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군대와 전쟁의 나라 고구려
한국의 역사뿐만 아니라 세계의 전사(戰史)를 살펴봐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단한 전공(戰功)을 세웠던 을지문덕(乙支文德)은 명림답부(明臨答夫)·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장수태왕(長壽太王)·연개소문(淵蓋蘇文) 등과 더불어 후대에 고구려를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가장 막강한 국력을 과시했던 나라로 인식시켰던 인물들이었다.
우리가 로마(Rome) 제국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고대 국가들 가운데 국력의 막강함을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이 되는 것은 바로 군사력이다. 로마 제국은 강한 군사력이 있었기 때문에 괄목할 만한 영토 확장을 이룩할 수 있었고 이는 오랜 세월 로마에 경제적인 이득을 가져다주었다. 고구려 역시 세월이 지나며 잘 단련된 군사력을 바탕으로 영토를 확장해 4세기에는 동아시아 최고의 강대국 지위에 오를 수 있었다.
중국인들이 보기에 고구려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기마술(騎馬術)과 궁술(弓術)을 익히고, 의자에 걸터앉아 외국의 사절을 맞이하거나 설 때는 꼭 팔짱을 끼고 턱을 들어 한껏 거드름을 피우고 인사할 때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구령을 붙여 인사하며, 평소에도 천천히 걸어가는 법이 없어서 걸음걸이가 달음박질 치는 것 같다고 하였다. 이런 기록들은 고구려의 사회 분위기가 상무적이며 무사풍에 젖어 있었음을 알려준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군대는 전쟁이 일어났을 때에 어떻게 구성되었으며, 어떤 방식으로 싸웠을까? 황해도 안악군에 있는 안악 3호분의 행렬도(行列圖)에 그 단서가 남아 있다. 무덤의 주인공은 수레를 타고 어디론가 가고 있는 중인데 그 주위를 고구려의 완전무장한 군인들이 에스코트하고 있는 모습의 그림이다. 벽화는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기병·보병·궁수·도부수·군악대·의장대 등 다양한 병사들의 무기와 장비를 그대로 묘사했을 뿐 아니라 이들 간의 수적 비율까지도 맞추어 놓았다. 이 벽화에 등장하는 기병과 보병의 비율은 1대3 정도인데, 이는 사료에 등장하는 기병과 보병의 비율과 일치한다. 그러니 사진이나 다름이 없다.
이 무덤의 주인공은 묵서명(墨書銘)을 통해 중국인 망명객인 동수(冬壽)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자치통감(資治通鑑)에 의하면 동수는 고구려의 숙적이던 전연(前燕)의 고위관료였는데, 서기 336년에 고구려로 망명했다가 357년에 사망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무덤의 주인공을 동수가 아니라 미천왕(美川王) 혹은 고국원왕(故國原王)으로 보는 이론(異論)도 있다. 그 유력한 근거가 벽화에 나타나는 주인공의 복장, 특히 머리에 쓴 관이 고구려 국왕이 썼다는 백라관(白羅冠)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주인공이 누구든 간에 이 무덤의 주인공이 국왕이나 한때 국왕과 거의 동렬에 선 귀족층의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그리고 국왕이든 고급귀족이든 그들이 거느리는 부대의 구조는 기본적으로 같았던 게 분명하다. 그러니 그림 속의 군대는 고구려가 중원 왕조와 일전을 벌이던 고국원왕에서 장수태왕(長壽太王)대, 즉 4~5세기의 고구려군 편제를 보여준다는 점에는 틀림이 없다.
고구려의 중장기병(重裝騎兵)은 말과 사람이 갑옷으로 중무장을 한다. 갑옷은 미늘갑옷으로 가죽편에 철판을 댄 미늘을 가죽끈으로 이어 붙인 것이다. 투구, 목가리개, 손목과 발목까지 내려덮는 갑옷을 입으면 노출되는 부위는 얼굴과 손뿐이다. 발에도 강철 스파이크가 달린 신발을 신는다. 말에게도 얼굴에는 철판으로 만든 안면갑(顔面甲)을 씌우고, 말갑옷은 거의 발목까지 내려온다. 벽화의 기병은 방패가 없는데, 신라의 중장기병을 형상화한 기마형 토기는 방패도 들고 있다.
최강의 공격력과 장갑을 자랑하는 중장기병의 주 임무는 적진돌파와 대형 파괴다. 중장기병은 밀집대형 혹은 쇄기꼴 대형으로 기마장창(騎馬長槍)을 앞으로 내밀고 돌격하여 적진을 허문다.
기병들의 장창은 보병들의 장창보다 길고 무겁다. 기마장창을 한자로는 삭(槊)이라고 한다. 중국의 삭은 보통 4미터 정도인데, 고구려군은 길이 5·4미터에 무게 6~9킬로그램 정도 되는 삭을 사용하기도 했다.
기병의 또 다른 무기는 칼이다. 고구려군의 칼은 그림으로 보아서는 직도(稙刀)인지 칼날이 약간 휘어진 곡도(曲刀)인지 판별하기가 곤란하다. 유물 중에는 당나라에서 유행하던 곧은 환두대도(環頭大刀)가 많다.
기병들이 쓰는 칼 가운데에는 끝이 약간 넓고 뭉특하게 보이는 것도 있는데, 이것은 끝부분이 무거워져 내려치고 베는 데에 유리하다. 말을 타고 휘두르는 것이므로 찌르기는 포기하고 치고 베는 데에 중점을 둔 무기이다. 이런 칼은 적의 대형을 돌파하고 난 다음의 백병전(白兵戰) 때, 도주하는 적군을 추격하여 뒤에서 내리치면 아주 효과적이다.
중장기병이 활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긴 갑옷이 사격할 때는 불편하므로 활은 개인적으로 근접전(近接戰)에서 적군을 쓰러뜨릴 때나 갑옷을 벗고 경기병(輕騎兵) 전술로 전환했을 때, 주로 사용했고 중장기병의 집단전술에서는 사격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던 것 같다.
중장기병은 다른 병졸보다 신분이 높다. 말과 갑옷은 매우 비싼 장비였고, 기마술(騎馬術)은 상당히 전문적이고 오랜 훈련을 요구하기 때문에 지배층이 아니면 중장기병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병사 개개인의 전투력도 중장기병이 탁월하게 높았다. 아마도 중장기병이 전장(戰場)에 나갈 때는 최소한 군마(軍馬)에게 먹이를 주고 말발굽을 손질해 주는 사람이 있어야 하기에 종자를 데리고 나갔을 것이다. 쇠의 약점은 녹이므로 갑옷도 매일 닦고 기름치고 조여야 했다. 그런데 철판을 연결한 가죽끈은 기름에 절면 쉽게 약해진다. 그러니 갑옷은 상당히 섬세하게 손질하고 관리해야 했을 텐데, 사람 갑옷의 몇 배가 되는 말갑옷까지 있었다.
중장기병의 단점은 기동력과 고비용이다. 말갑옷의 무게만 40킬로그램이 넘으며, 병사의 무장도 20킬로그램은 족히 된다. 그래서 중장기병은 속도와 이동거리에 제한을 받는다. 특히 도주하는 적군을 추격할 때 낮은 기동력은 안타까운 단점이 된다. 전투에서 적군에게 최대한의 손상을 가할 수 있는 때가 바로 이 때이기 때문이다. 적에게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입히면 전쟁은 그것으로 끝나지만 추격전의 기회를 놓치면 전력을 회복한 적군은 다시 공격해 올 것이다.
고비용과 전문성 때문에 중장기병은 병력 수에 제한을 받는다. 그래도 초원이라는 지리적 여건과 만주 일대의 풍부한 철광 덕분에 고구려를 비롯하여 북방의 기마민족은 중국에 비해 훨씬 많고 우수한 중장기병을 확보할 수 있었다.
기병의 중요한 역할은 수색·정찰·적진교란·적진돌파와 대형파괴, 추격이다. 그런데 중장기병은 느려서 돌파와 대형파괴 이외의 항목에서는 효용성이 떨어진다. 그래서 기병을 사용할 때는 중장기병과 장갑(裝甲)을 가볍게 한 경기병(輕騎兵)을 사용해야 효과적이다. 그런데 고구려군의 병종(兵種)에서 가장 애매모호한 부분이 이 경기병이다.
경기병이 있었던 것은 분명한데, 이들의 실체가 분명하지 않다. 벽화에는 갑옷을 전혀 입지 않고, 말에는 화살만 장착한 기병도 등장하는데, 과연 전투 때에도 이런 무장과 장비로 참전했는지는 의문이다.
장창(長槍)을 든 경기병은 대동강 하구의 남포시에 있는 약수리 벽화에 등장한다. 장창을 든 경기병이 중장기병대의 앞에서 행군하는데, 장창에 군기(軍旗)가 달려 있어 이들의 무장이 일반 무장 상태인지 의장대인지 파악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정통 기마민족의 후예로 수백년 후에 세계를 정복하는 몽골 제국 군대의 경우도 그들의 자랑인 경기병대는 갑옷을 전혀 입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들의 주 임무가 사격이었기 때문이다. 최고의 기동력과 놀라운 궁술(弓術) 능력으로 그들은 중장기병의 돌격을 엄호하고, 적진을 초토화했다. 특히 적진의 측면과 후면으로 돌아서 날리는 화살은 적진을 교란하고 대형을 허무는 데에는 가공할 효력이 있었다. 그렇다면 고구려군의 경기병대 역시 갑옷을 입지 않았을 가능성도 높다.
경기병의 약점은 백병전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중장기병이든 보병이든 이들을 따라잡을 수가 없고, 괜히 공격하다간 화살세례를 받는다. 이들에 대한 화살 공격도 별로 유용하지는 않다. 장갑은 없지만 대신 피할 수 있는 능력이 극대화되어 있다. 원거리에서 빠르게 움직이는 이들을 화살로 맞추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더욱이 원거리 사격은 곡사이며, 화살의 위력은 급격히 떨어진다.
경기병의 진정한 약점은 백병전 중에서도 일부 상황 즉 적진돌파와 충격작전을 감행할 수 없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 임무는 중장기병만이 감당할 수 있었다.
안악 3호분 벽화 좌측 상단과 하단에는 중장갑을 한 보병의 행렬이 있다. 갑옷은 기병과 마찬가지로 미늘갑옷인데, 소매가 반팔이고 상의만 입었다. 중장기병의 갑옷은 보병이 입기에는 너무 무겁기 때문이다. 그들은 한 사람의 몸을 겨우 가리는 가늘고 긴 방패와 갈고리 모양의 창인 예과(銳戈)로 무장했다. 보병 개개인의 전투력이 기병보다 떨어지고 기동력이 낮지만, 산악지형에 취약한 기병과는 달리 어떤 지형에서든 위력을 발휘한다.
중장보병(重裝步兵)의 밀집대형은 수비와 공격, 대보병전(對步兵戰)이나 대기병전(對騎兵戰) 어느 경우든 상당한 위력을 발휘한다. 잘 훈련된 밀집보병대는 중장기병도 함부로 돌파할 수 없다. 이들의 예과는 기병을 마상(馬上)에서 떨어뜨리는 데 매우 효과적이다.
기병과 달리 보병은 무장과 무기의 종류가 다양하며 한 사람이 오직 한 가지 무기만 들었다. 그것은 갑옷과 무기가 부족하며, 걸어다녀야 하는 보병의 특성상 한 사람이 여러 가지 무기를 착용하기가 곤란했던 탓도 있겠지만, 그만큼 보병의 역할이 세분화·전문화되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행렬도를 보면 행렬의 바깝 부분은 중장보병과 기병이 서고 안쪽과 후미에는 경보병과 경기병대가 선다. 이를 전투대형으로 즉 횡대로 환원하면 경보병(輕步兵)은 중장보병의 뒷선에 배치한다는 뜻이 되겠다.
경보병대의 주력은 도끼를 멘 도부수(刀斧手)로서 갑옷을 전혀 걸치지 않았는데, 전투력과 신분이 낮다는 증거다. 그들은 길을 내거나 목책 혹은 녹각과 같은 방어기구를 설치할 때, 공성구(攻城具)를 만드는 사역(私役)에 동원된다. 그러나 이들의 무기인 무거운 도끼는 내려치는 힘이 매우 강해 투구를 쪼개고 미늘갑옷을 찢는 데 매우 효과적이다. 이들은 중장보병의 이선에 서 있다가 갈고리 창에 걸려 넘어진 기병이나 부상으로 넘어진 중장보병을 공격했을 것이다.
어깨에 활을 메고, 허리에 전통(箭桶)을 찬 병사들은 바로 궁수(弓手)다. 동양에서 가장 유명했던 활은 동이족(東夷族)의 비멸병기 맥궁(貊弓)이었다. 기병용은 보통 80센티미터, 보병용은 120~127센티미터 정도였는데, 이 활은 작아서 다루기가 편리하며, 크기에 비해서 위력이 대단하다. 위력은 사수(射手)의 힘에 따라 큰 차이가 나지만 가까운 거리에서는 갑옷도 궤뚫는다. 고구려의 용장 고노자(高奴子)가 293년 신성(新城)에서 모용외(慕容廆)의 군대를 격퇴할 때, 화살 한 발로 적병과 군마와 안장을 함께 궤뚫었다고 한다.
궁수는 공격 때는 아군을 엄호하고, 수비 때는 돌격해 오는 적군을 공격한다. 특히 쳐들어오는 적군의 중장기병이나 보병을 저지하는 데는 궁수의 역할이 절대적이다. 적군이 원거리에 있을 때는 진형의 앞에 나가서 혹은 중장보병의 엄호를 받으면서 사격하고 적군이 접근하면 이선으로 후퇴하면서 사격한다.
공격군도 엄호사격을 받으면서 전진해 오므로 사격전에서 궁수를 보호하기 위해 이들에게도 갑옷을 입혔다. 단 사격을 해야 하므로 필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이들의 갑옷은 반팔인 중장보병과 달리 팔이 아주 없다. 투구도 쓰지 않았는데, 이는 머리를 자유롭게 해서 시야를 넓히기 위해서인 듯하다. 투구는 무거워서 고개를 잘 돌리지 못하게 되고 시야도 가려 좌우의 시야를 좁히는 단점이 있기 때문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