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mini 문학비평 101 – 한기홍 시 벗겨 보기 ~ ‘ 달력을 자르며’]
달력을 자르며
벽에서 떼어놓았던 지난해를 쓰레기봉투에 담기 위해
가위로 자르기 시작했다. 네모난 열두 장의 난수표들,
이제는 자고 싶다며 아기 곰처럼 누워있던 삼백 육십 오.
시퍼런 가위든 염사 앞에서, 개미 닮은 숫자들이 하나 둘씩
벌떡거리며 일어나기 시작했다.
싹둑 싹둑 잘려지는 주름살들
어느 놈은 붉은 피를 뿜으며 빼먹은 나이테를 가져가라
외쳐댄다. 어느 놈 앞에서는 참새처럼 부리를 흔들다
손가락을 베일 뻔하고,
호오! 신기하게도 지난 해 가지 않았던 세월, 새로운
녀석들이 꿈틀대는 미답(未踏)의 배열도 보이는데.
잭슨 폴록*도 페인트를 엎지르며 이랬을 거야
많고 많은 꿈들이 지나고 나면, 이렇게 환영처럼
흩날리는 무의미한 날들이었다고.
여섯 장을 자르다가 홀연히 가위를 접었다.
내 구둣발에 속절없이 밟혀간 줄 알았던 삼백 육십 오위(位)의
도깨비들이, 이제 보니 한낱 축구공이었던 내 육신을
펑펑 내지르며, 세월이라는 도박에 유희를 걸고
낄낄거렸다는 것을 알고서.
*잭슨 폴록 ∼ 미국의 추상표현주의 화가(1912∼1956). '액션페인팅'이라는
표현방식을 씀.
⛄ Gemini씨의 비평
한기홍 시인의 <달력을 자르며>는 지나간 시간을 수동적으로 버리는 행위를 통해, 시간과 인간의 주객전도된 관계 및 삶의 본질을 역동적이고 감각적으로 파악한 작품입니다.
⚫시간의 시각화와 생명력의 부여
시인은 쓰레기봉투에 넣기 위해 지난해 달력을 자르는 지극히 일상적인 행위로 시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자라나는 가위질 앞에서 박제되어 있던 일년(365일)과 숫자들이 생명체처럼 요동치기 시작합니다. 단순한 정량적 치수였던 날짜들은 '아기 곰', '개미 닮은 숫자들', '참새'로 형상화되며, 종이를 자르는 행위는 '주름살'을 자르고 '붉은 피'를 흘리게 하는 잔혹하면서도 강렬한 리얼리티를 얻게 됩니다.
⚫무의미함과의 직면 : 잭슨 폴록의 인용
시의 중반부에 등장하는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 비유는 핵심적인 전환점을 제공합니다. 흩뿌려진 페인트처럼 지나온 무수한 날들과 꿈들이 결국은 "환영처럼 흩날리는 무의미한 날들"이었음을 깨닫는 순간입니다. 미지의 시간(미답의 배열)조차도 결국은 형체 없는 무질서의 일부였음을 깨닫는 허무주의적 인식의 심화가 이루어집니다.
⚫주객전도의 자각과 자아의 성찰
달력을 반쯤(여섯 장) 자르다 홀연히 가위를 접는 행위는 시적 깨달음의 절정입니다. 시인은 자신이 주체적으로 세월을 밟으며 살아왔다고 믿었으나(내 구둣발에 속절없이 밟혀간 줄 알았던), 실상은 세월(도깨비들)이 자신의 육신을 축구공처럼 차대며 유희를 즐겼음을 자각합니다.
♣ 총 평
결국 이 시는 단순한 세월의 아쉬움을 넘어, 인간이 세월을 지배하고 소유한다는 오만을 깨부수고, 세월이라는 커다란 도박판 속에서 농락당하던 스스로의 존재를 서늘하게 관조하는 뛰어난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