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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기타가 있는 마을 원문보기 글쓴이: ㄱㅣ브
무정한 마음 임희숙
갈잎모아 불을 피우며 옛추억을태울때
녹슬을 불꽃 내마음 한숨
모두다 태워버렷네
생각하면 가슴만 아픈 옛추억을 태울때
사랑하던말 그하나만 태우지못해울었네
무정하기에 태워야 할걸
사랑 하던 말 어이하는가
생각하면 가슴만 아픈
옛추억태울때 사랑하던말
그하나만 태우지 못해 울었네
무정하기에 태워야 할걸
사랑 하던 말 어이하는가
생각하면 가슴만 아픈
옛추억태울때 사랑하던말
그하나만 태우지 못해 울었네
무정하기에 태워야 할걸....
무정하기에 태워야 할걸....
황혼의 엘레지 임희숙
마로니에 나뭇잎에 잔별이 지면
정열의 불이 타던 첫사랑의 시절
영원한 사랑 맹세하던 밤
아~~ 흘러간 꿈 황혼의 엘레지
황혼이 되면 지금도 가슴을 타는
상처의 아픈마음 다시 새로워
눈물을 먹고 이별하던 밤
아~~ 흘러간 꿈 황혼의 엘레지
생각나면 오겠지 임희숙
생각이 나면 돌아오겠지
생각이 나면 돌아오겠지
나를잊지 않고 잊지않았다면
생각이 나면 찾아오겠지
생각이 나면 찾아오겠지
나를잊지 않고 나를찾아서
아~ 지금도 그사람은 날그리며
생각하고 있을까 있을까
사랑하고 있을까
생각이 나면 돌아오겠지
생각이 나면 돌아오겠지
나를잊지 않고 나를찾아서
돌아와 주오 임희숙
차라리 잊어버릴까 떠난 그님을
차라리 지워버릴까그님 기억을
아무리 잊을려고 애써도 항상 내곁에 있는
우리 그님의 마지막 사랑한다는 그말이
돌아와주오이 밤다하기전
돌아와주오 별이 지기전에 돌아와주오
이생명 다하기전 정녕잊지못할 나의사람아
아무리 잊으려고 애써도 항상 내곁에 있는
우리 그님의 마지막 사랑한다는 그말이
돌아와주오 이 밤다하기전
돌아와주오 별이 지기전에 돌아와주오
이생명 다하기전 졍녕잊지못할
나의 사람아
사랑의 굴레 임희숙
흐르지 않은 우리의 가슴에
아쉬운것은 사랑이였을뿐..
두번다시 부르지 못할
그이름은 아니겠지요.
사랑이 머물지는 않아도
가슴은 채워져가고
사랑이 돌아오지 않아도
말없이 단념하지만
풀리지 않은 이운명은
사랑의 굴레였나요~
사랑이 머물지는 않아도
가슴은 채워져가고
사랑이 돌아오지 않아도
말없이 단념하지만
풀리지 않은 이운명은
사랑의 굴레였나요~
진정 난 몰랐네 임희숙
그토록 사랑하던 그 사람 잃어버리고
타오르는 내 마음만 흐느껴 우네
그토록 믿어 왔던 그 사람 돌아 설 줄이야
예전에는 몰랐었네 진정 난 몰랐네
누구인가 불어 주는 휘파람 소리
행여나 찾아줄까 그 님이 아니올까
기다리는 마음 허무해라
그토록 믿어 왔던 그 사람 돌아 설 줄이야
예전에는 몰랐었네 진정 난 몰랐네
굴곡진 삶을 노래한 짙은 감성의 허스키 보이스
긴 생명력의 가수 임희숙. 인기 정상의 가수라기보다는 최고의 가창력을 지닌 가수라는 표현이 합당한
가수이다. 인생의 깊이가 느껴지는 그녀의 노래들은 절절한 호소력으로 솔, 트로트, 재즈, 가스펠 등
여러 장르를 넘나들며 대중의 사랑의 받았다.
여자 가수의 인생치곤 고난이 많았던 지라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여러 차례 활동을 중단하는 아픔도
겪어야 했다. 그 때문에 많은 히트 곡 보다는 범접하기 힘든 뜨거운 가창력으로 스스로를 대중음악
사에 중요한 아티스트로 자리매김됐다. ‘진정 난 몰랐네’, ‘ 나 하나의 사랑의 가고’ 등 그가 남긴 히트
곡들은 지금도 중·장년층들의 사랑을 받는 불멸의 히트 넘버이다.
두 번의 결혼 실패와 대마초 사건, 그리고 병마와 싸우며 활동 중단을 거듭했던 평탄치 않은 삶의 여정
을 지나온 그녀의 노래 속엔 아픔만큼 삶의 절절함이 배어 있다.
80년대 중반, 재기에 성공한 이 후 그녀는 방송 출연을 비롯해 각종 공연과 미사리 등 음악 카페에서
매일 같이 노래를 부르고 있다. 짙은 허스키에 영혼을 울리는 그녀의 바이브레이션 창법은 흑인 재즈
가수로 착각을 일으킬 정도이다.
임희숙은 한국 전쟁이 발발한 1950년 6월 29일 태어나 조종순씨의 편모슬하에서 성장했다.
전쟁 중에 부친이 사망했기 때문. 재혼한 어머니는 두 명의 동생을 낳았다.
영화 ‘개같은 날의 오후’로 주목을 받았던 이민용 감독이 그의 친동생이다. 활달한 성격의 그녀는 중학
교 2학년 때 외국 팝송을 많이 접했는데 특히 미국 흑인가수 샘 쿡(Sam Cook)의 노래에 푹 빠져 지냈
다. 어린 그녀는 짙은 감성으로 사람의 영혼을 감싸주는 외국의 솔 가수들의 끈적끈적한 솔이나, 블루
스 같은 흑인 재즈성향의 노래가 특히 좋았다.
노래에 관심이 많아진 그녀는 덕성여고 2학년 때인 1966년에 작곡가 손목인과 손석인으로부터 재즈를
배우며 가수의 꿈을 키웠다.
가수로서의 첫 무대는 워커힐이었다. 67년 데뷔 곡 ‘ 그 사람 떠나가며’를 발표하며 워커힐 무대에
이어 TBC TV의 ‘ 쇼쇼쇼’, ‘ OB카니발’, 동아방송 등 방송에 출연해 팝송을 주로 불렀다.
가창력을 인정받자 CM송까지 부르며 주목 받는 신인 가수로 착실하게 성장을 했다.
1968년 여고를 졸업하고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바쁜 가수활동 때문에 학업을 병행하
기 힘들어 1년이 못 되어 중퇴를 했다. 본격적인 음악 활동에 들어간 그녀는 독특한 소울 창법과 남자
같은 화통한 성격 때문에 비슷한 시기에 데뷔한 조영남과 곧잘 비교되었다.
그래서 생겨난 별명이 ‘ 여자 조영남’. 외모를 비하했던 별명이었던지라 그녀로서는 달갑지 않았지만,
그만큼 대중의 관심이 증폭되었던 증거이기도 했다.
전우중의 곡 ‘그 사람 떠나고’를 받아 처음으로 음반을 낸 것이 1969년. 당시는 주류 대중 음악을 지배
하던 트로트가 서서히 대중의 관심 밖으로 내몰리던 시기였다. 미 8군 무대를 기점으로 영입된 솔, 록,
포크 등 다양한 장르의 기세가 어느 때 보다 드셌기 때문이었다.
그 해에 미 8군의 ‘ 신중현 스페셜 쇼’에 출연한 임희숙은 음악적 코드가 통했던 한국 최초의 소울 가수
박인수 등과 음악적 교류를 했다. 이 때의 활동 때문에 임희숙은 ‘신중현 사단’에 간혹 포함이 되곤
하지만 사실 신중현의 곡을 부른 것은 군방송 드라마 주제곡 ‘슬픈 고백’ 등 그리 많지는 않았다.
임희숙의 넘치는 끼를 높이 산 신중현은 ‘님은 먼 곳에’ 등 자신의 곡을 임희숙에게 주려고 했지만,
이미 작곡가 김희갑으로부터 MBC드라마 ‘ 왜 울어’의 주제가를 받아 노래한 그녀는 의리를 지키기
위해 김희갑 휘하로 갔다. 그래서 김희갑곡‘ 진정 난 몰랐네-1970’를 부르게 되었다.
빅 히트가 터진 이 노래는 그녀의 이름을 대중에게 알리는 도화선이 되었다.
30여년의 세월을 초월해 지금도 중장년층의 ‘18번’으로 뽑히는 이 노래는 그녀의 대표곡이 되었다.
또한 여러 가수에 의해 다시 불리거나 리메이크도 됐다.
그러나 솔 풍의 가요인 ‘진정 난 몰랐네’를 처음 불렀던 가수는 임희숙이 아니었다. 김상희였다.
하지만 1967년 맑은 음색의 김상희의 노래는 빛을 발하진 못했다. 임희숙의 호소하는 듯한 소울 풍의
끈적한 목소리는 3년이 지난 후에야 이 노래를 한국 대중음악사의 명곡으로 되살려냈다.
“사실 저도 노래를 부른 뒤 곧 바로 히트를 터트리진 못했고, 2년 정도 흐른 뒤 뜨기 시작했어요. 음악
을 제대로 아는 사람들의 입을 타고 알려진 경우입니다. 당시 키보이스가 반주를 했고, 한 번에 동시
녹음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후 트로트 작곡가인 박춘석과 손잡고 ‘잊어야할 사람’, ‘ 잊었을 거에
요’(1971)를 발표해 인기 가수의 반열에 올랐다.
71년 8월, 봉봉사중창단의 이계현이 운전한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소울 가수로 이름이 난 그녀는 72년 8월, 싱가폴 건국기념 재즈페스티발에 한국 대표로 초청을 받는
영광을 안기도 했다. 또한 ‘ 지난날’(1974), ‘ 돌아와 주오’, ‘ 믿어도 될까요’(1975) 등으로 꾸준히 자신
의 음악적 위상을 이어갔다. 74년 2월, 경기고, 서울대 법대를 나와 상업은행 본점에 근무하는 은행원
조성윤씨와 결혼을 했다. 하지만 혼인 신고도 하지 않은 채 5개월 만에 헤어졌다.
75년 11월, 임희숙은 종로5가 칠복여관에서 음독자살을 기도해 세상을 놀라게 하는 사건을 벌였다.
두 번째 결혼도 많은 갈등을 안고 있었던 것. 더구나 1975년 가요정화운동이라는 명분의 대마초 파동
에도 휘말렸다. 이처럼 이혼, 대마초 사건, 음독 자살 시도 등 개인사의 고난이 한꺼번에 밀려든
이 시기는 그녀의 표현대로 가혹한 시절이었다.
하지만 세상을 알게 된 것은 인간적으로 ‘철이든 계기’이기도 했다.
“사람이 모질지 못했죠. 워낙 운명이 거칠기도 했지만, 돌아 보면 나 자신이 똑똑하지 못했던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던 것같아요. ”신군부가 들어서면서 해금이 되자 재기 곡 ‘돌아와 주오’를 발표했지만
예전과 같은 반응을 얻지는 못했다.
그래서 무리하게 출연한 81년 10월의TV 공개 방송 ‘명랑 운동회’는 또 다른 불행의 씨앗이었다.
여자로서는감당하기 힘든 과격한 게임으로 허리를 다치는 불의의 사고를 당했던 것.
척추 디스크는 3년 4개월 동안 활동 중단이라는 좌절의 시간을 또 다시 안겨 주었다. 그러나 그냥 주저
앉지는 않았다.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이때부터 연예인 교회에 나가 신앙 생활에도 전념하며 재즈 피
아노를 익혔다. 삶에 진지해진 그녀는 사랑 노래보다는 영혼을 노래하는 솔과 가스펠을 부르기 시작했
다. 하지만 척추 디스크에 이어 왼쪽 다리에도 마비가 오자, 무려 180개의 금침을 몸에 넣는 시술을 했
고 효과를 보았다.
84년 5월, 몸을 추스르고 재기 곡 ‘내 하나의 사람은 가고’를 발표했다.
작사자 지명길을 통해 받은 가사를 읽어 본 임희숙은 ‘삶의 무게여’라는 부분에 반했다.
이 노래는 길고 어두운 터널과도 같은 시련기를 딛고일어서는 부활의 노래가 되었다. 강렬하면서도
정적인 목소리는 이전에 느낄 수 없었던 삶의 향내가 배여 나왔다.
큰 반응이 있자 신세계레코드와 3년 계약을 이루어졌고 ‘한국의 티나 터너’로 거듭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작곡가는 시인이자 노래 운동가로, ‘제2의 김민기’라고도 불렸던 백창우(현재 시노래 동인
나팔꽃의 리더). 서적 외판원으로 고단한 삶을살아가던 백창우가 27세 때 만든 노래였다.
시인의 고단한 삶과 그녀의 아픈 과거가 호소력 짙은 보컬과 어우러지면서 빅히트가 터졌다.
2003년 12월, 시전문 문예계간지 ‘시인세계’가 국내 유명시인 100명을 대상으로여론조사를 한 결과,
이 노래는 전체 순위 8위에 랭크되기도 했다. 임희숙은 “음반이 나온 뒤 2년 후에야 작곡가 백창우를
직접 만났다”고 한다. 85년 오준영의 곡을 받아 골든 2집 ‘상처’를 발표하며 이번에는 트롯가수로도
변신에 성공했다. 86년엔 지명길 곡 ‘사랑의 굴레’를 히트시킨골든 3집 음반도 연속으로 발표했다.
활발한 활동을 시작한 그녀는 리틀렌젤스 회관에서 열렸던 대한민국 제 1회 Jazz Festival 공연에도
참가했다. 또한 한때 연극 영화를 전공했던 그녀는 86년 KBS1 TV 드라마 ‘노다지’, 87년 영화 ‘토요일
은 밤이 없다(송영수 감독)’ 등에서 주제가를 부르며 특별 출연을 했다.
89년엔 KBS TV드라마 ‘사랑의 굴레’의 주제가로인기를 얻고, 그 해 10월 26일 대방동 해군해관에서
선배 재즈 가수 박대식과 재혼을 했다. 91년 6월엔 재즈가수 김준의 록 트로트 곡 ‘머물수 없는 사랑’을
발표했다. 자신의 아픈 사랑과 이별의 사연을 담은 이 노래는제법 성공을 거뒀다.
11월엔 동경 재일 한국인 음성 나환자촌 위문 공연을갖기도 했고 94년엔 KBS 2TV 드라마 ‘남자는
외로워’에서 기지촌 가수로 출연해 만만치 않은 연기 실력을 뽐냈다.
재즈 가수로 변신한 그녀는 95년 1월 김준, 정훈희, 이동원과 함께 KBS 빅쇼에 출연해 절묘한 4색화음을 선보이기도 했다. 6월에는 KBS 2TV ‘밤에음악사이’에 출연, 굴곡 많았던 자신의 노래인생 40년을
되돌아보는 뜻깊은 시간을 가졌다. 친동생인 영화감독 이민용의 감독 데뷔작 ‘개 같은날의 오후’에서
는 출연료를 받지 않고 콩국수집 식당 주인 포항댁으로 출연을 했다.
당초 출연하기로 했던 김을동이 시의회 선거에 출마하는 바람에 이루어진 첫 주연급의 영화 데뷔였다.
영화의 성공으로 96년 1월 SBSTV 가족드라마 ‘엄마는 못말려’에도 출연을 했다.그 해 3월, 서울 강남
구 신사동에 ‘메이플’이라는 고가구점과 카페를 겸한 공간을 오픈해 사업가로 변신했다.
음악은 중단하지 않았다. 그 해 6월, 과천 시민회관에서 재즈콘서트를 개최하고 11월에는 동생이 감독한 영화‘인샬라’에서 사하라사막 현지로케에 동행했다. 밥짓기는 물론 짐꾼 등온갖 험한 일을 맡아
돈독한 남매 사랑을 과시했다. 99년 9월, 후배 장욱조의 도움으로 첫 CCM음반 ‘마음으로 사랑으로
영으로’를 발표했다. 2001년에는 세종문화회관에서 독일의 재즈 캄보 살타첼로와 협연한 것을 비롯,
뮤지컬 ‘블루 사이공’과 ‘겨울 나그네’에 출연 하는 등 폭 넓은활동을 이어 갔다. 또 2002년에는 병마에
쓰러진 선배 솔 가수 박인수를돕자는 콘서트를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미담을 남기기도 했다.
“왕년의 히트 가수가 아니라 그냥 곁에 있는 가수로 팬들에게 기억되고싶다”는 그는 대중적 인기보다
는 음악으로 오랜 생명력을 지켜오는 흔치않은 가수다. 그에게 음악은 인기에 영합한 일회성 열기가
아니라 인생을호흡하게 하는 삶의 전부이다. “과거를 돌아보면 스스로 대견함을 느낄때도 있어요.
많은 고통 속에서 일어나 이렇게 노래를 부르고 있고, 아직도 저의 노래를 사랑해 주는 분들이 있으니
저는 복도 많고 행복한 여자같아요.”
(주간한국/최규성 가요 칼럼니스트)
파란 만장했던 삶처럼 그녀의 노래 속엔 원초적인 한이 담겨져있다.
그녀는 국내에서는 몇 안되는 소울적 필을 담아낼 수 있었던 가수였다.
초기 노래들은 가히 그녀를 최고 가창력의 가수로
평가받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던 좋은 노래들이었다.
영혼이 담긴 목소리로 흑인 소울 (soul) 음악을 노래하는 가수 임희숙.
'진정 난 몰랐네' 라는 히트곡으로 유명한 그녀는 현재 한국의 대표적인 보컬리스트로 이름을 떨치며
누구보다도 바쁜 일정으로 무대를 누비고 있었다.
"태어나서 지금 최고의 황금기를 맞고 있어요. 하나님께서 많이 돕고 살라고 축복하시나봐요."
곧이어 임희숙 씨의 입술에서는 속 깊은 삶의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온다.
"대마초 사건으로 7 년동안 노래를 못하던 시기가 있었어요. 다시 재기하려고 보니 난 잊혀져 있었고,
나이는 서른을 훌쩍 넘겼으며 목소리마저 나오지가 않았어요. 너무나 절망적이었죠."
후회와 좌절 속에 점과 굿도 보며 몸부림쳐 보았지만 그 모두가 허사였다.
그러다 우연히 TV 드라마에서,
"아무리 애를 써도 안 되니 이건 하늘의 뜻입니다." 라는 대사를 들었을 때
'하나님'을 떠올렸다고 한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기도를 했다. 다시 한 번 기회를 달라고...
"참 신기하죠. 제 마음에 평안이 찾아왔고 목소리가 돌아왔어요."
하나님에 대한 노래만 부르려했지만,
가요나 재즈를 부르고픈 욕심또한 버릴 수 없었다는 그녀.
다시 가요계로 돌아와 부른 노래가 '내 하나의 사람은 가고' 였다.
삶의 무게가 있으면서 호소력 강한 노래라
생각했기에 커다란 기대를 하고 발표했건만 반응이 좋지 않았다.
연이어 갑작스런 교통사고까지...
인생은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님을 다시 한 번 깨닫고서
하지만 그 노래는 4 년이 지나 주부가요열창에 등장하더니 뒤늦게 커다란 히트를 치게 되었다.
또한 70 년에 부른 '진정 난 몰랐네'가 2001 년 MBC 드라마 '그 여자네 집'에
주제곡으로 삽입되면서 다시 한 번 세상의 주목을 받았다.
임희숙 씨의 말을 빌리자면, 반응이 좀 더디긴 했지만 커피 값도 안 들이고도 히트가 된 것.
그녀의 데뷔 35 주년 기념 음반은 9시 뉴스에 보도될 정도였다.
올해 그녀의 스케줄은 벌써 빽빽이 채워져 있다.
"올해가 저의 황금 시대라면 다음 해는 다이아몬드 시대가 될 거예요."
그녀의 얼굴 가득 강한 자부심이 떠오른다.
영혼을 다해 노래하는 열정만큼 뜨거운 그녀의 삶이 눈부시다.
(임희숙 씨는 현재 예능교회에서 선교부 차장을 맡아 선교 및 미혼모 사역에 힘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