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헤드의 유기체철학 (10)
#. 화이트헤드 유기체철학을 이해하기 위해 거부되어야 할 널리 보급된 사고습성과 오류
<1> 사변철학(思辨哲學, speculative philosophy)에 대한 불신(不信)
<2> 명제의 충분한 표현으로서의 언어에 대한 신뢰
<3> 능력심리학(faculty-psychology)을 함의하고, 또 그것에 함의되어 있는 철학적 사고의 양식
<4> 주어-술어라는 표현양식
<5> 지각에 관한 감각주의적 학설(sensationalist doctrine)
<6> 공허한 현실태(vacuous actuality)의 학설
<7> 순수한 주관적 경험으로부터의 이론적 구성물로서의 객관적 세계에 대한 칸트적 학설
<8> 귀류법(歸謬法)에 의한 독단적 연역
<9> 논리적 모순이, 선행하는 오류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을 지적할 수 있다는 신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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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논리적 모순이, 선행하는 오류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을 지적할 수 있다는 신념
(1) 논리적 모순
‘모든 생물은 죽는다’와 ‘어떤 생물은 죽지 않는다’는 두 문장은 동시에 참일 수 없다. 이와 같이 동시에 참일 수 없는 두 문장을 모순관계(矛盾關係)라고 한다. 모순(矛盾, inconsistence)이라는 용어는 창 모(矛)자와 방패 순(盾)자의 합성어이다. 모순이라는 말은 “「창과 방패(防牌)」라는 뜻으로, 말이나 행동(行動)의 앞뒤가 서로 일치(一致)되지 아니함”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 말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전국시대(戰國時代) 초(楚)나라에 무기 상인(商人)이 있었다. 그는 시장으로 창과 방패를 팔러 나갔다. 상인(商人)은 가지고 온 방패를 들고 큰소리로 외쳤다. 「이 방패를 보십시오. 아주 견고하여 어떤 창이라도 막아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창을 들어올리며 외쳤다. 「여기 이 창을 보십시오. 이것의 예리함은 천하(天下) 일품, 어떤 방패라도 단번에 뚫어 버립니다.」 그러자 구경꾼 중에 어떤 사람이 말했다. 「그 예리하기 짝이 없는 창으로 그 견고하기 짝이 없는 방패를 찌르면 도대체 어찌 되는 거요?」 상인(商人)은 말문이 막혀 눈을 희번덕거리고 있다가 서둘러 달아나고 말았다.(naver 사전 인용)
만약에 위의 상인이 지니고 있던 창으로 자신의 방패를 뚫었다면, ‘방패는 어떤 창이라도 막아낼 수 있다고 말한 것’이 거짓이 된다. 그리고 창으로 방패를 뚫지 못했다면, ‘창은 어떤 방패라로 뚫을 수 있다고 말한 것’이 거짓이 된다. 이렇게 둘 중의 하나는 반드시 거짓이 되기 때문에, 둘 다 동시에 참일 수 없는 관계를 모순관계라고 한다.
‘모든 생물이 죽는다’라는 말이 참이라면 ‘어떤 생물은 죽지 않는다’는 말은 거짓이 된다. 그리고 ‘어떤 생물은 죽지 않는다’는 말이 참이라면 ‘모든 생물이 죽는다’라는 말은 거짓이 된다. 따라서 이 두 문장은 동시에 참일 수 없는 모순관계에 놓여 있다. 이렇게 두 문장 사이의 모순관계가 발생하는 논리적 모순은, 한 문장에서는 ‘~이다’고 한 것을 다른 문장에서는 ‘~이 아니다’고 말하는 데 기인한다.
논리적 문장을 명제(命題, proposition)라고 한다. 명제는 ‘~이다’와 ‘~이 아니다’로 표현할 수 있어서 진위(眞僞)가 분명하다. 명제는 근거명제와 주장명제로 이루어져 있다. 근거명제를 논리학에서는 전제명제라 하고, 주장명제를 결론명제라고 한다. 이때 명제라는 용어를 생략하고 전제(前提, premise) 와 결론(結論, conclusion)이라고도 불린다. 전제와 결론으로 묶은 명제들을 논증(論證, argument)이라고 한다.
‘모든 생물이 죽는다’를 전제로 하고 ‘어떤 생물은 죽지 않는다’를 결론으로 한다면, 논증형식은 갖추게 되지만 잘못된 논증인 오류(誤謬, error)가 된다. 오류가 되는 이유는, 결론에서 죽지 않는 ‘어떤 생물’도 전제에서 죽는 ‘모든 생물’의 부분이기 때문이다. 즉 ‘어떤 생물’에 대하여, 전제에서는 ‘죽는다’(죽는 것이다)라고 했고 결론에서는 ‘죽지 않는다’(죽는 것이 아니다)고 했기 때문이다.
결국 논리적 모순은 ‘~이다’를 ‘~이 아니다’로 했거나, 반대로 ‘~이 아니다’를 ‘~이다’로 했을 때 생긴다. 서양에서 전통논리학을 체계화시킨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논리학이 성립되기 위한 제1전제(第一前提)라고 하면서 세 가지를 제시했다. 그것은 ‘A는 A이다’로 표현되는 동일률(同一律), ‘A는 A가 아닌 것이 아니다’로 표현되는 모순율(矛盾律), ‘A와 A 아닌 것 사이에는 중간이 없다’로 표현되는 배중률(排中律)이다.
(2) 선행하는 오류
이 세 가지의 바탕에는 세상을 A와 A 아닌 것으로만 구분하는 이분법(二分法, dichotomy)이 놓여 있다. 이분법이 선행(先行, antecedent)되지 않으면 논리적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이 서양철학에서는 오랫동안 유지되어 왔었다. 여기서의 선행(先行)은 앞선 행위라는 의미가 아니라, 어떤 것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그에 앞서 다른 무엇이 미리 제시되어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여기서는 논리학의 제1전제인 세 가지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이분법이 미리 제시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A와 A 아닌 것이 확실히 분리되어 있어야, 동일률, 모순율, 배중률이 성립된다. 즉 ‘A는 A이다’, ‘A는 A가 아닌 것이 아니다’, ‘A와 A 아닌 것 사이에는 중간이 없다’가 성립된다. 만약에 ‘A와 A 아닌 것 사이에 중간이 있거나’ ‘A이면서 동시에 A 아닌 것이 있다’고 하면 논리학은 성립되지 않는다.
‘모든 생물은 죽는다’와 ‘어떤 생물은 죽지 않는다’는 두 명제가 모순관계에 있다는 것은 선행하는 이분법에 맞지 않는 오류에 기인한다. 한 명제에서 ‘A이다’고 한 것을 다른 명제에서 ‘A가 아니다’고 말하면, 두 명제는 동시에 참일 수 없다. 한 명제가 참이면 다른 명제는 반드시 거짓이 된다. 동일률, 모순율, 배중률이 성립되는 이분법적 사고에 맞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논리적 모순은 선행하는 이분법적 오류에 기인한다.
(3) 과도한 논리학적 신념
논리학은 이분법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그래야 진위(眞僞)를 분명히 구분할 수 있다. 진위를 분명히 구분할 수 있어야 진리를 추구할 수 있는 학문이 성립되기 때문에 논리학은 모든 학문의 기초가 된다. 그래서 논리학에 과도한 지위가 주어졌다. 화이트헤드는 이 문제를 ‘화이트헤드 유기체철학을 이해하기 위해 거부되어야 할 널리 보급된 사고 습성과 오류’ 9가지 중 마지막으로 제기했다.
‘논리적 모순이, 선행하는 오류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을 지적할 수 있다는 신념’이라는 제목으로 제기한 이번 항목은 화이트헤드 철학을 이해하는 데 있어 아주 중요하다. 논리적 모순이 선행하는 오류에 기인하여 발생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설명했었다. 그런데, 논리적 모순이 선행하는 오류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을 지적할 수 있다는 신념에 문제가 있다고 화이트헤드는 지적하고 있다.
‘논리적 모순이 선행하는 오류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을 지적할 수 있다는 신념’에서 ‘논리적 모순이 ⋯ 다른 어떤 것을 지적할 수 있다’는 말에서 ‘다른 어떤 것’은 무엇인가? 화이트헤드가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지는 않지만, 미루어 짐작해보면 다음과 같다. 논리적 모순은 선행하는 이분법에 근거한 오류이기 때문에 이분법을 넘어선 영역에 대해서는 적용되지 않는다.
그러면 이분법을 넘어선 영역은 어떤 영역인가? 화이트헤드에 의하면 실재(實在, reality)의 영역이다.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실재는 과정(過程, process)을 겪고 있다. 이것에 비해 이분법이 적용되는 논리적 영역은 과정을 겪지 않는다. 과정을 겪지 않기 때문에 ‘A는 A이다’라는 동일률이 성립된다. 과정을 겪게 되면 ‘A는 A가 아니다.’ 왜냐하면, ‘A는’이라고 말하는 순간 아무리 짧은 시간이지만,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벌써 ‘A가 아닌 것’으로 변하는 과정을 겪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사물을 볼 때, 시간이 흘러도 그 사물을 그 사물로 인식한다. 예를 들어 내가 가지고 있는 자동차가 10년 정도 되어서 여러 변화가 있었다 하더라도 여전히 그 자동차로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인식하고 있는 ‘나’도 60여 년이 지나서 많은 변화를 겪었지만, 여전히 ‘나’로 인식하고 있다. 화이트헤드는 이렇게 동일한 사물로 인식하는 것은 실재가 아니라 현상(現象, appearance)을 지각하는 것이다.
화이트헤드의 용어로 말하면 그 현상을 드러내는 영원한 대상(eternal object)이다. 영원한 대상은 불변(不變)이며, 부동(不動)이다. 그리고 이것은 사고 속에서만 포착되는 개념(개념, concept)이며, 논리학 영역이다. 이것에 비해 현상을 불러일으키는 실재는 과정을 겪으면서 변화하며, 유동(流動)이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현실적 존재자(現實的 存在者, actual entity)이며, 존재론적 영역이다. ‘자동차’와 ‘나’는 현실적 존재자들과 영원한 대상들이 결합되어 있는 결합체이며, 유기체(有機體, organic)이다.
논리학은 불변과 부동이며, 사고 속의 영역인데, 이 논리학을 변화와 유동이며, 현실적인 영역까지 지적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과도하게 영역을 넓힌 잘못된 신념이다. 화이트헤드는 이것을 ‘잘못 놓여진 구체성의 오류(fallacy of misplaced concreteness)’라고 말한다. 이것은 부동(不動)을 존재의 근원으로 본 오류이며, 사고 속에서만 가능한 것을 현실 속에서 구체적으로 가능한 실재로 본 오류이며, 이분법에 갇혀버린 좁은 존재론을 넘지 못한 오류이다.
〈이어지는 강의 예고〉
499회(2021.12.15.) : 미국의 자연주의 문학 (2), 나채근(영문학 박사/한국어교육학 박사 500회(2021.12.22.) : 인문학 통청아카데미 500회 기념 & 송년음악회, 설창환(중등음악교 과서 집필자/세비앙 앙상블 단장) 501회(2021.12.29.) : 화이트헤드의 유기체철학(10), 이태호(통청아카데미원장/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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