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닛시 (출17;8-16)
먼저 생각할 것은 무엇과 싸우는 것인가이다.
싸움의 대상이 무엇일까?
우리들의 싸울 것은 혈기 아니요 우리들의 싸울 것은
모세와 다투었다.
마실 물이 없다고 말이다.
그리고 여전히 모세를 원망한다. 우리와 우리 가족들이 목말라 죽게 되었다고 말이다.
두 가지를 간과한다.
하나는 하나님이 하신 일을 잊었고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하실 일을 생각하지 못한다.
먼저 이런 생각을 해본다.
하나님이 나를 어디로 인도해 가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하나님이 왜 나를 이곳에 보내었는가?
그리고 오늘 이 고통은 무슨 의미일까?
여전히 하나님의 역사를 보려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이
구하는 것을 구하고 있다.
마태 6;31, 32
이는 다 이방인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데 이들은 무엇을 구하고 있는가?
먹을 것을 구하고 마실 것을 구하고 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
여기서 염려하지 않음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허락된 일이다.
작은 믿음에 대립해서 큰 믿음에 이르러 가라는 것이다.
33절은 하나님의 오심, 하나님의 다스림이 완전히 나타나는
것에 맞추어 살며 현재의 삶을 미래에 비추어
형성하려는 뜻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은 그의 의를
구하는데서 구체화 되어야 한다.
그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첫째는 모세의 지팡이의 용도 변경이다,
모세의 지팡이가 애굽 에서는 나일 강의 물을 먹을 수 없게
했다면 이제는 없는 곳에서 물을 만들어 내는 생명을 만드는
용도로 변경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람을 살리기 위한 싸움을 하라고 한다.
내가 가진 것들을 통해 사람을 살리게 하신다. 내가 가진
보잘 것 없는 지팡이마저 사람을 살리는 일에 쓰이도록 한다는 것이다.
내가 가진 은사, 물질, 시간을 사람을 살리는 일에 쓰라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싸우라는 것이다. 이것이 선한 싸움이다.
이것을 경험한 사람들이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곤경 가운데
거하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하여야 한다.
만일 이것이 호렙이라면 생명을 살리시는 하나님과 그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 사이에 긴밀한 연관성이 생긴다.
두 번째는 ‘다투다’ 를 뜻하는 히브리 말과 ‘므리바’ 라는 땅의 이름이 비슷하다.
두 이름이 비슷하게 쓰이는 것은 무언가를 암시하는 특징 중의 하나다.
예) 이사야에게 무엇을 보는가?
살구나무가 보나이다. 샤케드. 지키다. 쇼케드
이런 결합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상징적으로 말씀해 주신다.
시험의 목적을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계신가 하였음이더라.
하나님이 계신 것을 보았는가?
그러면 그 하나님을 신뢰하라 철저하게 신뢰하라
그 분이 하시는 일을 보라
본문 8절은 ‘그때에’ 라고 시작한다.
어느 때인가? 므리바에서 하나님이 계신 것을 증명하고 났을 때 말이다.
아말렉이 쳐들어와 르비딤에서 싸우느니라.
과연 이스라엘 백성들이 싸울 힘이 있었을까?
그들이 변변한 무기라도 가졌을까?
가졌다 할지라도 몇 명이나 가졌을까?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원망하고 불평하는 일만 하던
사람들이다.
노예로 사는 일에 익숙한 사람들이다.
시키는 것만 하는 수동적인 사람들이다.
그런데 전쟁을 할 수 있을까?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싸우라. 나는 하나님의 지팡이를 잡고 산꼭대기에 서리라.
두 가지가 함께 가야 한다.
싸우는 것과 기도하는 것 말이다.
물론 기도만 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싸움만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많은 이들이 말한다. 싸워야 한다고 말이다. 일을 해야 한다고 말이다.
기도는 보이지 않고 싸우는 것은 보인다.
그런데 승패의 결정은 어느 것에도 치우치지 않는다.
예) 기도가 없다. 기도로 도와야 한다.
어떻게 하겠는가?
건축은 영적싸움이다.
사단이 성전을 짓는 일을 기뻐하겠는가?
당연히 싫어한다. 그래서 불평하게 하고 분열시키려고 한다.
싸우려고 한다.
하나님의 의도를 담지 않고 사람의 의도를 심으려고 한다.
예) 바벨탑이 대표적인 예다.
우리의 이름을 내고 흩어짐이 면하자
벽돌로 돌을 대신하고 역천으로 진흙을 대신하자
5절에 하나님이 개입하신다.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신다. 이해할 수 없도록 하신다.
돈이 기도를 대신하면 안 된다.
회의가 기도회를 대신하면 안 된다.
아말렉의 정체를 말한다.
이들은 한 번의 싸움으로 끝나는 적이 아니다.
신명기 25; 17-18
네가 피곤할 때에 네 뒤에서 떨어져 약한 자들을 쳤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느니라.
사방에 있는 모든 적군으로부터 내게 안식을 주실 때에
천하에서 아말렉에 대한 기억을 지우리라.
삿 6;3, 33; 7;12, 삼상 30장 삼상 15장
아말렉을 두 가지로 이야기 한다.
약한 자들을 치는 무리,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무리
이것을 이기는 것은 안식에 거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가 필요하다.
하나님을 향한 도움 요청이 필요하다.
하나님이 도우시는 것을 보고 있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예) 피희옥 권사님, 양완철 성도님
앞으로도 일어날 것이다.
하나님의 안식일에 거하는 이들이 그것을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안식은 하나님을 향해 손을 드는 것과
함께 그 일에 동참하는 것이다.
연약함을 돕는 것이다.
연약함을 무너뜨리려 하는 아말렉에 대해서
그 연약함을 돕는 일들을 통해 승리하게 된다.
“왜 그것도 못 견디는가?”
“왜 일을 그렇게 밖에 못하느냐고?”
아니다 그 일을 돕는 것이다. 비난이 아니라 협력이다,
13절은 중요하다,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무찌르니라.
모세의 하늘을 향하여 든 손과
여호수아의 손에 든 칼이 조화를 이룬다.
영적싸움은 이 두 가지로 하는 것이다.
기도의 손과 일하는 손 말이다.
두 가지가 같이 가야 한다. 어느 하나도 치우쳐서는 안 된다.
정의와 긍휼이 같이 가는 것처럼 말이다.
승리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런데 대가를 치러도 해결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예) 월남전
상업적 이용
그러나 지산들은 지키려는 전쟁
그런데 우리의 승리는 하나님이 이미 대가를 치러주셨다.
기도는 그 대가를 확인하는 통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