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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5월 20일 부활 제6주간 토요일
<아버지께서는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믿었기 때문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23ㄴ-2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3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24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25 나는 지금까지 너희에게 이런 것들을 비유로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더 이상 너희에게 비유로 이야기하지 않고
아버지에 관하여 드러내 놓고 너희에게 알려 줄 때가 온다.
26 그날에 너희는 내 이름으로 청할 것이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청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27 바로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28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
자장가 '달강 달강'
나는 어려서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 그 당시에 어른들은 사랑이라는 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들처럼 느껴졌습니다. 지금처럼 하트를 그려가면서 사랑한다고 자식들에게 그 감정을 표현하는 부모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내 기억 속에 어머니는 언제나 등잔불을 켜 놓고 바느질을 하시곤 하셨습니다. 바느질 솜씨가 유난히 좋은 어머니의 솜씨를 빌리려는 사람들이 자주 바느질감을 할머니에게 부탁하시면, 어머니는 하루 종일 일하시고 지친 몸으로 등잔불을 켜고 밤새워 바느질을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도시에서 사시면서 집에 오시지 않는 밤마다 어머니는 바느질로 그리움을 잠재우셨습니다.
내가 심장병으로 심하게 앓고 죽을 뻔 하다가 살아난 다음에 어머니는 바느질을 하시며 당신의 무릎에 아들인 나를 뉘시고, 자장가를 부르시며 많이 눈물 지으셨습니다. 지금은 모두 잊어버리셨을 법한 그 자장가는 들릴 듯 말 듯한 ‘달강 달강’ 노래였습니다. 어머니는 그렇게 노래를 부르시고 무릎을 흔들어 요람처럼 나를 재우셨습니다.
“달강 달강 외삼촌 네 갔다가 밤 한 되를 주어서 살강 밑에 감췄더니,
새앙 쥐가 들랑 달랑 다 파먹고 밤 한 톨이 남았네..
옹솥에다 삶을까? 가마솥에 삶을까, 냄비다 삶을까?”
(무릎에 누워있는 아들을 보시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사랑스런 아들을 쳐다보시며 물으시는 것입니다.)
“가마솥에 삶아,”
(아들은 기다리고 있다는 듯이 옹솥과 가마솥과 냄비를 번갈아 가면서 대답합니다.)
“그래 가마솥에 삶아서, 조랭이로 건질까?
대 꼭지로 건질까? 숱가락으로 건질까?”
“조랭이로 건져,”
(조랭이는 쌀을 일을 때 쓰는‘조리’의 충청도 사투리입니다.)
“그렇지 조랭이로 건져서, 겉껍질은 벗겨서 누구 줄까?”
“소 줘,”
“그래, 겉껍질은 벗겨서 소 주고, 속껍질은 벗겨서 누구 줄까?”
“돼지 줘,”
“그래, 속껍질은 벗겨서 돼지 주자, 그러면 알맹이는 누구랑 먹을까?”
“할머니랑, 아버지랑, 엄마랑, 동생이랑, 나랑 먹지”
“그래, 할머니랑, 아버지랑, 엄마랑, 우리 애기랑 같이 먹자.”
어머니는 노래가 끝나면 영락없이 나를 꼭 안아 주시며 최고의 사랑을 표현하셨습니다. 그러다가 잠든 내가 기척이 없거나 맞장구를 쳐 주지 않으면 홀로 대답 없는 달강 노래를 고요히 부르시다 나의 얼굴에 간혹 뜨거운 눈물을 떨구실 때면 철없는 어린 나였지만 차마 눈을 뜨고 울고 계신 어머니를 바라볼 수 없었습니다.
그 후 내가 결혼을 한 후에도 어릴 때 어머니가 들려주신 달강 노래는 삶의 시름을 잊게 해주는 가슴으로 부르는 노래가 되었고 노래의 깊은 의미를 늘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오랜만에 친정에 가셨는데, 바짝 여윈 어머니를 보시고, 외할아버지가 아무런 말씀도 없이 뒷산에 가셔서 밤을 털어서 싸주신 것입니다. 부엌에 있는 찬장(반찬을 넣어두는 장) 밑에 몰래 감춰 두었는데 쥐들이 들락거리며, 파먹기도 하고, 부엌에 들락거리는 사람들이 밤을 다 먹어버린 것입니다. 어쩌다 먹으려고 뒤져보니 밤 한 톨이 남아 있다는 말입니다. 그 한 톨을 어떻게 먹을 것이냐 하는 것이 어머니의 절절한 사랑 노래입니다.
지금까지‘어머니에게 '사랑한다.’고 말 한마디 하지 못한 안타까운 마음을 평생 가슴에 품고 살았습니다. 이제 팔십이 가깝도록 그 달강 노래의 자장가가 세월이 갈수록 가슴 속에서 잊어지지 않고 절절히 흐르는 그리움의 노래가 되어 사랑에 안타까운 마음의 노래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말도 그 당시에는 하느님을 흠숭(欽崇)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사랑’한다는 말만 들어도 이상하게 설레고 감히 그 말을 쑥스러워서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이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가끔 나는 ‘달강 달강 자장가’ 노래처럼 ‘사랑은 맞장구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스승의 날에 스승이 ‘존경 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83%에 이르고 있다는 보도가 떠오르고 있습니다. 존경받지 못한다는 것은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교권이 세워지지 않고 있다는 슬픈 현실입니다. 교육현장이 망해져 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선생님도 사랑으로 맞장구를 쳐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신바람이 나서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사랑하면 맞장구를 치듯 주님의 말을 잘 지킬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맞장구를 치듯 주님의 말씀을 잘 들으면 주님께서도, 하느님 아버지께서 그 사람을 사랑하시고, 부족한 모든 것을 성령을 통해서 알려주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맞장구를 칠 줄 모르는 사람은 주님을 사랑할 줄 모르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진정으로 내 이웃을 사랑한다면 이웃의 사랑에 당연히 응답할 것이니 곧 사랑으로 응답하는 것입니다. 내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사랑하는 이웃에게 다가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 맞장구를 치는 것이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소명에 응답하면서 그렇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정녕 사랑은 우리 서로에게 맞장구를 치는 것입니다.
<아폴로는 성경을 바탕으로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논증하였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8,23-28
바오로는 안티오키아에서 23 얼마 동안 지낸 뒤 다시 길을 떠나, 갈라티아 지방과 프리기아를 차례로 거쳐 가면서
모든 제자들의 힘을 북돋아 주었다.
24 한편 아폴로라는 어떤 유다인이 에페소에 도착하였는데,
그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달변가이며 성경에 정통한 사람이었다.
25 이미 주님의 길을 배워 알고 있던 그는 예수님에 관한 일들을 열정을 가지고 이야기하며 정확히 가르쳤다.
그러나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다.
26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설교하기 시작하였는데, 프리스킬라와 아퀼라가 그의 말을 듣고 데리고 가서
그에게 하느님의 길을 더 정확히 설명해 주었다.
27 그 뒤에 아폴로가 아카이아로 건너가고 싶어 하자, 형제들이 그를 격려하며,
그곳의 제자들에게 그를 영접해 달라는 편지를 써 보냈다. 아폴로는 그곳에 이르러,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미 신자가 된 이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28 그가 성경을 바탕으로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논증하면서,
공공연히 그리고 확고히 유다인들을 논박하였기 때문이다.
축일5월 20일 성 베르나르디노 (Bernardino)
신분 : 신학자, 설교가
활동 지역 : 시에나(Siena)
활동 연도 : 1380-1444년
같은 이름 : 베르나르디누스, 베르나르딘
성 베르나르디누스(Bernardinus, 또는 베르나르디노)는 1380년 9월 8일 이탈리아 시에나 근방 마사 마리티마(Massa Marittima)에서 정치가였던 아버지 톨로 델리 알비체스키(Tollo degli Albizzeschi)와 어머니 네라 델리 아베두티(Nera degli Avveduti)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3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다시 3년 뒤 아버지마저 여의고 고아가 되어 친척에게 맡겨져 양육되었다. 1391부터 1397년까지 시에나에서 인문학과 철학을 공부한 후 그곳 대학에서 3년 간 교회법을 배운 그는 라틴어 고전뿐만 아니라 성경과 신학에도 심취하였고 신심의 실천에도 열의를 보였다.
1400년 흑사병으로 온 나라가 공포의 도가니에 빠졌을 때, 그는 약 4개월 동안 시에나의 산타 마리아 델라 스칼라(Santa Maria della Scala) 병원에서 흑사병 환자들을 돌보다가 병에 걸리기도 하였다. 1402년 작은 형제회에 입회한 그는 이듬해 9월 8일 콜룸바요 수도원에서 허원을 하였고, 1404년에 사제품을 받고 다음해에 세지아노(Seggiano)에서 설교를 시작한 이래 죽기까지 설교 활동을 계속하였다.
성 베르나르디누스는 1408년부터 다음해까지 페라라(Ferrara)에서, 1410년에는 시에나와 파비아(Pavia)에서 설교했는데, 이 시기에 그는 예수 성명에 대한 설교를 시작함으로써 롬바르디아(Lombardia) 지역의 복음화에 기여하였다. 1417년부터 그는 밀라노(Milano)에서 대중 설교가로서 활동하면서 뛰어난 웅변술과 정열적인 설교로 청중들을 사로잡았다. 그는 걸어서 이탈리아 중부와 북부 지방을 순회하며 정열적으로 설교하였는데, 그의 주된 설교 주제는 예수 성명에 대한 공경과 참회와 사랑의 실천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도박, 고리대금업, 마술, 미신 등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한편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의 정치적 권력 투쟁을 그 시대의 근본적인 악으로 비판하였다.
그는 특별히 예수 성명의 신심을 전파했는데, 이 신심은 교회에서 새로운 것은 아니었으나 사람들이 그 신심의 깊은 신학적 기초를 깨닫도록 그리스어 예수(ΙΗΣΟΥΣ)의 첫 세 글자를 로마자로 표시한 ‘IHS’를 고안하였다. 그가 만들어 낸 이 모노그람마(Monogramma)는 ‘이 표징 안에서’(in hoc signo),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 표징으로’ 혹은 ‘인간의 구원자 예수’(Jesus hominum Salvator)라는 뜻이다. 그는 빛나는 태양의 중앙에 이 글자를 새긴 문장을 사용하여 설교를 마무리할 때마다 공경 예절을 행하였다. 그는 이 문장으로 어떤 미신적인 상징이나 특정 파벌의 훈장 등을 대체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는 예수의 성명을 성경의 요약이요 일치의 상징으로 생각하였다. 그 후 성 베르나르디누스와 그의 제자들의 사도직을 통해서 예수 성명에 대한 공경은 널리 확산되었고, 이 문장은 교회와 가정, 공적인 건물 등에도 사용되게 되었다.
반면에 당시의 일부 인문주의자들과 신학자들은 이러한 그의 활동을 불신하고, 이 기도를 위험한 혁신으로 간주하였다. 그래서 1424년 볼로냐(Bologna) 대학에서 예수 성명 신심에 대한 공식적인 반발이 시작되었다. 무려 8년 동안 그는 교도권과 신학계로부터 숱한 고발과 논쟁의 대상이 되었지만 1432년 1월 7일 교황 에우게니우스 4세(Eugenius IV)의 칙서 “아포스톨리케 세디스”(Apostolicae Sedis)를 통해 논쟁의 종지부를 찍고 그의 활동이 정식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는 마르티누스 5세(Martinus V) 교황으로부터 시에나의 주교로 임명받았지만 이를 거절하고 설교활동에 전념하였다. 또한 1430년부터 12년 동안 프란치스코회 엄률회의 총대리로 활동하면서 프란치스코회의 보다 엄격한 규칙을 회복하자는 수도회 내부의 개혁 운동에서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그리고 1439년에는 피렌체(Firenze) 공의회에 참석하여 그리스 정교회와의 일치를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1444년 고향에서 설교를 마친 후 그는 고령의 나이와 쇠약한 몸에도 불구하고 나폴리(Napoli) 왕국을 복음화하기 위해 출발하였으나, 아브르초(Abruzzo)의 라퀼라(L'Aquila) 부근에서 열병에 걸려 라퀼라의 작은 형제회 수도원에 머무르다가 그곳에서 5월 20일 사망하여 그곳 성당에 묻혔다. 그의 문장은 IHS가 새겨진 평판(平板) 혹은 태양이고, 광고업자들의 수호성인이다. 그는 1450년 5월 24일 교황 니콜라우스 5세(Nicolaus V)에 의해 시성되었다.
오늘 축일을 맞은 베르나르디노 (Bernardino) 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야고보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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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야고보 아저씨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에드몬드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