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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대조전의 화재 이전과 이후 모습들
1. 大造殿 火災의 槪要.
1917년 11월 10일 17시 30분 창덕궁 왕과 왕비의 침전인 대조전 서온돌 갱의실 여관 처소에서 불이 발화하여(순종실록부록, 10년 11월 10일) 흥복헌 남편복도를 타고 養心閤, 熙政堂까지 번져, 대조전(大造殿), 흥복헌(興福軒), 통명문(通明門), 양심합(養心閤), 장순문(莊順門), 희정당(熙政堂), 찬시실(贊侍室), 내전(內殿), 창고(倉庫), 경훈각(景薰閣), 징광루(澄光樓), 옥화당(玉華堂), 정묵당(靜默堂), 요화당(曜華堂), 요휘문(曜暉門), 함광문(含光門) 등 주요 전각 882평에 30만원 상당과 귀중 물품 수백만원이 불탔다.
순종은 약간의 귀중품을 챙겨 궁감(세금 징수 일)의 어깨 부축을 받아 윤비는 슬리퍼만 신고 나인들의 함께 먼저 성정각 보춘정, 낙선재로 가려하다 불길이 여의치 앉차 창경원 식물원 앞 물위 정자로 피난 했으나 날이 너무 추워서 다시 자동차를 이용하여 후원 演慶堂 이어했다.
불은 경성 소방대, 창덕궁 상비소방대, 일본군 보병, 조선보병대 등이 출동 3시간 여만인 20시 15분 화재진압 후 자동차로 성정각으로 이동 11일 오전 30분에 침소를 순종은 誠正閣, 윤비는 藥房 報春亭으로 잡았고 이날 오전에 假殿(임시 거처)을 樂善齋로 정했다.
火災復舊는 1년 예정이었으나 1919년 1월 21일 갑작스런 고종 승하로 1년 뒤인 1921년 大造殿은 交泰殿, 熙政堂은 康寧殿, 景薰閣은 萬慶殿, 희정 돌출현관은 延生殿, 生果房은 欽敬殿 등이 복구 완료되자(복구 완료, 1920년 12월말, 매일신보 창덕궁 신조전, 1920,1월 16일) 순종과 순정효황후 윤비는 1921년 2월 2일 樂善齋 가전(假殿)에서 大造殿으로 이어(移御)했다.
* 대조전 화재/순종실록부록, 1917년 11월 10일 오후 17시 30분 ~20시 15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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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전에 화재가 발생하다.
대조전(大造殿)에서 오후 5시(17시 30분)에 불이 났다.
불은 대조전 서온돌(西溫突, 왕비 침전)에 연접한 나인〔內人〕들의 갱의실(更衣實, 탈의실)에서 일어나 내전(內殿)의 전부를 태워버렸다.
대조전(大造殿), 흥복헌(興福軒), 통명문(通明門), 양심합(養心閤), 장순문(莊順門), 희정당(熙政堂), 찬시실(贊侍室), 내전(內殿), 창고(倉庫), 경훈각(景薰閣), 징광루(澄光樓), 옥화당(玉華堂), 정묵당(靜默堂), 요화당(曜華堂), 요휘문(曜暉門), 함광문(含光門)이다.
불은 오후 8시(20시 15분)에 비로소 진화(鎭火)되었다.
이날 밤 두 전하(순종 이척과 순정효 황후 윤비)는 잠시 연경당(演慶堂)으로 피신하고, 진화 후에 인정전 동행각(仁政殿東行閣)에 옮겨 가서 임시 침소를 성정각(誠正閣)으로 정하였다.
내전에 소장되어 있던 귀중 물품 및 훈기(勳記), 훈장(勳章), 휘장(徽章), 기념장(記念章) 등이 모두 함께 소실(燒失)되었다./순종실록부록 8권, 순종 10년 11월 10일 양력 1번째기사 1917년 일본 대정(大正) 6년
十日。 大造殿火。 午後五時, 火自大造殿西溫突接連之內人更衣室而起, 內殿全部燒燼 【大造殿、興福軒、通明門、養心閤、莊順門、熙政堂、贊侍室、內殿、倉庫、景薰閣、澄光樓、王華堂、靜默堂、曜華門、曜暉門、含光門】 , 午後八時始鎭火。 是夜兩殿下暫避于演慶堂, 鎭火後, 移臨于仁政殿東行閣, 假寢所定以誠正閣。 內殿所藏貴重物品及勳記、勳章、徽章、記念章, 俱爲燒失
* 대조전 침전 전소/ 대조전 화재를 보도한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1917년 11월 11일 호외/左 : 대조전이 전소된 사진/경향신문 이기환 역사스토리텔러기자, 2022년 05, 23일자
2. 화재의 발생 일시와 장소
1917년 11월 10일 17시 30분 왕과 왕비의 침전인 대조전 서온돌 更衣室(왕비 침전 인근)
3. 화재 원인(火災原因)
1) 화재원인 : 매일신보 1917년 11월 14일자, 대조전 ”出火 원인“
針房內人이 다림질 하다가 過熱 推定
2) 內殿炎上顚末報告書 ⇒ 이왕직 민병석장관이 궁내성 대신에게 보고
1917년 17시 30분 순정효황후 윤비 거주 공간인 서온돌에 접란 나인 갱의실(탈의실)에서 이상한 소리가 확인 보니 발화. 불은 서풍이 불어 내전이 전소되고 몸만 빠져 나옴, 숙직 찬시 이교영과 경찰서 및 소방대 등이 출동했으나 초기 진화 실패, 20시 15분 소화/화재 발견자는 왕비 근시 나인 윤명운, 유경운, 신태순 등
* 동궐도(1827 ~ 1830)상의 대조전은 솟을지붕, 지붕은 차양식, 월대 양 옆에 판문이나 복구 공사 후에는 평평한 지붕에, 판문 사라지고 내부는 서양식으로 즉 유리창문, 서양식 침대에 커튼 장식 등 월대 양 옆에 전구, 화분이 놓여 졌다.동쪽은 흥복헌, 융건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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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전 화재 의심 인터뷰/김윤규 이왕직 기사
”건축물에 대한 손해만 무려 30만원이상 될 줄로 생각하여 20여만원의 화재보험을 붙여 있는대 …, 평시의 소화설비로 말하면 전각 주위에 수다한 수도 소화전을 설비하였을 뿐 아니라 조그만 처소이라도 일일 소화기를 설비하였으며 궁강, 야경, 기타 불을 경계하는 사람도 다수하였으며 기외에도 광대한 전각일뿐 아니라 양전하의 기거하옵시는 지밀안인 고로 화재의 예방에 대하여는 물론 힘을 다하였건만은 …/매일신보 1917년 11월 11일 기사
“당시 창덕궁은 화재 전에 화재보험을 들었고 방화설비까지 완벽히 갖추고 있었으며 특히 대조전은 순종과 순정효황후가 거주했던 곳이라 화재 예방에 진력을 다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과연 내전 권역을 몽땅 잿더미로 만들정도의 강력한 화재기 발생할 수 있냐는 의문이 생긴 것이다/매일신보 1918년 1월 17일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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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순종과 순정효 황후 대피 및 이동 경로
순종은 어깨 부축 받아, 윤비는 슬리퍼만 신고 ⇒ 창경원 식물원 앞 물위 정자 ⇒ 날이 추워 자동차로 후원 연경당 이어
⇒ 20시 15분 화재진압 후 성정각 ⇒ 순종으 성정각, 윤비 약방 보춘당각 침소(11일 0시 30분) ⇒ 11일 樂善齋와 錫福軒의 도배 및 창호공사와 대청과 누마루 양탄자를 까는 신속한 공사 후 21시 에 가전(임시 거처) 낙선재로 이어(순종과 순정효황후 윤비는 1921년 2월 2일까지 생활)
5, 대조전 화재 진압(大造殿 火災 鎭壓)
화재집안 소방대는 화재발생 후 경보 출동했는데, 도경무부, 총독부 중앙시험소, 총독부의원, 경성고등보통학교 부속교원양성소, 조선은행, 동아연초회 등의 소방대와 경성, 마포, 용 산, 신용산, 왕십리 등과 일본군 19사단 기병 6명, 보병 270명, 조선보병대 전원 등이 출동 (1917년 창덕궁 대조전 화재와 이왕직의 역할, 이왕무, 2020, P 111.)
6. 화재 피해 상황(火災 被害 狀況) : 燒失 面積 882坪, 피해금액 30만원 추정
1) 殿閣 및 建物/王公族錄, 大正 6년 12월 14일 內殿炎上顚末報告書/ 창덕궁 대조전 화재와 이왕직의 역할,이왕무
가. 大造殿 103평 全燒, 熙政堂 62평 全燒, 景薰閣과 澄光樓 56평 全燒, 生果房 35평 全燒
나. 興福軒 67평 全燒, 玉華堂 39평 全燒, 靜默堂 22평 全燒, 靜默堂 倉庫 5평 半燒
다. 通明門, 曜輝門과曜輝門 看務所, 曜華門, 含光門, 莊順門 全燒
라. 養心閣 68평 全燒, 養心閣 附屬 倉庫 9평 全燒, 養心閣 便所 全燒
마. 生果房 35평 全燒, 退膳間 45평 全燒, 主膳所(반찬 만드는 곳) 일부 85평 全燒
바. 贊(도울)侍(모실)室(비서실) 44평 全燒, 內人室(나인실, 여관‧궁녀들 집무실) 半燒, 內人附 屬物置(나인들 물건보관소) 2평 半燒
사. 內殿 倉庫 61평 全燒, 書齋(천우재). 廊下(아랫사람들 거처방) 35평 全燒, 王妃 寢殿 浴 室 21평 全燒
아. 仁政殿 附屬 渡廊下 37평 半燒, 車 東西流所 渡廊下 休憩所 68평 全燒
2) 主要 燒失 物品 : 귀중 물품 및 훈기(勳記. 훈장 증서), 훈장(勳章), 휘장(徽章, 나라를 상징하는 물건), 기념장(記念章) 등 소실(燒失)과 損害 金額이 數百滿員 相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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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이 한 채에서 차차로 불어 나와야 여간 세간이라도 구하여 내일 터인데 대조전 화재는 한번 불이 바깥으로 나오며 걷잡을 사이 없이 나란히 잇는 세 채가 함께 붙었던 고로 귀중한 보물과 장식품은 물론이요 양전하의 좌우에 쓰시던 조조품과 기타의 대금침에 이르기까지 하나도 집어 내이지 못하고 전부 소실 되었음므로 그 손해는 실로 수백만원 일뿐 아니라 그 중에 금전을 주고도 사지 못 할 왕가의 귀중품이 다수라함은 물론이라/매일신보 1917년 11월 11일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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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左/1912 이전 대조전/右/1912년 이후 대조전 /월대 좌우에 전구와 화분, 창문에 유리, 커튼/구글 나무위키
* 左/순종 침전, 右/ 대조전 전소된 사진/매일신보, 1917년 11월 11일/나무위키
7. 소실 전각의 복구(燒失 殿閣의 復舊)
1) 전각의 복구 : 조선 소나무를 사용한 기존 경복궁의 주요 전각을 해체하여 복구에 활용하였다. 大造殿은 交泰殿, 熙政堂은 康寧殿, 景薰閣(동궐도상 이전에는 1층 경훈각(온돌방)과 2층 징광루(마루방)이었으나 현재는 경훈각만 내부는 서양식) 청기와은 萬慶殿, 熙政堂 돌출現觀은, 興福軒은 健順閣, 生果房은 欽敬閣 등을 활용하여 복구했다(매일신보 1920년 1월 16일자, 창덕궁의 신조전(新造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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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관 민병석 이하 고등관이 화재 이후의 처리방법에 대해 회의를 하다.
이왕직 장관(李王職長官) 자작(子爵) 민병석(閔丙奭) 이하 고등관(高等官)이 화재 이후의 처리 방법에 대하여 회의를 하고, ”임시 궁전 낙선재(樂善齋)이다.“ 을 응급 수리하는 비용 6만 5,000원을 예비금 가운데서 지출하기로 하였다. 신전(新殿)은 조선식으로 건축하기로 (외부 공사)하고, 그 외에는 서양식을 참조하기로(내부 공사) 하였다.
건평은 약 700평으로 하고 건축 및 설비, 잡비 등을 개략하여 54만 6,300원이 되었다. 금년(1917년)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대정(大正) 8년까지 준공하기로 결정(2년)하였다./순종실록부록 8권, 순종 10년 11월 14일 양력 1번째기사 1917년 일본 대정(大正) 6년
이왕직에서 전각을 중건하는데 경복궁 내의 전각의 재목을 옮겨짓는 일을 총독부와 의논하여 보고를 올리다.
이왕직(李王職)에서 전각(殿閣)을 중건하는데, 경복궁(景福宮) 내의 여러 전각 『교태전(交泰殿), 강녕전(康寧殿), 동행각(東行閣), 서행각(西行閣), 연길당(延吉堂), 경성전(慶成殿), 연생전(延生殿), 응사당(膺社堂), 흠경각(欽敬閣), 함원전(含元殿), 만경전(萬慶殿), 흥복전(興福殿)이다.』 의 옛 재목을 옮겨 짓는 일을 총독부(總督府)와 의논하여 정한 후 보고를 올렸다./순종실록부록 8권, 순종 10년 11월 27일 양력 1번째기사 1917년 일본 대정(大正) 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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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공사 참여자 : 내전공사 책임자를 이왕직 영선과장 다나카 센에서 곤도 시로스케(권등사낭개)으로 교체, 이왕직 기사 김윤구, 임길송, 이왕직 영선과 직원들, 승우용태랑, 창덕궁 건축토목기사 이와이 초사부로(암정장삼랑)와 구니 키, 전기장치는 체신국 기사 오카모토게이지로 등 일본인 설계과 계획으로 추진 됨.
3) 복구기간 : 2개년 사업으로 계획
4) 복구시설
1) 건물 복구 : 교태전, 강녕전, 연길당, 경정전, 연생전. 흠경전, 함원전, 만경전, 흥복전, 응사당, 연와병, 일각문 등 경복궁 건물을 解體 移建/순종실록부록 8권, 순종 10년 11월 27일
2) 복구 계획 : 기존 조선의 전통 한옥양식에 프랑스식 내부장식, 즉 설비, 채광, 통풍, 배수방식 등을 가미, 전각방향을 동향에서 남향으로 전환
3) 시설 : 전기, 수도설비, 난방시설(증기난로, 온수 난방), 창호, 방화벽, 배수구(콘크리트 배수관)
4) 복구 비용 : 546,300원/순종실록부록 8권, 순종 10년 11월 14일
5) 복구 결과
희정당, 대조전, 경훈각은 외부는 조선양식, 내부는 서양식으로 대조전의 경우 솟을지붕에 서 평평한 지붕에 차양 사라졌고, 경훈각의 경우 2층 징광루는 없어지고 단층 경훈각으로, 희정당은 자동차 이용편리를 위해 돌출 현관과 행각을 만들어 복도로 연결하는 눈목(目 )자 형태 배치, 동서행각에 귀빈실, 찬시실(비서실) 설치, 용마루가 생겼고 하월지 연못과 화계가 없어졌으며 내부는 서양식, 중국식 가구, 카페트, 샹들리에, 증기난방, 유리창문, 수세식 화장 식 등이 들어선 조,일,청 복합양식으로 변모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대조전에 이당 김은호 백학도( 西 ), 이용우 오일영의 봉황도( 東 ), 희정당에 해강 김규진의 해금강 총석정절경도(東), 금강산 만물초승경도(西), 경훈각에는 심산 노수현의 조일선광도(東), 청전 이상범의 삼선관파도(西) 등 안중식 조식진의 제자 서화미술연구회 소속 젊은 화가들의 귀중한 그림 6점이 내부벽을 장식한게 다행이다.
8. 대조전으로의 이어(移御)
순종과 순정효황후 윤비 1921년 2월 2일 임시 거처 낙선재에서 복구 된 대조전으로 이어(매일신보 1921년 2월 3일자)/ 대조전은 1926년 4월 순종 승하 후에는 가끔 영친왕(이은)비 이방자 여사가 한국에 왔으 때 이용 했고, 1939년 마지막이용 후에는 빈공간으로 남음.
* 참고사항
1. 순종실록부록 : 이왕직이 1935년 편찬, 조선왕조실록에 미포함. 순종재위기간(1907 ~ 1910)은 순종실록, 그리고 1910년 경술국치 후(1911 ~ 1926, 04,25)는 순종실록부록
2. 李王職 : 일제 강점기 조선 궁궐과 왕실의 일을 맡아 보던 궁내부 소속 관청으로 조선총독 부의 합법적인 왕실 감시기구, 1910년 12월 30일 이왕직 사무소를 설치, 사무실 인정전. 조 선인이 장관, 일본인 차관, 조선인 장관으로는 초대 민병석, 이재극, 한창수, 민영기 등이 임 명되었다. 경술 8국적은 이완용, 윤덕영, 민병석, 박제순, 고영희, 조중웅, 이병무, 조민희 등 이다.
3. 왕공족록 :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 후 일제가 대한제국 황실에 대한 신분을 규정한 제도 따라 관리기록한 문서
4. 매일신보 : 조선총독부 기관지
* 참고자료
1. 순종실록 부록, 국사편찬위원회
2. 창덕궁관리사무소 홈페이지
3. 창덕궁 대조전 화재와 이왕직의 역할, 서울역사편찬원, 2020. 이왕무
4. 대조전 화재 매일신문 호외, 경향신문, 이기환 문화부 기자
5. 매일신보
6. 왕공족록
7. 구글 나무위키
8. 동궐도
9. 월간조선, 오동룡 기자
* 이미지
1. 대조전 화재/순종실록부록, 1917년 11월 10일 오후 17시 30분 ~20시 15분까지
2. 대조전 침전 전소/ 대조전 화재를 보도한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1917년 11월 11일 호외/左 : 대조전이 전소된 사진/경향신문 이기환 역사스토리텔러기자, 2022년 05, 23일자
3. 동궐도(1827 ~ 1830)상의 대조전은 솟을지붕, 지붕은 차양식, 월대 양옆에 판문이나 복구 공사 후에는 평평한 지붕에, 판문 사라지고 내부는 서양식으로 즉 유리창문, 서양식 침대에 커튼 장식 등 월대 양옆에 전구, 화분이 놓여 졌다.동쪽은 흥복헌, 융건헌.
4. 左/1912 이전 대조전/右/1912년 이후 대조전 월대 좌우에 전구와 화분, 창문에 유리, 커튼/구글 나무위키
5. 左/순종 침전, 右/ 대조전 전소된 사진/매일신보, 1917년 11월 11일/나무위키
6. 창덕궁 대조전/무량각 평평한 지붕에 희정당과 일직선 형태의 1920년 이후의 복구된 오늘날 모습/양은석.
7. 조선왕가의 가계도/월간조선 오동룡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