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도에 올레길이 있고 지리산에 둘레길이 있다면,
강릉에는 바우길이 있다!
올 여름에는 대관령부터 정동진까지, 바우길 한 번 걸어보실까요~
삼성앤유에 소개된 대관령에 얽힌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의 이야기로 미리 공부하고 떠나보세요~
※ 아래 글은 삼성앤유에 소개된 여행 컨텐츠를 블로그용으로 수정한 글입니다.
대관령 바우길 풍경과 신사임당, 허난설헌 이야기
△헌화로 일출 강릉시 심곡항과 금진항을 잇는 헌화로는 경치가 아름다운 드라이브의 명소다. 헌화로라는 명칭은 향가 <헌화가>에서 비롯되었다.
△신사임당길 지역 문화 계승 발전에 앞장서고 있는 삼성생명 관동지역단 박성수 대리와 정일섭 사원이 신사임당길을 걷고 있다. 신사임당이 율곡의 손을 잡고 걷던 길이라 하여 신사임당길이란 이름이 붙었다.
△선교장 효령대군의 후손인 이내번이 처음 짓고 10대에 걸쳐 중수한 선교장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사대부가 주택이다.
△오죽헌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가 태어나 자란 조선 중기의 건물이다. 보물 제165호.
△오대산 비로봉의 풍경 오대산 정상인 비로봉에서 바라본 산맥. 멀리 설악산과 점봉산, 방태산에서 달려온 산맥들이 중첩되어 장관을 연출한다.
△선자령 대관령 인근의 선자령에는 우리나라 최대의 풍력 발전 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황태덕장 대관령 인근은 예부터 황태 주산지로 유명하다. 대관령의 바람과 추위가 황태를 빚어낸다.
△평창송어 평창의 자랑인 평창송어 알림이로 나선 에스원 이재구 원주 지사장과 강원지원팀 이슬기 사원.
△오대산 눈꽃 겨울산의 백미는 눈꽃이다. 앙상한 나뭇가지가 눈과 서리를 만나 환상의 세계를 연출한다.
△중대 사자암 오대산은 다섯 개의 봉우리와 다섯 개의 암자가 있어 오대산이라 불린다. 다섯 암자 중 하나인 중대 사자암의 설경.
△두물머리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는 한강의 비경으로 손꼽힌다. 사시사철 사진작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양수리 야경 소화묘원에서 바라본 양수리 야경. 사진 가운데 부분이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지점이다.
△동대문 야경 본래 이름은 흥인지문(興仁之門)이다. 서울에서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에 이르는 관동대로의 시작점이자 종착점이다.
■ 산 첩첩 내 고향 천리이건만
늙으신 어머님을 고향에 두고 외로이 서울로 가는 이 마음
돌아보니 북촌은 아득도 한데 흰 구름만 저문 산을 날아 내리네
옛 영동고속도로에 있는 대관령휴게소를 지나 강릉 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신사임당 시비를 만날 수 있다. 이 시비에는 <유대관령망친정 (踰大關嶺望親庭)>이란 시가 새겨져 있다. 제목 그대로 대관령을 넘어 서울로 가던 길에 늙으신 어머님이 계신 친정을 바라보며 지은 시다.
현모양처의 표상으로 존경받고 있는 신사임당은 외가인 오죽헌에서 태어나 자랐다. 19살 되던 해 이원수와 결혼했으며, 결혼한 지 몇 달 만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3년상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갔다. 이후 시집의 터전인 파주시 율곡리에 기거하기도 했고, 평창군 봉평면에서도 여러 해를 살았다. 이때는 가끔씩 친정인 강릉에 가서 홀로 계신 어머니와 같이 지낼 수 있었다. 그러다 38세에 강릉을 아주 떠나 서울로 가게 된다. 이 시는 바로 그때 지은 시다.
서울로 간 신사임당은 지금의 수송동과 청진동에 해당되는 수진방(壽進坊)에서 살다가 48세에 삼청동으로 이사했다. 그리고 그해 여름,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신사임당은 서울에 살 때도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이 애틋했다. 그런 마음은 <사친(思親)>이란 시에 잘 나타나 있다.
산 첩첩 내 고향 천리이건만 자나 깨나 꿈속에도 돌아가고파
한송정에 외로이 뜬 달 경포대 앞에는 한줄기 바람
갈매기는 모래톱에 헤락모이락 고깃배들 바다 위로 오고가리니
언제나 강릉길 다시 밟아 가 색동옷 입고 앉아 바느질할꼬
■ 신사임당길과 대관령 옛길, 그리고 관동대로
제주도에 올레길이 있고, 지리산에 둘레길이 있다면 강릉에는 바우길이 있다. 바우길은 현재 총 11개 코스가 개발되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신사임당길이다. 허난설헌의 생가에서 오죽헌으로 이어진 이 길은 다시 오죽헌 앞으로 흐르는 개울을 따라 시루봉을 넘어 대관령 자락의 위촌리 마을로 이어진다. 신사임당이 어린 율곡의 손을 잡고 걷던 바로 그 길이다.
대관령 자락에 도착한 신사임당은 대관령 옛길을 따라 고개를 넘었다. 그리고 관동대로를 따라 서울로 갔을 것으로 추측된다. 관동대로는 서울과 강원도를 잇던 조선시대 9대 주요 도로 중의 하나였다. 그 길이만도 890리, 약 350km에 달한다. 관동대로를 되짚어 가면 평해에서 울진-삼척-강릉까지는 7번 국도와 비슷하게 해안을 따라 북상한다. 강릉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대관령을 넘은 다음 횡계와 진부, 방림를 거쳐 찐빵으로 유명한 안흥을 지나 원주에 이른다. 원주에서 다시 지평-양근-평구-망우리를 거쳐 동대문에서 긴 여정을 끝낸다.
관동대로의 백미는 대관령이다. 옛날 서울에서 대관령까지는 나귀를 타고도 이레가 걸렸다고 한다. 강릉 지방 관리로 부임하던 벼슬아치들도 그 길이 너무 멀고 험해 울면서 넘던 길이었다. 그러나 강릉에 도착하면 빼어난 경치와 인심에 반해 오히려 웃었다고 한다. 반면에 신사임당의 경우는 두고두고 눈물길이었다. 가는 길도 반대 방향이었지만, 늙으신 어머니를 강릉에 두고 홀로 떠나야 했으니 대관령을 넘어서도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 율곡 잉태설화의 고장, 평창
대관령을 넘으면 곧바로 평창이다. 강릉 오죽헌이 신사임당과 율곡의 출생지라면 평창군 봉평면 창동리는 신사임당이 율곡을 잉태한 곳이다. 지금 그곳엔 ‘판관대’라는 기념비가 서 있다. 판관대란 율곡의 아버지 이원수가 수운판관이란 관직을 지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율곡의 잉태지에 기념비가 들어선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율곡의 잉태설화가 워낙 유명하기 때문이다.
잉태설화의 내용은 이렇다. 인천에 있던 이원수가 집으로 오는 길에 날이 저물어 평창군 대화면의 주막에 묵게 되었다. 그날 밤, 주막의 여주인은 용이 안겨 오는 꿈을 꾸게 된다. 비범한 인물을 잉태할 꿈임을 직감한 주모는 얼굴에 서린 기색이 예사롭지 않던 이원수에게 하룻밤을 청한다. 그러나 이원수는 주모의 청을 거절하고 집으로 발길을 재촉한다. 그 무렵 강릉의 친척집에 잠시 머물던 신사임당도 용이 품에 안기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깬 신사임당은 주위의 만류도 뿌리치고 140리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이원수도 밤이 깊어 도착했다. 바로 이날 율곡이 잉태된 것이다.
율곡의 잉태 설화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돌아가는 길에 다시 주막에 들른 이원수가 오늘은 청을 들어주겠노라 하자 이번에는 주모가 거절했다. 그러면서 “귀한 인물을 얻었을 것이나 후환을 조심해야 한다”며, 화를 피하려거든 밤나무 1000그루를 심으라고 했다. 이원수는 주모가 시키는 대로 했다. 몇 해 후, 험상궂은 중이 나타나 율곡을 보고자 했다. 이원수는 주모의 말이 떠올라 완강히 거절했다. 그러자 중은 밤나무 1000그루를 시주하면 아들을 데려가지 않겠다고 했다. 이원수는 기다렸다는 듯 뒤뜰에 심은 밤나무를 모두 시주했다. 그런데 1000그루에서 한 그루가 부족했다. 바로 그때, 숲 속에서 크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밤나무!” 그 외침에 중은 호랑이로 변해 도망쳤다. 그래서 나도밤나무라는 재미있는 나무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 월정사 전나무숲길과 오대산
대관령을 넘어 온 관동대로는 때로는 오대천을, 때로는 평창강을 따라 흐르다가 산을 넘고 고개를 넘어 원주에 이른다. 원주에서부터는 중앙선 철도와 숨바꼭질을 하듯 이어지다가 한강 줄기를 만나 양평-양수리-팔당-덕소를 거쳐 서울에 이른다. 그러나 앞만 보고 걷기에는 아쉬움이 남는 곳이 많다. 평창의 오대산이 특히 그러하다. 전나무숲길로 유명한 월정사에서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에 이르는 길은 언제 걸어도 좋은 길이기 때문이다. 관동대로에서 벗어나 잠시 오대산으로 들어가 보자.
월정사 일주문에서 1km 조금 넘게 이어지는 전나무숲길은 한겨울에도 푸름을 자랑한다. 아름드리 전나무들이 빚어내는 풍경 에 가슴마저 시원해진다. 월정사에서 상원사까지는 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이 나 있어 쉽게 올라갈 수 있다. 그러나 옛날 세조가 상원사에 갈 때 지나갔다는 옛길로 걸어가면 그 정취가 훨씬 남다르다. 계곡을 따라 징검다리와 섶다리를 건너며 구불구불 이어진 길은 일상의 피로를 잊게 해준다. 이 길은 특히 신록이 찬란한 봄날에 아름답다. 월정사와 상원사가 자리잡은 오대산은 다섯 개의 봉우리와 다섯 개의 암자가 있어 오대산이라 불린다. 주봉인 비로봉(1563m)을 비롯하여 호령봉, 상왕봉, 두로봉, 동대산 등의 봉우리와 중대 사자암, 북대 미륵암, 서대 수정암, 동대 관음암, 남대 지장암이 그것이다. 신라 시대부터 불교의 성지로 이름 높았던 산답게 불교 유적이 많다. 특히 사자암 위에 있는 상원사 적멸보궁은 부처님의 정골사리를 모신 곳으로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 중 하나다.
상원사 적멸보궁에는 불상이 없다. 부처님의 정골사리를 모신 곳이기 때문이다. 전각 안에는 불상 대신 붉은색 방석만 놓여 있다. 정골사리는 전각 뒤의 작은 언덕에 모셔져 있다. 이 자리는 어사 박문수도 감탄한 명당자리라고 한다. 사실, 부처님의 사리는 탑에 모시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자장율사는 오대산의 한가운데 사리를 모셨다. 덕분에 오대산 전체가 거대한 사리탑이 되고 말았으니 이보다 더 멋진 탑도 없을 것이다. 적멸보궁에서 산길을 계속 따라가면 정상인 비로봉에 오를 수 있다. 지금 비로봉엔 눈꽃이 한창이다.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에게 기대었구나. 부용꽃 스물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니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해라.
자신의 운명을 예견하는 듯한 시를 남기고 27살의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난 조선시대 최고의 여성 작가 허난설헌. 강릉은 허난설헌의 고향이기도 하다. 신사임당이 태어난 오죽헌과 허난설헌의 생가가 있는 초당마을은 경포호를 사이에 두고 가까이 붙어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살다간 모습은 멀어도 너무 멀기만 하다.
강릉시 초당마을에 있는 허난설헌 생가의 모습.
신사임당은 1504년에 태어나 1551년에 세상을 떴다. 허난설헌은 그보다 뒤인 1563년에 태어나 1589년에 세상을 떴으니 두 사람이 같은 시대를 산 적은 없다. 그러나 두 사람을 이어주는 끈이 아주 없진 않다. 1583년 허난설헌의 오빠인 허봉이 신사임당의 아들이자 당시 병조판서였던 율곡을 탄핵하다 갑산으로 유배를 갔기 때문이다. 이후 허봉은 벼슬에 뜻을 버리고 유랑하다 금강산에서 병으로 죽었다. 두 사람의 결혼 생활도 극과 극이다. 사임당은 출가 후에도 남편과 시어머니의 배려 속에 친정에서 많은 날을 보낼 수 있었다.
특히 남편 이원수는 사임당의 그림을 사랑하여 항상 친구들에게 자랑했다고 한다. 반면에 난설헌은 시어머니의 심한 눈총 속에 생활했고, 남편과의 사이도 원만하지 못했다. 난설헌의 재주가 남편보다 훨씬 뛰어났던 것도 그런 이유 중 하나였다. 오죽했으면 난설헌이 “어찌 알았으리. 나이 열다섯에 조롱받는 사내에게 시집갈 줄이야”라고 노래했겠는가.
난설헌은 자식 복도 없었다. 두 명의 자녀는 돌림병으로 잃었고, 셋째는 유산을 하고 만다. 자식을 잃는 설움은 <곡자(哭子)>라는 시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사임당은 슬하에 세 아들을 두었고, 셋째인 율곡을 만대의 스승으로 키워 냈다. 흠이라면 율곡의 어머니라는 후광 때문에 예술가로서의 진면목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 정도다.
결국 중국과 일본에까지 그 이름을 떨친 허난설헌은 요절한 천재 시인으로 기억되고 글과 그림, 특히 그림에 능했던 신사임당은 현모양처의 표상으로 존경받고 있다. 같은 곳에서 태어났음에도 너무나 다른 삶을 살았던 두 사람의 생애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