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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갈라디아서 4:7~11
광복 65주년을 맞이하면서 우리의 선조들이 일본인들로부터 당한 고통을 생각하며 우리들의 후손들에게는 이런 아픔이 없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1910.8.22일 일본이 강압적으로 체결한 한일 합방조약에 의하여 국군 침탈문서에 조인함으로 8월 29일 이를 발표하여 나라를 잃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국가적인 치욕을 당하였던 것을 국민에게 상기시켜 각오를 새롭게 하기 위하여 8월 29일을 국치일로 정하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8월15일 해방일 즉 광복절은 알지만 8월 29일 국치일은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일합방이후 일제는 36년간 우리나라를 식민지화 시키며 온갖 탄압과 학살을 해왔습니다.
1.한국에 개신교회가 처음 선교사들이 들어온 떄입니다.
1)개신교 첫 선교사 아렌의 입국
알렌은 1858 4월 미국 오하이오주 델라웨어에서 태어나 오하이오 웨슬리안대학을 졸업하고 이어 마이아미 의과대학을 졸업하여 1883년 의사자격증을 얻고 미국 북 장로교회로부터 중국 의료 선교사로 파송을 받고 결혼을 하고 1883년 10월 상해에 도착했으나 그곳 기후가 그의 아내의 건강에 맞지않아 그곳 의료선교사들이 한국에는 의사가 한명도 없고 기후도 온화함으로 한국에 가기를 제시하여 1884년 9월 20일 재물포에 도착하여 한국에 처음으로 개신교 선교사로 선교사 시대가 뎔렸다. 그는 서울로 들어와 미국공사 푸트를 만나고 공사관의 무임금 의사로 임명됐다.
알렌이 입국후 3개월 후 12월에 감신정변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개화파가 우리나라에 처음 근대식 우편제도를 시행할 우정국 건물 낙성식 피로연때 수구파를 모조리 죽이고 개화파들로 새 내각을 구성하려는 일종의 구테타였다. 12월 4일 개화파자객들이 연회가 무르익어갈 떄 불이야 하며 무차별 수구파를 칼로 죽일 떄 수구파의 거두이며 왕후 민씨의 조카인 민영익도 전신에 7군대 칼에 맞에 생명이 위험하게 되었을 때 알렌이 그를 치료하여 극적으로 완쾌 시켰다. 이 사건으로 알렌은 서구의 우수한 의술을 왕실과 고위관리들과 백성들에게 알리게 되었고 알렌은 왕실의 신임을 얻어 고종의 시의가 되었고 참판의 벼슬까지 얻었다.
2)선교사들의 입국과 사업입니다.
알렌은 병언 설립을 하게 되어 1885년 4월 9일 광혜원이라는 진료소를 개설하고 2주후에 제중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이것이 후에 세브란스 병원과 연세의대가 되어 한국의학계의 선두주자가 되었습니다.
3)선교사 언더우드 입국
그는 1859년 7우러 영국에서 태어나 12살 떄 그의 가족들이 미국으로 이주하고 뉴욕대학교와 네덜란드 개혁교회계통 뉴브론 스윅신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북 장로교회를 통해 25세 나이로 한국에 선교사로 1885년 4월 5일 부호라절주일에 재물포에 도착하여 서울에 왔다. 언더우드는 길가에 버려진 고아들을 모아 고아원을 시작하여 현대식 교육이 시작되어 오늘날 경신 중고등학교 전신이 경신학교가 세워졌다.
4)선교사 아펜셀러 입국
언더우드가 타고오는배에 전에 신학교 대회 때 만난 아펜셀러 부부가 미국 북 감리교회의 파송을 받고 한국에 가기위해 탑승하고 있었다. 그러나 갑신정변 떄 국내사정으로 아펜셀러는 일본에 가 있다가 2달후 한국으로 들어왔다. 아펜셀러는 1886년 6월에 학교를 시작하여 1887년 배재학당을 세웠다.
5)메리 스크랜튼 여사입국
1885년 6월에 서울에 입국 서울 정동에 땅을 사서 여자학당과 부녀원을 짓고 한국최초 근대식 여학교를 메리 스크랜튼 여사가 이화학당을 세웠다. 오늘날 이화 여자중고등학교와 대학이다.
6)존 헤론 의사
1885년 6월 내한하여 한국초기 선교사로 임명받고 의료활동 하다 환자들을 치료하다 더위와 과로로 이질에 걸려 5년 후인 1890년 7월 16일 순교함
7)다니엘 기포드 목사부부
1888 내한하여 경기도 지방 순밭중 이질에 걸려 1900년 4월에 순교함
8)헨리 데이비스 목사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회 파송 선교사로서 내한한지 6개월만에 천연두에 걸려 1889년 8월에 순교하심
9)조지 렉 목사
1900년 내한 "외국선교사가 되는 것은 미국의 대통령보다 더 영예스러운 일이다" 라고 하는 그가 평양에서 사역하다 천연두에걸려 1901년 성탄절 순교함
10)윌리암 메킨지 목사
1893년 12월 내한하여 솔내에 들어가서 혼자 외롭게 살다가 열병에 걸려 1895년 6월 2일 죽음
11)토마스 목사
1866년 우리나라에 선교를 위해 왔으나 대동간변에서 순교를 하심
이외에도 많은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서 많은 선교사업들을 하셨지만 위의 선교사들을 살펴보았습니다.
2.기독교의 대부흥입니다.
장로교회 감리교회 침례교회들이 선교 활동을 하며 1907년에 대 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떄 우리 성결교회가 처음 시작하게 되었는데 우리성결교회는 감상준 정빈 두 사람이 일본 동경 성서학원을 졸업하고 귀국 하여 서울종로 지금 무교동에서 세어진 교횡비니다. 1907년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연합으로 부흥회를 할떄 성령이 역사가 일어나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성령의 충만한 은총을 받고 놀라운 회개의 역사와 성령의 역사체험을 하고 그 때부터 부흐의 불길이 각 학교와 교회로 퍼져나가 전국으로 확산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교회가 세워지면 학교가 세워져 1907년에 장로교회학교가 405개 1908년에 561개 1909년 719개 매년 150여 학교가 세워지게 되었다.
3.기됵교 박멸운동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기독교 학교들이 세어지자 일제들의 눈에 항일운동으로 인식하고 박멸할 구실을 찾았다. 그떄 이또오를 격살한 안중근의 동생 안명근이 서간도에 무관학교를 세울 자금을 모금하려고 국내에 들어왔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내란미수죄로 기수하면서 황해도 해서 교육총회 (1908년 무렵 김구 최광욱도 인권등 기독교계 인사들이 학교를 세우려는 단체) 회원 전원을 체포하여 주동인물들을 투옥 유배 시키고 해산되었다.
그후 평안도의 기독교 지도자들을 박멸할 음모를 진행하였다. 1907년 미국 에서 돌아온 안창호가 신미회를 결성하여 비밀조직으로 이동영 이동회 이승훈이 오산학교를 세워 철저한 항일전을 바탕으로 민족 교육의 본거지로 삼았다.일제는 평안도 지방의 기독교 세력을 쳐 부술 개책을 세운것이 105인 사건이다. 이 사건은 데라우처 총독이 1910년 12월 27일 압록강 철교의 낙성식에 참석하기 위해 선천역에 잠시 하차하는 순간에 그를 암살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경비가 너무 삼엄하여 저격순간을 찾지못해 끝나고 말았다는 터무니없는 조작극인 것이다.
이 각본에 따라 이듬해 정월부터 평안도 지방과 전국에서 이승훈 양전백 윤치호 등 서북지방 교회 지도자 500여명이 체포되었다. 이 사건은 그들의 조작극이기 떄문에 이들이 범죄한 사실이 전혀 없으므로 오직 고문을 통하여 허위자백의 근거로 엉터리 재판부를 통해 1912년 19우러 선고를 하였는데 윤치호 양기탁 이승훈 등 주모자 6명은 징역 10년 그 외 18명은 징역 7년 39명은 6년 그외 42명은 5년 각각 선고 되었습니다. 이떄 유죄판결을 받은자가 105명이므로 105인 사건이라합니다.
105인 전체가 불복 상소하여 고동 법원에까지 가서 최후판결이 나왔는데 일제의 엉터리법정도 세계이 눈이 두려워 99명에게 무죄선고하고 6명만 징역 6년을 선고 하였습니다. 1915년 2월 이들이 천왕 대관식 떄 특사로 출소 하였을 떄 평양역에는 약 9천명의 시민들이 나와 국가와 신앙을 위해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은 이들을 극진히 환영을 하였습니다.
105인 사건은 마치 로마황제 네로가 로마 시에 자기가 불을 질러놓고 기독교인들이 하였다고 백성들에게 증오심을 갖게 하여 대학살알 하였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신앙전신들이 얼만 고통을 당하면서 신앙생활을 한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하겠습니다.
4.독립 운동을 위하여
또한 그들은 1919년 3.1 운동당시 민족 해방을 위하여 그 운동에 가담한 자들이 대부분 기독교인들이므로 당시 기독교 지도자들을 모조리 검거함.투옥시키고 학살하였습니다. 특히 제암리 교회는 신자들 전원을 교횡 가두고 불태워 죽이는 잔인무도한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일제 말엽에는 신사참배 곧 우상숭배를 강요하여 기독교 전멸 정책을 세웠습니다.
수많은 교회와 학교들이 폐쇄령 내렸고 성경읽기 금지 등 800여 교회가 폐쇄할 떄 우리 성결 교회도 폐쇄 당하였습니다. 수천명의 성도들이 투옥되고 50여명의 순교자들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언론기고나 봉쇄, 조선 국사에 대한 서적과 애국서적 20여 만권을 소각시켰고 황민정책을 하며 징용 학도병, 군대 위안부 젊은 이들을 전쟁터로 내보냈습니다. 곡시을 공출, 창씨 개명, 조선언문 폐지 정치 경제 종교 문화 다방면으로 우리 민족을 탄압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애국지사들은 군내와 외국 만주 중국 상해 미국에서 해방운동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서 승리 하시리라 믿고 독립을 위해 최선을 다하며 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이 외에도 많은 탄압이 있었습니다. 그중 기독교 탄압에 관한 일부만을 살펴보았습니다.
5.하나님의 은혜로 해방을 맞음
우리의 선열들과 애국지사들의 피와 땀으로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며 하나님께 기도하신 은혜로 드디어 하나님께서는 1945년 8우러 15일 미국을 들어 승리케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은혜를 더욱 감샇여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에게는 할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바로왕의 학정에서 해방받은 날을 유월절이라하여 지금까지 수천년을 내려오며 무교병과 쓴 나물을 먹으며 그들의 조상들이 겪은 종살이를 기념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에 비해 우리는 얼마나 8.15 광복절을 의미있게 지내며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는지 아직도 일본은 독도를 자기들 땅이라 하고 역사왜곡을 하며 교과서를 만들어 후손들에게도 교육을 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를 후손들에게 알리며 거기에 따른 대비를 하여야 합니다.
6. 6.25 전쟁 남침과 휴전
1)남침준비
북한 동포들이 공산치하에서 해방되기를 위해 많이 기도해야합니다. 해방이 되면서 남한은 미군이 점령하고 북한은 쏘련 군이 점령하여 북한정권을 세우고 독제정치를 실시하여 지줃르의 토지들을 몰수하고 주요산업을 국유화하고 겉으로는 남북협상과 평화통일을 주장하면서 속으로는 남침준비에 광분하였다. 1948년 2월 인민군을 창설하고 비행기 탱크 헌남운동을 대대적으로 하며 1949년 3우러 김일성은 쏘련과 비밀군사협정을 체결하여 남침준비를 하였다. 1950년 6월 주한 민군이 완전 철수한 그떄 그들은 남침 18일전 6,7일전 해방 5주년 기념일에 남북통일 최고 입버회의를 서울에서 개최하고자 하였고 6월 19일에는 남한 국회가 동읨낳 하면 6우러 21일 남한 국회 대표가 평양에 오든지 북한 인민최고 대표를 서울에 보내어 통일 정부 수립을 할 용의가 있다고 제안을 하였다.
그러면서 6우러 10일 북한 공산군 총참모장 강건이 예하각사단장과 여단장을소집하고 6월 23일 까지 전투배치를 위한 이동을 완료하라고 명령을 내렸고 18일에는 이들에게 김일성 명의의 훈령을 하달했다. 10개 보병 사단과 1개 전차사단 3개 경비여단 이었고 국군은 보병 8개 사단중 웅진에 17연대 개성지구 1사단 동두천지구 7사단 춘천 원주지구 6사단 주문진과 강릉지구 8사단등 4개 사단만 배치되고 나머지는 서울 수도 사단 그외 대전 대구 광주등 후방에 있었다. 장비도 비교가 되지않았다.
2)1950년 6울 25일 남침전쟁 시작
6월 25일 4시 39분 공산군이 일제히 남한을 쳐 내려왔다. 26일 의정부점령 27일 밤미아리 7사단지역에 적이 들어왔다 정부는 대전으로 가고 28일 새벽 한강 인도교 폭파 이날 서울이 함락되고 정부는 대전으로 가고 육군본부는 수원으로 후퇴 이떄 25일 미주대사 장면에게 긴급훈령을 내려 미 국무성에사태의 절박성을 알려 미국은 이날 오후 2시 un안전보장 이사회는 북한의 무력침략을 배제하는데 필요한 원조를 한국에 보낼 것을 모든 un가입국에 권고하자 는 미국대표의 제안을 7:1로 가결했다. 미국 트루만 대통령은 28일 맥아더 전투사령부를 한국전에 설치하고 해군과 공군을 우선 파견했다. 이렇게 32개국이 한국을 원조하기로 결의했다. 그리하여 일본 도쿄에 un군 총사령부를 설치 맥아더 장군을 총사령관에 임명 7월 14일 un기가 맥아더 장군에게 전달되고 이날을 기하여 한국군도 un군에 편입하여 싸우게 되고 7우러 20일 대전이 함락되고 8울 7일 마산지구에서 최초로 적을 진격하였다.
그리고 8월 13일 동부전선 포항에 도착한 적을 국군 수도사단과 3사단이 격퇴시켰다. 일부적은 8월 18일 대구북방 13마일까지 육박했다. 이날 정부는 대구에서 부산으로 후퇴하고 대구시민에게 소개령을 내렸다. 국군 1사단은 영국군과 미군지원하게 대구북방적군을 물리쳤다. 동부전선 국군 2군단이 9월 10일 적최강부대 15사단과 1개 포병연대를 영천지구에서 포위. 480명을 사살 완전 섬멸했다.
3)1950년 9월 28일 국군 서울 수복
이 당시 나는 가족들과 피난민들과 7월중슨 피난을 가서 경북청도 금천면까지 가서 피난을 하고 9우러 26일 추석날 청도에서 고향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떄 un군과 국군이 반격을 하고 un군 인천상육작전으로 9월 28일 서울수북 9월 30일 맥아더 장군이 북한공산군 총사령과 김일성에게 항복 권고문을 보냈으나 거부했다. 그래서 un군 사령부는 휘하의 전 상병에게 38선을 돌파하여 북진할 것을 명령했다. 계속북전 3사단은 10월 28일 성진을 점령하고 길주를 거쳐 백두산을 향해 합수로 진격하고 11월 25일 수도사단은 청진에 돌입했다. 이로서 국토의 전역이 거의 수복되고 조국통일이 목전에 다달았다.
4)1951년 1월 4일 후퇴와 재북진
그러나 중공은 아무런 통고없이 한국전에 병력을 투입하기 시작했다. 동부전선 운산에서 최초로 잡은 포로의 진술에 의하면 지난 19월에 약 2만의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너 한국전에 투입되고 고원지대로 내려오고 있다는 것이다. 11월 24일 맥아더장군 자신이 북진을 지휘하였으나 실패하자 후퇴하여 1951년 1월 4일 서울을 후퇴하여 오산 - 장호원- 제천- 영우러 까지 내려 왔다.
5)1951일 3우러 14일 서울탈환
아군이 재 반격을 하여 3월 14일 다시 서울를 탈환하고 4월 5일 동부전선은 소양강을 넘어 전진하고 있었다. 이떄 맥아더장군이 만주르 폭격하여 한국을 완전 통일을 하자는 주장에 미국 대통령이 4월 11일 맥아더장군을 퇴임하고 릿지웨이 장군을 대신 임명했다.그후 계속 전쟁 중 쏘련이 1951년 7월에 불리한 것을 알고 un대사 마리크를 통해 휴전을 제안했다. 미국이 호응하여 휴전을 하려할 떄에
6)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을 반대 하였다. 통일을 하자는 것이었다. 그로인해 휴전상태로 대치해 오던 중 1953년 7월 27일 3년 1개월 전쟁이 휴전협을 맺었다. 그런데 오늘날 6우러 25일 전쟁이 북침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말이 안된다. 왜 그런 말을 할까 공산당에 물든 사람들은 헤어나지 못하고 6.25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공산당을 찬양하거나 그들의 사상을 교육 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정부를 비판하거나 시위등을 선동하여 한떄에는 우리나라에 맥아더 장군의 동상을 철거 하자는 운동을 하며 미국과의 은헤를 원수로 여기게 하려는 그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또 우리국가의 안보를 무너뜨리려 하며 국가 발전을 방해 하려는 것입니다. 한상열 같은 사람이 아닌가 합니다.
공산당이 얼마나 무서운지 오늘날 젊은이들은 모르는 것입니다. 평양이 해방전까지 동양의 예루살렘으로 불리는 그 지역이 기독교를 말살하고 하나님을 부인하며 오직 김일성 김정일을 추앙하니 그 결과 오늘날 그들의 삶은 비참합니다. 고위관리들은 잘 살고 일반 백성들은 굶어 죽어 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목숨을 걸고 탈출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나라의 역사를 바로 알아 일제치하 36년간 우리나라 온 국민들과 선열들이 나라를 잃고 국내외적으로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하고 기독교의 탄압과 신앙을 지키다 순교하신 당시의 선열들의 당하신 고통들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의 현실이 있게 됨을 후손들에게 가르치고 그러한 일에 대비하도록 교육을 하여야 합니다.
6.25 전쟁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북한 공산당은 우리 정부가 주장하는 평화통일을 그들은 외면하고 휴전 협약을 위반하며 어떻게 해서라도 무력통일을 위하여 핵개발과 전쟁 무기생산에 광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에 대한 대비를 철저히 하여 그들의 모략에 속지말고 물리쳐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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