가 없습니다. 마귀 우두머리도 예수님 앞에서는 꼼짝도 할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마귀를 상대로 싸울 때 왜 예수님의 이름으로 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잘 나타냅니다. 만일에 예수님께 기도하지 않고 사람의 힘만으로 마귀들을 쫓아 내려고 시도하면 백전백패 할 것입니다.
여러 가지 ‘유혹’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우리 입장에서 특별히 더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마귀들이 천사로 위장해서 다가오거나, 심지어 예수님인 척 하면서 다가오는 경우가 있다는 점입니다.
“놀랄 일이 아닙니다. 사탄도 빛의 천사로 위장합니다. 그러니 사탄의 일꾼들이 의로움의 일꾼처럼 위장한다 하여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2코린 11,14-15).”
마귀가 사람들에게 접근할 때에는 마귀의 모습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천사의 모습으로 접근합니다.(사실 마귀도 원래는 천사였습니다.)
겉모습만으로는 천사와 마귀를 구분하지 못합니다. 또 마귀가 성모 마리아의 모습으로 접근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성령을 받은 모습과 악령을 받은 모습이 비슷할 때도 많습니다. (요즘에 ‘재림 예수’ 라고, 또는 ‘메시아’ 라고 자칭하는 자들을 자주 보는데, 그런 자들도 사탄의 하수인 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구분하고, 어떻게 식별 하는가? 예수님의 다음 말씀이 하나의 지침이 됩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요한 10,37-38).”
천사는 천사의 일을 하고, 마귀는 마귀의 일을 합니다. 마귀가 천사의 모습을 하고 사람들에게 접근해도 악한 마귀는 선한 천사의 일을 하지 못합니다. 천사가 하는 일은, 죄를 피하고 선을 행하도록 도와주고, 사랑을 실천하도록 도와주고, 더욱 충실 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그래서 사람들이 더욱더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 등입니다.
마귀가 하는 일은, 천사가 하는 일의 반대입니다. 죄를 지어도 괜찮다고, 선과 사랑을 실천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신앙생활은 나중으로 미루어도 된다고 유혹해서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드는 것, 마귀는 그런 일을 합니다.
마귀는 하느님과 사람 사이를, 또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간질하고 분열시킵니다. 용서하지 말고 앙갚음하라고 부추기고...
그 정도 죄는 회개하지 않아도 된다고 다독거리고...
신앙인으로서 해야 하지만 하기 힘든 일들은 하지 말라고 하고, 또 신앙인으로서 하면 안 되지만 하고 싶은 일들은 어서 하라고 재촉하고...
좁은 문으로 가지 말고 넓은 문으로 가라고 유혹하고...
참기만 하면서 자기 것도 챙기지 못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하고...
기도하려고 할 때마다, 성당에 가려고 할 때마다 자꾸만 방해하고...
사탄은 끝장나게 되어 있다.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마귀장난, 분열에 분열을 가져온다. 세포분열이 아닌 암세포 증식 같은 분열이다. 매우 오래갈 것 같았는데 마귀장난은 끝을 고한다. 예수님이 오신 날부터 헤로데의 마귀장난이 시작했다. 두살 이하의 어린이들을 죽인 일 말이다. 예수님이 죄인들과 함께한다고, 안식일 법을 어겼다고, 하느님을 모독했다고 이유를 들어 마귀들은 벼랑 끝으로 몰고가 떨어트리고, 없애고 죽이려 한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마귀를 쫒아내니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이 베엘제불이 들렸다고 음해하고, 더러운 영을 불러모아 은총의 샘을 근원적으로 없애려 한다. 역시 더러운 것은 더러운 힘을 결집한다. 성을 내는 사람이 누구던가? 약점이 많은 사람이 아니든가? 자기들 악의 원천이 노출될까 두려워 은총의 샘을 근원부터 막아버리려 했다. 율법학자들이 그랬다.(마르3,22-30참조)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받지 못하는 죄가 있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마르3,28-29)
이런 주장에 동의하지 맙시다.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은 마귀 들렸다라고 하니 하느님이 미쳤다는 거죠.
하느님의 성령을 모독하면 영원히 용서를 못 받는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집안이나 국가나 사탄들도 갈라지면 끝장나고 힘만 판친다 하셨습니다.
우리도 이 말씀에서 나라가 갈라지면 끝장난다는 데에 신경써야합니다.
우리는 공산주의를 끝장내고 성령의 힘으로 평등주의에 물들게 합시다.
하느님의 뜻인 성령 앞에 공산주의나 물질주의는 용서 못 받을 겁니다.
물질공산주의는 인간존엄 무시한 유물사관으로 영원을 무시한 사상이죠.
인간은 영원을 거부하고 짐승처럼 살아야 한다는 사상 동의하지 맙시다.
'끝장'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사탄도 갈라서면 버티지 못하고 끝장이 난다.(마르코 3장 22~30)'
힘을 합쳐도 모자랄판에 노젖는 사공들이 제각기 자기가 젖고 싶은대로 하다보면 힘은 힘대로 들고 짜증내다 서로 싸우겠지요.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가 살면서 겪게되는 서로의 갈등과 빗나감을 너무 잘 알고 계십니다.
마음은 합쳐야 뭐가 되도 되지 갈라지면 될것도 안됩니다.
나쁜짓 하는 사탄 조차도 힘을 합치지 않으면 끝장난다고 하십니다.
선한 마음먹고 힘을 합쳐 하다가 어느 순간이 되면 어려운 고비가 옵니다.
이때 서로 탓하다 보면 인내는 저 멀리 가고 중요한 촛점을 놓칩니다.
시험에 들때 어려운거 제치고 쉬운것만 풀면 점수가 제대로 나올 수 없죠.
하기 싫은것, 어려운것, 해보는 노력이 있어야 이룰 수 있습니다.
'어쩌다 되는것은 없습니다. 노력은 필수 '
성령의 힘, -삶의 중심과 성령-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으로 중요한 것이 삶의 중심입니다. 사제생활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참 많이도 강론 주제로 사용했던 ‘삶의 중심’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은 그대로 예수님 중심의 삶이란 말과도 통합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확고한 삶일 때 온갖 마귀들의 유혹도 잘 통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반면 삶의 중심이 모호하고 허약할 때 끊임없는 두려움과 불안이요, 온갖 마귀들린 상태를 상징하는 정신 질환들입니다. 참으로 삶의 중심이 확고할 때 정신과 영혼의 건강에 뒤따르는 육신의 건강입니다. 하여 우리가 행하는 모든 영적 수행들은 하느님 중심의 삶을 강화하는 것이 겠습니다. 어제 중증 치매환자들을 돌보며 요양원에서 일했던 분의 말도 생각납니다.
“먹고 싸고 하는 모습이 동물 수준입니다.”
바로 누구나의 미래가 될 수 있습니다. 새삼 하루하루 삶의 중심을 바로 잡으며 심신을 잘 관리하는 수행생활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이런 면에서 제1독서 사무엘 하권의 다윗은 그 모범입니다.
마침내 사울이 죽자 원로들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웠고, 서른 살에 임금이 되어 무려 마흔 해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다니, 다윗의 파란만장한 삶의 여정 중 항구하고 한결같은 하느님 중심의 삶에 감동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끊임없는 기도와 끊임없는 회개를 통한 삶의 중심을 강화하는 것이 영적 삶에 본질적임을 깨닫게 됩니다. 분도 규칙에서 두가지 강조하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아무것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더 낫게 여기지 마라”
“아무것도 하느님의 일보다 앞세우지 마라.”
삶의 중심인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을 우선하라는 것이요, 이런 삶의 중심의 강화를 위한 하느님의 일인 기도에 소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베엘제불의 이야기입니다. 바로 앞서의 복음은 열두 사도를 뽑으시는 내용중 한 대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둘을 뽑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다.’(미르3,14).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전제로한 사도들의 복음 선포와 구마활동입니다. 결국은 우리를 통한 주님의 복음 선포요 구마활동이겠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무지한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의 구마활동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바로 ‘베엘제불이 들렸다’ 또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말입니다. 예수님의 반론은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는 사탄 세력내의 분열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탄이 얼마나 영리한테 자기들 간의 분열을 통해 자멸의 길을 가겠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선의 연대’ 하늘 나라 시스템 못지 않게 강한 연대가 ‘악의 연대’ 사탄의 시스템입니다. 이어 주님은 사탄을 몰아낼 수 있는 분은 바로 자신임을 에둘러 밝히십니다.
“먼저 힘센 자를 묶어 두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힘센 자의 집에 들어가 재물을 털 수 없다.”
힘센 사탄을 압도하는 주님이요 성령의 힘입니다. 이런 너무나 자명한 주님의 성령의 활동을, 성령의 힘을 부정하는 것은 용서가 불가하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성령의 힘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주님께 더러운 영이 들렸다 말하는 것은 용서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이 대목에 대한 주석을 소개합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문맥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으로 수행하는 일들을 사탄의 것으로 돌려, 예수님을 통하여 활동하시는 권능의 주체를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러한 회개의 거부는 용서에 직접적으로 배치된다.’
구마행위뿐 아니라 모든 성사들이 주님께서 성령의 힘으로 행하시는 너무나 자명한 일인데 이런 사실을 거부하는 자체가 바로 성령을 모독하는 죄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완고하고 완강한 무지의 죄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죄는 알려줘도 몰라 회개가 어려우니 참으로 답답한 일입니다.
요즘 무지로 인해 광적일 정도로 이데오르기에 오염 중독된 이들을 대할 때 흡사 성령을 모독하는 죄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온갖 범람하는 더러운 영들 같은 가짜 뉴스들에 오염 중독되어 본의 아니게 더러운 영에 들려 성령을 모독하는 죄를 범치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성령 모독 죄에는 백약이 무효입니다. 바로 오늘 예수님을 모함하는 율법학자들이 이에 해당됩니다. 새삼 예수님 중심의 삶에 성령의 힘으로 영혼을 정화하고 강화하며 사는 일이 얼마나 본질적인지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 중심에 성령의 힘으로 살 때 끊임없는 회개와 더불어 영육의 건강입니다.
마침 어제 면담성사중 만났던 어느 아름다운 부부가 생각납니다. 2020년 새해를 맞이하며 20여일에 걸쳐 성지순례기간을 가졌던 신심깊은 부부입니다. 참으로 오랜 동안 온갖 역경과 시련중에도 한결같이 하느님 중심의 성령의 힘으로 영적 승리의 삶을 살았던 부부요, 그 모습이 아름다워 사진에 담아 기쁨을 나눴습니다.
세상이 어지럽고 혼란할수록 우리가 매일, 평생, 끊임없이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시편성무일도와 미사의 공동전례기도의 수행은 더욱 간절해질 수뿐이 없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성령의 힘으로 온전한 삶을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은 죽음을 없애시고, 복음으로 생명을 환히 보여 주셨네”(2티모1,10). 아멘.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독서와 복음에서는 대비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제1독서는 이스라엘이 통일 왕국으로 발돋움하는 중요한 사건을 기술합니다.
"우리는 임금님의 골육입니다"(2사무 5,1).
사울이 죽은 뒤 이스라엘은 그의 아들 이스 보셋을 중심으로 왕정을 이어가고, 다윗은 유다 집안의 임금으로 기름부음받아(2사무 2,4 참조) 자기 집안을 다스립니다. 이 상태로 사울 집안과 다윗 집안의 싸움이 지속되다가 이스 보셋이 죽은 뒤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헤브론에 있는 다윗에게 몰려와 임금이 되어 달라고 청을 하는 대목이지요.
아브라함의 후손인 한 민족이지만 불안정한 왕정 체제 수립 시기에 갈라진 그들이 다시 하나됨을 꿈꿉니다. 정치적이고 인간적인 견지에서야 분열의 요소들을 지울 수 없지만, 하느님께서 묶어 주신 한 골육이고 또 하느님께서 기름부으신 존재임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집안이, 다윗이야말로 하느님의 사람이고 그분 영이 머무르는 지도자임을 받아들이니 비로소 통일 왕국의 기틀이 마련됩니다.
반면 복음에서는 분열의 골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예수는 베엘제불이 들렸다 ...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마르 3,22).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하신 활동이 질병과 마귀의 억압에 신음하는 이들을 구해주신 일이었음에도 율법 학자들은 그 의미를 애써 부인하려 합니다. 율법에 충실한 자기들을 '선'으로 규정하다 보니, 자기들이 못한 일, 아니 관심조차 없던 일을 이루시는 예수님을 그 반대인 '악'으로 치부해 버리려는 발상입니다.
자기들이 공고히 해놓은 제도와 관습을 수호하려, 설사 그것이 하느님의 영일지라도 다른 것은 철저히 거부하는 행태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일어나는 선한 기적들도 과거에 없던 것이라면 그들의 이해 범위를 벗어나는 '악'일 뿐입니다. 그들은 고통에서 해방된 이들, 질병에서 치유된 이들의 기쁨과 찬미보다 예수님께 쏠릴 감사와 존경이 불안하고 불편합니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마르 3,28).
인간은 누구나 잘못을 저지르고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부족하고 모자라는 인간이 어떤 일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힘에 대해 설령 무지와 착각으로 오해하고 오류를 범한다 해도 인간의 약함에 기인한 그 죄와 잘못은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마르 3,28).
하지만 성령을 모독한 죄에 대해서 예수님은 단호하십니다.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영이 이루시는 일임을 감지하면서도 제 이념과 이익을 위해 고의적으로 이를 거부하고 모독하는 이에 대해서 예수님이 이례적으로 엄중히 경고하며 선고를 내리고 계십니다. 아무리 주님의 자비가 무한하다 한들 이를 혐오하고 거부하고 피해버리는 이에게까지 가 닿을 수는 없으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우리는 하느님의 영을 어떻게 감지할 수 있을까요? 일상의 시시콜콜한 일마다 하느님의 뜻이냐 사람의 뜻이냐 잣대를 들이대는 지나친 영성화도 피해야 하지만, 우리 삶의 방향을 결정 짓는 굵직한 사건들에서마저 하느님을 배제하는 무심함 역시 주의해야 합니다. 또 하느님의 뜻을 빙자해 약하고 힘 없는 이들을 길들이고 조종하는 것도 폭력이 될 수 있음을 성찰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영,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과정도 선하고 결과도 선합니다. 끝이 좋으니 다 좋다는 말은 신앙의 언어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자기 욕망에 기인하지 않았기에 누구도 두려움과 불편으로 몰아넣지 않았고, 오로지 상대의 선익을 위한 대가 없는 베풂이었습니다. 곧 성령께서 하신 일이었지요.
성령과 함께하는 영혼, 그리고성령께서 하시는 일을 깨닫고 받아들이는 영혼이 될 수 있기를 청하는 하루 되시길 기원합니다.
임금이 된 다윗은 행복했을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주님께서는 ‘너는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고 이스라엘의 영도자가 될 것이다.’ 하고 임금님께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이 드디어 임금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생각을 해봅니다.
다윗은 임금으로서 행복하였을까?
관구장이었던 저를 비추어보면 세속의 군주로서의 그는 불행했을 겁니다.
오늘 사무엘기에서 원로들이 와서 자기들의 임금이 되어달라고 청합니다.
한 인간으로서 이렇게 임금이 되어달라는 청을 받는 것은 갖고 싶었던 권력을 쥐게 된 기쁨이나 행복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이 자신을 임금으로 인정해준 것만으로 행복합니다.
권력욕이 큰 사람이 아닌 보통 사람일지라도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 주는 것은 좋아하고 그리고 인정받을 때 행복하지요.
저도 다르지 않아서 형제들이 저를 인정한 거라고 생각했을 때는 기쁘고 흐믓했지만 그 기쁨과 흐믓함은 오래 가지 않았지요.
나무 위에 올려놓고 흔든다는 말처럼 사람들은 책임자를 뽑아놓고는 흔들기 때문입니다.
나무 아래 있을 때는 좋은 사람이지만 나무 위에서는 좋은 사람이 아닌 겁니다.
사실 나무 아래 있으면 좋은 사람이지만 위에 있으면 그리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대통령 되고 난 뒤에 욕먹는 것이 다 이런 이유지요.
대통령이 되고 난 뒤에 사람이 변했을 수도 있지만 평범한 사람으로는 그 정도로 좋은 사람이지만 대통령으로는 부족한 사람이기 때문이고, 대통령한테는 평범한 사람일 때보다 더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관구장이 된 것이 형제들이 선출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를 뽑으신 것으로 받아들이면 전혀 달라집니다.
형제들에게 인정받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책임을 맡기신 겁니다.
그래서 기쁨과 흐믓함보다는 책임이 무겁고, 책임감으로 직무를 수행하기에 인간적으로는 괴롭고, 하느님으로부터 힘을 받지 않으면 직무를 수행하기도 어렵습니다.
다윗은 어떻게 생각했고 어떻게 받아들였습니까?
오늘 사무엘기를 보면 하느님께서 자기를 뽑으셨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하느님 앞에서 원로들과 계약을 맺습니다.
"다윗 임금은 헤브론에서 주님 앞으로 나아가 그들과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웠다."
그러므로 그는 인간적인 행복을 느끼기보다는 괴로움과 번민이 많았고, 하느님으로부터 힘을 받아 임금의 직무를 수행하다가도 가끔 죄를 짓기도 했는데 그것이 보통 고통이 없고 일이 잘 풀릴 때였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그것은 틀림없이 일이 자기 뜻대로 잘 될 때 교만해져서 자기 스스로 만족하는 것이 인간인데 다윗도 다르지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앞으로 다윗이 어떻게 죄를 짓고, 그러면서도 어떻게 하느님께 돌아오는지를 보게 될 텐데 우리와 비슷한 이런 다윗에게서 우리는 이것을 배워야겠습니다.
혼인과 가정의 신성성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현대 세계의 사목 헌장’에서(N. 48)
남편과 아내는 혼인 계약으로써 “이미 둘이 아니요 한 몸”이 되었으니, 인격과 행위의 깊은 결합으로써 서로 도와주고 서로 봉사하며 동시에 이로써 자신들의 결합의 의의를 체험하며 날로 더욱 깊게 한다. 이 깊은 일치는 인격과 인격의 상호 교환이므로, 자녀의 행복이 요구하듯이, 부부의 완전한 신의와 그 일치의 불가해소성을 강요한다.
주 그리스도께서는, 사랑의 천상 원천에서 솟아나고 그리스도와 교회의 일치를 모델 삼아 구성된 이 다각적 사랑에 풍부한 당신 축복을 내리셨다. 일찍이 하느님께서 사랑과 충실의 계약으로써 당신 백성을 도와주셨듯이, 지금은 인류의 구세주이신 교회의 정배께서 혼인성사로써 신자 부부를 도우러 오신다. 그들과 함께 계시며 당신이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것처럼 부부도 역시 서로의 애정과 변치 않는 충실로 서로 사랑하도록 도와주신다.
진정한 부부애는 하느님의 사랑에 흡수되어 그리스도의 구원 능력과 교회의 구원 활동으로 지배되고 풍요해진다. 이리하여 부부는 효과적으로 하느님께로 인도되고 부모의 숭고한 임무 수행에 있어서 도움과 힘을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 부부는 그 신분의 의무와 존엄성을 위하여 특수한 성사로 견고케 되는 것이니 말하자면 축성되는 것이다. 이 성사의 힘으로 신자 부부는 혼인과 가정의 임무를 수행하며 그들의 전 생애를 신망애 삼덕으로 채워주는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충만하여 날로 더욱 자기 완성과 상호 성화에 전진함으로써 공공으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게 된다.
따라서 부모들 자신이 솔선 수범하고 가정적 기도 생활을 실천하다면 자녀들과 집안에 함께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이 인간적 완성과 구원과 성화의 길을 더욱 쉽게 발견할 수 있으리라. 또한 부성과 모성의 직무와 품위를 갖춘 부부는 자녀 교육의 의무, 특히 자녀들의 종교 교육의 의무를 열심히 수행할 것이다. 교육의 의무는 그 누구보다도 먼저 부모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자녀들은 가정의 산 지체로서 그들 나름으로 부모들 성화에 이바지한다. 감사하는 마음과 효심과 신뢰로써 부모에게 받은 은혜에 보답할 것이며 부모를 역경과 노후 고독 중에 자녀답게 봉양해 드릴 것이다.
은혜 아닌 게 없다.
최민석 신부님
먼 산에 자욱한 빛이 어리기 시작하면서 옷 속을 파고드는 바람이 쌀쌀하기만 하다. 산간 마을 여섯 시가 채 못 된 시각이건만 어느새 산 그림자가 내려 앉아 일몰이다. 정자가 있는 소나무 숲 사이 산길을 굽이굽이 돌아 내려오는 길에 들어서니 동네 마을이 보인다.
면사무소 건물과 우체국, 삼거리 개인택시, 철물점, 미장원, 솔가지 태우는 저녁연기의 매움하고 다정한 냄새, 그리고 문득 한 차례 옷 속으로 파고드는 바람이 스친다. 도시에서 자란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나 기억 속에 묻어 둔 저녁거리의 모습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
지금 여기의 ‘현재’를 살아가면서 어김없이 가슴 깊은 곳에 떠오르는 풀리지 않는 것이 있었다. 나도 어찌할 수 없는 영혼의 목마름 같은 것이 늘 따라 다녔다. 늘 입술을 타게 하는 의문과 갈증을 풀기 위해 무엇인가를 해보지만 풀리지 않는 그 무엇이 있었던 것이다.
나 자신을 영원히 자유롭게 해줄 답이 나 자신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부터 자유와 평화를 얻었다. 진정한 자유와 평화 그리고 기쁨이 지금 이 순간의 현존 가운데 있다. 이게 바로 하느님의 현존이다. 현존이 하느님과 나 사이의 관계를 이어주는 다리다. 현존은 ‘이해’가 아니라 믿음이요, ‘합리’가 아니라 ‘사랑’이다.
우리는 흔히 나를 이해해 달라고 말한다. 또 너를 이해할 수 없다고도 한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에게 나는 되물어본다. 당신은 당신 자신을 이해하는가. 아직 나는 이 질문에 “그렇다. 나는 이해한다.” 대답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나’야말로 이해되지 않는 존재라는 것이 우리 모두의 정직한 대답일 것이다.
‘이해’라는 다리로는 건너가 닿을 수 없는 것이 사람이다. 하물며 어찌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내가 ‘나’를 이해 못하면서도 이렇게 끌어안고 살아가듯이, 나는 또 이해되지 않는 ‘너’ 또한 받아들여 함께 살아야 하는 것이다. 나와 네가 그러하듯이 하느님 역시 이해가 아닌 사랑으로만 만날 수 있는 분이시다.
그것은 하느님이 사랑이심을 믿기 때문이다. 두려움은 죽음을 낳고 사랑은 생명을 낳는다.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못한다. 하느님은 좋은 것 말고는 주실 수 없는 분이시다. 이 하느님을 믿을 때 비로소 내 마음 안에 항상 기뻐하고 언제나 감사하게 되는 것이다.
‘하느님’는 매 순간 있는 그대로의 것이다.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잠들 때까지 심지어 꿈속에서까지 경험하는 모든 감정, 느낌, 생각들이 다 ‘하느님’에게서 나왔다. 그러니 하느님 말고는 돌아갈 곳이 없다. 사람들이 좁은 소견으로 이러쿵저러쿵 분별하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그 모든 분별이 무효다. 오직 인간의 시끄러운 분별 너머에 한 분 하느님이 계실 따름이다.
‘하느님’ 아님이 없기에 모든 것을 ‘하느님의 현존’으로 받아들인다. 매 순간 하느님의 현존 가운데 있기에 인생의 모든 답이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에 있다. 매 순간 있는 그대로 하나하나 모두가 소중한 ‘나’일 뿐이다.
내 삶에서 목마름이 가시지 않고 마음의 고통과 괴로움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분별하려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 분별의 마음은 자신이 원하는 것은 받아들이고 자신이 싫어하는 것은 버리려 한다. 그런데 버리고 싶은 것들은 얼른 버려지지가 않고, 얻고 싶은 것 또한 쉽지 않기에 영혼의 목마름과 괴로움이 끝나지 않는 것이다.
진실로 ‘나’의 전부를 받아들이고 매 순간 있는 그대로 껴안아 수용하면 뜻밖에도 그 속에서 진정한 사랑을 발견할 수 있으며, 견딜 수 없는 구속이 오히려 자유로 다가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모든 것이 하느님이 주는 선물이요 축복이다. 지금 이 순간 내 안에서 올라오는 모든 감정 느낌, 생각들 역시 아름다운 ‘나’들이다.
하느님을 참으로 믿는 사람은 있는 그대로의 나와 세상에서 하느님을 본다.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이 바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며 답이라는 것을 깨닫는 사람이다. 그는 모든 일을 살피되 그것들을 관통하여 하느님을 본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들이, “예수는 베엘제불이 들렸다.”고도 하고,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도 하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예를 들어 내가 기도를 해서 어느 누가 병이 낫게된다면 너무나도 보람되고 행복한 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너무나도 자비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렇게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치유의 은총을 내려주시는 분이심을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잊지말아야 할 것은 그렇게 우리의 기도를 하느님께서 들어주신다고 해서 내가 마치 성령을 좌지우지하는 존재인 것처럼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야 말로 성령에 대한 모독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과 함께한다는 것은 마치 배가 돛을 올려 바람에 의지해 나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곧 내가 힘을 내어 노를 저어서 될 일이 아니라 믿음이 돛을 올리고 성령의 바람에 의지해 그분의 이끄심대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성령과 함께 이미 가고자하는 목적지에 다다라 있게 될 것입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악은 선을 이길 수 없다. <마르코 3, 22-30>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면서부터 악은 선을 이기려고 싸움을 걸지만, 방해는 해도 이길 수 없었습니다. 오늘 율법 학자들은 주님의 선한 행위를 시기 질투로 이겨 보려고 가진 모략을 다 해도 선한 의지의 주님 지혜는 이겨낼 수 없었습니다.
선은 악의 박해를 받고, 불의의 공격을 받고 선으로 무장한 사람을 겉으로 이겨내는 것 같아도 이길 수 없습니다. 이같이 진, 선, 미의 근원이신 주님과 함께하면 두려울 것 하나도 없습니다. 하느님을 이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하느님에게 도전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자입니다. 성령을 거스르는 자는 용서받지 못한다는 말씀은 진실을 거슬러 거짓이 이길 수 없고 사랑을 이길 장사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은 그 자체 아니꼽고, 치사하고, 더럽고, 메스껍고 유치한 일이 한둘이 아닙니다. 이런 세상을 극복하고 이기려면 하느님 편에 서서 전쟁해야 합니다.
선을 행하고도 욕을 먹고, 비난의 소리를 들으며, 바로 사는데도 잘못 산다고 하고, 좋은 일 하고도 원망을 듣고, 똑똑하게 하고도 바보 소리를 듣고, 정의롭게 행하여도 불의라 말하고, 내 편이 아니면 모두가 악이라 하고, 약한 자를 강한 자가 억누르고, 장애인을 선한 사람이 경멸하고, 노인이라 힘없다고 무시하며 대들고, 아이들 사랑하지 않고, 자기 편리한 것만 따라 사는 사람. 악이 선을 공격하고 희생시켜 자기 이익만 생각하는 사람들 안에 선한 의지를 가진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할까? 각자가 자기 입장에서 손에 무기를 들고 적과 싸워야 합니다. 칼이 어떤 사람의 손에 있는지가 문제입니다. 칼이 악한 자에게 있으면 악을 저지르고, 선한 사람 손에 있으면 음식을 맛있게 장만하고, 아름다운 예술품을 만들어 냅니다. 핵은 평화의 상징이 될 수 있고, 전쟁의 상징도 될 수 있습니다. 누구 손에 있는가에 달려있습니다.
우선 독버섯 같은 악의 씨가 자라지 못하게 하고, 힘을 쓰지 못하게 하려면 땅에 씨가 떨어지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사용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들 마음에 자유, 평화, 기쁨을 심어주고 참사랑의 정신을 갖게 해야 합니다. 성령의 소리에 귀 기울이게 해야 합니다.
그들과 대적하는 선한 무리는 주님이 주시는 무기를 갖도록 준비해야 합니다. 우선, 주님과 함께하는 정신, 주님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 준비는 기도의 삶입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힘을 얻는 주유소와 같고 힘을 키우는 길이 됩니다. 다윗이 돌 하나로 골리앗을 넘어뜨린 것은 하느님의 힘이었습니다. 가장 강한 힘은 미사를 통해서이고 다음은 주의 기도를 뜻을 새기며 힘 있게 믿음을 갖고 드리는 것입니다.
정의와 진리와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 찬미찬송 받으소서. 우리 주위에 둘러싸여 있는 악의 세력을 물리쳐 주시고, 하느님 나라의 영광이 드러나게 하소서. 아멘.
악을 굴복시키시는 주님
한민택 바오로 신부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악은 인간 삶에 깊이 자리하며 영향을 끼쳐 왔습니다. 신약성경 특히 복음서에서도 악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를 치유해주실 뿐만 아니라 악령도 쫓아주시며, 당신의 사명이 단순히 질병과 병고에서 사람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삶을 근본적으로 속박하는 악의 지배에서 인간을 구하는 것이었음을 알려주셨습니다. 요즈음 여러 매체들에서 보여주듯 악을 과장하여 표현하거나 의인화해서도 안 되겠지만, 악을 단순히 미신이나 비현실적인 상징으로 치부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악은 예수님 시대뿐 아니라 오늘 우리의 현실과 삶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으며, 공생활 처음부터 생을 마감하실 때까지 악과 싸우셨습니다. 악은 우리 삶 곳곳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 사랑의 힘으로 악을 굴복시키셨으며, 그분과 함께라면 우리 또한 악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마음이 악에 굴복하여 믿음을 잃고 두려움과 공포, 의기소침과 우울함, 분노와 원한, 좌절과 절망에 사로잡혀 왔다면, 이제 주님의 사랑과 자비, 용서와 평화가 우리 삶을 다스릴 수 있도록 굳건한 믿음을 청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히 죄에 매이게 된다.”(마르 3,29)
곽승룡 비오 신부님
신약에서 주님이 주시는 행복한 메시지란? 모든 죄는 용서받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를 받을 것이다.”(마르 3,28)
부활이후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특별한 표지로 숨을 불어주시며 용서하는 능력을 주셨다. 주님께서 그들 위에 당신의 성령을 불어주셨다.
세기를 통해 교회는 같은 힘 곧 하느님 영의 힘으로 죄를 용서한다.
그래서인지 영의 힘을 믿지 않는 자, 그리스도에 의해 제정된 성사들의 효과를 거부하는 자, 사제직을 인간적인 제도만으로 바라보는 자, 그는 성령을 거부하는 자다. 악에서 구하고 정화하는 가능성을 버리는 자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히 죄에 매이게 된다.”(마르 3,29)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마르 3, 23)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분열에서 분열로
번져가는 분열의
아픔입니다.
반목과 대립으로는
그 어떤 것도
이룰 것이
없습니다.
망가지게 하고
망가뜨리는 우리의
착각과 교만입니다.
예수님을
향해서까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말합니다.
전쟁과 경쟁으로
우리의 예수님까지
끌어들입니다.
예수님의 이름과
인격을 그 누구도
빼앗을 수는
없습니다.
내 안의 아무 것도
내려놓지 못한
어리석은 결과입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존중과 믿음임을
깨닫게됩니다.
서로를 폄하하고
서로를 인정하지 않는
불신의 관계에서
벗어나는 은총의
날 되십시오.
우리를 끝까지
지켜주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