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경은 불교의 성전인 삼장(三藏)을 중심으로 부처의 가르침과 관련된 기록을 총칭하는 용어다. 삼장은 부처의 가르침을 담은 경장(經藏), 스님 등 제자들이 지켜야 할 윤리․도덕적 규범인 계율을 담은 율장(律藏), 경장과 율장을 포함해 부처의 가르침에 대한 제자들의 논설을 모은 논장(論藏)이다. 여기서 장(藏)은 그릇 광주리란 의미다. 해인사 팔만대장경은 결국 부처의 가르침과 2000여년 불교 역사의 고갱이가 담긴 그릇을 의미한다. 고려 대장경은 세번에 초조대장경, 속장경, 재조대장경으로 세번으로 나뉘어 만들어졌다. <초조대장경> 첫번째는 초조대장경으로 거란 침입 당시인 현종 때 첫 대장경 판각이 이뤄졌다. 불력에 의한 국가 수호를 도모하는 것이 제작의 직접적 동기이지만 고려의 불교적 역량이 반영된 국가적 사업이었다. 성종 대에 전래한 송의 개보판(開寶版) 대장경과 국내에서 전래되어온 자료들을 바탕으로 처음 작업이 이루어졌고 문종년간에는 새로 전래한 거란의 대장경까지 제작에 참고하였다. 고려의 불교 역량이 집결된 초조대장경은 팔공산 부인사에 보관됐지만 1232년 몽골군의 침입 때 불에 타 없어졌다. <속장경> 초조대장경과 재조대장경 사이에 고려 속장경이 만들어졌다. 교장이라고도 불리는 속장경은 부처님의 말씀이 아닌, 여러 불교 교파의 교리를 정리한 장서이다. 대각국사 의천(1055~1101)이 초조대장경을 보완하기 위해 조성한 것으로 의천이 송나라에 다녀오면서 수집해 온 불서-불경과 요나라, 일본에서 수집한 것을 모아서 4700여 권을 제작하였다. 하지만, 흥왕사에 교장두감을 두고 1096년에 완성하였으나 초조대장경과 함께 몽고의 침입으로 부인사에서 불타버렸다. <재조대장경> : 고려가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고자 조성한 초조대장경은 안타깝게도 1232년(고종 19) 몽골의 2차 침입 때 몽골군에 의해 남김없이 불태워졌다. 나라의 보물을 잃은 고려는 불타버린 대장경판을 다시 새기기로 결정했다. 다시 새긴 대장경이라고 하여 흔히 재조대장경이라고 부르는데, 그 경판의 수가 81,258 매에 달하여 팔만대장경이라고도 부르며 오늘날 해인사 장경판전에 보관되어 있다.고려가 이 대장경을 왜 다시 새기려 하는 이규보가 37년(고종 24)에 지은 「대장각판군신기고문(大藏刻板君臣祈告文)」에 잘 나타나 있다. 이 글에 따르면, 몽골군은 지나는 곳마다 불상과 불경을 없애버리고 초조대장경판도 불태워버렸는데, 과거 초조대장경을 만든 이유가 거란의 군대를 물리치기 위함이었다고 하였다. 과거 대장경을 만들었던 까닭에 거란의 군대가 물러갔지만, 지금 이렇게 대장경이 소실되었으니, 이번 몽골군을 물리치기 위해서 다시 대장경을 조성한다고 밝히고 있다.불심 깊은 고려인들은 독실하게 불교를 믿고 대장경을 새기는 일을 통해 여러 불보살의 도움을 얻어 외적을 물리치고자 하였던 것이다.당시의 집권자인 최우를 중심으로승려였던 수기는 경전을 수집하고 교정을 담당하는 등의 책임을 맡기고 대장도감과 분서대장도감으로 분담하여 제작함으로써 전쟁기간에도 효율적으로 비교적 단기간에 제작할 수 있었다. <팔만대장경의 가치> 1. 정확성:이 매우 뛰어나다. 8만 장에 달하는 경판의서체가 모두 일정하며, 오탈자가 거의 없는 것으로 유명하다. 서체가 일정한 것은 글씨를 담당한 사람들의 글씨체를 모두 일정한 모양으로 만들게 하기 위해 거의 1년에 가까운 훈련을 했기 때문이라 알려져 있다. 팔만대장경에 새겨진 글자수는52,729,000(오천이백칠십이만구천)자이다. 2. 보존성: 우선 각 경판의 제작 과정을 보면 훼손을 막기 위한 숨은 노력이 엿보인다. 경판용 목재는 30~50년 자란 나무 중 옹이가 없고 곧은 것이 선택됐다. 벌채된 목재는 바닷물에 1~2년 담가놓은 후 경판 크기로 잘랐고, 자른 목판들을 다시 소금물에 삶은 후 건조시켰다. 이런 과정은 병충해, 갈라지거나 비틀어지는 것을 막았다. 경판용 목판이 완성되면 판각하는 각수들은 글자를 한 자 한 자 돋을새김했다. 경판들이 서로 부딪치는 등의 훼손을 막고자 양 끝에 마구리 작업도 했다. 여기에 해충 피해를 막기 위해 옻칠을 하고 네 귀퉁이에는 구리판도 장식했다. 비로소 한 장의 경판이 완성된 것이다. 1) 경판 보존을 위해선 무엇보다 통풍이 원활하고, 낮은 습도와 온도가 일정하게 유지되는 게 중요한데 수다라장, 법보전 건물은 이를 충족시키고 있다. 창문의 위치와 크기를 조절하여 건조한 공기가 내부로 쉽게 들어오게 하고, 들어온 공기는 최대한 아래위로 골고루 퍼진 뒤 돌아나가도록 하는 기능을 한다. 경판의 모양도 글자가 새겨진 부분이 양쪽 마구리 부분보다 얇다. 경판들을 아래위로 쌓아놓았을 때 공기가 아래위로 흐를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되는 것이다. 즉 창문과 경판 모양은 내부로 들어온 공기가 앞뒤, 아래위로 원활하게 흐르도록 작용한다. 2) 내부 바닥도 의미가 있다. 겉으로 보면 맨흙이지만 그 속에는 숯, 횟가루, 소금, 모래가 쌓였다. 습도를 조절하는 역할을 하고, 건물들의 배치도 통풍의 원활함을 노렸다. 장경판전 건물들은 가야산 중턱인 해발 약 650m에 서남향으로 자리 잡았다. 뒤쪽은 막혔고 앞쪽은 해인사 경내를 내려다보며 훤히 뚫렸다. 건물들은 가운데 마당을 두고 마주 보게 배치돼 바람이 자연스레 흐르도록 유도한다.
3) 통합성: 팔만대장경 판각 작업은 초조대장경과 송나라․요나라(거란)의 대장경 등을 비교․검토한 바탕 위에서 이뤄졌다. 13세기 동아시아 불교의 정수를 집대성한 것이다. 송나라, 요나라 대장경들이 지금은 대부분 사라져 팔만대장경은 온전히 남아 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대장경이다. 편찬 시 다른 나라의 대장경들을 비교 대조하여 종합하였기 때문에 그 내용이 매우 풍부하고 현재 거의 남아있지 않은 개보칙판대장경의 내용 또한 고려대장경을 통해 알 수 있음. 고려대장경이 담고 있는 내용이 풍부하여 일본의 <대정신수대장경>과 후에 청의 <빈가정사대장경>으로 이어지는 일본의 <축쇄대장경>의 모본이 되었음. 당시 동북아시아의 국제적인 보편문화였던 불교를 고려가 집대성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