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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대님의 의견을 듣고 있자면 이게 좀 정리가 안되는 면이 있다.
그리고 스데반의 순교의 사건이나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비유라고 하는데 이게 비유라는 단어의 특성상..
역사적 사건을 부정하는 그런 말로 들려 역사적 사건을 부정하면서 그 영적 의의를 찾는 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말인지 ..
그래서 논란이 있지만 기계(AI)에게 기계의 답변을 좀 물어 보았다.
그리고 칼 바르트라는 신학자가 나와 한번 검색을 해 보았다.
어떤 면에서 이 신학자의 주장과 무한대님의 의견 관념이 유사하다는 느낌이 드는데 ..
이러한 의견에 대해 좀 알아볼 필요는 있는것 같다..
어찌보면 상당히 화려한 것 같고 성경의 본체를 돋보이게 하는 면도 있지만 조심해야 할 구멍들이 많아 보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십자가의 사건과 스데반의 순교의 사건을 비유라고 한다면 성경의 역사적 사실임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보는가? 이런것을 언어 파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예수의 십자가의 사건과 스데반의 순교의 사건을 비유라고 한다면, 성경의 역사적 사실임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비유는 현실에 존재하는 사건이나 대상을 다른 의미로 해석하기 위해 사용되는 문학적 표현 방법입니다. 따라서 예수의 십자가의 사건과 스데반의 순교의 사건을 비유라고 한다면, 그것들이 현실에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라는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그것들의 의미를 다른 차원으로 해석한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의 십자가의 사건을 비유라고 해석하는 한 가지 방법은, 그것을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희생한 사건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 해석에 따르면, 예수의 십자가의 사건은 현실에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지만, 그 의미는 인간의 구원이라는 영적 차원으로 해석됩니다.
스데반의 순교의 사건을 비유라고 해석하는 한 가지 방법은, 그것을 진리를 위해 죽음을 마다하지 않는 순교의 정신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 해석에 따르면, 스데반의 순교의 사건은 현실에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지만, 그 의미는 진리를 위해 헌신하는 삶의 자세라는 영적 차원으로 해석됩니다.
이러한 해석은 성경의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더 풍부하고 깊이 있게 해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해석을 언어 파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물론, 예수의 십자가의 사건과 스데반의 순교의 사건을 비유라고 해석하는 것은 성경의 본래 의미를 왜곡하는 것이라는 비판도 있습니다. 성경은 역사적 사실과 신앙적 의미를 함께 담고 있는 문헌이기 때문에, 그 의미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의 십자가의 사건과 스데반의 순교의 사건을 비유라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한지 여부는 각자의 신앙과 해석의 수준에 따라 결정될 수 있는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역사적 사실자체가 충분한 의미가 있기에 그것의 영적차원의 해석은 잘못하면 사실자체의 의미를 퇴색시킬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습니다. 역사적 사실 자체가 충분한 의미가 있기에 그것의 영적 차원의 해석은 잘못하면 사실 자체의 의미를 퇴색시킬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의 십자가의 사건을 비유라고 해석하는 과정에서, 그 사건이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사실이라는 사실이 간과된다면, 그 사건의 의미는 크게 퇴색될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의 사건은 단순히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희생한 사건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사건으로서, 그 사건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의 십자가의 사건과 스데반의 순교의 사건을 비유라고 해석할 때에는, 그 사건이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사실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사건의 역사적 사실은 그 사건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또한, 영적 차원의 해석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이해 없이 영적 차원의 해석을 한다면, 그 해석은 무의미하거나 오히려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결국, 예수의 십자가의 사건과 스데반의 순교의 사건을 비유라고 해석하는 것은 신중을 기해야 할 일입니다. 그 사건의 역사적 사실과 의미를 충분히 이해한 후에, 그에 기초하여 영적 차원의 해석을 시도해야 합니다.
이러한 영적 차원의 해석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신학적 사조가 있었다면 어떤 것들이 있었지?
영적 차원의 해석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신학적 사조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알레고리즘은 성경의 문자적 의미를 무시하고, 그 의미를 다른 차원으로 해석하는 방법입니다. 알레고리즘은 기독교 초기부터 존재했던 신학적 해석 방법으로, 중세 시대에 크게 발전했습니다. 알레고리즘을 통해 성경의 의미를 더 풍부하고 깊이 있게 해석할 수 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영적 해석은 성경의 문자적 의미를 존중하면서도, 그 의미를 영적 차원으로 해석하는 방법입니다. 영적 해석은 16세기 종교 개혁 이후에 발전한 신학적 해석 방법으로, 성경의 역사적 사실과 신앙적 의미를 함께 고려하는 것을 강조합니다. 영적 해석을 통해 성경의 의미를 개인의 삶에 적용할 수 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신비주의는 성경의 의미를 단순히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신학적 사조입니다. 신비주의는 성경의 의미를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신비주의를 통해 성경의 의미를 더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이러한 신학적 사조들은 성경의 의미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 영적 차원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들은 성경의 문자적 의미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더 풍부하고 깊이 있게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영적 차원의 해석을 제시합니다.
현대에 알레고리즘의 영향을 받은 신학자나 철학자 예를 들어 볼래?
네, 현대에 알레고리즘의 영향을 받은 신학자나 철학자로는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칼 바르트는 알레고리즘을 성경의 의미를 해석하는 하나의 유효한 방법으로 인정했습니다. 바르트는 성경의 문자적 의미를 부정하지 않았지만, 그 의미가 단순히 역사적 사실에 국한되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바르트는 성경의 의미는 역사적 사실과 함께 영적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의미를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이라고 하는데 아래 발췌한 자료에 의하면 바르트는 물질 창조, 그리스도의 신성을 불신하였다는 이야기를 보면 이 AI의 답변을 좀.... 부정확 하지는 않은지.. 한번 생각해 볼 수도 있지만.. 일단 일반적인 지식과 논리적 답변의 예시를 얻기 위해서...)
폴 틸리히는 알레고리즘을 사용하여 성경의 의미를 현대인들에게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려고 했습니다. 틸리히는 성경의 이야기와 상징을 현대인의 삶에 적용하여 그 의미를 새롭게 해석했습니다.
미하일 바흐친은 알레고리즘을 사용하여 성경의 의미를 사회적, 문화적 맥락에서 해석하려고 했습니다. 바흐친은 성경의 이야기와 상징이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에 국한되지 않고, 사회적, 문화적 차원에서도 의미를 가진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신학자나 철학자들은 알레고리즘을 사용하여 성경의 의미를 더 풍부하고 깊이 있게 이해하고, 현대인들에게 성경의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또한, 현대에는 알레고리즘을 사용하여 성경의 의미를 해석하는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여성주의 신학자들은 알레고리즘을 사용하여 성경의 남성 중심적인 관점을 비판하고, 여성의 관점에서 성경을 해석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또한, 생태신학자들은 알레고리즘을 사용하여 성경의 창조 이야기에서 자연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존중의 메시지를 발견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도는 성경의 의미를 보다 다양하고 포괄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노력으로 볼 수 있습니다.
칼 바르트는 어디 사람이지?
칼 바르트는 스위스 출신의 신학자입니다. 그는 1886년 5월 10일 스위스 바젤에서 태어났습니다. 바르트는 1904년 바젤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1908년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바르트는 1911년부터 바젤 대학교에서 신학 교수로 재직했습니다. 그는 1921년부터 1925년까지 독일 본 대학교에서 신학 교수로 재직하기도 했습니다. 바르트는 1968년 12월 20일 스위스 바젤에서 사망했습니다.
바르트는 20세기 신학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입니다. 그는 신학적 실존주의의 대표적인 인물로, 하나님을 인간의 경험을 통해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바르트는 하나님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초월적인 존재라고 주장하면서, 인간은 하나님 앞에 겸손히 서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바르트의 신학은 현대 신학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의 신학은 신학적 실존주의, 해석학적 신학, 정치신학 등 다양한 신학적 사조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바르트는 스위스 바젤 출신이기 때문에, 스위스 사람이 맞습니다.
다른 답변
칼 바르트는 스위스 취리히 출신입니다. 1886년 5월 10일에 태어나 1968년 12월 10일에 사망했습니다. 그는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바르트는 스위스 개혁교회에서 목회자로 활동하면서, 성경의 의미를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은 인간의 이성을 초월한 초월적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이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신앙의 행위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바르트의 이러한 주장은 신학계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고, "신정론의 위기"로 이어졌습니다. 신정론은 하나님은 선하고 전능한 존재이기 때문에, 모든 악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라고 주장하는 신학 사조입니다. 바르트는 신정론이 하나님을 악의 원인으로 보는 것이라고 비판했습니다.
바르트는 하나님을 초월적 존재로 이해하면서도, 하나님은 인간과 관계를 맺으시는 존재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인간과 관계를 맺으셨다고 주장했습니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고, 인간과 화해하셨다고 주장했습니다.
바르트의 신학은 현대 신학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의 신학은 성경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공했습니다.
교묘한 언어 파괴의 예는 무엇이 있을까? 스데반의 사건과 예수님의 십자가 상의 돌아가심에 대하여 비유라 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그 사건들의 의미를 찾는 넓은 의미의 언어유희, 언어파괴 아닐까?
교묘한 언어 파괴의 예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단어의 의미를 미묘하게 왜곡하는 행위 : 예를 들어, "진실"을 "진짜"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는 행위는 단어의 의미를 미묘하게 왜곡하는 행위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언어의 의미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의사소통의 어려움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문법의 규칙을 무시하는 행위 : 예를 들어, "나는 배고파요"를 "배고파가요"라고 사용하는 행위는 문법의 규칙을 무시하는 행위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언어의 기능을 저해하고, 의사소통의 어려움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단어를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행위 : 예를 들어, "개이득"이나 "뿜었다"와 같은 새로운 단어를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행위는 새로운 단어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사용하는 행위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언어의 다양성과 풍요로움을 감소시키고, 의사소통의 어려움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스데반의 사건과 예수님의 십자가 상의 돌아가심에 대하여 비유라 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그 사건들의 의미를 찾는 행위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언어의 의미를 왜곡하거나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언어 파괴의 한 형태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가 언어 파괴로 볼 수 있는지 여부는 그 행위의 의도와 행위의 결과에 따라 판단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러한 행위가 단순히 언어 유희를 위한 행위라면, 언어 파괴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가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거나,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들기 위한 행위라면, 언어 파괴로 볼 수 있습니다.
(언어적 관점에서 언어 파괴에 대해 물었는데 언어 파괴를 정의하는 데 있어 그 동기가 어떠하냐에 따라 언어 파괴의 범주에 속하는 여부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은 ... 좀 더 자료를 조사해 볼 수 있겠지만.. 여기까지..)
예를 들어, 스데반의 사건을 "진리를 위해 죽음을 마다하지 않는 순교의 정신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해석하는 것은 언어 유희의 한 형태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해석은 스데반의 사건의 의미를 새로운 관점에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사건을 단순히 "진리라는 비유적 대상을 위해 희생된 사건"으로 해석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행위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해석은 스데반의 사건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습니다.
결국, 스데반의 사건과 예수님의 십자가 상의 돌아가심에 대하여 비유라 하는 것이 언어 파괴로 볼 수 있는지 여부는 그 행위의 의도와 행위의 결과에 따라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칼바르트의 신학
http://www.voamonline.com/ref-1/010_KarlBarth/
발췌
바르트가 쓴 로마서 주석이 유럽인들에게는 다시없는 복음으로 비쳐졌으며, 자유주의 신학을 폭파한 폭탄으로 여겨졌다. 문제는 바르트가 자유주의 신학을 공격한 것으로 그치지 않고, 같은 강도로 정통신학도 공격하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바르트가 무엇을 말하는지, 사람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러면, 바르트가 정통주의 신학으로 돌아왔는가? 아니다. 바르트는 자유주의 신학이 불신했던 성경무오와, 하나님의 물질창조와, 그리스도 신성과, 내세와 영생을 끝까지 불신하였으며, 별세까지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인류를 전쟁과 파멸에서 구하고자 혼신을 다했으며, 인간에게서 실존(참 인간)을 회복하려고, 성서를 교재로 하여 노력한 실존주의 신학자였다.
2) 바르트가 자유주의 신학을 공격한 이유
바르트가 자유주의 신학을 공격한 이유는 무엇인가? 바르트가 자유주의 신학을 공격한 것은, 자유주의 신학의 교리(진화론과 유물론)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일원론적(一元論的)인 우주관, 인간관, 구원관을 공격한 것이 아니다. 인간을 선하게 보아온 인간낙관론을 공격한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간의 야수성이 들어났으므로, 바르트의 스승들(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주장했던 인간의 성선설과 낙관론을 공격한 것이다. 바르트가 젊은 청년에 불과했으나, 갑자기 위대한 신학자로 각광을 받은 것은, 인간의 낙관론을 공격하고, 타락한 인성을 회복하여 윤리와 도덕을 회복하자고 외친 첫 번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전쟁이 1918년에 끝나고, 1919년에 로마서가 출판되었으니, 이 책이 제1차 세계대전으로 중병을 앓은 현대문명에 내려진 첫 번째 처방전이었기 때문에, 온 세계는 바르트가 쓴 로마서 주석을 현대문명의 치유책으로 대환영하였고, 바르트는 일시에 유럽과 세계의 영웅이 되었다.
첫댓글 성경은 역사가 아니라 모두 비유와 신화입니다.
스테반이 죽을때 영혼을 원어로 찾아보셨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은 사건은 실제가 아니라 제자들이 구약의 내용을 깨닫게 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기 위해 기록한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구약의 모든 내용이 들어있지요. 천지창조도 사람을 지으심도 칠일창조와 안식일도 들어있습니다.
눅24:27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구약의 모든 내용이 예수에 관한 내용이라고 하셨지요. 성경은 지구의 역사가 아니라 예수의 역사입니다. 신약도 지상교회역사가 아니라 예수의 역사서입니다. 말씀이 자신안에 전해져야지요.
님이 선교한다고 제자를 따라서 하면 우상숭배가 되어버립니다.
누가복음 24:45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예수가 십자가에서 지신걸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면 뭐하러 십자가에서 다 끝난 마당에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셨겠습니까? 그리고 성경을 깨닫게 하신건 성경이 지구의 역사가 아니라는 증거 아닌가요?
성경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믿음의 근간이 없어야 할텐데 말로는 그 의미를 따지는게..
도대체... 이게 공식이 성립이 안되는데...
0 × N = 0인데..
실제하지도 않았던 비유와 신화를 근거로 뭐하러 가치를 논하는지...
성경은 모두 내 안에 하나님의 나라를 창조하는 말씀 자체만으로 그보다 더 큰 가치가 있을까요?
이 세상적 가치관과 성경을 보는 가치관이 같다면 성경은 예수와 관련이 없는 책일뿐입니다. 말씀이 님의 생각과 마음을 파괴해 버랴야 가치관이 반대로 바뀝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고린도전서 15:19
실재적 천국(마음의 천국 말고)을 믿지 못하게 되면 이건 고상한 현세용 종교의 탈을 쓴 자기위로 일 수 있지 않을까요?
예수님의 천국에 대한 많은 말들이 마음의 천국이라고 수렴될 수도 있지만 보는 믿음의 차이에 따라 달리 보입니다.
무한대님은 그런 차원에서 보면 허망한 불신자
설탕발린 탕후루 신앙인듯 하네요.
창조와 예수님의 사건도 못 믿어진다니 이런 것들이 가공의 것들 소설이라고 생각한다니..
충분히 이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어지게 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믿는것을 그렇게 어렵게 생각하지 않고 맏고 있으며 현 시대의 나타나는 물질계와 사회변화 속에서 현실에 살아있는 계시록의 현상들을 읽어내고 있습니다.
스티븐잡스의 연설의 connect dots 처럼 지금의 사회 변화를 엮어 볼 믿음의 분석력을 가져도 이 성경적 예언의 실체화를 더 읽게 되리라 봅니다.
성경에서 이생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말하지 않습니다. 모두 말씀안이고 또한 내 안을 말하지요. 국어사전에서 찾듯 성경을 문자 그대로 읽으면 성경과 관련이 없게 됩니다. 성경은 자신 안에서 하늘의 언어로 재해석이 되어야지요.
반대로 한번 읽어 보십시요..
그래도 여전히 성경의 교훈이 죽지 않고 더 풍성히 살아 있음을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무한대님의 시야가 풍성해 보인다고 할 지 몰라도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의 신앙은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실체적 성경의 사건을 믿는 눈이 어떤이들에게는 본질적으로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이의 마음에는 그게 그렇게 어렵지도 않고 실체적 나타남을 머리로 읽고 한글자 한글자 읽듯이 분석까지 하고 있습니다.
저는 어렸을때도 창조론이 쉽게 믿어졌습니다.
논리적으로 볼때도 어떤 시스템이 완성되는데 지적 설계자가 만들었다고 믿는게 훨씬 설명이 간단하지 않습니까?
지금 백신 문제, 전 세계적 정치계의 연결성, 자연변화 등을 보시면 영의 세계와 물질계 모두가 함께 성경의 마지막 스토리를 함께 읽어 내려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것을 볼려면 아무래도... mbti가...??
도마와 같이 봐야만 하는 제자도 있었듯 잘 믿지 못 할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무한대님의 마음 안의 천국이 크다면 어떤 역사를 이루실지 모르겠습니다.
부활도 천국도 모두 현재입니다. 모두 내 마음안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잘 믿다가 들어가는 천국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셔도 의미가 틀리지는 않은데 천국도 있습니다.
이것을 믿지 못하시는 겁니다.
믿는것도 성격이고 재능이라 봅니다.
무한대님은 이런 관점에서는 바울의 경험처럼 극적인 계기가 있어야 할 듯 합니다.
추상적 관념은 많이 이해를 하는데 성경의 실체적실현에는 믿음(?)의 시야가 아직 상대적으로 많이 가리워진것 같습니다.
저도 35년동안 님이 믿는 하나님과 죽어서 들어가는 천국을 믿었지요. 그건 헛된 종교생활이었슴을 말씀을 깨닫고 알았지요.
성경을 문자 그대로 읽고 믿는 것은 자신 스스로 속고 있는겁니다. 자신이 만들어낸 하나님과 천국을 믿고 있는거지요.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지 않습니다 .
그렇게 믿다가 못 믿는 경우도 있군요..
어린아이의 마음을 잃으신것은 아닐까요..?
성경을 깨달으면 죄사함도 완전히 해결되어버리고 외로움도 사라져버립니다. 인생의 문제도 해결되지요.
@명탐정(조상민) 님은 평생 바알신만 믿다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인생 끝난다네.
@명탐정(조상민) 맞네 ~~~ㅋㅋ
@설아. 님의 하나님이 있다면 지금 구원해 주실텐데. 왜 못구해주실까? 즉고나서 구원해 주시나?
@명탐정(조상민) 니도 님처럼 살았으니 자알 알지요.
@명탐정(조상민) 무슨 도? ㅎㅎㅎ나도 성경을 읽다가 깨달은거지요. 성경을 문자 그ㅐ로 믿는 하나님은 자기가 만들어놓고 믿는 신입니다.
@명탐정(조상민) 난 불교처럼 도닦은적 없습니다. ㅎㅎㅎ
@명탐정(조상민) 성경은 불교처럼 도를 닦는다고 깨달아지는 말씀이 아니랍니다.
@명탐정(조상민) ㅎㅎㅎ 그렇게 도닦듯 깨달아서 성경을 깨달을수 있다면 아무나 구원받게요?
@명탐정(조상민) 좁은 길은 뭘까요? 1 님처럼 예수믿고 행하는길. 2 성경을 깨닫고 참된 진리가 되는 길
하나만 골라보셔.
@명탐정(조상민) 대한민국에서 성경을 깨달아 완전한 진리에 이른 사람은 10명정도이고 깨닫지 못한 종교인은 600만명정도. 성경말씀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하나님을 잘 섬기다 죽으면 천국에 들어간다는 교리.
@명탐정(조상민) 하나님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신앙생활하는 길은 어느 종교나 다 있죠. 기독교뿐만 아니라 이슬람교도 힌두교도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6
1과 2가 다른거라 하면 1 없이 2라는 말..
사람의 눈이 둘이듯 기독교는 입체적 신앙.. 이라고 봄..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로마서 1:21
관계적 종교..
여호와 하나님을 알려면 성경 전체를 깨달아야지요. 깨닫지 못하면 자신이 만든 산실령을 믿는겁니다. 그래서 여호와를 알라고 하셨지요.
여호와하나님은 말씀안에서만 만날수 있지요.
빙빙 돌려도 역사적 사실도 믿지 못하면서...
오히려 성경을 접하지 않은 타 종교인보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접근의 노력이 없었을 듯..할 만큼..
특이한(?)..
뭐 예수님 당시에도 부활을 믿지 못하는 이들이 있었으니..
바벨의 혼잡의 정신이 당분간은 필요할 수도 있겠죠...
건강한 불협화음이 아닐까 합니다용 ~
흐르는 시간이 말을 해 주겠죠..
요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생명은 2천년 전의 예수 육신일까요 말씀일까요?
육은 무익하다는데요.
그 말은 예수의 육을 믿으면 구원 받지 못한다는거지요.
그 말은 우리가 천국에 가면 천사와 같은 영으로 가니 그렇단 말이지 예수의 육만 따로 믿는다는 것이 아니지요.
우리의 육이 무익하단 말이지요..
이건 35년 이상 교회를 다니셨다는 분이 해석하는 방식이라기엔...
어느 종파에서 배우셨었는지요..?
이런건 어린 아이라도 알만한 ..??
성경은 모두 현재입니다. 천사같이 된다는건 내 마음이 말씀안에 사는것을 말씀하고 있지요. 님이 죽어서 천국에서 천사같이 된다? 그런거 없습니다. 천국도 없다는거지요. 말씀안과 내 안이 천국입니다.ㅎㅎㅎㅎ
내 종파요? 이 세상엔 없습니다.
과거 종파가 없었다면 35년간 독학 했다는 말이겠군요..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마태복음 22:30
하늘에 가서 결혼도 않고 천사와 같은 영적인 존재이다는 문맥을 못 읽으시겠습니까?
잘 못 끼운 단추들이 많이 있지 않나 모르겠군요..
신학을 하는 사람들 중에도 성경의 역사적 사실은 믿지 못하고 학문적으로 직업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많다던데..
아마도 그런 흐름의 유산들이 많이 있는 듯 합니다.
역사적 사실로서 성경의 사건들에 대해서 확인자료들을 좀 차분히 검토해 보셨습니까?
과거종파는 있었지요. 지금 종파가 없다는겁니다. 그런걸 알 필요가 있습니까?
바울이 유대교를 버렸듯이 님도 기독교를 버려야 합니다. 기독교나 유대교나 똑같아요. 말씀을 통해 예수가 오셔야지요. 바울은 지상교회를 세운 적이 없습니다. 편지도 비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