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 모든 아이들이 태어나는 이유는 부모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다."
어느 날, 한 선배가 제게 해준 말입니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은행원은 돈을 돈으로 보면 안 되고, (외과)의사는 사람을 사람으로 보면 안 된다."는 말씀을 종종
하시곤 했는데, 그러고 보면 인서가 태어나 제가 크게 깨달은 것 중 하나는 "나를 나로 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글을 시작하는 용기의 원천 또한 바로 그 깨달음에 있음을 먼저 고백합니다.
제겐 두살 터울의 언니가 있습니다.
뇌병변 1급 장애인인데 태어나서 지금까지 늘 누워서만 지내며
식사부터 배변까지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않으면 안 될 처지에서 50년을 살아왔습니다.
발음도 심히 어눌하여 가족이 아니고선 잘 알아듣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얼마 전에는 언니가 2010년부터 가족과 떨어져 살게 된 광안리의 한 요양병원에서,
독감예방주사를 이미 맞았는데 간호사의 실수로 한 번을 더 맞은 일이 있었습니다.
며칠 전에 맞았다고 언니는 절박하게 고함을 쳤으나 말을 알아듣지 못한 간호사는 그저 주사가 무서워 그러나보다 하며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언니를 붙들고 억지로 주사를 놓았던 것입니다.
그 순간 언니가 느꼈을 두려움과 절망을 생각하니 가족인 저로선 말그대로 눈이 뒤집혔습니다.
다행히 여기저기 알아본 결과, 별 탈 없으리란 소견들이 돌아왔고 정말 다행히도 언니는 아직까진 별 탈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이쯤에서 어쩌면 당사자인 언니나 저보다 더욱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로 이 글을 읽고 계실 어떤 한 분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닙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만 41년을 그런 언니와 한 지붕 아래서 부대끼며 살아온 저는 얄궂은 버릇 하나가 생겼습니다.
바로 소변을 참는 버릇입니다.
제가 방에서 문 열고 나오는 소리만 나면 이때다 하며 족족 저를 불러 세워 무언가를 요구하는 언니 때문입니다.
그 요구란 기본적인 것 외에도 참으로 다양한 것이어서,
텔레비전 채널을 돌려 달라, 씨디를 바꿔 달라, 바닥에 떨어진 밥풀을 주워 버려 달라, 베개를 똑바로 해 달라, 등을 긁어 달라 등등,
그야말로 "달라, 달라"의 연속입니다.
그 요구에 일일이 다 응해주는 것이 힘들어서, 아니 그 요구가 귀찮아 짜증을 낸 후 제가 겪을 죄책감이 더욱 힘들어서
소변 따윈 일단 참고 보자, 하던 것이 그런 악습으로 굳어진 것입니다.
상기의 것들이 제 경험 속 장애인의 삶이고, 장애인 가족들의 삶입니다.
제대로 단적인 것을 말해야 한다는 이 순간의 강박은 결코 언니나 저 때문이 아닙니다.
바로 그 분,
타인의 고통에 대한 생생한 상상력을 타고나신 분,
이미 그렇게 생겨먹어 자기자신도 어찌할 수가 없는,
그래서 현실이야 어찌 됐든 상처투성이의 지친 모습으로 찾아오는 그 누구도 거절할 수가 없는,
그게 죽기보다 어려운,
참으로 이상한 분,
바로 그 분을 감히 제대로 대변하고
바로 그 분께 감히 제대로 대들기 위함입니다.
그러자 우선 떠오르는 것이 2014년, 그러니까 인서가 1학년 때의 일입니다.
저와 함께 등교를 하여 신발장에서 실내화를 내려 신고 있는 인서에게 강당에서 놀고 있던 현아가 다가와
"안녕, 인서야." 하며 말을 건넵니다.
그때 예슬이도 현아 곁에 조금 뻘쭘한 표정으로 서있었는데 현아가 대뜸 "예슬아, 친구가 오면 인사를 해야지." 합니다.
그러자 얼른 예슬이도 "인서야, 안녕" 하고 손을 흔듭니다.
너무나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가르침과 배움, 아니 배움과 가르침의 현장을 운 좋게도 저는 목격했습니다.
이제 다시 언니와 저의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습니다만, 대략 초등학교 5,6학년일 때부터 저는 생업에 바쁘신 부모님을 도와
언니 밥을 떠먹이고, 소대변을 받아 처리하고, 옷을 갈아입히는 등등의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연히 힘들고, 벗어나고 싶고 했겠지만 그런 하루하루가 모인 몇 십 년의 삶이 장차 제게 어떤 괴물같은 성정으로
자리 잡을 지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다섯 살 때 인서가 부산대학에서 심리 검사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주스를 쏟았을 때 엄마가 어떻게 했느냐는 질문을 받고 인서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그 그림에 대해 묻자 "엄마가 의자를 던졌다."라고 대답을 하더랍니다.
정말 그렇게까지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어쩌면 기억하기 싫은 것일 지도 모릅니다.)
두 돌이 채 되기 전부터 그 비슷한 일에 대해 집이 떠나가라 고함을 지르며 아이를 닦달했던 것만은 분명합니다.
핏덩어리 어린 자식에게 너무도 당연히 베풀어야 할, 먹이고, 치우고, 입히고, 재우고, 씻기고 하는 일들이
왜 그토록 힘들고 지겹고 때론 억울하기까지 했던 것인지, 그 이유를 깨닫고 나서야 전 지난 제 삶의 무게가 얼마나
끔찍한 것이었나, 얼마나 내 능력 밖의 것이었나,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엄마한테 당한 것도 모자라 네 살 때 만 9개월을 다닌 어린이집에서,
김치를 뱉어냈다고, 카레를 흘렸다고, 낮잠을 안 자고 돌아다녔다고
때론 맞고, 때론 화장실에 갇히는 파란까지 겪었답니다, 바로 인서라는 어떤 아이가 말입니다.
(지금도 이렇게 남일 말하듯 하지 않고선 견디기 힘든 상처, 창자를 끊어내는 고통이 만약 제 인생에도 있었다면
바로 이 과거사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요즘처럼 그런 일들이 뉴스에라도 오르내렸다면 아이가 아침마다 어린이집을 안 가겠다 했을 때,
하원 후 이유 없이(?) 거실을 뒹굴며 발악을 했을 때, 혹시나 하는 의심이라도 있었겠지만
당시로선 설마 ‘세상에 그런 일이’했을 뿐입니다.
이쯤 되면 인서의 마음속이 불안과 분노로 들끓지 않음이 오히려 이상할 것입니다.
저는 터지는 그 불안과 분노 앞에서 말 그대로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저 미안하다, 내 탓이다, 하며 꾹꾹 참다가 나중엔 폭발하고, 또다시 더 큰 죄책감에 시달리고, 그러다 절망하고,를
지겹도록 반복했습니다.
이제 이야기는 질정 없이 건너뛰어 얼마 전 금정산성에서 있었던 3,4학년 엠티 때로 향합니다.
1박 후 고당봉 등산을 마치고 마무리 회식을 위해 찾았던 한 오리불고기 집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곳에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새끼고양이가 있었는데 당연히 아이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습니다.
뒤늦게 녀석의 존재를 알게 된 인서가 이미 몇몇 아이들이 둘러앉아 있는 곳을 헤집고 들어가 고양이한테 덥석 손을 댑니다.
그러자 기존의 아이들이 “야아, 만지면 안 돼.”하고 기겁을 합니다.
그러자 인서가 예의 무참한 표정으로 씩씩대며 그 자리를 떠나려 하는데 소민이의 야무진 말 한마디가 날아듭니다.
“느그는 만지면서 왜 인서는 못 만지게 해?”하더니 이내 “인서야, 이리 와.”하고 손짓을 합니다.
그리곤 자석에 이끌리듯 다가간 인서에게 부드럽게 한마디를 덧붙입니다. “인서야, 이렇게 살살 쓰다듬듯 만지면 돼.”
‘
인서는 집에 돌아와서도 통쾌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소민이의 언행을 한참동안 되씹고 칭송했습니다.
그때 저는 비로소 왜 인서가 그토록 소민이를 좋아하는지(인서 말론 좋아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는 거랍니다.) 알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인서 마음속 켜켜이 쌓인 분노를 서서히 녹여가는 장본인은 부모도, 교사도 아닌 바로 친구였던 것입니다.
상기의 현아와 소민이의 일화 또한 제대로 단적인 것이었길 바라는 마음, 이 역시 그 분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바로 그 분의 믿음이 옳았다는 것,
과연 그 분의 믿음대로 참빛학교는 ‘각양각색의 아이들이 더불어 행복한’ 곳이었다는 것.
하지만 저는 이런 그 분의 믿음이 어떤 과학적 근거나 학설에 반드시 기인한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오히려 그 분은 ‘그렇게 생겨먹은 대로’, 좀 더 고상한 표현을 찾자면 그 분 자신의 ‘결’대로 충실히 살면서, 혹은 충실히 살기 위해,
필연적으로, 아니 필수적으로 그런 믿음을 가질 수밖에 없었으며, 놀랍게도 그 믿음이 참으로 강하고 선한 것이기에
그저 현아나 예슬이나 소민이나 인서는 거기에 맞춰 제대로 놀아났을 뿐이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쯤에서 저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만약 그런 그 분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다면 그건 어떤 종류의 것일까 하는.
그건 혹시 '고통의 서열화' 비슷한 데서 기인하는 건 아닐까 하는.
좀 더 많이 힘든 사람에 대한 애틋한 판단과 쏠림.
만약 제 어머니가 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인 언니의 고통에만 쏠려 있었다면
그래서 제가 언니를 소홀히 대하거나 원망하는 듯한 언행을 할 때,
어머니께서 그 어떤 이해의 노력도 없이 즉각 언니 편만 들면서 “너 왜 그러느냐.” 질책을 하셨다면
그땐 제 마음이 어땠을까, 를 한 번 상상해 보는 것입니다.
그랬으면 아마 저는 그대로 가출 소녀가 되어 좀비한테 물리는 처지가 되었거나,
(차라리 그랬으면 인서를 고생시키는 일은 없었겠구나 싶으니 갑자기 쓴웃음이 납니다.)
저를 위악 속에 감추며 마음에도 없는 말을 마구 쏟아냈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오히려 어머니는 한결같이 제 입장에, 제 고통에 더욱 민감하셨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40년이 넘도록 저를 언니 곁에 굳건히 매어둔 끈이었습니다.
김건해 선생님, 장연지 선생님, 심온 선생님, 그리고 박지민 선생님께서 학교를 떠나신다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는 그동안 선생님들께서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는,
앞으로 태어날 자식보다 바로 지금 살을 맞대고 있는 자식이 더 애틋할 수밖에 없는,
더도 덜도 아닌 딱 부모와 같은 심정으로 아이들을 사랑해 오셨음을 감히 훔쳐 보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이 성장의 마디마디에서 크나큰 선물처럼 축복처럼 만날 그 사랑의 선생님들을
한 분도 빠짐없이 구체적으로 꿈꾸어 왔었음을 고백합니다.
포근하신 대로, 유쾌하신 대로, 든든하신 대로, 그리고 지혜로우신 대로,
선생님 저마다의 결 속에 아이가 어떤 새로운 모습으로 스며들지 얼마나 큰 기대를 하며 살았는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결국 저의 이 무모한 도발은 아무 것도 모르면서 아는 체 하는 건방의 발로가 아니라
그저 절박함 때문이라 호소합니다.
그 분을 비롯한 다섯 분 선생님들, 그 어느 누구도 잃고 싶지 않다는 절박함,
또한 그 소중한 분들이 어쩌면 바로 지금, 제 상상 이상으로 힘드실 지도 모른다는 절박함,
그 상상 이상이란 것이 때론 얼마나 무서운 경지일 수 있는 지는 지난 2009년 5월23일의 역사가 증명한 바,
전 ‘그때 그 분’을 위해 촛불 하나도 들지 못했고, 힘내시라는 댓글 하나도 달지 못했음을 아프게 떠올리는 까닭입니다.
그래서 저는 촛불을 켜는 심정으로 지난 사흘 동안 이 글과 씨름하고 있습니다.
이 글을 없애버리고 오로지 침묵해야 한다는 충동은 이미 수백 번을 넘어 지금도 저를 설득력 있게 붙들고 있습니다만
그때와 같은 크나큰 후회를 낳지 않기 위해 이렇게 마지막 발악을 해봅니다.