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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블란트 판 레인 <돌에 맞아 죽는 스데반 집사>
또 왕이 보신즉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뜨인 돌이 신상의 철과 진흙의 발을 쳐 부서뜨리매 …… 이 열왕의 때에 하늘의 하나님께서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 나라는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하고 영원히 설 것이라. 왕이 사람의 손으로 아니하고 산에서 뜨인 돌이 철과 놋과 진흙과 은과 금을 부서뜨린 것을 보신 것은 크신 하나님께서 장래 일을 왕께 알게 하신 것이라. 이 꿈이 참되고 이 해석이 확실하나이다. (단 2:34~45)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라, 하더라. (행 15:21)
바벨론 유수 뒤 주님께서 이 땅 위에 오셨을 때 로마 제국 안에는 헬라어로 번역된 {70 인 경}이 널리 퍼져 있었다. 물론, 이는 뜨인 돌로 신상을 쳐 부서뜨리려는 하나님께서 하신 준비였다.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하실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갈 3:23)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돼,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려 함이라. (갈 3:24) 믿음이 온 뒤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갈 3:25)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 3:20 하)
톰 라이트, 도날드 맥클라우드, 서철원 목사님은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율법의 기한을 이야기하셨다. 이단들처럼 확증편향에 사로잡힌 예장 합동 대표 꼴뚜기 Wolf이철도 마찬가지다. 그 기한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다. 즉, ‘하나님께서 믿음을 계시하실 때까지’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오신 뒤 죄를 깨닫게 하는 가시 채로서 율법은 활동을 멈췄는가? 멈췄다면, 바울 사도께서 굳이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하실 필요가 없었다. [로마서]에서 ‘그리스도께서 온전한 순종으로 획득하신 이신칭의 복음’을 선포하시기 전 “모든 사람이 죄(율법)를 범했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며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 사람들인 우리에게 율법을 대면하게 하실 필요가 없었다.
이른바 “새” 관점 신학 영향을 받으신 서철원 목사님에게 ‘모세 율법의 활동 기한’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다. 그러므로 ‘모세 율법보다 뛰어난 <산상보훈>은 연기된 메시아 왕국에서 지킬 수 있는 법이다.’는 세대주의 신학 잔재에 ‘모세 율법의 활동 기한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라는 새 관점 신학을 짬뽕해 버리면, 어떤 이단 사설이 태어나는가? “예수에게서 율법을 예사로 범하는 일이 진행됐다.”, “예수는 안식일을 범하셨다.”, “예수는 정결례를 범하셨다.” 같은 죄인 그리스도론이 태어난다. 그리고 이를 근거로 이른바 “옛” 관점 정통 교리 ‘그리스도 능동(율법준수) 순종’ 교리를 부정한 이른바 “새” 관점 서철원 신학이 태어난다. 칼빈 선생님께서는 {기독교 강요 제2권} [17장] <5항>에서 명명백백하게 ‘그리스도께서 율법준수 순종으로 얻으신 의와 그 의의 전가’를 가르치셨음에도, “칼빈은 그리스도가 율법을 준수해 의를 획득했으므로 그것이 의가 됐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는 거짓 증거의 서철원 신학이 태어난다. 더 나아가 이른바 “옛” 관점 정통 교리 ‘준비은혜론’을 부정한 이른바 “새” 관점 서철원 신학이 태어난다.
그러면 우리 구원의 서정에서 그리스도께서 온전한 순종으로 획득하신 의義의 씨,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믿음’의 씨를 언제 받게 되는가? 당연히 중생 시다. ㅡ행함의 구원론 “믿음은 중생에 선행한다.”는 알미니안 신학 아류로서 새 관점 신학은 “중생 전”으로 대답할까?ㅡ 그러므로 갈라디아서 3장 23절~25절은 구속사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우리 구원의 서정에도 적용할 수 있는 말씀이다. 우리가 초등학문에서 벗어나는 성인이 되는 때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믿음의 씨, “하나님의 씨”(요일 3:9)를 심으시는 때이기 때문이다.
도날드 맥클라우드 [‘조엘 비키 & 폴 스몰리 {은혜로 말미암는 준비}’ 비평] 김대운 역
※) 아래 본문에서 [{은혜로 말미암는 준비} 비평]으로 적는다.
그리스도 십자가 안에는 그리스도 생애와 부활이 있고 그리스도 부활 안에는 그리스도 온전한 순종이 있다. 즉, ‘그리스도 전 생애 걸친 율법준수 순종’과 ‘그리스도 능동(율법준수) 순종 극치로서 그리스도 십자가 수난’이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생애’와 ‘그리스도 십자가’와 ‘그리스도 부활’은 구별할 수 있을지언정 분리할 수 없다. 분리해 십자가를 건너뛰어 부활만 강조하면, 춘천 한마음교회 김성로 목사 이른바 “부활 복음”이 태어난다. 또한, 십자가에 이르시기까지 전 생애에 걸친 그리스도 능동 순종이 그리스도 부활을 낳았음에도,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그리스도 생애’와 ‘그리스도 십자가’를 분리해 그리스도의 생애를 건너뛰면, 예장 합동 꼴뚜기(서철원)파 다른 복음이 태어난다. 그리스도 능동 순종 극치로서 십자가 수난을 무너뜨리는 이단의 복음이 태어난다.
율법 안에 복음이 있고 복음 안에 율법이 있다. 그러므로 복음과 율법은 구별할 수 있을지언정 분리할 수 없다. 그러함에도 예장 합동 대표 꼴뚜기 Wolf이철은 (이른바 “새” 관점 신학 주장대로) ‘몽학선생으로서 율법의 용법은 주님께서 이 세상 오심으로 종결됐다.’며 이른바 “옛” 관점 신학 정통 교리 ‘준비은혜론’을 부정했다. 그러므로 예장 합동 대표 꼴뚜기 Wolf이철은 아래 “그리스도의 말씀”을 오직 ‘{신약 성경}’에 적힌 “그리스도의 말씀”으로만 독해할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 10:17)
존 머레이 <중생(회심:믿음+회개) 전前 준비(예비) 은혜>
https://cafe.daum.net/reformedcafe/jMaU/310
‘성령께서 하나님의 씨를 심으시는 단회 순간 중생 시 확정성화 진리’를 확립하신 20세기 개혁 신학의 거목 존 머레이 목사님께서는 이른바 “옛(헌)” 관점 신학 정통 교리 ‘준비은혜론’을 설명하시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배경색은 내가 칠한다.
우리가 실제 회심의 시점에 이르게 될 때, 회심에 포함된 믿음과 회개는 복음의 진리에 관한 지식과 동떨어져 발생하지 않는다. 죄인에게 ‘죄를 깨닫게 하는 율법’과 ‘믿음의 재료가 되는 내용’을 전달해 주는 복음의 진리 내용이, 믿고 회개해 구원에 이르는 사람의 마음에 전달되는 것임이 틀림없다. 최소한 어느 정도는 구원하는 믿음과 회개의 작용 이전에 율법과 복음이 지닌 의미에 대한 인지와 인식이 있음이 틀림없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중략)… 믿음은 진공 상태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사도행전]에서 보는 준비은혜: 몽학선생의 회초리(가시 채)를 맞았던 이방인들>
https://cafe.daum.net/reformedcafe/jMaU/353
[{은혜로 말미암는 준비} 비평] 원문에 소제목 <A Stereotypical Pattern>이 있다. 김대운 목사는 이 소제목을 <진부한 패턴>으로 번역했다. 그런데 ‘진부한’은 ‘정형화한, 틀에 박힌, 낡고 새롭지 못한, 고리타분한’이라는 뜻이 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준비은혜의 한가지(同) 패턴이다. 즉, 예정된 나무 중생을 위한 믿음의 씨를 품고 예정된 나무를 향해 바람처럼 다가오시는 성령의 일반사역, 중생의 주인이신 성령께서 창세 전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된 나무를 몽학선생의 가시 채로 때리며 책망하시는 사역, 준비은혜의 동일한 패턴이다.
ㅡ<[사도행전]에서 보는 준비은혜>는 [{은혜로 말미암는 준비} 비평] 소제목 <성경의 핵심적인 이야기들(Key Biblical Narratives)>에 관한 반론이기도 하다. 맥클라우드 목사님은 <성경의 핵심적인 이야기들>에서 “그리고 이 율법은 유대인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지도 못했다.”고 하셨다. 이 주장은 부분을 전체로 말하는 일반화의 오류다. [사도행전]에서 몽학선생의 가시 채를 맞으며 그리스도께로 회심한 유대인들만이 아닌 이방인들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은혜로 말미암는 준비} 비평]에서 맥클라우드 목사님은 허수아비 때리기 오류 하나로서 범주 일탈 오류도 범하셨는데, 이는 논하지 않는다.ㅡ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해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 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일 년 육 개월을 머물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 (행 18:10~11)
이스라엘이 아닌, 로마 제국 고린도에 있는 “이 성 중에 내 백성”은 어떤 사람들일까? 창세 전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 받은 죄인(불신자들: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로서, 몽학선생이 때리는 회초리(가시 채)를 맞고 있는 사람들이다. 다음은 ‘존 칼빈 {사도행전 주석} 신윤수 역 (고양: 크리스챤 다이제스트사, 2014)’ 694쪽에서 옮기는 주석이다.
10. 이 성 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전략)…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내 백성”이라고 부르신다. 당시에 그들은 “외인들”로 불려야 했지만, 이미 생명책에 기록돼 있을 뿐만 아니라, 곧 하나님의 권속으로 택함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런 호칭으로 부르신 것은 합당하다. …(하략)…
말 못 하는 젖먹이, 갓 태어난 젖먹이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찬미할 수 있는가?
제가 날 때부터 주님께 맡긴 바 됐으며 모태에서부터 주님께서는 제 하나님이 되셨나이다. (시 22:10)
주님께서 주님의 대적자들 때문에 어린아이와 젖먹이 입을 통해 권능을 세우셨으니, 이는 원수와 복수하는 자들을 잠잠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시 8:2)
어린아이와 젖먹이들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마 21:16)
존 머레이 <어린아이 중생>
https://cafe.daum.net/reformedvillage/D3MR/132
다음은 [{은혜로 말미암는 준비} 비평]에서 옮기는 글이다. 배경색은 내가 칠한다.
성경의 핵심적인 이야기들(Key Biblical Narratives)
우리가 논의의 중심을 성경에 있는 이야기들로 전환하면, 예비적 율법의 역할 패턴은 확실히 항상 적용되지 않는다. 영혼의 고통을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었던 세례 요한의 이름을 딴 존 번연과 존 그레샴 메이첸(What Is Faith, 129쪽)은 세례 요한이 이 부분에서 아주 독특한 인물이라고 지적한다. …(중략)… 이 모든 성경 본문에서 예비적인 율법의 역할에 관한 어떤 암시도 발견되지 않는다. 대신 예수님 부르심에 즉각 순종해 주님을 따르는 모습만 관찰된다. …(중략)… 이와 유사한 회심 이야기들이 사도행전에서 발견된다. 예를 들어, 빌립보에서 루디아는 주님에 의해 마음을 열었고 이후 믿음에 이르는 그녀의 여정은 아주 부드러웠다. 전혀 괴로워하는 과정이 없었다. 빌립보 간수 역시 아주 다르게 보인다. 지진 후에 곧바로 떨면서 자살하려고 하던 간수 모습을 성경이 조명한다. 그러나 이는 결코 어떤 예비적인 율법의 역할에 기인한 것이 아니었다. 혹 그 간수 마음에 예비적인 율법의 역할 공식이 적용됐다고 해도 그 시간이 너무 짧았다. 그는 바울에게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 물어봤다. 바울과 실라는 그에게 복음을 제시하기 전 가장 먼저 율법을 대면하게 하지 않았다. …(중략)… 이 율법은 바울의 대적들이 이방인 개종자들에게도 강요하려고 했던 유대주의의 거대한 경계선이다. 그러나 이는 바울이 명확히 밝혔듯 우리가 더 이상 준수하지 않아도 되는 법이다. 왜냐면 우리는 더 이상 종이나 (율법이라는 몽학선생 아래에 놓인) 미성년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율법은 유대인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지도 못했다. 반대로 토라의 가르침에도 그들은 집단적으로 그들의 메시아를 거부하고 말았다.
{바른 믿음} 서철원 <능동 순종, 종교개혁 허물어 다시 율법주의-로마교회로 복귀>
구원 받은 중생자는 구원을 받기 위해 율법을 준수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이 말은 ‘중생자는 율법준수 의무에서 벗어났다.’는 말이 아니다. 바꿔 말하면, ‘중생자는 점진성화 과정에서 마음대로 율법(죄)을 범해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함에도 이른바 “세계적인 신학자” 서철원 목사님은 <능동 순종, 종교개혁 허물어 다시 율법주의-로마교회로 복귀>에서 “믿는 자들에게 더 이상 구원을 위하여 율법을 준수하라는 요구가 제거되었습니다. 믿는 자들에게서 율법준수의 의무가 해제되었습니다.”는 명확하지 않은 주장, 반법주의로 오해를 살만한 주장을 하셨다. 그러므로 신학자의 말은 분별이 어린 신자를 위해 오해를 사지 않도록 명확해야만 한다.
“바울의 대적들이 이방인 개종자들에게도 강요하려고 했던 유대주의의 거대한 경계선”을 엄밀하게 말하면, 모세 율법에서도 할례 같은 정결법(행 10:9~14, 11:1~3, 갈 2:11~14)이었다. 그러므로 도덕법인 십계명, 하나님 나라의 헌법은 그리스도의 거룩한 씨인 믿음의 씨로 중생해 정결(확정성화)하게 된 신자, 몽학선생에게 놓임을 받아 자유롭게 된 성년이 점진성화 과정에서 자유롭게 지켜야 할 법전(행 15:19~21)이다. 그러함에도 서철원 목사님처럼 맥클라우드 목사님 역시 “이는 바울이 명확히 밝혔듯 우리가 더 이상 준수하지 않아도 되는 법이다.”는, 반법주의로 오해를 살만한 주장을 하셨다.
중생자를 몽학선생 감독에서 놓인 성년으로 생각할 때, 성년이 점진성화 여정을 걷다가 또 다시 가시 채찍을 맞는 때가 없을 것 같은가? 당연히 있다. 유아처럼 넘어졌을 때다. 즉, 밧세바를 범했던 중생자 다윗 왕처럼 율법을 어겨 하나님께 죄를 지었을 때다. 죄를 지었을 때 이 채찍에 맞지 않는다면, 그는 사생아일 뿐(히 12:5~8)이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고 하셨건만 자신들 짧은 신학은 모른 채, 교만한 예장 합동 꼴뚜기파 정이철 목사는 우리 개혁신앙의 선조 베자 목사님과 메이천 목사님을 두고, 교만한 이창모 목사는 예장 합신 김병훈 목사님을 두고, 교만한 림험원 목사는 예장 합동 서창원 목사님과 김효남 목사님을 두고 기고만장한 망발을 일삼았다. 그런데 그들을 중생한 성년으로 보고, 그들이 채찍에 맞고도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상실한 마음 그대로 버려두지 않으실 것 같은가? 채찍을 때리는 일을 멈춰 그들을 사생아로 취급하지 않으실 것 같은가? 그들은 개혁 교회 ‘성도의 견인 교리’를 믿겠지만, 사생아로 취급하신다. 사생아로 취급해 그들 눈을 흑암에 가두신다. 다음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8장] <4절>이다. 예장 합동 대표 꼴뚜기 Wolf이철이 ‘칼빈 선생님 구원을 받들어 이단 구원파 구원론을 비평하신 예장 고신 박영돈 목사님’을 두고 “마귀의 스파이”, “마귀의 굵직한 빨대”로 이단 몰이를 할 때, 인용했던 도돌이표 인용이다.
……. 이 같은 일은 …… 성령을 근심케 하는 어떤 특별한 죄에 빠지거나 어떤 갑작스럽거나 강렬한 시험으로, 또는 하나님께서 그의 얼굴빛을 숨기셔서 그를 경외하는 자일지라도 흑암 중에 행하게 하시며 전혀 빛이 없도록 하심으로 말미암는다. …….
“예비적 율법의 역할 패턴은 확실히 항상 적용되지 않는다.”는 맥클라우드 목사님 말씀에는 동의한다. ‘단회 순간 중생 시 회심과 확정성화 진리’를 확립하신 존 머레이 목사님께서 <어린아이 중생>에서 말씀하신 대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난 언약의 자손 경우, 어릴 때 중생하면 중생 시 회심한다.’ 점에서 동의하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성령의 가시 채를 맞는 준비은혜 과정에서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을 초대형 거목 사울은 태풍의 핵이 가까이 왔음에도 태풍에 꺾이지 않으려고 주님을 핍박하며 고생(고통)스럽게 버텼다. 그러나 에티오피아 내시나 고넬료나 루디아는 준비은혜 과정에서 주님을 핍박하며 버텼다는 증거는 없다. 이 사실에서 보듯 ㅡ또 다른 중생인 영화에 이르기까지 화살표(→)로 표시할 수 있는 우리 점진성화 과정이 각자 다양하듯ㅡ 화살표(→)로 표시할 수 있는, 중생(회심)에 이르기까지 우리 준비은혜 과정도 각자 다양하다고 생각하기에 동의하는 것이다.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해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행 9:4)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해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 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행 26:14)
‘사도행전 9장 4절’을 ‘누가복음 11장 2절, 3절, 4절에 적힌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라고 한다면, ‘사도행전 26장 14절’은 ‘마태복음 6장 9절, 10절, 11절, 12절, 13절에 적힌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라고 할 수 있다.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그들이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정말 그러한가 해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들 중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헬라의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행 17:10~12)
예장 합동 꼴뚜기파 Wolf들이 “너그러워서”에서 예정된 나무 중생을 위한 믿음의 씨를 품고 예정된 나무를 향해 바람과 같이 다가오시는 성령의 사역, 예정된 나무 영혼이 뿌리박은 땅을 옥토로 바꾸시는 사역. ‘준비은혜의 기경起耕’을 독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맥클라우드 목사님 역시 안타깝게도 [{은혜로 말미암는 준비} 비평]에서 “이 모든 성경 본문에서 예비적인 율법의 역할에 대한 어떤 암시도 발견되지 않는다. 대신 예수님께서 부르시자 즉각 순종해 주님을 따르는 모습만 관찰된다.” 하신 뒤 빌립보 루디아와 빌립보 간수 예를 드셨다. 그런데 사도행전 17장을 보면,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 사도 가르침을 받고 회심한 이방인 베뢰아 사람들만이 아닌, 바울 사도 [아레오바고 강설]을 듣고 주님을 믿는 이방인들도 있었다.
그들이 주님을 믿는 장면(회심 장면)을 보면, “예비적인 율법의 역할에 대한 어떤 암시도 발견되지 않는다.” 또한 고넬료(와 그의 권속) 회심 장면 역시 마찬가지다. 빌립보 자주 장사 루디아(와 그의 권속)도 마찬가지다. 빌립보 간수(와 그의 권속) 역시 한가지다. “전혀 괴로워하는 과정이 없었다.” 그들이 회심에 이르기까지 “여정은 아주 부드러웠다.”
빌립보 간수 경우, 바울과 실라가 “그에게 복음을 제시하기 전 가장 먼저 그에게 율법을 대면하게 하지 않았다.” 특히, “율법에 관하여 매우 특별한 열심을 가졌던 사울(훗날의 바울)은 계속 율법에 소망을 두었을 뿐이다. 율법으로 인해 자신의 죄와 불행한 처지를 깨닫고 슬퍼하면서 그리스도를 찾으려는 자세는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는 Wolf이철 주장1)에 비춰보면, 사도행전 9장에 적힌 사울의 회심도 마찬가지다. 식음을 전폐하고 기도 중인 사울에게 안수한 아나니아는 “그에게 율법을 대면하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성령 충만”의 축복만을 전했다. 더군다나 그리스도 십자가 사역과 사죄의 복음도 전하지 않았다.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해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매 강건해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해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 (행 9:17~22)
사울은 가시 채로서 율법을 대면한 적도 없었고 ‘그리스도 사역과 사죄의 복음’도 듣지 않았다. 그래서 사울은 가만히 있고 싶었다. 그러나 성령 충만이 임하니 저절로2)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게 됐다. 그런데 사울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십니다.”는 복음을 전할 때 그저 단순히 “예수 천당! 불신 지옥!” 식으로 전했겠는가?
정말 그러한가? 아니, 빌립보 간수와 그의 권속은 준비은혜 없이 “예수 천당! 불신 지옥!” 식 복음 전도, “주 예수를 믿으라!”는 그 단순한 몇 마디에 주님을 믿게 됐을까? 물론, 누가는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행 16:32), 이렇게 적는다.
계속 의문을 던져보자. 창세 전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된 나무로서 빌립보 루디아는 바울 사도에게 복음을 듣기 전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몽학선생의 가시 채를 맞은 적이 없었을까? “없다.”고 대답한다면, 로마 제국에 헬라어 구약성경 {70 인 경}이 퍼져 있을 때인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경외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행 16:14)에서 “하나님을 섬기는(경외하는)”을 삭제하는 짓거리다.
또 의문을 던져보자. 창세 전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된 나무로서 빌립보 간수는 바울 사도에게 복음을 듣기 전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몽학선생의 가시 채를 맞은 적이 없었을까? 혹은 빌립보 간수는 유대교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을까? “없다.”, “모르는 사람이었다.”고 대답하면, 이는 빌립보 간수 회심을 루디아 회심에 비춰 생각하지 못하는 짧은 생각이다. ‘짧은 신학과 성경 지식’으로 이단 몰이를 일삼는 예장 합동 꼴뚜기파 Wolf들이나 할 대답이다.
베뢰아 성도들 자세로 계속 생각해 보자. 과연 그러한가?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 세상에 보내실 때부터 눈을 떼시지 않는, 창세 전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된 나무로서 그들 삶에서 가시 채에 맞아 고통을 느낀 적이 없었을까? 가인의 후손들에게 기독교 최초 아벨의 피를 흘리는 현장…. 그 현장에서 ‘가인의 후손들에게 율법을 대면하게 한 뒤 ㅡ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서 스데반 집사를 맞이하시는 인자人子ㅡ 높이 되신 그리스도를 전한 스데반 집사의 강설’을 들었을, 구약성경에 능통했던 영민穎敏한 사울은 양심을 때리는 가시 채찍에 맞지 않아 다메섹으로 가면서 아무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았을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해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 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행 26:14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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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래 링크 글을 보라.
{바른 믿음} 정이철 [불신자를 죄 깨닫고 그리스도에게 나아가게 만드는 율법의 기능은 없다.]
2) 선포로 이루는 저절로 성화론자 서철원 목사님이 즐겨 쓰시는 말로는 “자동으로”. 세대주의 신학을 따르며 ‘삼위일체 양태론과 신인합일神人合 이단’ 지방교회 ‘선포로 이루는 저절로 성화론’을 간단히 말하면, ‘너는 가만히 있어라. 너는 가만히 있어라. 오직 “주여!”만 외쳐라. 오직 “주여!”만 선포해라. 그리하면 성자께서 성령으로 너 안에 오시는, 신인합일 임재를 이룬다. 오직 “주여!”만 외치고 너(나, 我)는 가만히 있어야 아사주생我死主生을 이룬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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