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무성 의원이 직접 말하는 ‘나의 개인사와 가족사’
⊙ 아버지는 원내총무, 아들은 원내대표. 국내 최초 父子 원내 책임자
⊙ 장인도 5選 국회의원 출신, 연기자 길 걷는 아들에게 정치의 業 물려주고픈 맘 없어
⊙ 올 4월 부산 영도 선거 때 돌아가신 둘째 형님 얼굴 맴돌아
⊙ 차기 대권도전? “어떻게 해야 인생 마무리 잘할 수 있을까 고민”
金武星
⊙ 62세. 한양대 경영학과 졸업. 부경대 명예정치학 박사.
⊙ 15~19대 국회의원, 청와대 민정·사정비서관, 내무부차관, 한나라당 사무총장·원내대표.
⊙ 황조근정훈장 수훈.
그는 국회의원에 5번 도전했다. 5번 도전 가운데 두 번 낙천(落薦)했다. 그런데도 5선(選) 국회의원이다. 두 번의 낙천을 받으면서 한 번은 탈당을 선택했고, 한 번은 당 잔류를 선택했다.
‘이명박(李明博) 대통령 시대’가 막을 열었던 2008년 총선에서는 친박(親朴)이라는 이유로 한나라당 공천에서 탈락했고, ‘박근혜(朴槿惠) 대통령 시대’를 준비하던 2012년 총선에서는 그의 이름이 언론에 의해 탈박(脫朴)으로 묶인 상황에서의 낙천이었다.
2008년에 그는 낙천에 불복해 당(黨)을 탈당한 후 ‘친박 무소속연대’라는, 우리 정치사에서 그 이전까지 유사한 이름조차 볼 수 없었던 이름을 달고 돌풍을 일으키며 친박 무소속 후보들과 동반 당선했다. 2012년 총선에서는 낙천 후 탈당 대신 불출마와 당 잔류를 선언했지만 금년 4월 국회의원 재(再)선거를 통해 국회로 귀환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두 번이나 낙천했음에도 불구하고 국회의원에 5번 도전해 5번 모두 금배지를 단 셈이 됐다.
5선 의원 김무성(金武星). 국회에 다시 입성한 그를 놓고 언론은 ‘돌아온 무대’라는 표현을 썼다. 언론이 표현한 그때의 ‘무대’는 ‘김무성 대장’의 줄임말인 그의 별칭과 그의 활약이 펼쳐질 국회라는 ‘무대(舞臺)’의 중의적인 표현일 것이다.
그만큼 김 의원이 다섯 번 국회의원을 하는 동안 사무총장, 원내대표로서 국회에서 보여준 활약상에 대한 기대치 또한 높았다는 방증이다. 그런 김 의원에 대한 국회 안과 밖의 시선은 그의 무대를 국회라는 한 공간에 머물러 있지 않게 하고 있다.
최근 그가 주도했던 공부모임에 새누리당 소속 국회의원 3분의 2가 참석했던 데서 알 수 있듯이 세상은 그를 그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큰 뜻을 품은 사내’로 읽고 있다. 국회의원으로서 그의 가슴에 달았던 5개의 금배지가 주는 무게 이상의 무게로 그의 행보를 보는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일까.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해야 할 처신에 대해 자중자애(自重自愛)라는 표현을 쓰며 조심스러운 행보를 보이고 있다. 김 의원은 《월간조선》과의 인터뷰 전제 조건으로도 정치 이야기는 최소한으로 하고 가족 이야기를 주로 하자는 조건을 달았다. 김 의원이 지금까지 자신의 가족사를 공개적으로 밝힌 적이 없었던 터였기에 《월간조선》은 그 조건을 수용하기로 했다.
朴智元과 5시간 동안 TV프로그램 녹화
김 의원의 빡빡한 요즘 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듯 우리는 오전 7시30분에 만나야 했다. 전날 저녁 그는 “전직(前職) 의원들을 만났다”고 했다. “그들에게 미안해서 오랜만에 만나 술 한 잔 샀다”고 했다.
. 그 전직 의원들이란 다름 아니다. 김 의원이 2012년 총선 당시 낙천 당한 후 국회의원 불출마와 당 잔류를 선언함으로써 금배지 도전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다. 한나라당 공천에서 탈락한 김 의원을 중심으로 새로운 당을 만들어 출마하려고 했지만 김 의원의 백의종군 선언으로 국회의원 도전 포기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다.
김 의원은 당시 불출마 선언을 “선언 당일 아침에 결심했다”고 했다. “만약 대통령 선거가 끝난 후였다면 2008년처럼 무조건 당을 만들어서 새누리당 탈당을 결행했을 것”이라고 했다. 탈당 후 당을 만들었다면 2012년 총선에서 몇 명의 당선자를 낼 수 있었을까. 그는 “30석은 넘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 길이 보수의 분열을 막는 길이었기 때문에 당시의 선택에 후회는 없다고 했다. 그때 함께할 뻔했던 전직 의원들에게 미안함이 남아 있는 것이다.
저녁 한 끼 식사로 달래줄 수는 없는 일이지만 김 의원은 “그런 분들을 잊지 않고 미안한 마음을 한 끼 식사로라도 표현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고 말했다. 인간의 도리를 말하기 위해 전날 저녁의 일을 설명하는 그의 표정에서 인간적 섬세함이 읽혀졌다. 큰 덩치만큼이나 투박한 ‘경상도 사내’의 모습만 연상하고 있었던 기자에게는 의외의 모습이었다. 김 의원은 편안한 노타이 차림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김 의원은 최근 한 종합편성 채널이 준비 중인 <비무장 정치쇼:적과의 동침>이란 프로그램 녹화를 마쳤다. 이 프로그램은 여야 국회의원들이 나와 민심과 유행 등에 대해 문제를 푸는 퀴즈쇼를 표방하고 있다.
—<적과의 동침> 녹화는 잘 마쳤습니까.
“2회분 녹화를 했는데 5시간이나 방송국에 잡혀 있었습니다.”
—민주당 박지원(朴智元) 의원이 상대팀으로 나왔다던데 이겼습니까.
김 의원은 박 의원을 박 대표라고 불렀다. 2010년 두 사람은 비슷한 시기에 여야 원내대표를 지냈다.
“녹화 현장에서도 박 대표가 주로 말을 많이 했어요. 박 대표하고 저하고 관계는 항상 그래요. 말은 박 대표가 다하고 마무리는 제가 하고 그런 식이었어요. 그런데 정치에 뭐 이기고 지는 게 있나? 결국은 다 함께 가는 거지.”
그러면서 김 의원은 “우리 정치 이야기 대신 가족 이야기를 주로 하기로 하지 않았나요?” 하면서 말머리를 돌렸다. 말머리를 돌리면서 갑자기 생각이 났다는 듯 최근에 김 의원이 주도했던 역사공부모임이 ‘계파 정치 시작’이니 ‘줄 세우기’니 하는 시각으로 비치는 데 대해 언짢은 반응을 보였다.
“제가 한국사 권위자인 이배용 전 이화여대 총장을 만나서 저녁을 먹다가 역사교육 문제에 대해 얘기가 나왔어요. 영향력이 큰 국회의원들이 좌경화된 교과서의 문제를 알아야 한다는 데 서로 공감을 하게 된 자리였어요. 막연하게 좌경화된 교과서가 큰일이다, 할 게 아니라 국회의원들이 실체를 알아야 쇼크를 받아 바로잡으려고 하지 않겠나, 하는 이 총장의 생각에 제가 동의를 했고 그래서 역사교실을 만들기로 했고 그 자리에 함께 있던 김학용 의원이 간사를 맡기로 하고 제 이름으로 간단한 편지를 써서 보낸 거예요. 단 한 명한테도 가입하라고 얘기한 적 없고요. 그런데 그렇게 많은 분이 왔던 겁니다. 그런데 보도가 내가 뭐 계보를 만든다느니, 줄 세우기라느니, 눈도장이라느니 그렇게 나가는 거예요. 저는 차라리 괜찮아요. 그건 그 자리에 참석한 의원들을 모욕하는 거예요. 저도 그 자리에 가서 정치 이야기는 단 한마디도 안 했습니다.”
—오늘 신문에는 복지와 통일 관련 공부 모임도 한다고 나왔던데요.
“정치인으로서 우리의 노령화 사회나 통일 대비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런 보도가 또 나가니까 줄 세우기 소리 들을 거고 해서 당분간 보류할 생각입니다. 하더라도 정말 정치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순수한 공부모임이라고 봐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父親은 일본 헌병대의 제거 대상”
—부자간에 집권여당 원내대표를 맡았던 경우는 우리 정치사에서 김 의원 부자간이 처음이죠?
“아, 그 이야기는 숨기고 싶은 이야기인데….”
—정치인으로서 자랑스러운 일 아닙니까.
“아니 부끄럽다는 얘기는 아니고, 한 번도 제 입으로 얘기한 적이 없어요. 부자간에 다 해먹는다는 소리 듣는 게 싫어서 일부러 이야기를 안 해왔습니다. 질문하신 대로 우리 국회에서는 처음 있는 일로 알고 있습니다.”
—부친이 초선 국회의원만 하고 더 이상 안 한 이유가 있습니까.
“아버지께서는 6·25전쟁 중에 맡고 있던 주일(駐日) 대표부 특명전권공사직을 떠나서 전쟁 중에 파괴된 전남방직 공장을 재건하는 데 전력을 쏟았다고 해요. 그런데 산업은행 융자가 취소되는 등의 탄압이 들어왔는데 이유는 당시 야당에 거액의 자금을 제공했다는 사실이 발각됐기 때문이었죠. 그래서 전쟁 중에 일본으로 피신하셨다가 1956년에 다시 귀국해 사업을 시작하려는데 자유당 정권의 탄압이 또 시작된 거예요. 아버지께서는 그때 정계로 진출해 자유당 정권에 맞설 생각을 하셨답니다. 1958년 민의원 선거에 무소속 출마를 강행했는데 자유당 후보에게 42표 차로 져 떨어졌답니다. 부정선거에 지신 거죠. 그러다가 4·19 후에 출마해 당선됐는데 그게 5·16이 나면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이후로는 정계와 일절 인연을 끊고 사업에만 전념하셨던 거죠.”
김무성 의원 어린시절 사진
—부친께서 김 의원이 정치하는 것을 반대한 이유는 그런 개인적 아픔 때문이었습니까.
“우리 집안 사람들 성격이 학자스럽다고 할까, 그런 성격을 가졌어요. 5·16 후 아버지께서 군사정권에 붙잡혀 가 한두 달 동안 조사받고 나오셨어요. 죄가 없으니까 풀려나셨겠죠. 풀려나신 후에는 어린 우리를 앉혀놓고 ‘내가 사업을 하다가 정치라는 외도를 해봤는데 이게 해보니까 우리 집안 사람들 성격하고는 안 맞는다. 너희는 절대 정치할 생각 마라’고 신신당부를 하셨죠.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김 의원께서는 부친의 말씀을 거역한 거네요.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네요. 제가 우리 집안 돌연변이인 셈이죠(웃음).”
—그런 부친에 대해 최근 친일문제가 제기됐는데요.
김 의원은 이 질문에 호흡을 가다듬었다.
“아버지가 친일파라는 주장은 참으로 어이없는 주장입니다. 차라리 저에게 모욕을 주는 것은 참을 수 있지만 돌아가신 아버지를 끄집어내 친일의 굴레를 씌우는 일은 정말 어처구니없는 주장입니다.”
김 의원 부친에 대한 친일 문제는 최근 유시민(柳時敏)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제기했다. 유 전 장관은 자신의 홈페이지에 김 의원의 부친이 “일제강점기 경북도회 의원, 조선임전보국단 간부였다. 전쟁에 나간 ‘황군(皇軍)’에게 위문편지 보내는 운동을 폈다”는 등의 주장을 펼쳤다.
“하도 가당찮은 주장이라 대꾸조차 안 하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대꾸를 안 하면 기정사실로 받아들인다고 해서 제가 이렇게 자료까지 만들었습니다.”
김 의원이 내민 자료는 일제하인 1925년 5월 9일자 《동아일보》에 김용주 회장 등 포항 지역 유지들이 포항에 노동야학을 개설해 무료로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내용이 실린 기사를 비롯해 1930년대에는 포항에다 자신의 재산 절반을 털어 영흥학교를 세워 조선인들 교육에 앞장섰던 김 회장의 활약상을 소개한 기사들이었다. 이런 기사들은 1940년대까지 이어졌다.
중동고등학교 시절 김무성 의원
친일을 주장하는 측이 증거로 내세우고 있는 당시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1941년 12월 9일자 기사 하나보다는 그 양과 질에서 상당한 차이가 난다. 김 의원의 말이다.
“1941년 12월 9일자 매일신보에 아버님이 조선임전보국단 상임이사로 위촉지명됐다는 짤막한 기사가 나와요. 그런데 보세요. 당시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인을 보면 3·1운동 33인이었던 한용운, 오세창, 권동진, 정춘수의 이름도 나오고 이 외에도 유진오, 장면, 주요한, 정인보, 조병옥과 좌익계열인 백남운, 홍명희, 송진우, 여운형 등 일제강점기 민족지도자들이 총망라돼 있습니다. 상당수 인사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강제로 가입한 걸 알 수 있는 거죠.”
김 의원은 답답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아버지께서는 1926년 10월 포항에서 3·1 정신을 이어받는다는 취지로 ‘삼일상회’를 설립했다가 불온하다는 이유로 상호를 고치지 않으면 구속하겠다는 위협에 맞서다가 18년 만인 1944년에 간판을 내리는 일도 있었습니다.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됐다가 풀려난 일도 있었고요. 하나만 더 말할까요. 일제 말에 일본이 조선의 주요 인물 3000명을 학살하는 계획을 세웠는데 아버지도 거기에 포함돼 있었답니다. 아버지는 가족들을 산중으로 피신시키고 당신께서도 몇 달 동안 도피생활을 하시다가 광복을 맞았답니다. 이런 게 친일입니까?”
김 의원은 친일 문제와 관련된 말 말미에 이런 말을 덧붙였다.
“저는 말실수를 하면 바로 사과를 합니다. 제가 과거 국회에서 유시민 장관이 베이징 북한대사관에 갔다는 발언을 했어요. 유시민 장관이, 아니라는 증거를 들이대고 반박했죠. 전 깨끗이 잘못했다고 바로 인정하고 사과했습니다.”
한양대학교 재학시절 김무성 의원
직접 YS 찾은 이유
—부친이 정치를 반대했는데도 김 의원은 중동고 재학 시절 서울시내 12개 고등학교를 규합해 3선개헌 반대 집단 시위를 하려다가 발각되는 일도 있었다는데 일찍 사회참여에 눈을 떴던 것 같습니다.
“제가 우리 집안의 돌연변이라고 하잖아요(웃음). 그 당시 아버지는 사업하느라 바쁘셔서 제가 그런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잘 모르셨어요.”
—어떻게 돌연변이가 됐습니까.
“제가 초등학교 때 아버지가 참의원 선거에 나갔는데 그때 온 식구들이 집에 모여서 선전물을 접고 했습니다. 저도 그 일을 했죠. 아버지가 유세를 하면 어떻게 하시나 연단 앞에서 듣기도 했죠. 그렇게 하면서 돌연변이가 만들어진 것 같아요. 결국 정치는 말이거든요. 어디에 가서 말을 어떻게 요령껏 감동적으로 전하느냐, 그게 중요한데 저는 어려서 아버지를 보고 체득한 거죠. 친구들에게 감동을 주다 보니까 반장도 하게 되고 앞에 나서게 되고 그랬던 거죠. 고등학교 때 3선 개헌한다고 하기에 서울 광화문부터 안국동, 혜화동 로터리까지 주변에 있는 고등학교 모두를 규합해 반대 시위를 하려고 했다가 들켜서 잡혀갔죠. 고생 좀 했습니다.”
—공식적으로 정계(政界)에 입문한 시기는 통일민주당 창당 시기인 1987년이라고 봐야겠죠?
“아니죠. 본격적으로는 민추협 활동을 한 83년도부터라고 봐야죠. 결심은 80년 광주를 간접적으로 겪게 되면서 하게 된 것이고요.”
—80년 광주요? 그때는 사업하고 있을 때 아닌가요?
“제가 포항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데 그때 친한 친구의 처가가 광주였습니다. 프로골프 선수 한희원의 아빠인데 장인이 광주에서 병원을 하시는데 다 죽었다는 소문이 도니까 부인이 울고 난리가 났죠. 그때는 광주와 외부의 연락이 완전히 끊긴 상태라 여기저기 알아보는 과정에서 과장된 측면도 있었지만, 광주에 관한 소문을 듣게 된 겁니다. 우리나라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나도 민주화 투쟁에 참여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김영삼(金泳三·YS) 전 대통령을 찾아가면서 정치와 연을 맺게 된 겁니다.”
장인어른은 정치활동 지지
김 의원은 자신의 정치적 스승으로 김영삼 전 대통령을 꼽았다. 김 전 대통령이 2008년 3월 19일 공천에서 탈락 후 무소속 출마를 선언한 김무성 의원을 격려하는 모습. |
|
—그 당시는 가족들의 정치활동을 반대하던 부친이 생존해 계실 때인데 괜찮았습니까.
“연로하신 아버지가 정치하는 거 알면 난리가 나니까 숨어서 했죠. 숨어서 하다가 아버지가 85년도에 돌아가시면서 표면으로 나왔죠.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YS가 연금상태를 몰래 피해가지고 문상을 하러 왔어요. 저 때문에 온 것이었죠. 저는 입 다물고 있으니까 ‘옛날에 아버지하고 YS하고 잘 아는 사이니까 그 인연으로 오셨는 모양이다’ 하고 생각하는 가족도 있었고, 우리 자형은 자기하고 ‘서울대 동문이라 그것 때문에 온 모양이다’ 서로 이렇게 생각했죠. 한참 후에야 가족들은 저 때문에 YS가 문상을 왔었다는 걸 알게 됐어요.”
—부친께서는 민주당 구파였습니까.
“YS는 호남사람들을 중심으로 한 민주당 구파인데 경상도 사람이고 DJ는 경상도 사람들이 중심이 된 민주당 신파인데 전라도 사람이었죠. 아버지는 신파였습니다. 아버지는 YS보다 DJ랑 교류가 더 많았던 거죠. 작은아버지께서 사업을 했는데 DJ를 도와주다가 걸려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고생 많이 했어요.”
—항간에 속설로 YS와 부친이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에 김 의원께서 정치에 입문하게 됐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었군요.
“전혀요. 제가 제 발로 찾아가서 YS를 만났어요. YS가 그때는 저를 보고 재벌집 아들이라고 그냥 불렀어요. 재벌집 아들이 큰 피해를 입을 수 있으니까 당시 김덕룡 실장을 자신처럼 생각하고 교류를 하라고 하셨죠. 그때 미행이 많이 붙었는데 미행을 따돌리는 법도 배우고 그랬었죠.”
—1980년대 초면 신혼 때 아닙니까.
“신혼 때였죠.”
김 의원의 장인인 최치환 전 의원
김 의원의 장인은 5선 의원 출신인 최치환(崔致煥) 전 의원이다.
—장인께서는 김 의원의 정치 참여를 반대하지 않았습니까.
“장인이 YS를 좋아했어요. 장인은 제가 정치를 하겠다고 하니까 해야 된다고 하셨죠.”
김무성 의원의 이야기는 1987년 통일민주당 창당 비화로 넘어갔다. 큰형님(김창성)의 도움을 받은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였다.
“YS가 사무실을 사대문 안에 구하라는 거예요. 돈이 얼마나 있느냐고 물어보니까 한 1억5000만원 정도 있다고 그래서 사무실 200평 이상 되는 거 구하러 다니는데, 50평 이상 사무실 얻으려는 사람이 있으면 경찰에 신고하라고 지령이 내려졌던 거예요. 창당을 방해하려는 거였죠. 안 되겠다 싶어서 차라리 빚을 안고 조그마한 빌딩을 사면 감시를 피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서울 서부역 중림시장 언덕배기에 있는 한 2억원쯤 되는 빌딩을 제 이름으로 샀어요. 사무실 내부시설 다 하고 집기도 다 집어넣고 오픈했는데 경찰, 안기부, 기무사가 다 낌새를 못 챘어요. 그런데 KBS 뉴스에 크게 터진 거예요. 통일민주당이 당사를 중림동에 구했다고요. 그때 나는 속으로 죽었다고 생각했어요. 독재정권에서 김무성이가 빌딩을 샀다고 하니까 우리 집은 완전히 망했구나 했는데 다행히 우리 큰형님 하고 김윤환 전 의원, 노태우 전 대통령이 다 경북중학교 동기들이었어요. 그래서 피해를 좀 피했지요. 큰형님이 두 사람한테 ‘내 동생이 하나 있는데 저놈이 YS한테 미쳐가지고 내 말도 안 듣고 나도 어쩔 수 없다’고 당시 민정당 대표였던 노 대통령에게 이야기한 모양이더라고요.”
연기자 아들에게 부산 사투리 가르쳐주기도
김 의원은 슬하에 1남2녀를 두고 있다. 아들 김종민군은 고윤이라는 예명으로 연기자의 길을 걷고 있다. 지난 4월 KBS2에서 인기리에 방영됐던 《아이리스2》에도 출연했다.
—하나뿐인 아들이 대학 1학년 때 정치를 하고 싶다고 했는데 왜 반대를 한 겁니까.
김 의원은 아들과 관련된 질문에 대한 답을 부친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했다.
“우리 아버지가 1905년생이에요. 옛날 분이라 그런지 자식들을 엄하게 키웠어요. 저도 어려서부터 검소함이 몸에 배어 있죠. 아버지는 양복이 헐면 그걸 뒤집어서 입을 정도로 검소한 분이었습니다. 지금도 저는 이면지 절대 안 버리고 지금 타는 승용차도 15년째 타고 있습니다. 방학 때 친구들은 다 놀러가는데도 저는 공장이나 목장에서 일을 안 하면 등록금을 안 주셨어요. 아버지한테 엄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저는 우리 애들만은 자유롭게 키우고 싶었어요. 너네 하고 싶고 원하는 거 다 하라고 했죠. 그런데 아들놈이 대학 1학년을 마치고 오더니 ‘아빠 저 정치하겠습니다’ 그러는 거예요. 제 첫마디가 ‘너 미쳤냐’였습니다. 그러니까 ‘아빠는 정치하면서 왜 나한테 미쳤냐고 하느냐’고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쭉 상황을 설명했죠. ‘우리 집안 사람들이 너무 정직하고 이래서 너 정치하면 안 된다. 너 다른 거 해라’ 했더니 이놈이 방황을 하더라고요. 제가 정치를 하면서 아버지가 왜 우리 형제들에게 정치를 하지 말라고 했는지를 뼈저리게 저는 느꼈거든요.”
—그래서 아버지의 말을 듣고 곧바로 포기하던가요?
“방황을 해서 군대 먼저 갔다 오라고 했어요. 만기 제대하고 복학해서 6개월 다니다가 저한테 오더니 정색을 하고 눈을 저랑 딱 마주치더니 이러는 거예요. ‘아빠 이번만큼은 반대하지 말아주세요’, ‘뭘 반대하지 말라는 거냐’고 물으니까 연기를 한다고 하더라고요. 이번에는 ‘너 진짜 미쳤구나’ 하는 말이 튀어나오더군요. 다른 길을 찾아보자고 설득을 해봤지만 이번에는 듣지 않더군요. 그래서 ‘아빠가 너 도와줄 수 없으니 너 혼자 힘으로 해라. 아빠 아들인 것 알려지면 너한테 손해일 거다’ 그렇게 약속하고 허락했습니다. 지금은 ‘연기하려면 바닥부터 기어야 한다. 그래야 연기력이 나온다’는 당연한 충고는 해주고 있습니다(웃음).”
—<아이리스2>를 봤는데 아드님 배역이 단역 수준은 넘던데요?
“아이고, 총 쏘고 죽는 거 그게 단역 아니면 뭐겠어요. <아이리스2> 할 때 저는 이놈이 저격수라 대사도 없다고 하기에 드라마에서 곧 죽겠구나 했어요. 그리고 곧 연기를 포기할 것으로 생각했죠. 드라마를 보면서 아들한테 ‘야 너 언제 죽냐’ 하고 물으니까 7~8회 때 죽는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안 죽고 오히려 없다던 대사도 나오고 격투장면도 나오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너 왜 빨리 안 죽냐’고 했더니, ‘글쎄요. 빨리 안 죽이네요’ 하더라고. 12회 때인가 죽었어요. 속으로 ‘아이고 잘 죽었다’ 그랬죠.”
—혹시 아버지한테 도움을 요청하지는 않던가요?
“다른 부탁은 안 하고 한번은 부산 영도 출마 때문에 부산에 가 있다가 서울집에 왔더니 대본을 들고 와서 ‘아빠 <친구2> 오디션을 보기로 했는데 부산 사투리 좀 가르쳐달라’는 거예요. 대본에 글씨가 하도 작아서 돋보기를 쓰고 보는데 이게 처음부터 끝까지 욕이야. 그래서 아버지로서 밤늦게까지 자식을 놓고 쌍욕을 가르치는데 잘 못 따라 하더라고요. 나중에는 몇 번 하다가 ‘야 내가 아무리 그래도 아비인데 자식에게 쌍욕을 가르칠 수 있느냐. 나 못하겠다’고 했죠. 결국 이놈이 오디션 가서 떨어졌다더군요. 제가 도움을 줄 생각도 없지만 아들도 도움을 요청하지 않습니다.”
이재설 전 장관 중매로 아내 만나
—두 딸이 1982년, 83년 연년생이고 아들은 88년생으로 터울이 다섯 살이던데 혹시 아들 욕심에 더 낳은 건가요?
“아니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제 아내(최양옥)가 서울 음대를 나와서 뉴욕 맨해튼 음대 대학원에서 피아노를 전공했어요. 그러다가 저를 만나서 결혼하는 바람에 학업을 중단한 상태였어요. 제가 신혼 초에 정치한다고 돌아다니니까 아내는 ‘내가 5선 의원을 한 아버지를 보면서 정치는 절대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느꼈다. 어릴 때 아버지 얼굴 제대로 볼 시간도 없었는데 어쩌다 가끔 보면 아버지는 미안함 때문에 레스토랑 가서 양식 사주고 했지만 부족한 아버지의 사랑을 채울 수 없었다. 또 식구들이 잠을 자려고 하면 지역구 사람들 열댓 명씩 올라와서 머물고 정말 힘들었다’면서 제가 정치하는 게 싫다는 거예요. 이혼하자고 난리였죠. 그래서 타협한 게 공부를 계속하는 거였고 그렇게 해서 딸 둘 낳고 파리로 유학을 가서 프랑스 에콜 노르말을 이수했는데 87년에 장인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돌아왔죠. 그때 막내를 가지게 돼서 터울이 그렇게 된 겁니다.”
—정말 아들을 낳고 싶은 생각이 없었습니까.
“(웃음) 저는 딸이 좋아서 아들 낳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두 분 어떻게 만났습니까.
“중매로 만났습니다. 전 결혼할 생각이 없었는데 아버지가 당신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결혼해야 될 것 아니냐고 말씀하셔서 선을 봤는데 바로 마음에 들었어요. 그때 제가 포항공장에 있었기 때문에 바빴는데 그때는 제가 영화를 좋아해서 지금의 아내를 만나면 하루 영화 두 편씩을 보곤 했어요. 아내는 모처럼 만나면 이야기도 하고 싶고 그랬는데 영화만 보니까 싫었던 모양이에요. 한 4~5번 만나고 결혼했습니다.”
—중매는 누가 섰습니까.
“이재설 장관이라고 예전 체신부장관 하시던 분인데 이분이 우리 큰형님하고 경기고 동기였어요. 또 장인이 경기고등학교 동창회장을 했는데 그런 인연으로 만나게 됐죠.”
—팔불출 소리를 듣더라도 부인 자랑 좀 해보시죠.
“말이 없이 조용한 사람이에요. 사치도 안 하고 검소하고요. 저한테 집에 일찍 들어오라고 하거나 애들한테 신경 쓰라는 말을 일절 하지 않아요. 정치가의 아내로서 자신의 일부를 포기하면서 살고 있는 거죠. 덕분에 저는 집에서 편안하게 생활을 하지만 마음 한편에 미안함은 늘 갖고 있습니다.”
—그런 아내를 위해서 집에서 요리를 해본 적은 있습니까.
“요리는 못하지만 청소는 잘합니다. 설거지도 제가 먹은 그릇은 제가 하고요. 아내가 학교에 나가니까 바빠서 설거지를 못할 때가 있는데 저는 그런 것 못 봐요. 제가 다 치우죠. 요리는 못하지만 라면 끓이는 것은 기본이고 라면에 고기도 넣고, 파도 썰어 넣고, 그런 거는 잘합니다. 고기를 구워먹을 때도 주로 제가 맡아서 합니다.”
—두 따님은 다 결혼했습니까.
“큰아이는 결혼했고 둘째 딸은 수원대 교수인데 아직 결혼 안 했습니다.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해서 결혼하라고 하는 저와 매일 싸웁니다. 제가 정치한답시고 바깥으로만 돌아다녀서 그런지 두 딸이 저에게는 자라면서 애교도 부리지 않았어요. 용돈 달라고 떼도 쓰고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 게 없었어요. 부모 자식 간 제일 중요한 게 대화인데 제가 그런 시간을 갖지 못한 탓이라고 자책합니다.”
중학교 2학년 때 둘째형 세상 떠나
현대그룹 현정은(玄貞恩) 회장의 어머니인 김문희(金文姬) 용문학원 이사장은 김 의원의 누나다. 현 회장이 조카인 것이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은 자주 만납니까.
“제사 때나 만나지 자주는 못 봅니다.”
—혹시 금강산 관광 재개 등을 도와달라고 요청은 안 합니까.
“업무에 대해서는 서로 그런 게 없어요. 가끔 북에 가서 만나고 온 이야기들은 좀 듣기도 하죠.”
김 의원이 가슴에 아프게 간직하고 있는 슬픈 가족사 가운데 하나가 바로 형의 죽음이다. 1950년대 후반 김 의원의 형은 중학교 2학년 때 사고로 세상을 떠나는데 그곳이 이번에 김 의원이 국회의원 재선거에서 당선된 부산 영도다. 제분공장을 증설하고 있던 무렵에 사고를 당했다는 것이다.
—지역구를 옮겨서 영도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됐을 때 감회가 남달랐겠습니다.
“그랬죠. 개인적으로 아픈 기억도 있는 곳이고요. 영도는 섬이기 때문에 배 타는 사람들이 많이 살아요. 보통 배 타는 분들이 미신을 믿는 경우가 많죠. 그래서 영도에는 점집들이 많아요. 영도에서 유명한 신이 봉래산 영도 할매 산신령이랍니다. 할매가 노하면 무섭다고 믿고 있는 분위기죠. 그래서 영도에서는 보통 기가 세지 않으면 할매가 다 거부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어요. 김형오 전 국회의장이 영도에서 5선을 했는데 선거 때마다 굉장히 고생을 했어요. 그런데 제가 이번에 영도에 가게 됐던 거죠. 가만히 생각하니까 우리 형이 거기서 죽었고 아버지도 공장에서 기계에 크게 다친 적이 있는 기억이 떠오르는 거예요. 영도 할매가 우리 집안을 거부하나 이런 생각까지 들었죠.”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솔직히 투표에 이기고도 엉뚱하게 법에 걸려서 질 수도 있는 것 아니에요? 그래서 밤에 혼자 공장터에 가서 ‘형님! 동생이 국회의원 하러 왔는데 아직 혼이 계시다면 당선된 다음에 큰절 드릴 테니까 도와주세요’라고 빌었죠.”
—영도 선거 치르면서 형님 기억이 많이 났던 모양입니다.
“아프도록 그랬죠.”
“박 대통령이 부르면 맨발로 뛰쳐나갈 것”
김 의원은 2007년 대선 때까지는 친박계의 좌장으로 불렸지만, 2010년 세종시 수정 논란 때 친박계를 완전히 이탈했다. 지난해 총선 때 백의종군했지만 박근혜 대통령과의 관계 회복 속도는 더뎠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과거사 문제와 내부 혼선으로 선대위가 크게 흔들렸을 때 김 의원을 찾았다. 그에게 총괄선대본부장직을 맡긴 것이다. ‘가깝고도 먼 인연’으로 회자되는 두 사람의 관계는 어떨까.
—요즘 박 대통령과 교감을 나누고 있습니까.
“서로 교감을 하고 안 하고를 떠나서 저는 박 대통령이 당선되는 데 큰 기여를 한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박근혜 정부의 성공을 위해서는 어떤 일이라도 할 생각이 있습니다. 부르면 언제라도 맨발로 뛰쳐나갈 각오가 돼 있습니다.”
—박근혜 정부 6개월을 어떻게 평가합니까.
“과거 대통령들은 김정일 한번 만나는 걸 큰 업적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억지로 정상회담을 추진한 것이지요. 그런데 박 대통령 한번 보십시오. 원칙 있는 대북정책으로 국민의 자긍심을 높이지 않았습니까. 또 국가 간 현안과 쟁점을 놓고 방문국 지도자들과 회담을 벌이는 것과 별도로 그 나라의 문화에 대한 관심을 부각하고 국민 정서에 파고드는 맞춤형 외교도 좋은 평가를 받는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잘해나갈 것 같습니다.”
—83년도에 정치에 입문했다고 했는데 정치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일이 무엇입니까.
“2005년 1월 제가 사무총장을 맡고 있을 때였습니다. 당시 당내에는 경선룰 등을 마련하는 혁신위원회가 구성됐는데 대의원(20%)·당원(30%)·일반 국민(30%)·여론조사(20%)로 대선 후보를 뽑도록 하는 안을 들고 왔더군요. 대통령 후보를 뽑는 대사에 여론조사 항목이 있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많이 싸웠지요. 결국 제 의견이 반영되지 않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온몸으로 저항해서라도 그것을 막았어야 했습니다.”
김 의원은 2001년 5월 역대로 가장 막강한 야당 당수였던 이회창 총재의 비서실장에 기용됐고, 2004년 탄핵 역풍으로 한나라당이 박근혜 체제로 바뀐 뒤에는 다시 박근혜 사람이 됐다. 이명박 정권에서는 집권여당의 원내대표를 맡았다. 김영삼 전 대통령부터 이명박 전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여권의 일인자 모두는 그를 총애한 셈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 이회창 전 총재, 박근혜 대통령 중 누구를 가장 닮고 싶습니까.
“당연히 YS입니다.”
—외환위기 때문에 YS에 대한 평가는 좋지 않은데요.
“YS에게 IMF의 책임을 다 뒤집어씌우는 건 억울합니다. IMF는 YS의 잘못이 아니라 미국과 일본의 환율전쟁에 아시아 모든 국가들이 희생당한 것 입니다. 불행하게도 대통령 선거가 있어서 침소봉대된 측면이 강합니다. YS는 우리 사회를 민주화시킨 분입니다. 가택연금 중이던 1983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기념일을 기해 목숨을 걸고 23일간 단식투쟁을 하기도 했지요. 대통령이 되고서도 하나회 청산, 금융실명제 실시, 고위공직자 재산공개 등의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재평가가 이뤄질 것입니다.”
—박근혜 대통령 지지 선언 했을 때 YS가 서운해 하진 않던가요.
“처음에는 조금 그랬는데 결국 마지막에 YS가 저에게 전화를 주셨더라고요. ‘김 대표, 내가 박근혜 후보를 적극적으로 지지한다’고요. 그 뒤에 YS가 선거 때 많이 도와줬습니다. 상도동계 일부 인사가 문재인 후보 쪽으로 가면서 오해도 받긴 했지만요.”
차기 대권 묻는 말에…
현재 여권의 차기 대선주자 선두는 김 의원이다. 차기 대선이 4년 넘게 남았고 여권에 눈에 띄는 인물이 없어 나타난 현상일 수 있지만 그래도 의미 있는 결과다.
지난 9월 2일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가 여권의 차기 대선주자 지지도를 조사한 결과에도 부동의 1위는 김 의원이었다.
—차기 대선을 염두에 둔 적이 있습니까.
“권력자란 자리는 보통사람이 하는 게 아닙니다. 아주 독한 근성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좌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판단했을 때 저는 그런 근성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 인생의 목표는 대통령이 아니었습니다. 대통령이 목표였다면 몸조심, 말조심했을 것입니다.”
—지금은 상황이 다르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도 자중자애(自重自愛)하면서 공인으로서 어떻게 해야 인생 마무리를 잘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습니다.”
—차기 당대표도 1순위입니다. 당내에서는 벌써 “차기 당대표는 김무성이다”라는 말이 나오던데요. 당대표에는 도전할 것입니까.
“뭐라고 대답해야 합니까.”
—솔직하게 말씀하시면 되지요.
“임기가 많이 남은 이 시점에서 그런 이야기를 할 때는 아닌 것 같습니다.”
—너무 원론적인 답변 아닌가요.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