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약속의 시대에서 하느님 영과 말씀(「가톨릭 교회 교리서」 702~716항)
구약을 거치면 성령을 필요로 하는 ‘가난한 이들’이 된다
성령만이 ‘하느님 유사성’ 회복
율법 통해 자신의 죄를 깨닫고 그리스도께 성령의 힘 청해야
하느님 백성으로 구원에 이르러
지금은 고인이 되신 미리내 천주성삼 수도회 임언기 신부가 임종 직전 한 냉담교우에게 병자성사를 주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간암 말기 환자였는데 본인이 청한 것은 아니고, 주위 신자들이 끝까지 성사를 거부하는 것이 안타까워 청했던 것입니다. 배에 이미 복수가 차 있고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었습니다. 그는 오랜 냉담을 하고도 병자성사를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고해할 것이 없느냐고 묻는 신부님의 질문에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말을 못 하나 싶어 십계명을 일일이 읊어주며 해당하는 것이 있다면 고개를 끄덕이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병자는 미동이 없었습니다. 결국, 신부님은 고해성사와 병자성사를 거부하는 것에 대해 확신하고 방을 나섰습니다.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뒤에서 환자가 크게 소리쳤습니다.
“나 죄 없어!”
바오로 사도는 “의로운 이가 없다. 하나도 없다”(로마 3,10)라고 말합니다. 천사도 하느님 앞에서는 부끄러워 얼굴을 가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어떻게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저 자신의 죄를 잊어버리려 다른 사람을 심판하며 살아왔던 것뿐입니다.
성령을 통한 죄 사함을 거부하는 이유는 ‘구약’의 회개의 과정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구약은 ‘율법’을 통해 인간이 죄인임을 인정하게 만드는 목적이 있습니다. 인간이 죄인임을 인정해야 성령을 통해 죄를 용서하러 오신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게 됩니다. 율법은 한마디로 말하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것이고, ‘사랑’은 성령의 열매입니다.(갈라 5,22 참조) 그러니 구약의 율법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그리스도께서 주실 ‘성령의 필요성을 깨닫게 하려고’ 존재합니다.(로마 3,20 참조) 구약은 성령을 주러 오시는 메시아를 기다리며 성령을 받을 준비를 하는 시간이기에 구원을 위해 누구나 거쳐야 하는 시기입니다.(711 참조)
구약의 모든 예언자들은 율법을 지키기 위해 메시아를 통해 오시는 성령의 필요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태초에 하느님께서는 마치 사람이 두 손으로 물건을 만드는 것처럼 하느님도 ‘성자와 성령’이라는 두 손으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704 참조) 인간을 창조하시되, 당신의 ‘모습’(image)대로 당신과 ‘유사’(likeness) 하게 만드셨습니다.(창세 1,26 참조) 그런데 인간은 성령의 내적 이끄심을 거부하여 비록 그분의 모습(image)을 유지하더라도, 결국 그분과 닮음, 즉 ‘유사성’(likeness)을 잃었습니다. 구약에서 말하는 구원의 약속이란 “성자께서 ‘인간의 모습’을 취하시어 그 ‘영광’, 곧 만물을 ‘살리시는’ 성령을 주시고 성부에 대한 ‘유사성’을 회복시켜”(705) 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죽음을 몸소 짊어지심으로써 당신 생명의 영을 우리에게 주셔서 다시 하느님을 닮게 하셨습니다.(713 참조)
문제는 아무리 성령을 주시러 메시아가 오셨어도 구약을 제대로 통과하지 못해 성령을 통한 죄 사함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율법을 지키려 하지 않기 때문이거나 자신의 힘으로 율법을 지킬 수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는 성전을 빼앗기고 유배를 다녀와 “이스라엘의 위로”와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던 소수의 “남은 자들”, 곧 “가난한 백성들”이 결국엔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러 오셨습니다.(714 참조) 가난한 이들이란 율법을 ‘성령의 힘으로’ 지키려는 사람들입니다. 구약의 모든 예언자는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는 메시아를 통해 오시는 성령의 필요성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다 성령의 영감을 입은 이들이었는데, 성령께서는 그렇게 당신 백성을 “겸손하고 양순한 사람들”로 만들어, “마침내 약속의 시간에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도록”(716) 이스라엘 백성을 준비시키고 계셨던 것입니다.
성령을 통해 정화된 가난한 백성들은 율법을 통해 자신을 비추어 절대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또한, 바리사이-율법학자들처럼 자신들의 힘만으로 율법을 지킬 수 있다고 교만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 오시는 성령만이 죄로 잃었던 “하느님과의 유사성”의 영광을 회복시켜 줄 수 있음을 믿게 하십니다. 사랑의 율법을 지키기 위해 그리스도께 최우선으로 ‘성령’을 청할 수 있다면(루카 11,13 참조), 그 사람이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는 행복한 ‘가난한 자’이고 구약을 통과한 메시아를 필요로 하는 백성입니다.(루카 6,20 참조) 성령으로 준비되지 않은 사람은 성령을 통한 하느님 유사성의 회복까지 다다를 수 없습니다.
전삼용 신부(수원교구 영성관 관장·수원가톨릭대 교수)
[가톨릭신문, 2020년 04월 26일자]
68. 때가 찼을 때의 성령(「가톨릭 교회 교리서」 717~726항)
성령은 그리스도 앞에서 인간의 처지를 깨닫게 하신다
성령의 도움을 통한 참된 회개
누구도 심판할 수 없음을 깨닫고 하느님 자비만을 청하게 될 때
그리스도와 온전한 일치 이뤄
16세기 프랑스 카푸친 수도회에 모든 이들로부터 성인으로 추앙받는 암브로시오란 수사 신부가 있었습니다. 어깨에 손바닥과 같은 특이한 점을 가진 채 수도원 앞에 버려져 아기 때부터 수도원에서만 산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의 엄격함은 같은 수사들에게도 두려움을 주었습니다. 한 번은 어떤 수녀가 남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수녀의 간청도 뿌리치고 원장 수녀에게 알려 아주 혹독한 벌을 받게 했습니다. 겉으로는 성인처럼 살았지만 실제로는 자비가 없는 바리사이나 율법학자와 다를 바가 없었던 것입니다.
세상을 겪어본 적이 없는 암브로시오 수사는 신자 중 가장 젊고 아름다운 한 여인에게 특별히 끌리게 됩니다. 온통 그녀 생각만으로 가득하고 꿈을 꾸어도 그녀 꿈만 꿉니다. 조금씩 이상한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그 여인이 자신의 어머니가 마음의 병이 있다며 암브로시오 수사를 집에 불렀습니다. 그 어머니는 첫 아이를 버린 적이 있어서 그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상담을 해 주던 중, 어머니의 눈을 피해 딸을 탐했고 그때 어머니가 방에 들어왔습니다. 암브로시오 수사는 그 방에 들이닥친 어머니를 살해합니다. 어머니는 수사의 어깨에 있는 점을 보고는 자기가 버렸던 아들임을 알아챕니다. 암브로시오도 자신의 어머니를 찌르고 동생을 겁탈한 것을 깨닫게 됩니다. 성인으로 추앙되던 수사가 자신의 오빠인 것도 모자라 어머니까지 죽인 것에 동생은 실성합니다.
암브로시오 수사는 교회에서 파문된 것은 물론이요, 재판에서 화형을 선고받습니다. 죽기 전에 마귀가 또 찾아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영혼을 넘기라고 말합니다. 암브로시오는 자신은 아무래도 좋으니, 그 조건으로 자신의 여동생 정신을 온전하게 돌려놓아 달라고 청합니다. 암브로시오 수사는 하느님 자비에 의탁하며 그렇게 죽어갑니다. 영화 ‘수도사’(The monk)의 줄거리입니다.
처음 암브로시오는 자신이 성인인 줄 알았으나 사실은 마귀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를 찌르고 진정 성인으로 태어납니다. 자신은 지옥에 가도 상관없다며 동생을 위해 기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암브로시오를 변화시킨 것은 자신이 찌른 어머니의 ‘피’입니다.
성령은 암브로시오 어머니의 피처럼 참으로 어떤 사람을 겸손하게 만들어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게 합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죄인인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하느님의 자비만을 청합니다. 누구도 심판할 수 없는 사람이 되고 오직 하느님의 영광과 이웃의 행복만을 위해 살게 됩니다. 이런 상태가 되어야 참으로 그리스도를 만날 준비가 된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선구자인 요한을 통해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718) 하셨습니다. 성령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느님을 닮은 ‘유사성’을 되돌려”(720) 받을 수 있음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렇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719)인 그리스도께로 사람들을 이끄십니다. 성령을 통하지 않으면 누구도 그리스도와의 온전한 친교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성모 마리아는 성령의 도움으로 이런 지혜를 지니셨기에 “상지의 옥좌”(721)로 불리십니다. 마리아는 이러한 준비로서 “전능하신 분의 이루 말할 수 없는 선물”(722)인 그리스도를 당신 태중에 받아들이셨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마리아는 “온전한 그리스도의 어머니”(726)가 되십니다. 성령은 이렇듯 인간을 그리스도와 진정으로 하나가 되게 합니다.
그리스도는 성령을 통하여 엘리사벳과 그의 태중의 요한을 준비시키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엘리사벳 태중의 요한이 성령으로 가득 차게 하셔서 당신과의 친교를 이루게 하신 것입니다.(717 참조) 교리서는 성령께서 “인간들에게 그리스도와 친교를 이루게 하신다”(725)라고 말합니다. 성령은 인간을 그리스도와 이어주는 중개자이십니다.
지금도 교회를 통해 우리에게 오시는 성령은 우리의 처지를 깨닫게 하시고 그리스도가 아니면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알게 하십니다.(724 참조) 암브로시오 수사는 어머니를 찌르고 나서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누구도 성령의 힘으로 참된 회개에 이르러 누구도 심판할 수 없는 처지가 되기 전까지는 그리스도와의 온전한 친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성령은 내가 찌른 그리스도에게서 오시어 나를 진정으로 그리스도에게 합당한 사람으로 새로 태어나게 하십니다.
전삼용 신부(수원교구 영성관 관장·수원가톨릭대 교수)
[가톨릭신문, 2020년 05월 0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