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인천을 '대한민국의 관문'으로 표현한다. 이 명칭은 근대 해양시대, 서구 문명이 당시 국내 최대항이었던 인천을 통해 유입된 데서 유래됐다. 이후 김포공항, 인천국제공항 등이 들어서면서 '관문'이란 표현은 더욱 고착화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근대 이전에도 인천은 결코 지나치는 도시가 아니었다. 오히려 한민족 역사가 시작된 중심지였음을 강조하고 싶다. 필자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조명해 보면서 인천을 '개척의 도시'라고 표현하는 것이 어떨까라는 생각을 인천시민과 행정당국에 제안해 본다. 대한민국 역사의 중심지였던 인천.
기원전 5천년 전부터 인천에 인류가 살았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강화도 뿐만 아니라 인천 곳곳에서 구석기 유물이 속속 나오고 있고 그 이후 신석기나 청동기시대에 쓰였을 것으로 보이는 것들도 심심찮게 나와 강화도를 중심으로 한 인천지역에 꾸준히 정착촌이 형성됐음을 짐작케 한다. 인류의 시작과 더불어 인천이 황해의 중심지였음을 알려준다.
당시부터 내려온 사회·문화·경제적 유산은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의 아들인 비류(沸流)가 지금의 인천 문학산에 미추홀(彌鄒忽)을 건국하는 바탕이 되기도 했다. 혼란한 시기 인천은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개척의 도시로 각광받은 것이다. 고려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고려 왕조는 대외무역 활성화를 위해 건설한 수로의 중심도시로 인천을 설정하고 대대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문종에서 인종에 이르는 7대동안 왕실과 깊은 인연을 맺어 칠대어향(七代御鄕)이란 칭호를 받기도 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도 인천의 문화·지리·경제적 중요성이 매우 컸음은 병인양요(1866년), 신미양요(1871년)와 같은 역사적 사건이 증명하고 있다. 비록 강대국들의 힘에 의해 제물포가 개항되긴 했지만 인천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외국문물을 받아들인 도시가 됐다.
이제 인천은 동북아를 개척하는 중심도시로 거듭나야 한다. 이젠 주변도시, 경유도시로서의 성격을 지워야 한다. 서울 외곽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수도를 보조해야 한다는 퇴행적 사고를 정리해야 한다.
인천의 역사는 우리나라의 중심부를 관통하고 있다. 한민족의 시작에서부터 미추홀의 건국, 몽고군에 대항한 강화천도, 정묘호란, 병인양요, 신미양요, 제물포 개항, 인천상륙작전 등 굵직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이 인천을 무대로 하고 있다. 인천시는 '동북아 중심도시 인천'을 미래 청사진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를 위해 지하철을 놓고 고속도로를 확충했다. 공유수면 매립을 통해 산업·물류단지를 조성중이며 관광·레저단지도 구축중이다. 또 우리나라 최초의 경제자유구역 조성에 한창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더 이상 주변도시도 보조도시도 아니다. 그야말로 대한민국, 동북아를 '개척하는 도시'로 발돋움하고 있는 것이다.
인천은 역사적인 수 많은 사건 속에서도 고난과 시련을 극복하고 유구하게 명맥을 이어왔다. 그리고 지금 더 힘찬 전진을 준비하고 있다. 고된 역사를 딛고 일어선 희망의 도시 인천이 대한민국 나아가 동북아 희망도시로의 비상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이의 성공을 위해선 모든 구성원에게 능동적이고 진취적인 기상을 심어줘야 한다. 전근대적 시야에서 벗어나 앞을 내다보는 혜안을 갖도록 해야 한다.
동명성왕의 아들 비류가 문학산에 올라 한반도를 개척하고 고조선 영토를 회복하겠다는 꿈을 키웠듯이 말이다. /박철호(한민족문화재단 상임대표) 경인일보 2005-0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