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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석연화백과 이응노화백은 18살의 나이차가 있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여러면에서 공통점이있습니다.
먼저 두분 모두 80세 이상 장수하면서 활발한 작품활동을 이어갔다는것과
청년기에 일제의 강제 점령시기를 경험 했다는것 그리고 6.25 전쟁을 겪었고
원석연 화백은 젊은 시절 미국 공보원을 통해 작업에 정착 할 수 있었고
이응노 화백은 홍익대학교등에서 활발히 활동 하였지만 이후 도불하여 프랑스에서 본격적인 작업을 펼치게 된점들입니다.
이응노화백 파리시절
젊은 원석연 화백의 미국 공보원 활동 시절
한국 초기 화가들 대부분이 그림 수학을 일본에서 하였던것은 이미 많이 알려진 사실이지만 두 작가 역시 초기 서양화 수업은
일본에서 시작 하게 됩니다.(이응노 화백은 도일전 이미 서예나 사군자에 능통하여 선전 입상경력도 있습니다.1924)
재미있는 부분은 두 작가의 일본 수학 시기가 엇비슷하게 겹친다는것입니다.
이응노 화백은 국내에서의 동양화 수련시기가 길어져 도일시기가 30대였고 원석연 화백은 집안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이미 10대에
도일하게 되는게 그 이유입니다. 또한 두 작가가 수학 했던 학교도 동일한데(당시 유학생들은 하나의 학교에만 적을 두지 않고 여러 학원등을 두루 섭렵하였을것이라 추측 됩니다.)
원석연 元錫淵 (1922-2003) 일본 가와바다(川端)에 미술학교 (1937~?)
이응노 李應魯 (1904-1989) 일본 가와바다(川端)에 미술학교 (1935~39)
두 작가가 최소 1년 정도는 전공학과는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같은 학교<가와바다(川端) 미술학교 1909~태평양 전쟁중 폐교>에 적을 두었을 것이고 아니라 해도 유학생의 특성상 서로 얼굴을 보거나 어느정도의 교류가 있었을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이 학교 출신인 한국 2세대 서양화가로는 박영선, 정현웅, 구본웅, 김인승, 김경승, 오지호화백등이 있습니다.
많은 나이차에도 불구 하고 비슷한 시기에 동경에서 공부하고 같은 역사적 사건들을 겪어 나갔을 두 작가는
작품의 측면에 있어서는 아주 많은 차이를 보입니다.
먼저 1950년대 두작가의 작품들 몇점을 보기로 합니다.
1957년 이응노
1950년대 원석연 화백 작품 크게보기(3점:출처-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
1958- http://www.mmca.go.kr/html/item/item_image.jsp?artwork_image=DP_06260.jpg
1955- http://www.mmca.go.kr/html/item/item_image.jsp?artwork_image=DP_06259.jpg
1955- http://www.mmca.go.kr/html/item/item_image.jsp?artwork_image=DP_06258.jpg
1958 원석연 석쇠와 생선
1950년대부터 이응노 작가는 전통적인 동양화외에도 채색화와 일부 실험적인 작업에 들어 갑니다.
전통적인 수묵 또는 채색이라는 동양화 고유의 물성을 고수 하면서도 전형적인 구도나 필법에 구애 받지 않는
자신만의 작풍에 이미 진입한시기였고 1960년대 전후하여 문자추상등 비구상 작업을 활발하게 펼치기 시작합니다.
이응노 작가의 이러한 작업은 꼴라쥬등의 작업으로 이어지며 프랑스에서 본격적인 추상세계가 펼쳐지기 시작 합니다.
반면에 원석연 작가는 시종일관 변함없는 연필화 작업을 구체화 시키고 세련됨을 추구하는 시기이기 입니다.
일부 작품은 일본풍의 냄새가 나는 작품들도 있지만(위의 참고 작품 2번째 - 06259jpg 참조) 대체로 소박하고 토속적이며
세밀한 분위기가 조금씩 고조되는 분위기를 보여 줍니다.
1957 원석연
1961 원석연
1959
1962
1960
애초에 동양화 작가인 이응노와 서양화(연필 드로잉)전공인 원석연 작가
두 사람을 작품 자체로 비교한다는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또한 두 작가의 작품성향이나 작품에 대한 태도, 작가관등이 워낙 극단적으로 다른 탓에
이러한 단순 비교는 더더욱 말이 되지 않는것이죠.
이응노 작가는 서예, 그림, 조각, 도예에 이르기까지 많은 쟝르를 다루며 시기별로 극명한 작업적 분류가 이루어 질 정도로
다양한 작품들을 오랜 시간에 걸쳐 정력적인 창작 활동에 전념했었던 작가이고 원석연 작가는 60년간 연필화외에 한눈을 팔지
않고 한우물만 파왔었던 우직한 성품의 작가였습니다.
제가 이글에서 말하고 싶은것은
예술가로서 동시대를 살았었던 두작가의 작품에 나타난 시대정신의 관찰 입니다.
작품에 꼭 시대정신이나 어떤 이즘이나 사상이 들어가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즉답을 내리기는 곤란하지만 저의 개인적인 생각으로 예술(을 포함한 모든 인간 활동의 부산물들)은
동시대를 살아간 인간들이 만들어 내는 사고 또는 행위의 결과물들 이라는 겁니다.
-때로는 선명한 이슈와 개념을 공유하며 극적인 예술양식을 만들어 갔던 작가군 들도 있었죠
한국의 민중미술이나 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존 하트필드를 비롯한 다다이스트들 또는 미래주의화파등등-
시대의 결과물은 당연히 그 시간들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고
그것들은 그 시간들의 기록물이자 역사의 좌표로 그 흔적들이 남을 겁니다.
그 흔적들은 표현한 사람의 사상이나 재주에 따라 여러 가지 다른 형태로 후세에 넘겨 지는데
이러한 여러가지 변형된 모습들의 지도들은 우리들에게 흘러간 고물이 아닌 소중한 자료로서의 가치도 중요할것이기에
한번 훑어 보고 지나가는것도 유익할듯 합니다.
두 작가의 시대정신을 살펴 보기전에 먼저 세가지 사건에 주목합니다.
6.25
6.25는 모든 분들이 아시는 것이고(얼마전 6.25는 북침이라고 외치던분도 있던데 이글에선 중요하지 않으니 패쓰~)
동백림('동베를린'의 당시 한국식 약자)사건은 1967년 독일거주 한인교포를 비롯 200여명이 기소 되었던 간첩단 사건 이었습니다.
동백림 사건으로 작곡가 윤이상씨를 비롯해서 이응노 작가(2년 반동안 투옥)등이 박정희 정권하 중앙정보부에서 많은 고문과 불법적 감금이 이루어 졌었습니다.새마을 운동은 1977년 부터 시작된 박정희 정권의 국가 재건정책중 하나로서 범국가적 관치운동을 통해 낙후된 농촌과 지역의 발전에 이바지한바가 큰 국민운동이였습니다.
본문에서는 원석연 작가의 개미 시리즈와 이응노 작가의 군상 시리즈를 예시하면서
두 작가의 시대관을 살펴 보겠습니다.
원석연 작가의 1956년 작품인<1950>이라는 작품입니다.
험한 바퀴자국과 벗겨진 한켤레의 고무신등을 통해 전쟁의 혼란과 아픔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개미떼들의 무리들은 한평생 일밖에는 할줄 모르는 힘없는 민초들이 전쟁이라는 큰 난리에 우왕좌왕 헤메이는
모습을 표현한것으로 보입니다. 수많은 개미 한마리 한마리를 그려내면서 원석연 작가는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요?
사라진 이웃 또는 난리통에 죽어간 친척을 생각하고 그리워하며 그들의 영혼들을 위한 제문을 쓰는듯한 마음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이러한 마음은 김환기 작가가 그의 작품 '어디서 무엇이되어 다시 만나랴'를 작업 할때 수많은 점들을 그려 넣을때와 비슷 했을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김환기 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1987년은 대한민국에 아주 커다란 의미가 있는 해입니다.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이 일어났었고 6월 민주화 운동과 6.29 선언이 있었던 해이자 대한 민국의 민주주의가 드디어 뿌리를 내리는
해였습니다. 이미 그 싹은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에서 트이기 시작 했지만 강력한 군부 정권의 탄압으로 무려 7년간이나 기나긴 숨 고르기를 해야만 했었습니다.
80년대 들어 많이 등장하는 이응노의 군상은 한눈에 보아도 민중의 힘이 느껴지는 역작입니다.
원석연 작가의 개미 군상들이 질서있고 체계적이지만 수동적인 힘 없는 민초의 생존성을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그려냈다면 이응노의 인간 군상들은 무질서하고 비구상적인 형태에 가깝지만 상징적이고 집단적인 힘이 느껴 집니다.
비슷해 보이는 두 작가의 작품들에게서 우리는 어떠한 상이점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이러한 차이점을 변별하기 위해 우선 두 작가의 작품이 출발하는 시점에서 부터 관심을 가져 볼까 합니다.
먼저 원석연 작가의 경우 개미 시리즈는 6.25 전쟁이후 부터 출발되었고 이응노작가의 군상 시리즈는 동백림 사건 후
재도불한 시점 이후에 나타났다는 점입니다.
원석연 작가의 경우 개미를 통해 보여 주려고 했던 것은 곤충학적 관심이나 세밀한 표현력의 극대화라기 보다는
(물론 그 점도 간과할 수는 없는 요소이긴 하지만) 민족 또는 한 사람 한사람의 개인을 나타내는 일종의 메타포일 것입니다.
부지런하지만 약해 빠지고 목표만을 위해 전진하는 개미의 특성을 우리 민족성에 비유하거나 은유하였다는 것이 저의 생각 입니다.
이러한 원석연 작가의 그림들은 우리 70년대의 시대 상황과 정말 우연적으로 맞아 떨어지는 상황을 맞이 합니다.
당시 새마을 운동으로 전 국가적인 재건 운동을 펼치던 박정희 정권에게 그의 이러한 그림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행위와 예술적으로 일치하는 하나의 표상이 될수도 있었기에 이응노 작가와는 사뭇 다른 입장에 서게 됩니다.
물론 원석연 작가가 박정희 대통령의 초상화나 생가를 그렸다고 해서 그를 친 유신정권 작가나 어용작가로 칭하려는 것은 아닙니다.(이응노 작가와의 시대상황 인식에 대한 대비를 하려다 보니 어쩔 수가 없어 안타까울 뿐입니다.)
원석연 작가는 한국에서의 60~70년대의 공포정치에 가까운 시절과 80년대의 격변기를
정권과의 별다른 충돌 없이 살아가지만 그의 개미 그림들은 1950년대부터 쉼 없이 그려나갑니다.
6.25 직후 그렸던 그의 개미 그림들이 세월이 지나갈수록 세련되어지고 형식화 되어가는 과정을 거치지만
개미 한마리 한마리안에 내재된 민초에 대한 작가의 애정은 그가 작업 할때 들어가는 공과 열정만큼이나 컸었을겁니다.
이응노 작가의 군상은 여러가지 의미로 해석 될 수 있겠지만 독재 정부에 짓눌린 조국의 국민들에게 바치는
예술가로서의 호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행했던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은 자유로운 영혼의 예술가에게 자유에 대한 목마름과 그를 위한 행동을 촉구했을 것이고
결국 그의 화선지위를 저항하고 환호 하고 열광하는 어머니 나라의 수많은 민중들로 빼곡히 채워 나가게 만들었습니다.
여전히 존재하던 그에 대한 감시와 조국에 들어 가지 못하는 한 맺힌 심정으로 그는 한사람 한사람의 친구, 가족들을
그려 나갔을 겁니다.
박정희 정권하에서의 독재에 대한 뼈아픈 경험은 멀리 타국에서 듣는 광주에서의 수많은 억울한 죽음과 군인들의 폭압에
이런식으로라도 항거하고 소리 질러야 했음을 우리는 이해하게 됩니다.
그의 89년작 군상이 화려해지고 즐거워 보이는 이유는 아마도 많은 희생을 치루었지만 그래도 작은 민주주의의 싹을 틔워낸
우리 자신에게 보내는 축하 메세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이응노 작가는 오랜기간 국가의 감시와 보이는 또는 보이지 않는 탄압을 받으며 그 역경을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현실정치에 간접적으로 반응하는 현실적 작품을 군상 시리즈로 발표하였던 반면에 원석연 작가는 민족동란인 6.25 전쟁을 통해 민족에 대한 근본적인 애정과 관심을 끊임없이 메타포적인 기법으로 한평생 펼쳐 보인 작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별세한 두분의 원로 작가에 대한 사상적 또는 이데올로기적 재평가나 파헤침은 아무런 득이 되지도 않거니와
그들이 살았었던 시간의 어떠한 사건들과 상황들이 직간접으로 작가들의 작품활동과 그 결과물에 영향을 주었었는지 정도는
알아 보는것이 그들 작품을 대하는 우리들의 최소한의 예의이자 도리라는 생각은 해보게 됩니다.
근대 이후 우리 민족사에서 불행했었던 대부분의 사건들을 두루 섭렵했었던 두 사람이 작품들은 사뭇 비슷하면서 다릅니다.
그들은 이미 고인이 되셨지만 많은 작품들을 우리에게 남기며 한 시대를 통찰할 수 있는 시대적 교훈까지 남겨 주고 있습니다.
그들의 그림이 한시대를 세심하게 표현한 역사화는 아니지만 우리는 그들의 그림을 통해 지나간 역사의 아픔과 상처까지 바라볼 수 있는 혜안을 지녔으면 합니다.
예술가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들은 생각보다 많지만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은듯 합니다.
현재 원석연 작가의 10주기 추모전이 통의동 갤러리 아트사이드(7월 28일까지)에서 진행중입니다.
대전에 있는 이응노 미술관에 가시면 그의 작품을 보실 수 있습니다.(또는 국립현대 미술관)
PS> 원석연 작가 추모전을 보던 도중 '지우개'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었는데~
전시 관람 후 기사를 보니 작가분께서 지우개 사용을 전혀 안했다는 기사가 일 부분 있더군요.
지우개 사용 여부가 작품성과 관련이 있는것은 아니지만 제 생각으로는 연필화 작업을 하면서 지우개 사용을 안할 이유가 없고
(그것은 마치 유화를 그리면서 white물감이나 knife을 사용 안한다는것과 같으니) 연필화 작업 특성상 100% 지우개 사용 없이는 작업이 불가능하고(최소한 최종 마무리를 위한 번진 흑연 가루나 때를 벗겨내기 위해 서라도 필요함)지우개는 지우는 작업에도 사용 되지만 번짐효과나 착색시에도 사용되는지라 일부 기사내용은 아마도 원석연 작가의 뛰어난 기량을 돋 보이기 위한 글이 아닌가 하는 개인적인 생각을 해봅니다.(물론 작가님께서 전혀 사용 안하셨을지도 모르지만-국과수라도 가야 하나?ㅋ)
제가 말씀드렸던 것처럼 지우개도 硬~軟(떡지우개부터 돌맹이같은 지우개까지)까지 여러가지 경도가 있고 연필도 경도에 따라 B~HB까지 여러가지가 있으며 연필의 경도나 메이커(또는 제조국)에 따라 흑연 색깔이 미세하게 다릅니다.
첫댓글





ㅋㅋ 파랑새님도 짱!
여기 아래서 함께 박수해야 할듯^^
여기있는 모든 분들께 박수! ^^
멋진 글 잘보고 갑니다. 짝짝짝
짝짝짝! ^^
"원석연 작가의 개미 군상들이 질서있고 체계적이지만 수동적인 힘 없는 민초의 생존성을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그려냈다면
이응노의 인간 군상들은 무질서하고 비구상적인 형태에 가깝지만 상징적이고 집단적인 힘이 느껴 집니다"
두분 작가의 <개미>와 <군상>의 비교...정~~말 인상적이었어요..!!!!
원석연 작가의 개미가 우리의 모습을 상징한다는 글을 어디선가 읽고 유약해 보이는 개미의 모습이 웬지
싫다~는 막연한 느낌을 갖고 있었는데
이응노 작가의 군상을 보고나니 제가 느낀 것이 무엇이었는지 분명하게 알게 되었어요..감사합니다..!! ^^
동무 박수 치시라요!! 짝짝짝~~^^
지우개 사용여부가 그렇게 예술성에 영향을 미칠라나 암튼 굿~글
친유신 그런쪽 아니라는 부분 특히, 권력에 빌붙어 예술가이길 스스로 포기한 부류들과는 다르다는
선전, 국전, 특히 개발과 함께 했던 수많은 건축가들~~등등 항상 가난한 예술가들은 줄타기 신세,,쌀밥에 쇠고기냐 아님 작가의 양심과 자존심이냐의 싸움,,선수한테 칭찬 받다니 쑥스러운걸~
이궁 밥과 예술에 대해서는 밤새도 모자른다. 밥먹어야 예술도 하지. 밥이 얼마나 숭고한건데.하지만 자본에 비굴한거랑은 다른 의미. 선수는 무신, 요즘엔 자발적글쓰기를 못하고 있구만, 돈주는 것만쓰고 나두 배고픔
나는 돈주는데두 없음..ㅜㅜ
감사합니다~
고갱, 원석연, 이응노... 요즘 제 가려운 곳을 어쩜 이리 잘 긁어주시는 지..
정말 좋은 공부였습니다. ^^
시류에 따라가 주는 약간의 센스? ㅎ 그건 아니고 요즘 제가 본 전시들 리뷰만 쓴거예요,,워낙 그림을 안보러 다녀서,,요즈음..ㅡㅡ:: ~ 다음글은 아마도 울분에 찬 무라카미 리뷰가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ㅋ(문제는 플라토 가볼 시간이 없다는~ㅋㅋ)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고맙습니다. 두 분 원로작가의 작품에 담긴 시대정신을 읽으려는 시도가 인상적이네요.
'모든 예술작품이 동시대를 살아간 인간들이 만들어 내는 사고 또는 행위의 (시대적)결과물'로 인식하신 점도 공감합니다. 예술의 시대성, 사회성을 펼쳐 설명하신 것이니, 예술은 자체의 순수성에 더하여 그 시대를 품고 사회성을 지닐때 생명력이 커진다는 의미겠죠. 동시대와 반시대, 순수와 참여로 이어지는 논쟁은 끝이 없겠지만요./ 원석연의 '개미 군집'이 질서와 쳬계를 지녔지만 수동적인 생존력으로 전쟁의 처참한 폐해를 극복하려는 의지를 상징한다면, 이응노의 '인간 군상'은 무질서하고 비구상적 형태지만
집단적 힘이 느껴진다는 분석에 누구나 공감할 겁니다. 그런데 보스코님 글에 아쉬움이 있으니, 두 원로작가의 시대정신을 비교하려면 故박정희대통령의 유신독재체제에 동조(또는 방관), 반대의 대척점에서 '순응'과 '저항'으로 처신했던 두 예술가의 상대가치를 상술했더라면 더 좋았겠단 겁니다. "두 작가에 대한 사상적 또는 이데올로기적 재평가나 파헤침이 (본 글을 쓰는데) 아무런 득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셨으니 더 상세하게 써주십사 부탁하기도 멋적은 일이네요. 그러나 두 분의 작품성을 평가하는데 그치지 않고 작품에 배어든 시대정신을 제목으로 삼아 비교하신 글이라 꼭 짚었어야 할 내용이라 생각 되어서요.
제가 이 글 쓰면서 대충 넘어가려했던 부분을 콕 짚어 주셨네요. 글이 길어질듯 해서 저의 마음속에만 담아 두었던 건 이런겁니다.(분명 초기 글잡이 할때는 두작가의 시대적 대응 방법과 역사인식에 대해 제법 실랄하게 써 보려고 했었지만) 순응이 굴복(또는 동조나 방관)은 아닐거라는 생각과 저항의 방법과 명분 때문입니다. 조사하고 글을 쓰면서 두 작가 사실 이 두가지 부분에서 명확함과 선명성에서 많은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두 작가의 작품에 관련된 지극히 제한적인 글이 되고 말았어요. 아쉽지만..
지금여기님도 그 시대를 겪으셨겠지만 80년대 그 많은 시민들과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기 전 우리들은 동조자도 아니고 방관자도 아니었습니다. 순응과 저항으로 양분하려는 것 또한 너무나 무리였구요. 그렇다고 우리 모두가 우민이였을까요? 아니면 기회주의자나 무개념이었던것도 아니었습니다. 거창하게 역사의식이나 시대정신을 운운하지는 못했지만 분명 느끼고 화내고 분개하였었지요. 이런면에서 볼때 두 작가의 사상적 대비를 통한 시대정신의 분류법은 무리하다고 판단했습니다.~물론 제 원래의 취지와 결과물의 차이가 많은점은 인정합니다, 좋은 지적 감사 드리고 앞으로 글쓸때 좀더 독해 지던지^^ 공부를 더 해야겠어요.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다른 곳으로 퍼가도 될까요?
네~감사합니다.
덕분에 감상과 공부까지 하고 갑니다. 보스코님! Thank you.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