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힌남노로 포항제철이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는 소식과 TV화면에 포항제철이 있는 내 초임 발령지였던 포항시 대송면이 창세기편에 기록된 노아의 홍수가 재현된 것처럼 물바다가 된 모습을 비췄다. 수마가 할퀴고 간 자리가 처참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했는데 태풍의 길목에 있는 포항에 재난 방재시설이 옛날이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 것이 없어 새삼 놀라웠다. 열불 터질 노릇이다.
그런데 그 화면 속에서 63년 전 내 모습이 파노라마 들여다보듯 떠올랐다. 1959년은 우리가 초임 발령을 받은 해고 그 해 추석날, 이름이 기록된 태풍 중 최악인 ‘사라’가 포항을 덮친 날이었다. 역사엔 849명의 사망자와 2533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내가 그 와중에 사람의 목숨을 다섯이나 구하고 돼지를 두 마리 구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과거라는 서랍장을 뒤져 보는 단초가 되긴 했다.
“추석에 일직이라?… 아무에게나 오는 복이 아니지. 암, 조상이 돌봐야지.”
그해 추석이 다가오자 선생님들은 추석날 일직인, 술이라면 맨발로 달려가는 푼더분한 이동우 선생님을 향해 짓궂은 농담을 보내면서도 눈은 모두 내게 방점을 찍는듯했다.
‘미혼은 너 뿐이니 어지간하면 나서보시지….’
무언의 압력이었다. 12학급인 남성국민학교 직원들은 가히 가족처럼 지냈다. 그러나저러나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사회에 발 디딘지 첫해여서 부모형제도 보고 싶었고 보다, 친구들을 만나고 싶어 몸살이 날 지경이었다. 그러나 어쩌랴. 나는 추석 전날 추석 당직은 내가 맡을 테니 모두 고향에 편히 다녀오시라고 선언했다. 박수가 쏟아졌지만 속은 죽을 맛이었다.
추석날이었다. 출근시간이 되어도 밥상이 들어오지 않았다. 빗소리가 나기에 문을 열어보니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잘 되었다 싶었다. 이 비에 누가 추석날 시골 학교에 찾아올 사람도 없을 거고, 주인집은 추석제사를 모시느라 정신이 없으니, 에라 한잠 더 자자 싶어 벌렁 누웠다. (과거라는 서랍장을 아무리 뒤져봐도 추석날 태풍이 올라온다는 소리를 사전에 들은 기억은 어디에도 없었다.)
“선생님 큰일 났어요!”
하숙방 문을 벌컥 열며 야단법석을 떠는 주인집 손녀 때문에 나는 밖을 내다보았다. 세상에 이런 일이! 눈 달리고는 처음 보았다. 하숙집은 제방 위 높은 곳에 있어 안전했으나 온 세상이 물바다였다. 나는 지청구를 부릴 사이도 없이 다짜고짜 입은 채로 하숙집을 달려 나가 제방 위에 올라섰다. 200여M 떨어진 학교 쪽을 바라보니 운동장은 물바다였고 돋우어지은 교사도 물에 질펀하게 잠겨가고 있었다. 물바다가 된 그 운동장에 까만 돼지 두 마리가 둥둥 떠다녔다. 6학년 졸업 때 쓰기 위해 내가 정성껏 기르는 놈들이었다.
나는 댓바람에 학교를 향해 마구 달렸다. 고함을 냅다 지르며 만류하는 할머니의 고함을 뒤로한 채. 세찬 바람에 쏟아지는 빗방울이 바늘처럼 얼굴을 찔렀다. 제방이 끝나는 부분에 서자 길은 사라지고 세찬 물이 동촌(지금 포스코가 들어선 곳이다) 쪽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무작정 뛰어들려다 가만히 보니 물 위로 미루나무가 푯대처럼 두 줄로 학교까지 즐빗이 늘어서있었다. 나는 그 사이로 몸을 밀어 넣으며 수영자세를 취했다. 허지만 생각보다 깊지 않았다. 허리춤까지 물이 차올랐다. 교무실은 무릎가지 물이 차올라 있었다. 나는 들은 말이 있어 제일 먼저 학적부와 졸업대장을 찾아 캐비닛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가슴께로 차오른 운동장에서 둥둥 떠다니며 포달을 피우며 개기는 푸등푸등한 돼지 두 마리를 혼신의 힘을 다해 교실에 몰아넣었다. 그리고 아이들 책상을 3층으로 쌓아올리고는 직수굿한 돼지들 보고 말해주었다. 물이 차면 올라가라고…. 그리고 일지에다 급히 적바람을 몇 자 휘날리고 캐비닛 위로 던졌다.
‘11시 10분. 폭우로 가슴까지 물이 차올라 학교를 지킬 수 없어 퇴교함. 졸업대장과 학적부는 캐비닛 위에 올려놓았음. 돼지는 교실에 넣고 문을 닫음. 일직 교사 고제홍’
-다행히 물이 캐비닛 위까지는 차지 않아 졸업대장과 학적부, 일지는 고스란히 남았다. 일지는 훗날까지 영원히 보관해야 한다고 선생님들이 법석을 떨었는데 지금은 모르겠다.-
“사람 살려!!!”
교무실을 나서는데 학교에 붙은 소사가 사는 집 쪽에서 비명이 들렸다. 돌아보니 소사 부부와 초등학교 1학년인 아들 ‘용’이 지붕 위에서 날 보고 소리쳤다. 나는 이 생각 저 궁리하다 교무실로 들어가는 현관문을 힘껏 손바닥으로 쳤다. 송판으로 된 문이 한 번에 나가 떨어졌다. 나는 현관문을 밀며 소사 집으로 헤어갔다. 물은 이미 가슴까지 차올랐고 영일만을 향해 서서히 흘렀다. 아주머니와 용이를 물에 뜬 현관문에 태우고, 다리가 불편한 50이 넘은 정씨 아저씨는 현관문에 매달리게 했다. 나는 낙동강에서 배운 수영실력으로 킥을 차며 물에 뜬 현관문을 밀어 제방으로 향했다. 저어하는 마음이야 말해 무삼하리오, 목숨을 걸었다. 만에 하나 잘못하여 물살에 휩쓸리면 영일만으로 떠내려가게 되어있었다. 오로지 목적지는 하숙집이었다. 가다가 힘이 달리면 미루나무에 매달려 숨을 골랐다. 저 멀리 보이는 제방 위에서 하숙집 식구들이 나와 응원을 보냈다. 포호빙하였지만 나는 기운이 솟아올라 무사히 제방에 도착하였다. 하도 허출하여 제삿밥을 두 그릇이나 먹은 기억이 난다.
오후 들어 비가 그치고 웃날이 들었다. 모터소리가 요란스럽게 나기에 하숙집 마당까지 든 물에 맨발로 제방에 올랐다. 해병대 상륙정이 물바다가 된 농경지 위를 달리다 내게로 달려왔다. 아마 내가 고립되어 구원을 요청하는 줄 알았던 모양이었다. 에라, 잘되었다 싶었다. 그렇지 않아도 형산강 다리 쪽에서 사람들이 난리를 피우고 있었는데 궁금해 몸살이 날 지경이었다. 나는 상륙정에 올라타고 형산강 다리께로 향했다. 지나다보니 학교는 창문까지 물이 차올라 있었다. 형산강다리는 강물이 불어 다리발까지 ‘깔랑깔랑’했다. 세차게 흐르는 시뻘건 강물에 집이 통째로 떠 흘러오고 지붕에 올라탄 사람이나, 부력이 있는 물체를 잡은 사람들이 수 없이 떠내려 오면서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다리 위 사람들은 동아줄을 늘어뜨려 그들을 구조하고 있었다. 용케 밧줄을 잡은 사람은 생이요, 그러지 못한 사람은 포항만의 물귀신이 되었다. 검부러기에 섞여 수없이 떠내려 오는 소, 돼지 가축들은 차치하고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안강댐이 터져 제사 모시던 사람들이 그대로 물에 휩쓸렸다고 했다. (훗날 보니 물이 전봇대 전깃줄 위로 흘러내렸더라)
나도 동아줄을 두 개 늘어뜨렸다. 순간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처럼 헛물켤까 불안, 불안했다. 제대로 얼어붙지 않은 강을 건너는 것처럼 손발도 오그라들었다. 허투루 볼 일이 아니었으나 나는 해냈다. 처음 건져 올린 사람은 50대 어머니뻘이었다. 아주머니는 다리에 올라오자마자 나를 부둥켜안고 쓰다듬으며 구호대원이 올 때까지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 두 번째로 운 좋게 건져 올린 사람은 누나뻘이었다. 한 번 삐꺽 했는데도 그녀는 악착같이 밧줄을 놓지 않았다. 다리위로 올라오자 거의 벗은 상태였는데도 그녀는 폴짝폴짝 뛰며 내 뺨에 입맞춤을 퍼부었다. 그러나 나는 도리어 두려운 내 마음의 구김살을 그분들이 펴주어 마음속으로 고맙다고 수없이 읖조렸다.
날이 어둑어둑해지자 강도 바다도 조용해졌다. 나는 다리 난간을 부여잡고 영일만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상륙정들이 갈지자로 바다를 누비고 있었다. 그러나 바다는 시침을 떼고 일렁일 뿐이었다. 인간이 자연 앞에서 얼마나 무기력 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인지, 내가 선택했다고 해서 원하는 대로 삶을 살 수는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유대인들이 사람의 운명을 세찬 파도 가운데 떠 있는 조각배로 비유한 것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주위를 돌아보니 사람들은 주섬주섬 자리를 털었다. 날씨는 어느새 끄느름했다. 어떻게 돌아간다? 순간 처연했으나 금방 나는 히죽이 웃었다. 산 사람이 무슨 걱정을 하노? 빨래가 바람에 제 몸을 맡기 듯 나도 바람에 맡기는 거야. 나는 허적허적 걸었다. 영화‘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릿의 대사를 중얼거리며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거야’
그날 밤 하늘에 뜬 별들이 씻기운 듯 반짝이었지, 아마….
이 일로 나는 도지사 표창을 받았다. 허, 참!
첫댓글 1959년9월 사라호의 기억은 나도 있는데 안개속 같네
나도 추석날 밤 숙직을 했다 영주군 풍기국민학교, 달은 째지게 밝은 밤이었다 하지만 바람은 쎄게 불었고
아침에 나가 보니 운동장 나무들이 뿌리채 뽑혀 자빠져 있었다
부임 후 첫 추석, 고향도 못 가고 사라호 불던 날 숙직을 했던 기억이 새롭다
사람의 생명을 5명나 구원한 자네는 하늘나라에 가면 큰 상급을 받겠네.
" 한 사람의 생명은 온 천하보다 귀하다." 예수님의 말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