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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히 불어나는 하느님의 뜻 안에서
2020년 8월 1일부터 2020년 8월 31일까지 한달동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의 시간들』기도를 이어가고자 합니다.
기도 기간을 한 달로 잡겠습니다. 하루에 수난 한 시간을 드리겠다는 지향으로 드리되, 일이 있어서 기도를 다 하지 못할 경우, 시간이 날 때나 다음날에 준비 기도로 시작하고 멈춘 부분부터 이어서 계속 드리시면 됩니다. 묵상하지 못한 시간들과 일과에 전념할 때에는 묵상을 하고자하는 의지와 지향을 봉헌합니다.
매일 수난 한 시간씩 24일 동안 24시간 기도를 드린 분은 계속 이어서 기도하시면 더욱 좋습니다.
※ 댓글에 신청을 해주시면,신청 순서대로 각자가 맡은 시간부터 시작하여, 매일 다음 시간의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1시간부터 시작할 경우: 오늘은 제1시간, 내일은 제2시간, 모레는 제3시간... 24일째 제24시간.)
수난의 시간과 현재 시간을 맞춰서 기도하는 것은 자유입니다.
기도를 시작할 때에도, 기도 중간에 멈출 때에도, 무슨 일을 할 때에도
‘예수님께서 ~ 하고자 하신다' 하면서 예수님의 뜻으로 하시길 바랍니다. (천상의 책 11-28,3 참조)
주님의 사랑과 평화안에서 자유롭고 행복하게 사시면 좋겠습니다!
참고: <천상의 책 11-28, 자기 망각에 이르는 방법>
2. “딸아, 영혼이 자기를 잊으려면 그가 하거나 해야 할 필요가 있는 모든 일을 마치 내가 그 영혼 안에서 하기를 원하는 것처럼 해야 한다.
3 만약 기도하려고 한다면, ‘예수님께서 기도하고자 하신다.’ 하고 말할 일이다. 그러면 내가 그와 함께 기도한다. 일을 해야 할 때에도 ‘예수님께서 일하고자 하신다.’ 하고 말하고,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걷고자 하신다.’, ‘예수님께서 식사하고자 하신다.’, ‘예수님께서 주무시고자 하신다.’, ‘예수님께서 일어나고자 하신다.’, ‘예수님께서 즐겁게 시간을 보내고자 하신다.’ 등 삶 속의 다른 모든 것에 대해서도 똑같이 할 일이다.
4 이와 같이 할 때라야 비로소 영혼이 자기 망각을 얻을 수 있다. 무엇이든지 내가 원하기 때문에 하고, 또한 나 자신이 그것을 하고 싶어하기 때문에 - 그것이 바로 내게 필요하기 때문에 하니 말이다.”
『수난의 시간들』의 가치와 유익한 효과 및 이 묵상 실천이 주님께 드리는 기쁨에 대하여
-성 안니발레 디 프란치아 (수난의 시간들 서문 중에서)
다음은 우리 주님께서 이 책을 쓰게 된 저자에게 주신 계시들 중 일부입니다.
이는 이 경건한 실행이 흠숭하올 예수님의 성심에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보여 주는 것들입니다. 단, 교황 우르바노 3세의 교령에 따라 성교회의 결정에 무조건 순종하고 인간적인 믿음 외에는 달리 구하는 바가 없음을 천명하면서 신중을 기하여 이 계시들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먼저 저자가 필자에게 보낸 편지부터 소개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존경하는 신부님, (제 손으로 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의 시간들』을 마침내 신부님께 보내 드리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주님의 더 큰 영광이 되기를 빕니다.
저는 또한 이 『수난의 시간들』에 대한 묵상에서 얻게 될 선익과 공로 및 예수님의 약속에 대해서 쓴 글4)도 함께 동봉합니다. 이를 묵상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많은 은혜를 받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죄인이라면 하느님께 돌아올 것이고,
불완전한 사람이라면 완전해질 것이고,
거룩한 사람이라면 더욱 거룩해질 것이고,
유혹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이라면 승리를 거둘 것이고,
병든 사람이라면 힘과 약과 위로를 얻을 것이고,
영혼이 약한 사람이라면 영적 양식뿐만 아니라
아름다움과 완전함을 반사하는 거울도 얻어,
예수님께서 주신 이 모범에 비추어 자신의 삶을 만들어 갈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 『시간들』 에 대해 묵상할 때에 예수님께서 얼마나 크나큰 기쁨을 느끼시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이 책이 도시나 마을마다 적어도 한 권은 있어서 (그것이 활용되는 것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께서 그 고통스러운 수난의 24시간 동안 아버지께 보속으로 바치신 당신 자신의 기도와 말씀을 듣고 계신 듯할 것입니다. 또한 ― 예수님의 말씀이 뜻하는 바에 의하면 ― 각 마을이나 도시마다 이 묵상 기도를 바치는 사람이 한 사람만 있어도, 고문과 학살이 자행되는 이 비통한 시대에, 부분적으로나마 하느님의 의노가 진정되고 징벌도 완화될 것입니다.
존경하는 신부님, 모든 사람에게 이 소식을 널리 알려 주십시오. 그러면 사랑하올 예수님께서 제게 맡기신 이 일을 완성하도록 신부님께서 저를 도와주시게 될 것입니다.
덧붙이고 싶은 말씀은 이 『수난의 시간들』의 목적은 주님의 수난 사건을 다시 상세히 이야기하는 데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거룩한 주제를 다룬 책들은 이미 많이 있고, 따라서 또 하나의 책을 낼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보다도 이 책의 목적은 보속에 있습니다. 이 보속은 우리가 예수님 수난의 각기 다른 단계들을 각기 다른 종류의 죄들과 나란히 놓음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이는 각별히 주목할 점입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가 예수님과 하나 되어 하느님께 합당한 보속을 바치면서 피조물이 하느님의 정의에 빚져 있는 것을 거의 다 갚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이 『시간들』 속에 여러 가지 보속의 방식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주님께 감사를 드리는 대목이 있는가 하면, 다른 대목에서는 동정심을 표현하고, 또 다른 대목에서는 찬미를 드리고, 또 다른 대목에서는 고난을 받으시는 예수님을 위로합니다. 그런가 하면, 보상을 바치고, 애원하고, 기도하고, 간청하는 대목들도 있습니다.
존경하는 신부님, 그러므로 신부님께서 이 완결된 작품을 출판하시되 거기에 서문을 붙여 일반 사람들에게 내놓으시기 바랍니다.”
저자가 위의 편지에서 동봉한다고 한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는 『수난의 시간들』을 묵상하는 사람들이 받게 될 은혜, 효과 및 예수님의 약속 등에 대한 것입니다.
저자의 일기에서 발췌한 내용자의 자전적(自傳的)
1906년 11월 9일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있으면서 우리 주님의 수난에 대하여 묵상하고 있노라니 그분께서 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딸아, 내 수난에 대하여 끊임없이 묵상하며 가슴 아파하고 나를 측은히 여기는 사람은 내 마음을 무척 기쁘게 하기에 내가 수난의 전 과정을 통해 겪었던 모든 것에 대해서 위로를 받는 느낌이 된다. 그리고 언제나 그것을 묵상함으로 인해 영혼은 늘 음식을 마련할 수 있게 되는데, 이 음식에는 여러 가지 양념과 맛이 있어서 다양한 효과를 낸다.
이를테면, 내 수난 중에 저들은 밧줄과 사슬로 나를 묶었지만 이 영혼은 나를 풀어 자유롭게 해 주고, 저들은 나를 업신여기며 침을 뱉고 모욕했지만 이 영혼은 내게 감사하며 침을 깨끗이 씻어 주고 나를 공경한다. 또한, 저들은 내게 가시관을 씌우며 왕이라고 놀리고 내 입에 쓸개즙을 갖다 대며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이 영혼은 나의 모든 고통을 묵상하면서 내게 영광과 영예의 관을 씌워 자기의 왕으로 공경하고, 내 입 안 가득 단맛이 퍼지도록 더없이 맛있는 음식을 먹여 준다.
이 음식은 바로 나 자신의 업적에 대한 기억이거니와, 그러고 나서 이 영혼은 내게 박힌 못을 뽑고 십자가에서 나를 빼내어 자기의 마음 안에서 부활하게 한다. 그리고 그 영혼이 그렇게 할 때마다 나는 그에게 은총의 새 생명을 상급으로 준다. 그런 영혼이 나의 음식이고 나 역시 그의 지속적인 음식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나를 가장 기쁘게 하는 것은 끊임없이 내 수난에 대하여 묵상하는 일이다.”
1913년 4월 10일
오늘 아침에는 언제나 사랑하올 내 예수님께서 오시어 나를 품에 꼭 껴안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딸아, 내 수난에 대해서 항상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 마음 안에 샘을 형성하고 있어서, 이 생각을 하면 할수록 그 샘도 더욱 확장된다. 그리고 샘솟는 물이 사람들에게 공동으로 쓰이는 것과 같이, 이 마음의 샘도 그 사람 자신의 선익과 나의 영광과 다른 사람들의 선익을 위해 쓰인다.”
그래서 나는 그분께 “저의 선이시여, 말씀해 주십시오. 당신께서 저에게 가르쳐 주신 것과 같이 이 『수난의 시간들』을 묵상하며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상급을 주시렵니까?” 하고 여쭈었다. 그분은 이렇게 대답해 주셨다.
“딸아, 네가 이『시간들』을 묵상하며 기도할 때, 나는 이를 너의 것으로 여기지 않고 내가 행하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므로 마치 내가 수난 고통을 받고 있는 것처럼 나의 공로와 같은 공로를 준다. 이와 같이 이 기도를 바치는 이들에게도 그 지향에 따라 같은 효과를 거두게 하겠다.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그렇게 해 주리니, 내가 이보다 더 큰 상급을 줄 수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천국에서도 그들이 내 『수난의 시간들』을 기도한 횟수만큼 사랑과 기쁨의 불화살을 쏘면서 내 앞에 자리하게 하겠고 그들 역시 내게 그렇게 할 것이다. 모든 복된 이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참으로 달콤한 황홀이 될 것이다!”
1913년 9월 6일
이제 글로 쓰인 ‘수난의 기도’를 보면서 어째서 여기에는 대사(大赦)가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사가 풍성히 붙어 있는 기도들이 많이 있는데, 이 기도에는 그것이 없으니 이를 바치는 이들은 얻는 것이 없지 않겠는가? 하며 의아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언제나 사랑하올 예수님께서 매우 다정한 음성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딸아, 대사가 붙어 있는 기도를 바침으로서 사람들은 하나의 대사를 얻는다.
그 반면에, 내 『수난의 시간들』은 바로 나 자신의 기도요 보속이며 온통 사랑이기 때문에 내 성심 깊은 데서 솟아난다. 내가 너와 하나 되어 이 기도를 바치면서 얼마나 여러 번 세상에 내릴 징벌을 은총으로 바꾸곤 했는지, 너 혹시 잊어버린 것 아니냐? 그토록 내 마음을 흐뭇하게 해 주는 기도인 만큼, 나는 이 기도를 바치는 사람에게 하나의 대사가 아니라, 헤아릴 수 없도록 무한한 가치의 부를 지닌 한 움큼의 사랑을 준다.그 외에도, 순수한 사랑으로 이것이 실행되면 내 사랑이 자신의 분출구를 찾아 얻게 된다. 그런즉 피조물이 창조주의 사랑에 위로와 분출구를 제공한다는 것이 어찌 대수롭지 않은 일이겠느냐?”
1914년 10월
『수난의 시간들』을 쓰면서 혼자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이 복된 『수난의 시간들』을 종이에 옮겨 적는다는 것이 내게는 기막힌 희생이다. 특히, 오직 예수님과 나 사이에서만 일어난 어떤 내적 행위들은 글로 쓰기가 여간 어렵지 않으니! 이 희생에 대해서 그분께서는 내게 어떤 상급을 주실까?’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감미롭고 다정한 음성을 들려주시면서 “딸아, 내 『수난의 시간들』을 쓴 상급으로, 네가 쓴 낱말 하나하나에 대해서 한 번의 입맞춤을, 한 영혼을 네게 주마.” 하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래서, “제 사랑이시여, 그건 제게 주실 상급이겠지요? 하지만 이 기도를 바치는 다른 이들에게는 무엇을 주시렵니까?” 하고 여쭈었다. 예수님의 대답은 이러하였다. “이『수난의 시간들』의 효과는 사람들이 나와 어느 정도로 긴밀히 일치하여 바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므로 그들이 나와 함께, 나 자신의 뜻으로 이 기도를 바친다면, 그들에게도 역시 발음하는 낱말 하나하나에 대해서 한 영혼을 주겠다.
또한, 나의 뜻과 하나 되어 이 기도를 바침으로써 그들은 나의 의지 안에 숨어들게 된다. 따라서 활동은 나의 의지가 하게 되므로 단 하나의 낱말로도 내가 원하는 모든 선을 낳을 수 있다. 그것도 네가 이 기도를 바칠 때마다 그렇게 할 작정이다.”
또 한 번은 이 『수난의 시간들』을 쓰기 위하여 그토록 많은 희생을 치른 뒤에도 정작 이를 실행하는 사람은 너무나 적기 때문에 내가 예수님께 한탄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딸아, 애통해하지 마라. 이를 실천하는 사람이 딱 한 사람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너는 기뻐해야 한다. 나는 다만 한 영혼만이 구원될 수 있었다고 해도 내 수난의 전 과정을 겪지 않았겠느냐?
너도 마찬가지다. 이용하는 사람이 얼마 되지 않는다고 해서 네가 이 선행에 게을러선 안 된다. 손해를 입게 될 쪽은 다만 이를 활용하지 않는 사람들뿐이다.
그리고 나의 수난은 내 인성으로 하여금 모든 사람이 구원될 공로를 얻게 하였다.
모든 사람이 다 구원되는 것은 아닌데도 그러한 공로를 얻은 것은, 나의 뜻이 모든 이를 구원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것은 내가 원한 것에 따라 얻은 공로이지 사람들이 거기에서 끌어낼 이득에 따라 얻은 것이 아니다. 너도 이와 꼭 마찬가지다. 너의 뜻이 어느 정도로 나의 뜻과 하나 되어 모든 이에게 선을 베풀고자 했는가에 따라 상급을 받게 될 터이니 말이다.
손해를 입게 될 쪽은 이를 실행할 수 있으면서도 하지 않는 사람들뿐이다.
이 『시간들』은 모든 기도 중에서 가장 고귀한 기도이다.
내가 지상생활 동안 행했던 일과 지극히 거룩한 성사 안에서 지금도 계속하고 있는 일을 되풀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수난의 시간들』 기도를 하는 소리가 들리면, 나는 거기서 나 자신의 음성과 기도를 듣게 된다.
기도를 바치는 사람의 영혼 안에서 모든 이의 선익을 갈망하며
모든 이를 위하여 보속하고 있는 나의 뜻을 보게 되고,
그리하여 그 영혼이 행하고 있는 바를 나도 그 안에서 할 수 있기 위하여
그에게로 거처를 옮기는 나 자신을 느낀다.
오, 도시마다 단 한 사람이라도 이 『수난의 시간들』 기도를 바친다면 내 마음에 참으로 큰 기쁨이 일 것이다! 도시마다 나 자신이 있는 듯한 느낌이 들 테니 말이다!
그러면 이 시대에 몹시 분노하고 있는 나의 정의가 부분적으로나마 그 노여움을 풀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덧붙여 보면, 어느 날 나는 천상 엄마께서 예수님을 무덤에 안장하시는 시간 (곧 ‘제24시간’) 기도를 바치면서 극심한 비탄에 잠기신 어머니를 동정하며 끝까지 곁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 ‘시간’을 묵상할 때마다 늘 그렇게 하지는 않았고 간혹 그렇게 했을 뿐이다. 그런데, 앞으로도 늘 그렇게 해야 할지 어떨지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노라니, 복되신 예수님께서 온통 사랑에 젖은, 또 내게 간절히 청하시는 듯한 음성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딸아, 나는 네가 그것을 빠뜨리지 않기 바란다. 내 엄마를 기억하면서 나에 대한 사랑으로 언제나 그렇게 하여라. 네가 그렇게 할 때마다 내 엄마는 몸소 세상에 계시면서 당신 삶을 다시 살고 계시는 것처럼 느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어머니께서 지상 생활 동안 내게 주신 영광과 사랑을 받으시게 된다. 그리고 나는 내 엄마가 다시 세상에 계시면서 어머니다우신 자상함과 사랑과 모든 영광을 내게 주시는 것처럼 느낀다. 따라서 나는 너를 어머니로 여기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나를 껴안으시면서 아주 부드럽게 “내 엄마, 엄마.” 하셨고, 또한 자애로우신 엄마께서 이 ‘시간’에 행하시고 겪으셨던 모든 것을 내게 속삭여 주셨다. 그래서 나는 엄마를 따라 함께 하였다. 그때부터 예수님 은총의 도움으로 한 번도 빠뜨리지 않고 그렇게 하였다.
1914년 11월 4일
『수난의 시간들』 기도를 바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매우 기뻐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딸아, 네가 내 『수난의 시간들』을 반복하는 것을 보면서 느끼는 내 기쁨이 얼마나 큰지 네가 알면 참 좋겠다. 게다가 너도 늘 이 기도를 반복하다보면 기쁨을 느끼게 될 것이다. 사실, 내 성인들은 내 수난을 묵상하면서 내가 얼마나 극심한 고난을 받았는지를 깨달았고, 너무나 측은해서 울음을 터뜨리기도 하였으며, 내 고통에 대한 사랑으로 온 몸이 불타는 듯한 체험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이 기도처럼 순서에 따라 지속적으로 반복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너야말로 내 생애와 내가 겪은 것의 편린(片鱗)들을 시시각각 너 자신 안에 보존함으로써 이리도 크고 특별한 기쁨을 내게 주는 첫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너에게 나는 매우 강하게 끌림을 느끼기에 시시각각 그것을 음식으로 주고, 같은 음식을 너와 함께 먹으며, 네가 하는 일을 함께 한다. 하지만 내가 너에게 새로운 빛과 새로운 은총으로 풍부하게 보답해 주리라는 점도 알아 두어라. 네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사람들이 땅에서 내 『수난의 시간들』을 바칠 때마다 내가 하늘에 있는 너를 늘 새로운 빛과 영광으로 옷 입혀 줄 작정이다.”
1916년 4월 23일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있노라니 흠숭하올 예수님께서 온통 빛에 휩싸여 나타나셨다.
이 빛은 그분의 지극히 거룩하신 인성 안에서 나오는 것으로서 매혹적이고 황홀한 모습이 되도록 그분을 아름답게 꾸미고 있었다.
놀라움에 잠긴 나에게 그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딸아, 내가 겪은 아픔마다, 흘린 피 방울방울마다, 각각의 상처마다, 기도와 말과 행위와 발걸음 등등마다 내 인성 안에 빛을 낳았으니, 이 빛이 천상의 모든 복된 이들을 황홀하게 할 정도로 나를 아름답게 꾸몄다.
이제는 영혼이 내 수난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따뜻한 동정심을 표현하며보속과 또 다른 행위들을 할 때마다, 내 인성으로부터 빛을 끌어내어 나와 비슷한 모습으로 미화된다. 그러므로 내 수난에 대한 생각을 하나 더할 때마다 그것이 그에게 영원한 기쁨을 가져올 또 하나의 빛이 된다.”
1917년 2월 2일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있다가 나 자신의 바깥에 나가 있음을 알았는데, 언제나 사랑하올 예수님께서 피를 뚝뚝 흘리시며 끔찍한 가시관을 쓰고 계셨다.
눈을 찌르는 가시들 사이로 간신히 나를 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딸아, 이 세상이 마음의 평형을 잃게 된 것은 내 수난에 대한 기억을 잃었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서, 세상은 자기를 비추어 줄 내 수난의 빛을 찾아내지 못하였다.
이 빛을 찾아내었더라면 나의 사랑을 알려 주고 영혼들을 구하는 것이 내게 얼마나 큰 희생을 치르게 했는지를 알려 주었을 것이니, 세상이 자기를 참으로 사랑한 분에 대한 사랑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그리고 내 수난의 빛이 세상을 인도하면서 모든 위험에서 지켜 주었을 것이다.
나약함 속에서, 세상은 자기를 떠받쳐 주었을 내 수난의 힘을 찾아내지 못하였다. 참을성 없음 속에서, 세상은 자기에게 평온과 고요한 자기 포기의 정신을 불어넣었을 내 참을성의 모범을 찾아내지 못하였다. 찾아내었더라면 내 참을성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끼며 자기 지배를 마땅한 의무로 여겼을 것이다. 고통 속에서, 세상은 고통을 지탱해 주며 고통에 대한 사랑을 불어넣어 주었을 하느님 고통의 위로를 찾아내지 못하였다. 죄 속에서, 세상은 그것과 마주 서서 그 안에 죄에 대한 증오를 불어넣었을 나의 거룩함을 찾아내지 못하였다.
아! 인간은 이렇듯 모든 것을 악용했다. 모든 것 속에서 자기를 도울 수 있는 분을 제거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세상이 평형을 잃은 것이다. 그것은 마치 더 이상 제 어머니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아이와 같이, 또는 스승을 부인하며 더 이상 그의 가르침을 듣거나 교훈을 배워 익히려고 하지 않는 제자와 같이 굴었다. 그런 아이와 제자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겠느냐?그들은 그들 자신의 고통이 될 것이고, 사회의 공포와 고통이 되기도 할 것이다. 인간이 공포와 고통이, 그것도 동정의 여지조차 없는 고통이 되고 만 것이다. 아, 갈수록 더욱 악화되고 있는 인간 ! 이 인간을 내가 피눈물을 흘리며 통탄해하고 있다!”
1917년 5월 12일
평소와 같이 있으면서 다정하신 예수님 안에 온 존재로 녹아들었다. 그런 다음 모든 피조물 속에 나 자신 전부를 쏟아 부었다. 모든 피조물에게 예수님 전체를 주기 위함이었다. 그러자 사랑하올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딸아, 한 피조물이 내 안에 녹아들 때마다 모든 피조물에게 하느님 생명의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네 필요에 따라 그 효과를 얻는다. 약한 이들은 힘이 돌아오는 것을 느끼고, 죄에 들러붙어 있는 이들은 빛을 받고, 고통 중에 있는 이들은 위로를 얻고, 다른 모든 경우에도 같은 식으로 효과를 얻는다.”
그 뒤 나는 나 자신의 바깥에 나가 있었다. 연옥 영혼들과 성인들로 보이는 많은 영혼들 가운데 있었는데 그들은 내게 말을 걸면서 얼마 전에 죽은, 내가 아는 한 사람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그는 이 『수난의 시간들』의 날인을 지니지 않고 연옥에 들어오는 영혼이 하나도 없음을 보면서 기쁨을 느끼고 있습니다. 영혼들이 이 『시간들』의 호위와 도움을 받으며 안전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있으니까요. 또한 이 『수난의 시간들』의 동반을 받지 않고 천국으로 날아드는 영혼도 없습니다. 이와 같이 이 『시간들』은 천국에서 땅으로, 또 연옥과 하늘에까지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이슬이랍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아마도 내 사랑하올 예수님께서 『수난의 시간들』 중 각 낱말마다 한 영혼을 주시겠다고 하셨던 약속을 지키시려고, 이 『시간들』에서 이익을 얻지 않고 구원되는 영혼은 하나도 없도록 하시나 보다.’ 하고 혼잣말을 했다.
나중에 나 자신 안으로 돌아오자 다정하신 예수님이 계시기에 그것이 사실이냐고 여쭈어 보았더니 이렇게 대답해 주셨다.
“이『시간들』은 우주의 질서이다.
그러기에 하늘과 땅을 조화롭게 하고, 나로 하여금 세상을 멸하지 못하게 한다.
나의 피와 상처와 사랑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이, 모든 이를 구원하기 위하여 두루 흘러가고 있음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수난의 시간들』 기도를 할 때에 나는 영혼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나의 피와 상처와 열망이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것을 느낀다. 곧 내 생명이 거듭 재현되고 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니 이 『시간들』에 의해서가 아니라면 사람이 어찌 모든 선을 얻어 낼 수 있겠느냐? 네가 의아해하는 까닭이 무엇이냐? 이 일은 너의 것이 아니라 나의 것이다.
너는 유한하고 나약한 도구 노릇을 해 왔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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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댓글 앞에 번호를 달아주시면 본인이 시작하시는 기도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댓글로 신청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예) “1 하느님의 뜻 안에서 기도하겠습니다.”(1시간~)
“2 하느님의 뜻 안에서 기도하겠습니다.”(2시간~)
하느님의 뜻 안에서 지난달에 이어서 계속하셔도 좋습니다.
첫댓글 “1 하느님의 뜻 안에서 기도하겠습니다.” (11시간~)
“2하느님의 뜻 안에서 기도하겠습니다.” (1시간~)
"3 하느님의 뜻 안에서 기도하겠습니다." (2시간~)
하느님 뜻 안에서 기도하겠습니다.(15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