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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붕준 金朋濬 (1888 - 1950 ?)】 "임시의정원 제18대 의장"
서북학회와 신민회 청년학우회에서 활동하다.
김붕준은 1888년 평
안도 용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김의현(金義鉉), 어머니의 성은 김씨(金氏)이고, 5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아버지 김의현은 일찍부터 크리스트교(개신교)를 받아들였으며 근대적 지식과 민족의식이 강하였다. 김붕준은 어릴 때부터 이런 아버지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김붕준은 고향에서 한학(漢學)*을 배웠고, 이후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1908년 서울로 가서 보성중학교 농림과에 입학하였다. 이때 안중근의 동생 안정근이 함께하였다.
보성중학교에 다니며 김붕준은 애국계몽단체인 서우학회(西友學會)*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서우학회가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와 통합하여 서북학회(西北學會)가 되자, 1908년 1월 서북학회에 가입하였다. 김붕준은 서북학회에서 활동하며 안창호(安昌浩) ‧ 전덕기(全德基) ‧ 이동녕(李東寧) ‧ 박은식(朴殷植) ‧ 이갑(李甲) ‧ 유동열(柳東說) ‧ 노백린(盧伯麟) 등과 같은 애국지사들과 교류하였다. 이와 같은 교류를 통해 김붕준은 1909년 신민회(新民會)*와 신민회 청년 조직인 청년학우회 활동에도 참여하였다.
* 서우학회(西友學會) : 1906년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동포 청년들의 교육과 인재 양성에 힘쓸 목적으로 조직한 문화 운동 단체. 평안도, 황해도 출신의 지식인을 중심으로 서울에서 결성하였는데, 기관지 ≪서우(西友)≫를 발간하였으며, 1908년 1월에 ‘서북학회’로 발전하였다. 이처럼 김붕준은 주요 애국계몽운동단체에 빠짐없이 가입하며, 애국계몽운동에 활발히 참여하였다.
*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 : 이동휘, 이종호 등을 중심으로 1906년 서울에서 조직되었던 애국계몽단체. 함경도민으로서 국권 회복을 염원하여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하려는 사람을 회원으로 하였다. 서우학회와 통합하여 서북학회로 발전하였다.
* 신민회(新民會) : 1907년에 안창호가 양기탁, 이동녕, 이갑 등과 함께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조직한 항일 비밀결사 단체. 평양에 대성 학교, 정주에 오산 학교를 세우고 <대한매일신보>를 발행하는 등 꾸준히 항일 활동을 벌였으나, 1910년에 데라우치 총독 암살 모의 사건으로 많은 회원이 투옥됨으로써 해체되었다.
평안남도와 황해도 일대에서 농촌 개발에 힘쓰다.
1911년 일제는 ‘105인 사건’을 일으켰다. 이는 일제가 한국인의 국권회복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날조한 사건으로, 애국지사들이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을 암살하려 하였다는 것을 구실로 하였다. 이로 인해 신민회의 주요 인사 105인이 체포되었기 때문에 ‘105인 사건’이라 한다. 체포된 사람들은 대부분 무죄를 선고 받고 풀려났으나, 이 일로 인하여 신민회는 해체되었다.
김붕준은 1911년 3월 보성중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러나 ‘105인 사건’으로 잠시 진남포로 피신하였다. 105인 사건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김붕준은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김붕준은 서울 승동교회 한석진 목사와 여운형(呂運亨) 등과 협력하여 승동학교를 운영하였다.
김붕준은 이 시기에 농촌 개발에 힘쓰기도 하였다. 1912년부터 1919년까지 김붕준은 고향 평안남도와 황해도 일대에서 농업 ‧ 수리* ‧ 관개* ‧ 개척 ‧ 목재 판매 등의 일을 벌였다. 1916년에는 대동강(大同江) 지류인 인황천과 동창천 하류 대안에서 수로를 개설하고 밭을 조성하기도 하였다.
* 수리(水利) : 식용, 관개용, 공업용 따위로 물을 이용하는 일.
* 관개(灌漑) : 농사를 짓는 데에 필요한 물을 논밭에 댐.
후일 김붕준은 흥사단(興士團)*에 가입할 때 이력서에 자신의 학예*는 농림이며 최장기능은 관개라고 하였다. 또 고향에 돌아가 물줄기를 끌어들여 버려진 땅을 개간하고 마을에도 관개시설*을 설치하여 마을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았다고도 하였다. 이러한 것을 보면 김붕준 스스로 이 일을 자랑스러워한 것으로 보인다.
* 흥사단(興士團) : 1913년 안창호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창립한 민족 부흥 운동 단체. 신민회의 후신으로 <흥사단보>를
발행하여 흥사단 안팎의 소식과 일반 교포의 계몽에 힘쓰다가, 8‧15 광복 후 서울로 본부를 옮겼다.
* 학예(學藝) : 학문과 재주 그리고 기능을 아울러 부르는 말.
* 관개시설(灌漑施設) : 다수확을 위하여 논밭에 물대고 빼는 시설. 수원 확보 시설, 물 대기 시설, 배수 시설 따위로 이루어진다.
3‧1운동 이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김붕준은 만세운동에 참여하였고, 이후 검거를 피해 중국 상하이(상해, 上海)로 망명하였다. 1919년 9월경 상하이에 도착한 김붕준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찾았다. 당시의 일제 정보 자료를 보면 김붕준을 가리켜 “농후한* 배일사상을 포지(抱持)한*” 사람이라 하였고, “신정(新政)*에 불만을 품고 독립운동을 획책하기 위하여” 중국으로 건너왔다고 기록하였다
.
* 농후하다(濃厚하다) : 어떤 경향이나 기색 따위가 뚜렷하다.
* 포지하다(抱持하다) : 마음에 지니다.
* 신정(新政)은 ‘새로운 정치’라는 뜻으로, 일제가 자신들이 한국에 실시한 식민 통치를 미화화여 부르는 말이다.
또 일제 정보에 따르면 김붕준이 상하이로 망명할 때 “상해가정부* 노동총판 안창호가 발급한 신임표를 소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를 보면 김붕준이 상하이로 향한 것에는 안창호와의 밀접한 관계가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 가정부(假政府) : 국제법 차원에서 적법한 정부로 인정받지 못한 사실상의 정부.
여기서는 일제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부르는 말로 사용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활동하다.
김붕준은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군무부 서기로 일을 시작한 김붕준은 1920년 2월 21일에는 군무부 참사로 선임되었고, 군무부가 운영한 육군무관학교 교육과정을 이수하였다. 1919년 임시정부의 군무총장은 노백린이었다. 그러나 노백린은 당시 미국에서 한인 비행사 양성에 힘을 쏟고 있었기 때문에, 군무부의 실무는 김붕준의 몫이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 신년 축하 사진(사진 출처 : 독립기념관)
* 1921년 1월 1일, 앞줄 오른쪽 세 번째가 김붕준
김붕준은 군무총장이 자리를 비운 가운데 군무부의 조직 체계를 정비하고, 1919년 12월에는 군무부령 제1호로 <임시군사주비단제>를 제정 ‧ 공포하였다. ‘임시군사주비단’은 국내외 독립군의 연계와 상호 연락 등 조직망 구축을 목표로 하였다. 이어서 1920년 1월에는 군무부 포고 제1호를 발표하여 군대의 양성과 편성을 통해 독립전쟁을 준비하였다. 이처럼 김붕준은 후일 교통부 참사로 옮겨갈 때까지 임시정부 초기의 군사정책 수립 실무를 맡아 활동하였다.
1922년 김붕준은 교통부 참사에 임명되었다. 김붕준은 교통총장 손정도와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국내로 파견하는 특파원들을 관장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국내로 선전원과 특파원을 파견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였다. 이때 고향에 남은 김붕준의 가족은 이러한 임시정부 특파원들을 숨겨주곤 하였다.
상하이에서 가족들과 다시 만나다.
당시 일제는 3‧1운동에 참여하고 독립자금을 대한민국임시정부로 보내었던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회장 김마리아를 체포하였다. 그러나 김마리아가 감옥에서 건강을 크게 해쳐 죽음 직전에 이르자 형 집행중지하고 감옥 밖으로 내보냈다. 소식을 들은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윤응렴*을 국내로 보내어 김마리아를 상하이로 탈출시키려 하였다.
* 윤응렴은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교통부 참사를 지냈던 사람이다.
윤응렴은 당시 국내에 남아 있던 도인권*의 가족과 김붕준의 가족 또한 상하이로 탈출시켰다. 그리하여 김마리아와 도인권 그리고 김붕준의 가족 등은 중국으로 무사히 탈출하였고, 김붕준은 상하이에서 다시 가족들과 만날 수 있었다.
* 도인권(都寅權)은 임시정부 군사국장, 무관학교 교관·학도대장, 임시의정원 부의장, 상해거류민단장 등을 역임독립운동가이다.
대한적십자회 설립에 참여하다.
일제는 1909년 7월 23일 대한적십자를 폐지하고, 일본적십자사 조선본부로 운영하였다. 그러나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후 안창호를 중심으로 독립운동가들은 대한적십자회를 부활하였다. 대한적십자회는 일본적십자사에 대해 관계 단절을 선언하고 연금의 반환을 요구하였다. 또한 독립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1920년 2월 1일 간호원양성소를 설립하였으며, 외지의 동포 환자를 보살피는 데 앞장섰다.
김붕준은 대한적십자회 설립 선언문과 결의문을 내외에 선포한 78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으며, 이후 적십자회원이 되었다. 이후 1921년 11월 25일 열린 대한적십자회 총회에서 상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상하이 대한교민단에서 활동하다.
상하이에는 독립운동가뿐만 아니라 수많은 한국인이 모여들었다. 1921년 무렵 상하이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의 총수는 560여 명에 달하였다. 이에 상하이 한인들의 단결과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상하이 대한교민단이 조직되었다.
김붕준은 상하이 대한교민단에 참여하여 1921년 제4회 대한교민단 의원총선거에서 본구(本區)*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23년 1월 4일 도인권이 여운형의 뒤를 이어 교민단장이 되자, 김붕준은 교민단 총무로 선임되었다. 그리고 교민단 의사원 총선에서 의사원에 선출되어 교민단 내 여러 일에 크게 기여하였다.
* 당시 임시정부는 본구, 동구, 서구, 북구 등으로 상하이의 지역을 나누어 한인들을 관장하였다.
김붕준은 대한교민단 총무로 일하며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때 학살당한 한인 추도회를 열었고, 11월 7일에는 교민단 주최로 독립운동이 나아갈 길을 주제로 한 연설회를 열었다. 또 1928년 이후에는 대한교민단 단장과 인성학교* 교장을 맡는 등 상하이 한인 동포들의 생활을 보호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기반을 다지는 데 노력하였다.
* 인성학교(仁成學校) : 중국 상하이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자녀를 교육하기 위해 설립한 초등 교육기관.
또 1921년에 5월에는 신규식(申圭植)이 중국의 주요 인사들과 교류하며 한국 독립운동의 지원을 받고자 설립한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원 비서장 등으로 활동하다.
1920년대 초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둘러싼 환경은 매우 어지러웠다. 독립운동의 방략과 임시정부가 나아갈 바를 두고 주요 독립운동가들의 논쟁이 계속되었고, 결국 이를 논의하기 위한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가 열리기도 하였다.
이 시기 김붕준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23년 열린 제11회 의정원 회의에서 김붕준은 차리석 ‧ 최준 ‧ 최석순과 함께 평안도 의원에 선출되었다.
이어서 1924년 12월 박은식은 국무총리 겸 임시대통령 대리를 맡아 혼란스러운 임시정부 안정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그리고 김붕준은 국무를 총괄하는 국무원 비서장에 선임되어 박은식을 보좌하였다.
임시의정원은 박은식은 대한민국임시정부 2대 대통령으로 선출하였으며, 이어서 헌법 개정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1925년 3월 30일 박은식 내각이 제출한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키고, 4월 7일 <대한민국임시헌법>을 공포하였다. 이때 국무원 비서장 김붕준은 대통령 박은식을 모시고 임시의정원에 출석하여 새로 마련한 임시헌법을 낭독하였다.
또 1925년 대한민국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獨立新聞)>이 경영난으로 발행을 중지하자, 김붕준은 <독립신문> 경리에 임명되어 재정 문제를 해결하였다. 그리하여 1926년 1월 1일 자 191호부터 <독립신문>을 다시 발간할 수 있었다.
박은식은 후일 사망할 때 전 민족이 통일할 것을 유언으로 남길 정도로 독립운동 세력의 통일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박은식과의 만남은 이후 김붕준이 충칭에서 임시의정원 의장으로 독립운동 세력의 좌우합작을 추진하는 데 상대한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임시의정원 상임위원으로 활동하다.
박은식 대통령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국무령제를 시행하여 이상룡 ‧ 홍진 등이 국무령에 올랐다. 그리고 다시 1926년 12월 10일에는 김구가 국무령에 취임하였다. 김구는 다시 임시정부의 헌법을 개정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임시정부 3차 개헌안은 1927년 2월 15일 임시의정원을 통과하여 4월 11일 공포되었다.
임시정부 3차 개헌은 임시정부 내에서 국무령 단일 지도 체제를 국무위원 집단 지도 체제로 바꾸었으며, 임시의정원을 임시정부보다 우위에 두었다. 그리고 임시의정원 의원 7인으로 구성한 상임위원회를 설치하여, 임시의정원 폐회 중에도 임시의정원의 권한을 대행하도록 하였다.
한국독립당을 창당하다.
김붕준은 1930년 1월 25일 김구 ‧ 이동녕 ‧ 안창호 ‧ 조소앙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당하였다. 한국독립당의 주역은 이동녕을 비롯한 임시정부 유력 인사와 안창호를 비롯한 흥사단이었다. 한국독립당은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임시정부를 강화하고 독립운동을 주도하려 하였다. 김붕준은 한국독립당 발기인으로 참가하여 한국독립당 광둥지부 대표로 활동하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유지와 옹호에 노력하였다.
흥사단 원동위원부에서 활동하다.
1921년 김붕준은 상하이에서 흥사단 원동임시위원부에 가입하였다. 김붕준의 흥사단 단원 번호는 204번이었고, 흥사단 원동위원부 상하이 지방 단우회 수석반장으로 복무하였다.
1931년 4월 흥사단 원동위원부가 협동조합 형식의 경제운동체인 공평사(公平社)를 만들었다. 공평사는 공동의 경제적 이익을 목적으로 하였으며 사원들의 상호부조*를 기반으로 한 협동조합체였다.
* 상호부조(相互扶助) : 공동생활에서 개인들끼리 서로 돕는 일. 사회 진화의 근본적 동력이 된다.
이에 김붕준은 제1조 조장에 임명되었고, 같은 6월 월례회에서는 제5반 주석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또 국내에서 전개한 이순신 유적 보존 운동에도 참여하여 의연금 45원을 동아일보사로 보내기도 하였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 상하이 훙커우 공원 의거가 일어났다. 이에 일제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와 상하이 교민 사회를 습격하여 애국지사들을 마구잡이로 체포하였다. 이때 안창호와 함께 김붕준의 큰아들 김덕목도 체포되었다. 그러나 김붕준은 흔들리지 않고 어려움에 처한 흥사단 원동위원부의 정상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광둥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1930년 12월 26일 김붕준은 임시의정원 의원을 사직하고 광둥(광동, 廣東)으로 향하였다. 김붕준은 이곳에 한국독립당 광둥 지부를 결성하고 독립운동에 복무할 인재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한인 청년들의 황포군관학교(黃浦軍官學校)와 중산학교(中山學校) 입학을 주선하고 학업에 편의를 제공하였다. 이러한 학생들은 중국 학생들과 연대하여 항일시위운동을 주도하였고, 졸업 후 임시정부와 독립운동 단체 그리고 후일 한국광복군에서 활약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다음과 같은 신문 조서 내용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김붕준은 1933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월대표단 단장에 임명되었다. 김붕준은 중국 국민당 광둥성 당국과 연락하며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한국독립당 기관지 <한성(韓聲)>을 발행하여 선전 활동을 벌이고 한인 동포들에게 독립의식을 북돋았다.
또 김붕준은 중국 국민혁명군 상교 참의에 임명되었고, 이를 통해 한국과 중국의 항일 공동 투쟁을 위해 노력하였다.
1934년 1월 2일 제26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김붕준은 윤기섭 ‧ 김철과 함께 다시 상임위원에 선임되었다. 김붕준은 새로 뽑힌 의원들의 자격을 심사하였으며, 1934년 간행한 윤봉길 의사의 전기인 <윤봉길전>에 김기원(金起元)*이란 이름으로 서문을 썼다. 김붕준은 서문에서 “윤봉길의 의거는 한국이 나라를 되찾고, 중국이 망국에서 구해지고, 동양 평화를 이루는 길”이라고 평가하였다.
* 김기원은 김붕준이 중국에서 원활히 활동하고 일제 감시에서 벗어나기 위해 중국 국적을 취득할 때 개명한 이름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수호를 위해 노력하다.
1935년 각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 논의가 활발히 일어났다. 김붕준이 속한 한국독립당은 대동단결에는 동의하나 이를 위해 당을 새로 만드는 것에는 반대하였다. 또 임시정부를 그대로 유지할 것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한국독립당이 앞서 내린 결정을 바꾸고 새로 결성하는 민족혁명당에 참가하기로 하자, 김붕준은 이동녕 ‧ 이시영 ‧ 차리석 등과 함께 임시정부 사수*를 결의하였다.
* 사수(死守) : 죽음을 무릅쓰고 지킴.
김붕준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재정비를 위해 노력하였다. 1935년 10월 항저우에서 임시의정원 제28차 정기회의가 열렸고, 김붕준은 국무원 비서로 선출되었다. 또 1935년 11월 김구 ‧ 이동녕 ‧ 조완구 ‧ 송병조 ‧ 양우조 등과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지할 정당으로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을 결성하였다. 한국국민당은 김구를 이사장에 선출하였으며, 김붕준은 이사에 선출되었다. 이후 김붕준은 다시 광저우로 파견되어 한국국민당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일에 힘썼다.
1935년 당시 김붕준의 모습(사진 출처 : 독립기념관)
* 흥사단 제22회 창립 기념사진(1935. 5. 13)
왼쪽부터 김붕준, 김철, 양우조
한국국민당 선언
인류가 자기국가가 다른 국가에게 침점되어 타국인의 군림 아래에서 영예, 생명, 재산을 박탈당하고 노예가 되어 도살되는 일을 감수하는 자가 있을까?
문화 수준이 최저급인 야만인이라도 참고 받아들이는 것을 긍정하는 자는 없으며 자기들의 본능을 발휘하는 것인데, 하물며 5천 년간 자주독립해온 국가생활을 처음으로 원수인 적에게 빼앗기고 찬란 유구한 역사와 영예를 말살당한 우리들에게서랴.
국가의 존엄이 폐허를 이루고 인민의 지위가 소나 말과 같으며, 따라서 전반적으로 고혈을 착취당하고 정신적인 양식조차 빼앗겨 암흑의 마귀굴에서 입 막히고 발이 묶여서 사멸로 나아가는 우리들. 30년래 전 국민의 운동이 끊임없이 희생에 희생을 더하고 혁명적 광복운동에 헌신한 우리 국민성을 가진 우리들로서는 한 시라도 견딜 수 없다.
이와 같은 역사와 광휘가 얼마 안 되는 좁은 땅을 탈환하지 못하고 철제 유린에 슬프게 부르짖는 동포의 소리가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것은 어째서인가. 적의 세력이 강한 까닭도 사실의 하나이지만 자기 자체의 착오에도 역시 중요한 성분을 가지고 있다. 즉 사상의 차이, 견해의 부동, 조직의 무능 등이 상당히 큰 원인 요소이며, 기본적인 수치, 도덕의 문란, 현대적 종횡술책의 남용이 최대의 요소라는 점도 긍정하지 않을 수 없다.
(중략)
적의 모든 세력을 박멸하여 완전한 민주공화국을 건설하며 위로는 조상의 광휘를 빛내고 아래로는 자손만대에 영예를 발전시켜서 세계 각국 민족과 공존공영을 도모할 것을 선언한다.
한국인은 분기하여 일치하여 원수인 적 일본을 박멸할 것.
완전 순수한 광복과 생을 도모하는 정신을 발휘할 것.
우리 국민의 정신적 기관인 임시정부를 옹호 고수할 것.
한국광복 성공 만세.
대한민국 17(1935)년 11월 일
한국국민당
이사장 김구
이사 이동녕 · 송병조 · 조완구 · 차리석 · 김붕준 · 안공근 · 엄항섭
감사 이시영 · 조성환 · 양묵
- 자료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35권 한국국민당Ⅰ)
한국국민당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기반 역할을 하였으며, 당 기관지 <한민>을 발행하여 선전 활동을 펼쳤다. 또 산하에 한국국민당 청년단과 한국청년전위단을 두었다. 이 중 한국청년전위단은 광둥 지방에서 한국국민당의 세력 기반을 넓히기 위해 김붕준이 1937년 2월 결성한 단체였다.
1937년 일제가 상하이를 다시 침공하면서 본격적으로 중일전쟁이 일어났다. 특히 일제가 난징을 점령하고 대학살을 벌이자 중국 내에서 항일 분위기가 크게 올랐다. 이러한 때에 김붕준은 광둥 지역에서 외교 및 선전 활동에 주력하였다. 또 1938년에는 흥사단 원동임시위원부 위원장에 선출되어 흥사단을 이끌어가는 책임도 맡았다.
1940년 5월 김붕준은 치장(기강, 綦江)에서 통합 한국독립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통합 한국독립당은 김구를 위원장으로 선출하였고, 김붕준은 조완구 ‧ 조소앙 ‧ 엄항섭 ‧ 지청천 등과 함께 중앙상무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임시의정원 의장으로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다.
김붕준은 1935년 열린 제28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임시정부 광둥 대표에 선임되었다. 1936년 11월에는 제29회 임시의정원 상임위원회 주석으로 선임되어, 1937년까지 상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1939년 제32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임시의정원 18대 의장에 선출되었다.
김붕준 일가가 기증한 임시의정원 태극기
(사진 출처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중일전쟁으로 일제 침략이 강화되자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40년 충칭(중경, 重慶)으로 이주하였다. 김붕준 역시 광둥에서 충칭으로 이주하였다. 김붕준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조직과 체제를 확대하고자 헌법 개정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1940년 10월 9일 새로 개정한 <대한민국임시약헌>을 공포하였다. 이번 개헌으로 독립운동을 보다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국무위원회 중심의 집단 지도 체제에서 주석 중심의 단일 지도 체제로 정부 조직을 바꾸었다.
김붕준은 임시의정원 의장으로서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에 힘을 기울였다. 앞서 보았던 것처럼 김붕준은 먼저 민족주의 정당인 한국국민당 ‧ 한국독립당 ‧ 조선혁명당 등 3당 합당에 한국국민당 대표로 참가하였다. 그리하여 통합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다.
한국독립당 창당식 기념 사진(사진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 1940년 5월 8일, 앞줄 왼쪽 끝이 김붕준
이어서 김붕준은 좌익*계인 조선민족혁명당과의 통합을 추진하였다. 김붕준은 평소 여러 독립운동 세력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통합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1941년 5월 조선민족혁명당은 제5기 중앙위원회 7차 회의에서 임시정부 참여를 결의하고 11월 전당대회를 거쳐 임시정부 지지를 선언하였다. 그리고 자신들이 임시정부에 참여하는 것을 승인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 좌익(左翼) : 정치에서 급진적이거나 사회주의적 ‧ 공산주의적인 경향. 또는 그런 단체. 1792년 프랑스 국민 의회에서, 급진파인 자코뱅당이 의장의 왼쪽 의석을 차지한 데서 나온 말이다.
당시 우익*계 민족주의 세력이 주류였던 임시정부는 이를 불신하였다. 그러자 김붕준은 1941년 10월 제32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의장 권한으로 조선민족혁명당 대표들을 임시의정원에 등원시키려 하였다. 이는 평소 김붕준의 주장대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 세력 통합을 위해서였다.
* 우익(右翼) : 정치에서 보수적이거나 국수적인 경향. 또는 그런 단체. 1792년에 프랑스 국민 회의에서, 온건파인 지롱드당이 의장의 오른쪽 의석을 차지한 데서 나온 말이다.
그러나 이는 임시정부의 여당이었던 한국독립당의 큰 반발을 샀다. 그리하여 김붕준은 임시의정원 의장에서 물러나야 했다. 또 한국독립당에서 나와야 했다.
하지만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을 추진한 김붕준의 노력은 이듬해 결실을 맺어 조선민족혁명당이 1942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합류하였다. 그리하여 10월 25일 열린 제34회 임시의정원 정기회의에서 좌우익 단체들이 참여하여 ‘통일 의회’를 구성하였고, 임시정부 국무위원에도 좌익계 인사들이 선임되었다. 그간 독립운동 세력 통합에 앞장선 김붕준의 노력이 헛되지 않은 것이었다.
다시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활동하다.
1942년 2월 김붕준은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과 한국독립당통일동지회를 결성하였다. 그리고 조선민족혁명당과 합당하였다. 이때 일제가 점령한 상하이의 흥사단 원동위원부가 해소를 선언하고 단원들의 명의를 도용하여 전향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김붕준은 충칭의 흥사단 원동위원회 단원들과 함께 즉각 반박 성명서를 발표하고, 원동위원부의 부활을 선언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한국광복군을 성립한 후 소속 장병들의 생활 유지를 위해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1942년 11월 한국광복군총사령부 내에 ‘유한책임한국광복군사령부 군관소비합작사(有限責任韓國光復軍司令部 軍官消費合作社)’를 설립하였다. 소비합작사는 광복군 장병들에게 생활용품을 저렴하게 공급할 수 있도록 설립한 소비조합이었다. 김붕준은 소비조합 설립과 운영에 참여하였고, 1944년 5월 6일에는 황학수 ‧ 차리석 ‧ 최석순 등과 함께 임시정부 생계설계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44년 4월 26일 열린 제36회 임시의정원 회의는 임시약헌 개정안을 통과하고 국무위원의 수를 늘렸다. 이때 김붕준도 국무위원에 선임되었다. 이와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한국독립당 ‧ 조선민족혁명당 ‧ 조선민족해방동맹 ‧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등 4개 단체의 연합 선언을 발표하였다. 이로써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진정한 통일 정부가 되었다.
일제의 패망을 예견한 김붕준은 1945년 2월 홍진 ‧ 유동열과 함께 신한민주당(新韓民主黨)을 창당하였고, 이어서 3월에는 홍진 등 50여 명과 함께 한국구제총회(韓國救濟總會)를 창립하면서 광복을 준비하였다.
새 나라 건설을 위해 애쓰던 중 납북되어 사망하다.
1945년 8월 15일 김붕준은 중국에서 광복을 맞이하였다. 그리고 12월 1일 임시정부 요인 2진으로 군산비행장을 통해 귀국하였다. 김붕준은 흥사단 국내위원부를 결성하는 한편 임시정부가 1946년 2월 20일 18개 단체를 모아 비상정치회의 준비회의를 열자 김붕준은 신한민주당 대표로 참여하는 등 새 나라 건설을 위해 노력하였다.
또 김붕준은 외국의 신탁통치를 반대하였으며, 김구 ‧ 김규식과 함께 1948년 남북협상회의에 참여하여 통일 국가 수립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북한은 국제연합이 제시한 총선거에 끝내 응하지 않았다. 결국 남과 북의 각각 단독정부가 들어서면 김붕준의 노력은 결실을 맺지 못하였다.
더구나 북한은 남침을 하여 6‧25전쟁을 일으켰다. 북한은 서울을 점령하고 아직 피난을 가지 못한 애국지사들을 억류하였으며,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으로 후퇴하면서 이들을 강제 납북하였다. 김붕준은 역시 강제로 끌려가던 도중 1950년 9월 28일(또는 29일 새벽)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김붕준의 공훈을 기리어 1989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김붕준의 가족 이야기
김붕준은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인 1911년 같은 고향 출신의 노영재(盧英哉)와 혼인하였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들 김덕목(1913년생)과 딸 김효숙(1915년생), 김정숙(1916년생)을 두었다.
상하이로 이주한 후 부인 노영재는 바느질하여 넥타이를 만들고, 이 넥타이를 팔아 생활비를 벌었다. 또 노영재는 국수를 좋아하는 박은식에게 국수를 대접하고 임시정부 요인들의 식사를 마련하는 등 애국지사들의 생활을 지원하였다.
삼 남매는 상하이에서 인성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아버지 김붕준을 따라 광저우로 가서 중산대학을 다녔다. 그리고 각각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리하여 김붕준의 가족은 부부는 물론이고 아들 ‧ 딸 ‧ 사위까지 모두 건국훈장을 받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