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초여름, 석남사에서 사진작가 작은 아니님이 촬영한 모습입니다.
멀리 보이는 산의 능선과 스님의 모습이 닮았죠?
깊은 강물을 건너온 사람의 눈빛,
한평생을 출가수행자로 살아오신 세월이 그대로 담겨진 얼굴의 깊은 주름들...
작은 아니님이 촬영하신 현묵스님의 이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스님은 참.. 이름과 잘 어울리는 모습을 하고 계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玄黙.. 그윽하고 고요함.. 혹은 그윽히 침묵을 머금고 있는 듯한..
현묵玄黙스님..
올해 세수 일흔다섯. 석남사 금당선원 유나(선원 총책임자).
손가락 두 개 여섯 마디를 태워 부처님께 바치면서 ‘불퇴전하여 세세생생 불도를 닦겠다’고 서원하신 분 ...
반세기의 세월을 '생사해탈과 영원한 대자유인'를 꿈꾸며 걸망 하나 지고 바람처럼 구름처럼 제방 선원을
오가며 한순간도 산문을 떠나지 않은 분... .
이름처럼 그윽하고 고요한 눈빛을 지니신 수행자이십니다.
아무 말씀 없이 앉아 계신 모습만으로도 스님께서 얼마나 잘 살아오셨는지.. 짐작케 해주셨던
분이었습니다. 수행자가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인지 보여주신 분이었으므로
지난해 여름 만나뵈었을 때, 제가 이런 질문을 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스님.. 수행자로 사신 것.. 너무 좋으시죠?”
“그렇죠.. 참말로.. 가만히 혼자 생각하면.. 어째.. 내가 부처님 법을 알았을까. 그런 감사함과 기쁨을
하루도 잊어본 적이 없어요. 제가 선禪하는 스님네들에게 그럽니다. ‘참말로 정진해야 한다. 금생에
우리가 이런 공부 못하면 내생엔 어려우니까.. 공부 잘 하자.’ 라고 그러죠..
그 말밖에 할 게 없어요. 부처님 법은 말로 할 수 없어요.“
육이오 전쟁중이던 열아홉살에 출가하셨다니, 그 시대 남들은 다 시집갈 나이에 왜 불문에
들어오셨을까 궁금해서 여쭤보았습니다.
“스님은 왜 출가를 하셨어요?”
“인연이죠. 나는 세상에 스님네가 있다는 것도 몰랐어요. ..”
현묵스님을 뵈면 출가란 전생사가 전제되지 않으면 이뤄질 수 없음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집안살림을 돕는 것은 물론 그 시대, 시집 가기 전의 처녀들이 모두 했던 수놓기조차 왠지 싫어서
수틀을 손에 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보다 못한 사촌언니가 ‘이렇게 수를 놓기 싫어하니 시집갈 때
뭐를 들고 가련?’ 하면서 대신 수를 놓아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절에 다니던 이웃 아주머니에게 ‘오대산의 한암스님이야기랑 비구니스님들 사는
이야기를 듣고는 신선이 사는 것처럼 느껴져 산으로 가야겠다고 마음 먹으셨다고 합니다.
출가해서 초발심자경문을 배우면서 세상에 이런 기막힌 도리가 있다니! 하시곤 곧바로 화두를
타야겠다고 몸살을 앓으셨다니, 스님은 분명 전생에 참선수행자였음이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나는 평생 초발심자경문을 지고 다닐 거예요. 잠재해 있던 내 불연을 틔워주었으니까요.
초발심자경문을 공부하면서 세상사 모든 것이 내 맘에서 사라졌어요. 오직 ‘화두’하나만 생각났죠.
해서 어른스님들 허락도 없이 출타하신 틈을 타서 도반들하고 셋이서 안정사에 계신 성철큰스님을
찾아뵈러 갔죠.”
마산에서 출발해 고성까지 일부러 차를 타지 않고 태산같이 느껴졌던 산을 넘어 걸어온 세 어린
수행자에게 성철스님이 물으셨다고 합니다.
“발도 못 붙이는 기암절벽에 복숭아 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내가 너희들에게 그 나무에서 복숭아를
따오라고 하면 따오겠나?”
그러자 세 어린 비구니들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고 합니다.
“예.. 따오겠습니다.”
그러자 큰스님께서 그러시더라는군요.
“하하.. 그래? 그러면 너희들 절(마산 성주사)로 돌아가서 절 삼만배를 해라.
삼천배씩 열흘해서 마치고 다시 오너라.”
성주사로 돌아온 세 비구니스님은 너무 화두를 받고 싶은 마음이 북받쳐 열흘도 너무 길게 느껴져
일주일만에 마치고 안정사로 달려갔다고 합니다.
“산을 넘고 걷고 또 걸으면서 화두타러 가던 생각.. 돌아와서 절하던 때의 심정.. 삼만배하고 화두타러 가던 생각..
또 큰스님에게 화두 받던 그때 그 마음이 꾸준했으면 3년 안 가서 결단났을 겁니다. ”
전쟁이 막 끝났던 스물한 살 때의 풋풋하고 뜨겁기만 했던 초발심 시절을 말씀하시면서 스님은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렇게 모든 것이 사라지고 화두 하나만 보였어도 육십이 넘으니까 공부하기 힘들어요.
요즘에도 잠은 많지 않지만 그래도 일찍 자리에 듭니다. 젊었을 때 열심히 바짝 공부해야지요.”
스님께선 당신의 노스님이야기를 증언하는 중간중간 당신이야기를 곁들이셨습니다.
고춧가루도 없는 허연 배추김치와 된장 하나에 밥을 먹으면서도 눈빛 푸르게 공부하셨던 이야기,
김용사에서 성철큰스님이 토해내셨던 '육조단경', '반야심경' 등의 법문을 들으면서 환희에 찼던 이야기,
선방 입승 소임을 보던 젊은 수좌시절에 입선시간에 나가서 석남사 주변 사자평의 아름다움에
정신을 빼앗기고 돌아와 노스님에게 어깻죽지를 수없이 맞고 참회하던 이야기,
'이곳을 떠나야겠다' 싶으면 새벽 예불을 마치곤 바랑 하나 짊어지고 뒤도 안돌아보고 떠나던
젊은 선객시절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이야기를 듣다가 자연스레 화제가 스님의 연비하신 이야기로 옮아갔습니다.
비구니스님으로서 연비하신 예가 드문 터라 실례를 무릅쓰고 여쭈어보았습니다.
“스님.. 연비는 언제, 왜 하셨어요?”
스님은 제 물음에 묵묵하셨습니다. 저희들에게 차를 따라주시면서 다른 말씀만 하시더군요.
“정진이 끝나고 나면 가끔 심검당 스님과 차를 마십니다..”
그날, 스님의 뭉턱 잘려나간 손가락 끝을 만져보면서...울컥 가슴이 뜨거워졌던 생각이 납니다.
세세생생 부처님 곁을 떠나지 않겠다는 굳은 서약, 결정코 부처가 되고 말리라는 눈물겨운
서원이 느껴졌기 때문이었겠지요.
가끔 후학들이 물어오지만, '그런 것은 묻는 게 아니다' 하면서 연비한 이야기를 결코 하지
않으셨다는 스님께서 저희들에게 일부 털어놓으신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계속)
배경 음악은...
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