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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명당 무진장 대종사 열반 11주기 추모 다례재 봉행
지난 9월7일 한라산 반야사에서 대덕스님과 재가불자 60명 동참
혜명당 무진장 대종사의 11주기 추모다례재가 한라산 반야사에서 봉행됐다.
한라산 반야사(주지 현파 수상 스님)는 지난 9월7일 대법당에서 혜명당 무진장 대종사 열반 11주기 추모 법회를 봉행했다.
이날 대종사 열반 추모법회에는 무주선원 주지 본연스님, 덕산정사 주지 성후스님, 마라도 기원정사 주지 혜덕스님, 여련암 주지 제아스님, 성불사 주지 해주스님, 묘각사 주지 원경스님 등 대덕스님들과 유재호 신도회장 및 제주도노인복지회관 임직원들과 태고보현봉사단원 및 호스피스회 회원 등 재가불자 60여 명이 참석했다.
혜명당 무진장 대종사의 삶과 사상
혜명당 무진장 스님
혜명당 무진장 대종사는 1932년 제주 출신의 큰스님으로 평생 청빈한 삶으로 귀감을 보이신 사표였다. 우리나라 대중포교의 선구자셨던 스님은 제주시 건입동이 본적으로 교래리에서 출생하셨다. 한의사 집안에서 태어나 17세에 학도의용군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고, 전쟁이 끝나 고향에 돌아왔지만, 허무하게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인생의 무상을 느껴 불교에 귀의하였다.
출가를 결심하고, 범어사로 가서 동산 스님의 제자가 되어 범어사에서 3년여의 행자생활을 거쳐 1956년 ‘혜명(慧命)’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1960년 3월 부산 범어사에서 동산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고, 범어사 불교전문강원을 이수한 후 동국대 불교대학에서 공부했다. 그때부터 6년 여 동안 탑골공원에서 거지들과 같이 생활하면서 매일 같이 법문을 했으며, 그 당시 거지들에게 자비의 마음을 몸소 느끼며 ‘불교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대중 속에 포교 밖에 없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이후 태국으로 건너가 1968년 방콕 왓 벤타마보핏 사원에서 남방불교를 연구하였고, 일본 경도대학 대학원에서 천태교학을 공부했다. 귀국후 스님은 본격적으로 포교 대중화를 위해 노력하였고, 조계종 총무원에 포교원 설립을 적극 요청해 1980년 결실을 보게 된다. 초대 포교원장으로 석주 스님이 주석한 후 무진장 스님은 2대와 4대를 역임하며 현재의 포교사 제도 및 교육 체계를 이루는 등 포교의 근간을 세웠다.
혜명당 무진장 스님은 2007년 조계종 원로의원으로 추대되었고, 2008년에 대종사 품계를 받았다. 그후 2010년에 서울 조계사 회주로 추대되어 40여 년을 조계사에 주석하며 불교 발전과 대중포교에 평생을 헌신했다. 무진장 스님은 출가의 삶 58년 동안 ‘마음이 어리석으면 그것이 범부이고 한 생각 깨달으면 그게 곧 부처다’, ‘불교는 믿음의 종교가 아니라 마음(깨달음)을 닦는 종교다’라고 정법만이 길임을 강조했다.
평소 “시줏돈을 함부로 쓰면 큰 죄”라며 수행자로서 반드시 지켜야 할 근검절약을 강조했다. 비슷한 일화로 스님은 모자를 평생 쓰지 않으셨는데 “모자를 쓸 거면 머리를 깎지 말지”라며 삭발한 그 자체가 수행자의 여법한 모습이라고 늘 강조했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강직한 성품으로 일체의 주지직, 평생 봄․가을 춘추복으로 겨울과 여름을 나셨고, 춥다고 솜옷과 목도리, 내복, 장갑 등을 일체 걸치지 않으시는 등 한 평생 수행자 본연의 모습을 지키고자 했다.
상좌인 현파 스님은 1983년도에 출가해 불교사상대강연회에서 무진장 스님의 법문을 듣고 크게 감동을 받았으며 1989년에 대원불교대학 강의를 들으면서 참스승으로 생각하게 되었다고 하며, 이후 1989년 조계사에 네 번을 찾아가 상좌로 받아줄 것으로 허락받고 사제지간의 인연을 맺게되었다. 현파스님이 중앙승가대학 재학시에 무진장 스님은 법문비를 모아 등록금을 항상 챙겨줄 정도로 인연이 깊었고, 11년전 범어사에서 무진장 스님의 다비를 한 후에는 제주 반야사에서 5재를 봉행하기도 했다.
그리고 무진장 스님의 육신사리는 49재 후 무진장 스님의 첫 삭발지인 부산 범어사 금정산과, 스님의 탄생지인 제주도 한라산, 스님의 전법지인 서울 북한산에 산골(散骨)하였고, 정골사리는 부산 범어사와 제주 반야사에 부도탑을 조성하고 봉안했다. 평생 대중교화와 교육에 매진한 공로로 조계종 포교대상을 비롯해 제3회 대원상 대상 등을 받았으며, 1987년에는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훈했다.
무진장스님의 상좌, 현파스님 11년째 추모다례재 이어와
이날 추모법회에서는 혜명당 무진장 대종사의 은덕을 기리는 소중한 법석이 마련됐다. 무진장 대종사의 상좌인 한라산 반야사 주지 현파 수상스님은 11년째 추모다례재를 봉행하고 그 가르침을 이어가는 법자리도 매년 마련하고 있다.
이날 법문은 중앙승가대학 명예교수이며, 목포 달성사 주지, 사회복지법인 자제공덕회 이사장이신 보각 큰스님을 모셨다.
보각 큰스님이 추모 법문을 펼치고 있다.
청법가에 이어 법석에 좌정한 보각 스님은 “오늘 무진장 큰스님 11주기 다례재를 맞으며 옛날 제가 대학원을 다닐 때 조계사 2층 정화회관에서 스님 모시고 함께 살았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함께 목욕탕도 가고, 조계사 법문도 하면 뵙고, 설날에는 세배를 드렸을때는 100만원이 넘는 몽블랑 만년필을 주시면서, ‘이런 만년필로 사인도 해봐야지’라며 저를 아기시고 평가해 주시던 기억들이 많은 데 이젠 추억이 되었다.”고 회상했다.
보각 큰스님, 추모법문서 무진장대종사 가르침 회상
스님은 또 “우리가 어머님 아버님 인연으로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는 흔적도 없는 존재들이었다. 그렇게 알몸으로 태어났는 데 승가대학 총장이 사제가 돼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준다고 하는 지경에 이르었다. 옛날에 우리가 공부할 때는 교수님께 소주 댓병 들고 인사를 가거나 스승을 찾아 뵐 때는 담배 한 보루가 전부였다. 스님이 될 때는 빈손으로 산문에 들기도 했다. 우리가 죽을 때도 또한 빈손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 이 존재다. 옛 도반들을 만나면, 우리가 이렇게 경제적으로 잘 살게 되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다고 회상하기도 한다.
그 옛날, 미국사람들은 TV도 내다 버리고 차도 버린다는 이야기를 듣고 부러워 했는데, 우리나라가 지금 그 지경에 이르렀다.”고 설명하면서, “출가해서 얻어지는 모든 것이 모두 부처님 재산이고 삼보재산이고 오는 모든 것이 부처님에게서 얻어진 것이다. 내 소유가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도 요즘 세상은 행복하지 않다. 누군가 싸운다고 하면 먹을 것이 있어서이다. 모든 다툼 뒤에는 탐욕이 자리하고 있다. 탐심이 삼독의 가장 근본이다. 의사들 파업도 그 끝은 탐심이고 모든 시위의 목적은 근본이 욕심이다. 욕심이 없으면 화낼 일이 없다. 어리석을 일도 없다. 세상이 잘 살게 되었지만, 그런데도 우리가 행복하지 않다.”고 진단했다.
스님은 이어서 “아함경에는 누가 제일 부자인지 묻는 질문이 나온다. 그 대답은 만족하는 사람이 제일 부자라고 한다. 온 세상 금덩이를 모두 한 사람에게 다 주어도 욕심이 있는 한 만족하기는 어렵다. 아함경에는 세상에 제일 가는 이익이 무병이라고도 한다. 병없이 건강하게 오래 살면 좋은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 100세이상 노인인구가 3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러나 오래 사는 것보다 건강하게 사는 것이 중요하고, 착한 벗을 가까이 두는 것이 가장 행복한 일이다. 좋은 벗이 없다면, 부처님게서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하셨다. 아무리 외롭고 고독하다고 하여도 어리석고 나쁜 사람과는 동행하지 말라고 하셨다.”고 하면서, “부처님 가르침을 한마디로 축약하면 마음 심(心)으로 귀결되고, 팔만대장경이 마음 하나 바르게 쓰는 것을 가르친다.
그 부처님 가르침은 한마디로 자비다. 용수보살은 자비에 대해서, 발고여락(拔苦與樂)이라고 했다. 상대를 기쁘고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자심(慈心)이고, 다른 이의 고통을 없애는 것이 비심(悲心)이다. 우리가 하루라도 자비를 실천하지 않으면 그것이 곧 무자비(無慈悲)다. 행동이 없는 것이 무자비고, 알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무자비고, 입과 머리로 천만번 떠들고 생각한다 해도 실천하지 않으면 자비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하루라도 마음을 행복하게 하고, 항상 남에게 기쁨을 주시고 친절을 베풀고 즐겁게 만들라.”고 강조했다.
그래야만 우리가 떠날 때 그 육신은 버리고 업을 갖고 떠나는데, 자업(自業)과 공업(共業)을 잘 짓고 잘 만나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스님은 “몸은 음식을 먹고 살고 마음은 기도를 먹고 산다. 죽을 때 어차피 버리고 갈 육신에게는 매일 잘 먹이면서 하루라도 기도 하지 않고 수행하지 않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라고 강조하면서, “무진장 스님께서 열반에 드신 지 11년이 되셨다. 아마도 우리 곁에 이미 와 계실 것이다. 오늘날 불교가 위기라고 한다. 큰스님이 어서 오셔서 그 지혜와 실천과 가르침을 펼쳐주시기를 간곡히 염원한다. 그래서 그때처럼 탑골공원에서 거지들 걷어 먹이시고, 화장실에서 짬밥 나눠 먹으면서 우리 곁에서 자비로운 부처님으로 계셨던 것처럼 그런 마음으로 법을 배우고 수행하는 마음을 갖게 될 것을 기대한다.”고 법문을 마쳤다.
한라산 반야사는 매년 혜명당 무진장 스님 추모다례재를 봉행해 오고 있다.
현파스님, 한라산 영실서 무진장스님 육신사리 뿌리던 날 회상
현파스님은 인사말에서 “무진장스님은 50여년 평생을 조계사에서만 머무르셨다. 평생 주지도 한 번 안하고 대종사에 오른 유일한 분으로, 포교에 방해가 된다고 주지를 맡지 않았다. 스님은 평생 밤색 옷 두 벌 갖고 사셨다. 제가 출가해서 17년간 조계사 근처에서 모시고 법회를 다니던, 저에게 아버지 같은 분이며, 나아갈 방향을 이끌어 주신 스승이시다. 그래서 열반에 드시고 큰 스님의 가르침을 펼쳐가겠다는 원력으로 부도를 모시고 함께 추모를 하고 있다.”고 소개하고, “무진장 스님은 모든 사람이 부처 아닌 사람이 없다. 우리 모두가 부처님이다. 가장 소중하다고 여기는 마음자리, 본성이 부처니까 우리가 기쁜 마음으로 공양을 올리고 함께 나누어야 한다는 것이 무진장 스님의 마음이셨다. 그래서 저 나름대로 부족한 정성이지만, 11주년동안 최선을 다해 모시면서 스님의 사상과 행을 본받아 함께 나아가자 하는 원력으로 오늘 하루도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함께 하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고 전했다.
또 스님은 “범어사에서 큰스님 다비를 하고 육신사리를 세 군데에서 뿌려드리자고 의논해서, 출가 본사인 범어사 금정산, 포교도량이던 서울 삼각산 모시바위, 그리고 일부는 고향인 한라산 영실에서 뿌렸다. 서울 삼각산도 어떻게 건너 갔지 싶게 험했고, 제주도 한라산에서는 안개가 자욱하고 앞도 안보이고 얼음도 얼었는데, 계곡을 내려가 육신사리를 뿌려드렸다. 그때 계곡 밑에서 따스한 바람이 불어와 두렵지도 않고 큰스님의 원력이 느껴졌던 기억이 난다. 스님과의 좋은 인연을 되새기면서, 평생 그 법문 들은 대로 가르침을 새기면서 지금도 그렇게 살아왔다고 생각한다.”고 회고하고, “큰스님의 가르침은 정법만 강조하셨고, 허튼 것은 용납하지 않으셨다. 스님의 육성법문이 유튜브에 다 올라와 있으니 여러분들도 들으시면 큰스님의 가르침에 정신이 번쩍 들 것이다.”고 소개했다.
이날 추모다례재에는 맑은소리합창단의 조가 음성공양과, 신도들의 참배로 추모의 마음을 함께 나누기도 했다.
현파 수상스님이 무진장 대종사와의 인연과 11년전 범어사에서 다비를 마치고 육신사리를 삼각산과 한라산 영실에서 뿌리던 날들을 회상하며 참석자들에게 감사를 전하고 있다.
첫댓글
.. 탐심이 삼독의 가장 근본이다.
부처님 가르침은 한마디로 자비다 ..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
무진장 스님!
가까이 뵙지는 못했지만 늘 먼 거리에서
좋은 법문 들으며 존경했는데, ..오늘도 좋은 글 고맙습니다.
그립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_()_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_()_
나무아미타불...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