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주 광장은 파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콩코드 광장과 서로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록 치열한 미의 경합을 벌이고 있다. 특히 청명한 날씨에 햇빛에 반짝이는 아케이트와 기하학적으로 울창하게 들어선 나무의 그림자는 경이로운 조화를 발하고 있다.

사진]보주 광장으 둘러싼 아케이드 회랑형식.
빅토르 위고의 명언에 따르면, " 몽고메리의 날카로운 창날이 보주광장을 창조하였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1559년 앙리 2세가 마상시합에서 정적 몽고메리 경의 창에 찔려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거의 열흘만에 투르넬 저택에서 숨을 거두자 그의 미망인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이 불행한 추억을 지워버리기 위해 저택을 헐도록 명하였고, 그 넓은 부지를 그대로 비워두었다.
앙리 4세는 그 자유로운 공간을 축제의 장소 또는 파리 시민들의 휴시공간인 산책로로 만들기 위해 붉은 벽돌의 우아한 저택 서른여섯채로 빙 둘러싸인 사각의 광장을 계획했다. 그리고 앙리 4세가 암살당한지 2년후인 1612년에 그의 아들 루이 13세에 의해 광장은 완공되었다.


사진]보주 광장의 전경
초기에는 '루아이얄 광장'으로 불렸는데, 당대의 유명인사들만이 출입하여 더욱 유명한 장소가 되었다. '왕실'을 의미하는 루아이얄 이라는 이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왕가가 그곳에 머문적은 단 한번도 없었고, 건물은 모두 개인에게 세를 내주었다.
1792년에는 혁명의 고조된 분위기에 다라 '불가시성의 광장'이라는 다소 장황한 명칭이 주어졌으며, 1800년에 비로소 오늘날과 같은 '보주광장'이라는 이름이 탄생하였다. 전 유럽을 상대로 교전 중인 조국 프랑스를 돕기위해 세금을 신속하게 내준 보주(프랑스 동북부의 산맥)주민들의 공로를 치하하는 뜻으로 이름을 보주 광장으로 개칭한 것이다. 보주 광장에 있는 늠름한 루이 13세의 기마상은 1818년에 다시 세워진 것이다. 원래 이 기마상은 리셜리에 추기경이 국왕에게 헌납한 것인대, 혁명중에 파괴된 것을 다시 모사한 작품이다.
자료 출처 [재미있는 파리 역사 산책] 김복래 지음, 북폴리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